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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살맛나는 세상을 위해 - 김종철, 『간디의 물레』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비교적 넓은 공터에서 손 야구도 하고, 자치기도 하며, 여러 가지 놀이를 했던 그 시절을, 그 공간을. 불과 20여 년 전 일인데도 내가 놀던 그 곳에는 아이들도 없고, 공터도 없다. 빌라가 들어서는 것 같더니 동네 길은 이내 자동차 도로로 바뀌어 버렸다.
변해버린 옛 길을 거닐 때면 항상 내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요즘 아이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얼핏 보면 별거 아니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생각이 자꾸만 내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 사라진 아이들이라, 무슨 엽기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골목길 공터에서 사라진 아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김종철의 『간디의 물레』를 읽으면서 내 머리 속을 계속 맴돌던 생각들이다. 변화를 진보로만 생각하고 지내왔던 시간들, 그 속에서 우리가 혹은 우리 아이들이 잃은 것은 무엇일까? 어린 시절, 공터에서 놀이를 통해 내가 얻은 소중한 기억들을 지금의 아이들은 무엇을 통해 얻고 있을까? 십중팔구, 골목길에서 사라진 아이들은 자기만의 밀폐된 공간에서 컴퓨터 게임에 열중하고 있으리라. 놀이가 줄 수 있는 기쁨을 컴퓨터 게임을 통해 얻고, 공터 흙이 주던 포근함을 컴퓨터의 차가움으로 대치하면서, 흙이라는 실제 사물이 주는 기쁨을 아이들은 사이버 공간의 차가운 세상에서 발견하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고향이 되어 버린 차가운 사이버 세상을 지배하는 논리는 힘의 논리이다. 수없이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하는 바탕이 힘이라면, 그것은 약한 자 위에 군림하는 강한 자의 욕망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자기와는 다른 특이한 아이들을 집단으로 ‘왕따’시키고, 심지어는 그 아이들을 집단으로 구타하면서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을 지배하는 것, 그것이 힘의 논리이다. 또래들 사이에서 왜 이리 폭력 사건이 자주 벌어지겠는가? 이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작가의 말은 바로 우리 어른들에 대한 경고이면서,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 대한 파산선고로 들린다.
폭력의 근원은 내면적 평화와 자유의 결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산업사회는 폭력의 악순환이죠. 내면적으로 행복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니까 자꾸만 파괴적인 수단을 강구하면서 또 그런 수단을 강구하니까 원천적으로 보살핌의 문화는 자꾸 망가지게 되는 거죠. (117쪽)
'행복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자꾸만 파괴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문화를 어른들이 만들었고, 그 속에서 아이들은 커 왔다. 내면적인 결핍을 경험하면서 커 온 아이들이 외면적으로 알차길 바랄 수 있는가? 작가의 말대로 '삶의 우주적 연관이나 자연적 근거를 완전히 망각한' 우리 어른들이 폭력이 난무하는 아이들의 세계를 탓할 수 있겠는가?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 아이들은 갇혀 있고,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 아이들은 길들여져 있을 뿐이다. 아이들의 세상은 어른들이 만든 세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셈이다.
아이들이 살맛나게 살 수 있는 세상, 지은이가 원하는 세상도 결국은 이런 세상이리라. 그가 노자를 통해 내세운 여성적 원리나, 「간디의 물레」를 통해 표현하는 비폭력주의의 뿌리에는 아이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꿈이 담겨 있다. “인간존재란 자기 자신보다도 훨씬 더 큰 전체 자연의 일부이며, (그것은) 만물은 형제라는 사실에 대한 살아있는 감각에 기초”(172쪽)한다는 지은이의 말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물려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지은이의 표현대로 서로 보살피는 문화가 도래하는 세상이 될 때, 주인을 잃어버린 골목길에도 새로운 주인들이 나타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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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이 책 안의 글 '과라니의 아이들'이 실려 있다. 그것도 일부만. 분량이 그리 많지도 않은데 이왕이면 다 담을 것이지 일부만 있어서 불만이 생기기도 했다. 그 탓에 구한 책이다. 이런 내용이라면 책 자체를 보는 것이 더 낫겠다 싶었다. 그리고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학생이 공부할 교과서에 실을 정도라면 적어도 검증은 했다는 게 맞겠다 하면서.
