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릭 앰블러의 베스트 [디미트리오스의 관]이 순진한 인물이 자기의지를 가지고 있는듯하나 결국 누군가의 손바닥위에서 놀았다는 것을 알게되는, 거친 리얼리티와 흥미진진 오락성을 겸비한 스케일 큰 액션모험걸작이었다면, 이건 잠깐 아가사 크리스티가 연상되는 귀여운 작품이다. [디미트리오스의 관]에서 추리소설가는 코지추리물 (Cozy mystery)를 꿈꾸는 것처럼 (뭐, 이 작품이 [디미트리오스..]보다 먼저 쓰여졌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주인공은 코지추리물의 아마추어 탐정격으로 에조틱한 외국의 호텔에서 스파이 (추리물에선 '범인')을 찾아내느라 고군분투한다. ![]() ![]()
The Dark Frontier (1936) Uncommon Danger(1937), US title: Background to Danger Epitaph for a Spy (1938), 어느 스파이의 묘비명 Cause for Alarm (1938) The Mask of Dimitrios (1939), US title: A Coffin for Dimitrios, 디미트리오스의 관 Journey into Fear (1940) Judgment on Deltchev (1951) The Schirmer Inheritance (1953) The Night-Comers (1956), also published as State of Siege Passage of Arms (1959); Gold Dagger Award The Light of Day (1962), also published as Topkapi; Edgar Award for Best Novel, 1964 A Kind of Anger (1964) This Gun for Hire (1967), also published as Dirty Story The Intercom Conspiracy (1969), also published as The Quiet Conspiracy The Levanter (1972); Gold Dagger Award Doctor Frigo (1974) Send No More Roses (1977), US title: The Siege of the Villa Lipp The Care of Time (1981) |
|
에릭 앰블러에 대한 평가, 명성은 대체로 하나로 고정되어 있다. '스파이 소설의 원조'. 과연 그렇기는 하겠으나, 아 뭐 설사 저기 낙원동 공평동 골목의 이름난 원조 주물럭이라 해도, 레시피와 인간 미각의 변천, 혹은 본질에 대한 셰프의 진지한 고민 없이 그저 원형 그대로의 보존, 보전만을 고집한다면 까다로운 미식가, 나아가 멍청한 대중으로부터까지 외면 받기 십상이듯, 확립된 명예와 영광이 곧 현재에 있어 광범위한 직접적, 감각적 효용을 창출하는 담보가 될 수는 없다. 아시모프의 고전 SF도 세련된 현대의 독자의 눈에는 실망스러운 구석이 많이 발견되듯, 고전은 그저 시대 상황을 감안하여 어느 정도 자기 기만 기제를 발동시키지 않으면 도저히 끝까지 참고 읽어 주지 못할 경우가 속출하며, 이는 현대인의 물적, 전망적 어드밴티지를 감안할 때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문제는, 자신이 속한 시대와 공동체의 수혜 사항을 제 개인의 지적 우월성으로 쉬 귀속시키려 드는 뻔뻔스러움과 속물 의식에 있다. 스파이소설의 애독자라면 문학의 어떤 다른 요소에 앞서 짜릿한 흥미를 우선으로 추구하게 마련이다. 기교와 선정의 극단적 외줄놀음에 입맛을 버려 놓은 미학적 응석받이들이, 정작 이 고졸 담백한 클래식 앞에서 '원조'. '스파이'라는 두 태그의 호객 메시징에만 끌려(물론 작가의 귀책이야 일점도 없다) 덥석 제 입에 과분한 진미를 물고는, 천한 도회 감각이 잔뜩 부풀려 놓은 어쭙잖은 키치적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고 '낚였다'니 뭐니 가증스런 불평을 떨어댈 광경을 예상하면, 오랜 금석문 공예를 그저 그 자체로만 봐 줄 것을 간곡히 당부하는 간이 이정표라도 수고를 들여 곁에 세우고 싶은 '선한 사마리아인적' 공명심이 소폭으로나마 솟기도 한다. 묘비명은 그저 묘비명일 뿐인 것을, 청하지도 않은 독해, 해독의 수고를 자청하여 달갑잖은 수다 객설을 베풀어 놓고는, 인생의 맞춤형 진리나 최신 전자 제품의 매뉴얼, 혹은 성하의 더위에 시원한 에너지 드링크 한 캔을 곧바로 서빙하지 않는다고 생떼를 쓰는 건, 그저 점잖게 평해 준다 해도 연목구어의 추태에 지나지 않는다. 딱 잘라 말해서, 그 문학사적 의의가 무엇이건 이 작품은 스파이 소설이 아니며, 격변과 대파국을 눈 앞에 두었던 유럽의 어느 묘한 위상의 벽지에 모인 이례적 처지와 신분의 인물들이 빚는 촌극과 소동에 약간의 미스테리를 입힌 것 이상이 아니다. 앰블러 특유의 유머와 스토리텔링(치밀한 계산과 고안의 산물이 아닌, 그저 구수한 삼천포 우회전 신공 연속)의 묘미를 구경하며 몇 번 웃음을 지었다면 그걸로 소설에 치른 금액의 본전은 뽑은 것이며, 한 세기 전 솜씨의 소박한 백자로부터 요란한 만화경적 환각이나 3D 이펙트의 각막 고막 골반틈새 타격의 짜릿한 쾌감을 기대하는 건 대단한 무리라는 점 강조해 둔다. 권말에 둘씩이나 부록이 붙었는데, 같은 작가의 캐릭터 얀 치사르 교수가 등장하는 바로 그 작품과, 데이비드 일라이의 에드가상 수상작이다. 두 편 모두 정태원 정영목 양씨가 앤솔로지로 묶은 도솔 刊 '세계 미스테리 걸작선'에 실려 있는 것들이다(이 점에서 본전의 일부 감쇄가 발생ㅜ). |
| 한 남자가 스파이 혐의로 경찰에 잡힌다. 그는 자신의 카메라가 바뀐 것이 밝혀져 오해는 풀리지만 경찰의 끄나풀이 되어 자신이 머물고 있는 호텔에서 자신의 카메라와 바꿔 간 스파이를 찾는데 협조하게 된다. 그에게는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헝가리인으로 유고슬라비아 여권을 가지고 있지만 프랑스에서 살기를 원하고 프랑스 시민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만약 프랑스에서 추방된다면 그는 어느 곳으로도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실수를 연발하고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면서 열심히 머리를 짜낸다. 그리고 스파이를 밝히는 것이 그의 과제가 아니가 스파이를 쫓아내는 것이 그의 임무였음을 알게 된다. 결국 스파이는 밝혀지지만 스파이는 죽고 그는 그의 묘비명을 생각해 낸다. <그는 돈이 필요했다>... 1938년 당시 사회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당시 하와이로 이민간 우리 선조들을 생각하면 절박한 주인공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약소국가에 태어나 남의 나라에 살면서 조국으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입장의 사람이 살 수 있는 길은 정말 험난한 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어느 스파이의 묘비명은 모든 인간의, 모든 사회의, 모든 국가의 묘비명이 아닌가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