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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가 '박노자 허동현 교수의 한국 근대 100년 논쟁'입니다. 한때 홍세화씨 다음으로 좋아하던 저술가가 박노자 교수였죠. 지금은 그다지 끌리지 않는 인물이지만 관성 때문인지 여전히 그의 책이 나오면 사서 보고 있습니다.
건강한 보수임을 자처하는 허동현 교수와 개인주의적 진보를 내세우는 박노자 교수가 근대사에 있어서 논쟁거리가 되는 사안 12개를 가지고 주고받은 편지 논쟁을 책으로 엮은 겁니다. 최익현이나 흥선대원군, 황사영 백서, 독립운동 등, 조선 말기부터 식민지 시기 초입까지의 시기를 다루었군요..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는 (스스로 좌파임을 자처하는 저로써는) 허동현의 글에서 어떤 허점을, 박노자의 글에서는 어떤 동의점을 찾을 수 있을지 보는 것을 중심으로 했었습니다. 하지만 넘기는 책장의 수가 늘어날수록 허동현의 관점에서는 동의를 보내면서도, 박노자의 글에서는 의문부호를 붙이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과거를 바라볼 때는 과거의 시점에서 봐야한다'라고 말하는 박노자의 글에서 기계적인 잣대 적용이 느껴져서 순간순간 아주 불편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황사영 백서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 특히 그렇더군요. 천주교의 생존을 위해 외세 무력의 적극적 개입을 요청한 황사영 백서를 두고 박노자는 요즘으로 치면 유엔에 탄원한 것과 같지 않겠냐고 그랬습니다만, 수단의 정당함 여부를 무시하고 백서 사건을 보편적 정의의 수호라는 측면에서만 보려한 그의 오버에 지나지 않아보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백악관에 탄원한 거 아닐까요?) 허동현의 글에서는 한 사건의 양면성, 예를 들어 황사영 백서가 분명 보편적 정의를 지키려한 면이 있긴 하지만 반민족적 해답을 적극 제시했다는 면에서 비판해야한다고 하는 점이 좋았습니다. 가끔 지나치게 미국의 입장을 확대 해석하려는 건 좀 걸리긴 했지만요.. 빈 라덴을 최익현과 비교한 곳에서는 박노자의 의견에(박노자는 외세의 강압이 심한 상황에서 가치를 지키려는 지식인의 투쟁이다라는 면에서 봤고, 허동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인에 대한 공격은 용납할 수 없다라는 면을 강조했죠), 후세인을 박정희와 비교한 곳에서는 허동현의 의견에(박노자는 후세인이 독재자이긴 하지만 국민국가를 지키고 국민들에게 복지를 제공했다는 면에서 평가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뜻밖이죠? 반면 허동현은 개발독재가 결코 외세에 비해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스스로 진보라 자처하든, 보수라 자처하든 상식적인 선에서 이야기를 한다면 누구의 의견이라도 동의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더군요. 책 마지막머리에 두 교수의 대담이 짧게 실려있는데요, 여기서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로 같이 인정하며 갈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있는 진보와 보수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 대목에서 이 책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을 인정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는 것. 그런 바탕에서 생겨난 논쟁을 보는 것.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근대의 이야기를 보는 것에 더한 재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참.. 이 책 진짜 마지막에는 논쟁에서 나왔던 참고문헌 몇가지가 실려있습니다. 쉽게 보기 힘들었던 것들이 있더라구요. 유길준의 글들이나, 최익헌의 상소문, 황사영 백서, 조선책략, 영남만인소 등이 있습니다.
푸른역사, 박노자 허동현 지음, 379 pa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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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플 경우, 내 몸은 두가지로 반응한다. 그 하나는 외부에서 오는 간섭을 배제하고 자정작용에 의해 스스로 나으려는 동물적 본능에 자신을 맡겨두는 것, 그래서 아무런 음식도 입에 대지 않는 것, 다른 하나는 습관과 이성이 시키는 대로 약이던 음식이던 배불리 먹어서 몸을 보하는 것, 이 두가지 중 어느 것이 옳은 방식인지 나로서는 잘 판단할수 없다. 다만 상반된 두 방식 모두 그때 그때 내 몸이 원하는 방식이란 확신은 있다.