책도 샀으니 교과서에 담긴 글만 읽으면 좀 섭섭하지 않겠나 싶어 몇 편을 더 학생들과 읽었다. 사회문화 비평 연습 차원에서. 학생들이 글을 읽고 쓴 것을 보면 염려할 게 없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평소 마냥 철없어 보이기만 하는데도 막상 글로 자신의 생각을 나타낸 것을 보면 그 나이에 해야 할 생각 다 하고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 다 헤아릴 줄 아는 분별력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성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더 든다. 온통 문제 투성이의 사회를 그들 앞에 펴 놓고, '이제부터 너희들이 해결하면서 살아가렴.' 하는 듯 책임을 미뤄 던지는 것 같기만 해서(사실 그렇기도 하고).
책은 좀 오래 되었다. 초판이 1999년에 나온 것이어서 시의성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참 답답한 점은 있다. 삶의 내용은 오래 된 듯 보이는데 문제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고, 그때의 문제점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우리네 삶의 발목을 잡고 있어 여전히 넘어지곤 하고 있으니. 사람의 한 생애가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다더니 이런 쪽으로는 짧기만 한 건가 싶기도 하다. 도무지 살아서는 해결책을 못 보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자발적 가난, 요즘 내가 끌어 안으려 하는 말이다. 물론 지금 내 사정에서 지금보다 더 벌 수 있는 뭔가는 전혀 없다. 앞으로의 내 삶은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더 나아질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더 넉넉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안 써도 되는 것, 덜 써도 되는 것이 보이고 잡힌다. 생활은 단순하게, 물질은 줄이고, 정신은 풍요롭게, 그리고 운동은 가볍게.
지구 환경을 지키는 방법 중 하나는 내가 살고 있는 영역을 물질적으로 확대시키지 않는 데 있다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조그맣게 그러나 깊이 있게 살아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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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창간 당시 환경재난을 개탄하며 <녹색평론>이 우리 사회에 던졌던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라는 물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4대강 정비한답시고 애꿎은 강바닥에 온통 삽질을 해대질 않나, 이웃나라에서는 쓰나미 한방에 전 세계를 방사능 유출의 공포로 몰아넣지를 않나, 갈수록 불안은 가중되는 반면 희망은 잘 보이지 않는 위태로움의 연속이니 말이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국내 원전의 안전도에 대한 우려도 증폭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조사 결과 대부분이 내진설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영광 원전 근처에 사는 나에게, 이 분야를 맡고 있는 국회의원 보좌관 선배는 "원전을 없애든지, 원전 멀리 이사를 가든지" 하란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원전 피해 이사 간다 한들 방사능 위협으로부터 벗어날리 만무하고, 결국 "답이 없다"는 얘기를 저런식으로 한 거다.
'아마겟돈'으로의 폭주
최근에는 기록적인 폭우로 서울에서도 완벽하게 계획된 부자 동네로 불리는 강남, 서초가 물에 잠기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한마디로 속수무책. 전문가들은 쓰나미에 버금가는 산사태가 언제든 다시 덮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참에 전국의 모든 산을 점검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아마겟돈, 선과 악이 싸우는 최후의 격전지. 점점 세상이 거역할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 느낌이다. 지구 환경은 인간의 축적과 파괴 행위를 감당할만큼의 수용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인간은 세상 만물 중에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유일한 존재. 세계를 완전히 인식하고 자연을 지배할 수 있을거라 장담했던 인간의 오만함은 결국 자연으로부터 어마어마한 복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인류 역사상 일찌기 겪어보지 못했던 거대한 위험 앞에서 여전히 과학기술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차라리 베르베르의 소설 '파피용'에서처럼 거대한 '노아의 방주'를 만들고 지구 밖에서 새로운 인류의 건설을 준비하는 편이 현명하지 않을까. 불안감이 빚어낸 허황된 상상에 도리질 칠수록 "우리에게 과연 희망은 있는가?"라는 질문이 어깨를 무겁게 누른다.
