| 아마도 남한에서 가장 미문가로 꼽힐 만한 고종석의 글을 읽게 되면, 아무래도 다른 무엇보다도 문장에 대한 기대를 한껏 품게 되기 마련이다. 적어도 문장을 좇는 즐거움만으로도 읽을 가치는 보장되고도 남을 것이라는 안도. 사실 그의 소설에서는 담론이 소설적 서사를 압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그를 소설보다는 에세이에 어울리는 작가라고 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병익의 표현대로 엄연히 ‘에세이 소설’도 전통을 가진 소설적 기법일 터. 그리고 《엘리아의 제야》는 소설적인 면에서도 한층 두터워졌다고 보여진다. 〈피터 버갓 씨의 일기〉와 같은 소설은 다소 독특한 면모로 지식인을 해부하는데, 사실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은 다른 소설들에도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인으로서의 통찰이라면 굳이 소설이 아니라 산문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소설적 형상화가 두드러지는 부분은 무엇봐도 그러한 자기 성찰이 조우하게 되는 인물들을 통해서일 텐데, 무엇보다도 주목이 가는 것은 다름 아닌 ‘누이’들이다. 〈엘리아의 제야〉의 다리가 성치 못한 누이, 〈누이 생각〉의 세 차례 국제 결혼을 한 기구한 이력을 가진 누이, 〈아빠와 크레파스〉의 시력을 잃는 딸, 〈카렌〉의 초등학교 동창에서 아내가 되는 화련 등. 일전에 고종석은 ‘누이’라는 말이 가지는 정감에 대한 애정을 피력한 바 있다. 세상의 ‘누이’들을 향한 고종석의 시선에 굳이, 여성을 약자이자 연민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닌가 하고 혐의를 씌울 수도 있겠지만, 그 ‘누이’들의 면모를 되짚어 본다면 결코 그렇게 여길 수는 없는 듯하다. 윤대녕 식으로 여성을 대상화, 이상화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피터 버갓 씨의 일기〉의 피터 버갓은 촘스키를 염두에 둔 것인가? 경박하고 호기심 많은 독자인 나는 별 수 없이 그런 궁금증을 갖게 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의 소설의 인물, 사건들은 실제의 구체적인 경우를 환기시키는 경우가 빈번하다. 때로는 실명을 드러내고, 때로는 막연하며, 때로는 가명을 쓰기는 하지만 명백히 노골적으로 실명을 환기시킨다. 〈피터 버갓 씨의 일기〉 같은 경우야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뚜렷이 특정한 고유 명사를 떠오르게 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내내 그 고유 명사를 염두에 두고 읽게 하는 경우다. 좀더 허구적으로 변용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러나 작가의 사적인 체험이 조금씩 윤색되는 다양한 변주들을 접하노라면, 어느 새 그러한 데에는 자연스레 관심 끄게 될 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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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년만에 출간된 고종석의 소설집 『엘리야의 제야』를 어제부터 읽고 있다. 이 소설집에는 여섯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피터 버갓씨의="" 한국일기="">는 '한국사회언어학회'(p68)의 학술세미나 초빙을 받은 '생성문법, 기호사회학의 창시자'(p69)인 피터 버갓씨의 8일간의 일기를 내러티브 방식의 고백체 형식으로 재구성한 소설이다. 글의 포맷만 따지자면 97년 펴낸 첫 소설집『제망매』에 실린 <讚기파랑>과 엇비슷하다. 언어학자를 소설의 화자로 삼은 것이 그런데, 사실 고종석 본인이 서울과 파리에서 언어학공부를 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소설의 전체적인 구성은 노스트웨스트기를 타고 황해/일본해를 건너온 자신(피터 버갓)의 심경묘사와 함께(01.8/5일기) 시작하고, 다시 노스트웨스트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마지막날 일기(01.8/12)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피터 버갓씨는 소설 시종일관 자신을 '이성의 빛으로 세계를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p. 73) '위대한 정신(p. 93)으로, '대단한 인물'(p. 77)로 평가를 내린다. 또한 스스로를 '프랑스 이남이나 동유럽에서 건너온 미국인들'(p. 73)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독일 이북에서 건너온 게르만'(p. 73)계 미국인임을 다소 우월감을 가지고 자평하는데, 이로써 스스로를 '제 3세계를 원호하는 진보적 세계시민'(p. 67)으로 자칭하는 소설 속에서의 그와는 다르게 그답지 않는(아니 소설 전반을 보건대 오히려 그다운) 인종주의적 발언을 하고 있음을 독자는 감지할 수 있다.
또한 초빙료로 오천불을 조심스럽게 제시하는 해동대학교 김교수의 제안에 '내가 우스꽝스럽기 짝이없는 노벨상을 탄 동료들'(p. 70)만도 못하느냐며 벌컥 화를 내더니만 결국 세금공제 없는 만이천불을 한국사회언어학회로부터 받아낸다. 그리고 한국체류 기간동안 내내 한국문화와 학문수준에 대해 저급한 평가를 내리더니만 경주방문 후, 유럽엘 '죽기 전에 열 번쯤은 더 가보고 싶다',(p. 89)란 친유럽성의 발언을 서슴없이 내린다.
2.