무엇이 진보며 무엇이 보수인지 제대로 구분하기 어려운 내게 진보와 보수의 개념 역시 그렇다. 진보와 보수가 민족의 문제에 한정되어 있는 경우, 민족을 하나의 몸이라고 본다면 진보와 보수가 지향하는 바는 다를지언정 이 둘 모두가 몸- 민족이 원하는 치유 또는 건강 유지의 합일점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진정한 보수, 진정한 진보가 목표하는 바는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나의 이 생각은 '박노자, 허동현 교수의 한국 근대 100년 논쟁'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 <우리 역사 최전선>에서 다시 확인 할 수 있었다. 비록 '논쟁'이라는 부제가 붙었지만 우리나라 인문 문화사에 기록되어진 숱한 논쟁들처럼 물고 뜯는 난장이 아니라 또 다른 길을 함께 모색하며 고민하는 두 분의 모습이 그러했다. 이 책은 진보주의자 박노자 교수와 보수주의자 허동현 교수가 100년전 근대 여명기의 상황과 지금의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화두를 놓고 반면교사로서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데서출발한다.
되짚어 보는 일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역사는 단순히 과거가 아니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나의 실존적 상황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의 내가 당장 국제적 상황에 따라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데 어찌 아니 그러하겠는가. 우리 앞에는 긴 미래가 있다. 우리는 미래를 위하여 계획을 세우지만 어떤 모습이 될른지는 불투명하다. 불확실한 미래를 가늠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반복된다'는 명제하의 역사를 통해서가 아닐까? 그러므로 하나의 지표가 되는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꿰뚫는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흥미롭다. 더우기 하나의 사실을 바라보는 보수와 진보
라는 두 시선은 상호보완적 상승작용으로 역사적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다. 이 책은 그밖에도 많은 미덕을 갖추고 있다. 내용을 보강하는 많은 삽화며 '그래서?'의 해답편이 되는 두 교수의 좌담이며 부록으로 딸린 원전 읽기(단순한 출전 소개가 아니라 주요 원전이 그대로 실렸다)등이 그것이다.
역사물은 고리타분하다고? 실제로 그렇게 여기는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상당히 아쉬웠다. 제일 재미있는 게 싸움구경이라고 하지만 양식있는 논쟁의 전개들은 단숨에 독파될 만큼 신선한 재미를 던져주는 한 편, 열강 사이에 낀 우리나라의 나아갈 길에 대한 우려로 등골이 서늘해지기도했다. 이 책, <우리 역사의 최전선>을 꼭 일독해 보기를 권한다. 생각 같아서는 대한민국의 모든 분이 읽어 보았으면 싶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목차만이라도 꼭 읽어 보시기를....
덧붙임; 박노자 교수...1973년생이니 우리나라 나이로 고작 서른 둘. 한국역사에 대하여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 1989년, 레닌그라드 대학교의 동방학부 조선사학과에 들어가서 부터이다. 그 짧은 공부에도 불구하고 태생이 외국인인 사람이 이렇듯 심도있게 우리나라 역사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놀라움이다. 그 바탕에 우리나라에 대한 애정이 깔려있어 더욱 그렇다. 단순히 훈수꾼이 바둑을 더 잘 두는 것으로 볼 수 없는 경이로움이 있다. 그는 몇십년 앞을 내다보는 천재이며(국사와 민족의 시대의 종언을 이야기하며 역사는 시민 개개인의 것임을 주장하는 점이 그렇다) 우스개 처럼 말하자면 전생에 우리나라 역사학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짧은 시간에 이룩한 학문적 성과며 한국의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은 그 불가해함으로 마치 신비한 외계인처럼 여겨진다. 아니 혹시 우리나라 일부 기성 역사 학자들에게는 에얼리언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인상깊은구절] 고압적인 역사의 민주화...역사는 더 이상 국가나 만족의 것이 아니다. 국사와 민족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약사는 시민 개개인의 것이다. -중략- 역사학자는 시민들에게 역사읽는 여러 방법을 소개해 주는 소개자, 내레이터이자 과거 일의 많은 해석자 가운데 한사람일 뿐이다. |