지금까지 진보는 '빵의 오염' 보다는 '빵의 부족'을 해결하는데 치중해왔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산업문화의 헤게모니에 대하여 근본적인 비판과 대안을 발전시키지 않는 한, 어떠한 진보적인 정치 사회적 이념도 부적절한 것일 수 밖에 없다"(p37)고 단언한다. 오늘날 맞딱드린 '빵의 오염'이라는 현실이 정치경제적 문제이면서 산업주의 문화에 물든 인간 생존 방식의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하는 문제라는 사실을 겸손히 받아들이자는 것이다.(p85)
저자의 말처럼 진보는 개발, 성장, 산업주의 헤게모니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생산력 증대를 통해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혁명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했던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사람 사이의 불평등을 혁파하는 일에 주력해 온 진보적인 사회사상이 인간 중심의 관점에 머무르고 있는 제약성을 뛰어넘어 자연세계와의 조화를 중심으로 재편되지 않고서는 참다운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빵의 오염 문제가 인류 전체의 생사존망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빵의 부족 문제를 대체할만한 의제라고 할 수 있을까. 여전히 지구의 절반은 굶주리고 있고 빵의 오염 못지 않게 빈곤과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도 매우 사활적인 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의 부족이 먼저냐, 빵의 오염이 먼저냐'는 물음에 빵의 부족이 먼저라고 간단하게 답할 수 있을 만큼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좌'든 '우'든 '생태적 대안' 없이는 안된다는 저자의 주장을 뒤집어 생각하면 '생태'라는 것의 스펙트럼이 그만큼 넓다는 이야기도 된다. 히틀러 나치정권은 전 세계적 최초로 동물보호법을 시행했지만 6백만에 달하는 유대인을 학살했다. 실제 생태주의라는 카테고리로 보자면 이 안에는 극우파에서부터 극좌파까지 다양한 정치세력이 포진할 수 있다. 따라서 생태적 공동체를 어떤 정치 이념의 토대 위에서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다.
다른 것을 욕망하자
<간디의 물레>라는 책 제목처럼 저자가 그리는 생태적 공동체, 농업중심의 자치공동체는 간디의 사상에 기초한 '더불어 가난한 사회', '지속가능한 순환형 사회'다. 이는 산업주의 문화속에서 고집해 온 인간의 생존방식이 자연과 생명의 질서에 어긋난다는 반성, 즉 삶의 존재방식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전제로 한다. 어쩌면 생태적 공동체론은 사회 변혁의 자기 완결적 구조를 가진 이론이라기보다 자율, 협동, 연대, 생태에 기초한 방식으로 삶을 재구성하자는 움직임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새로운 키워드는 '가난'이다. 이는 금욕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욕망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p23) 간디는 '인간의 탐욕으로는 이 세상이 매우 궁핍한 곳일 수 밖에 없지만,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는 이 세상이 더 없이 풍요로운 곳'(p261)이라고 했다.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지배와 소유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생명체들과 조화로운 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생존방식을 택하자는 것은 결국 가난한 삶일 수 밖에 없다.
어렸을때부터 생태적 자아를 형성하고 생태적 감수성을 키우며 공생적 가치관을 학습했다면, 과연 지금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자본주의 문화와 도시적 삶의 방식에 깊숙이 젖어있는데다, 어느 정도 나이까지 들었으니 삶을 재구성한다는게 어지간히 쉬운 일은 아니다. 대안에 목마르다면 자기 스스로 대안적인 삶을 살라는 말이 있다. 진보를 말하는 사람일수록 '언행일치'하고 있는지 늘 경계할 일이다. 생태적 공동체 운동이 진보적 가치를 재구성하는데 새로운 상상력을 제공하는 것 만큼이나 내 삶에서 단 한발의 진보적 전진이라도 가능할 수 있도록 다른 것을 욕망하는 연습을 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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