결론적으로 파리에서 학업과 생업을 위해 체류한 적이 있는 고종석의 시각을 빌어 비교학적 관점에서 피터 버갓같은 미국지식인의 이중성을 고발하고 있고, 조금 더 소설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면 대의와 명분에 따라 움직인다 하면서도 종국에는 실리(자본획득)를 꼼꼼하게 챙기는 것을 잊지 않는 지식(상)인의 허위를 폭로하고 있다.
하나 더 첨언하자면, 고종석의 소설을 읽을 때 자간과 행간에서 인문학적 소양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여전한 것 같다. 이런 류의 소설을 읽을 때, 지적 즐거움을 유발시키는 것이 픽션이라 부리는 소설의 순기능으로 작용할지, 아니면 역기능으로 작용할 지, 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인상깊은구절] "헬렌은 두 시간쯤 전부터 자고 있다. 그녀도 이젠 정말 늙었다. ........내 평생의 반려, 내 둥지, 내 사랑, 모나무르, 모나망트, 영어의 러브도 그렇지만, 프랑스어의 아무르나 아망트도 지나치게 포괄적이다. 고대 로마인들이 아모르라는 말로 표현했던 사랑이 모호했던 탓이다. 거기에는 정다움과 성애가 뒤범벅돼 있다. 그리스인들의 필리아오 에로스를 로마인들은 구별할 줄 몰랐다."讚기파랑>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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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글은 강렬하고 깊다. 부드러운 문장으로 포장되었지만 그 내용은 진득하다. 단편소설도 그러해서 나는 그의 소설을 연달아 읽기가 힘들다. 일부러 그러기도 하지만 하루 한편을 읽어내기가 버겁다. 소설의 후반에는 숨이 턱턱 막힌다. 배려에선지 고종석은 마지막 문장에서 숨구멍은 터준다. 150자를 채워야 등록이 되는 리뷰라니… 뭘 더 쓸 것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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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서 공부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 누가 억지로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인데 그게 바로 공부가 되고 있는 듯한 느낌, 시험을 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부가 되면서 알아간다는 게 그저 대견하고 깨닫는 자신이 그저 기쁘게 여겨지는 듯한 그런 느낌. 이 소설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그런 기분을 가졌다. 소설이 재미만 주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애써 교훈을 남기려는 것도 아니고, 정말 읽기는 소설책을 읽었는데 읽고 나니 어려운 책 몇 권을 공부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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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 고종석의 에세이 소설이다. 본래 소설이란 시사 논평이나 중수필과는 달리 형식 논리적 제약이 덜한 자유로운 장르이다. 이런 특성을 지닌 소설의 형식을 빌어 고종석은 그간 묵히고 삭여 두었던 내면의 소리를 분방하게 발언하고 있다. 그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력에 실려있는 정신적 지향과 의식의 결을 접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자유주의자는 단연 사회적 약자인 소수자의 처지에 공감하고 그들에게 우호적인 지적, 정서적 경향을 지닌 자이다. 고종석의 글에서도 이점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주류에서 소외된 주변 계급에 대해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심을 기울이며 가진 자들의 배려를 호소하고 있는 것이 이번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경상도 출신의 강남 거주자로 명문대를 졸업한 고귀한 신분에다가 조선일보에 기고하여 문화 권력까지 누리고 있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에 비해 전라도 출신에다가 강북에 거주하며 비명문대 출신의 학벌 때문에 천출로 취급당하고 배제와 억압의 대상으로 내몰린 이들에 대하여 고종석은 따뜻하고 축축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그들을 두둔하고 비호할 수밖에 없는 이성적 근거와 심정적 연민을 간곡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더러는 이런 사회 구조를 혁파해야겠다는 의지도 언뜻언뜻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고종석은 소수자들에게, 또 그들에게 동조하는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무조건 우호적인 눈길만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들과 자칭 자유주의자들의 내면에 깃들어있는 분열적 무의식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집어내고 있다. 자신이 사회적 약자로서 또는 그들에게 우호적 입장에 서 있는 자유주의자이기에 끝까지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동참해야만 할 이들의 한 꺼풀 내면에는 이런 의식을 배반하는 천박한 속물 근성도 잠재해 있음을 과감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천민자본주의적 풍토에 휘둘려서인지 주류 기득권층에 합류하여 또 다른 약자들 위에 군림하고픈 욕구를 지니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출신 지역과 가문을 숨기고 싶고 강남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싶으며, 조선일보에 기고하여 사회적 명사의 반열에까지 오르고자 하는 무의식적 갈망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권력이나 금력에 초연해야 할 자유주의자 내지는 그 우호 세력들의 내면에 동물적 욕망이 강렬하게 번들거리고 있음을 짚은 것이다.
고종석은 어쩌면 그동안 발설이 금기시 되어온 자유주의적 지식인의 무의식 세계, 천박한 권력욕으로 점철된 지점을 소설의 형식으로 또렷이 드러내 보여 우리가 진정으로 배격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 어떤 것인지를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하겠다. [인상깊은구절] 헤프다는 말도, 천하다는 말만큼은 아니지만, 내가 싫어하는 말이다. 나도 내가 지나치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 말도 우리들의 유년기를 연상시킨다. 미옥도 그 말이 걸렸던 것일까? "응, 헤프게 태어났으니, 헤프게 살기로 했어." 하고 그녀가 짐짓 씩씩하게 되받았으니 말이다. 경수는 잠깐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