| 허동현 교수와 박노자 교수는 100년 전 대한제국을 놓고 직접적으론 청나라, 일본, 러시아가, 간접적으론 미국, 영국 등 각 열강들이 각축전을 벌이던 상황과 현재의 국제정세와 매우 흡사하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미국의 패권주의, 중국의 부상, 러시아의 군비 확대, 경기침체로부터 활로를 찾는 일본. 분명히 지금의 동아시아 국제정세도 새로운 권력구조를 향해 움직이려 하고 있다. 이에 두 역사학자는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개화기의 역사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책의 기획은 '건강한 보수'를 자처하는 허동현 교수와 '개인주의적인 진보'를 주장하는 박노자 교수가 서로 다른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하여 서신 논쟁을 이끌어 내려는 것이다. 박노자 교수야 저서들이 워낙 많이 읽혔기 때문에 유명하지만, 다만 보수란 말이 우리나라에선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으니 허동현 교수의 입장을 분명히 보자. '...저는 우리 사회에도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는 쪽이고, 박 선생은 이 문제를 다른 방향으로 확대해서 보는 쪽이었죠. 그래서 서로 역할을 나눴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수라고 해서 정치적인 성향에서의 보수반동은 아니니 오해 마세요, 하하. 사실 저는 열려 있다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컨서버티브라고 생각합니다(281 p.).' 아마도 우리 전체의 시각이 아직도 너무 오른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독재자들을 옹호하면 보수다 라고 여기지만, 허동현 교수는 보수라고 자처하면서도 흥선대원군과 박정희, 후세인을 평가 절하하고 제 2공화국의 장면총리를 다원적 시민사회를 한국 사상 최초로 실현하려 한 정치가라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4장 유교와 사회주의, 10장 아나키스트의 이상과 좌절이 특히 재미있었는데 아무래도 현재 사안과 관련하여 11장 후세인과 박정희가 관심을 끈다. 박노자 교수는 개발독재, 문화정책, 지역차별 등후세인과 박정희의 유사점을 비교하면서 과연 일본이 유신정권에서 해방시키겠다는 명분하에 한국을 침공해 온다면 운동권 학생들이 누구 손을 들어줄지 묻는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서방에 뿌리깊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이라크 민중들이 왜 반미항전을 계속하는지 분명해진다. 이제 중심 주제로 돌아와서... 그럼 두 역사학자는 현재 미국 이후의 시대를 어떻게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먼저 박노자 교수는 미국의 패권을 줄이거나 상대화할수 있는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적인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미국의 침략을 방지하는 훌륭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경제체제와 문화 코드를 단일화하고, 지역적인 안보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EU와 비슷한 블럭화이다. 허동현교수는 이미 문화적으로 거의 서구화 된 한국이 블럭화의 가장 중요한 코드인 적합한 문화요소를 가지고 있느냐고 반문하며, 우리의 번영 뒤에 버티고 있는 미국의 힘을 간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많은 도판과 역사책에서 꼭 빠져선 안 될 사료, 원전까지 부록에 실어 흠잡을 데가 없는 책이다. 박노자교수의 <나를 배반한 역사>와 함께 적극 추천한다. |
| 박노자 교수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대학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한국 사회의 병폐를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는 분이다. 그의 통찰력과 지식 앞에 때때로 한국인인 내가 부끄러워 질 때가 많다. 그의 역사 관점은 매우 파격(한국에서 보자면)적이다. 개인주의를 우선시하며 적에게도 관용의 시선을 베푸는 인도적인 그의 시선은 한국사회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으나 상당수 극우 수구세력들에게는 먹히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의 이런 역사 재해석에 허동현 교수가 합리적인 보수를 자처하며 반론을 가한다. 전통적 관제 국사 교육을 받은 한국인이라면 받아들이기 힘든 박노자 교수의 문제 제기를 허동현 교수는 보수적 시각으로 '정화'한다. 이 책은 무슨 결론을 내리거나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저 독자들이 두 교수의 시각을 읽으면서 스스로 판단하면 그만이다. 나는 상당수의 주제에서는 박노자 교수의 글에 공감이 갔으나 몇 가지 글에서는 허동현 교수의 글에 더 공감이 갔다(예: 황서영 백서).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책이라 하겠다. |
|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박노자 교수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지만 역시 합리적인 보수적 시각(그나마 한국에서)을 갖고 있는 허동현 교수의 서한집(한마디로)이다. 어떻게 보면 그저 컴퓨터에서 그대로 삭제되어 갈 수도 있는 메일들을 관련자료를 덧붙여 훌륭한 한 권의 책으로 완성시킨 출판사의 기획이 탁월하다. 각 장마다 덧붙여 나오는 참고할 도서목록과 부록의 원전이 이해를 돕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다. 박노자 교수는 역사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 했다. 우리의 근대사를 보면서 그 말이 그냥 공허한 말이 아님을 느낀다. 근현대사는 지금 우리의 모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장 왜곡된 부분이기도 하다. 그만큼 영향이 크다는 반증일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근대사를 잘 모른다. 그것은 학교의 박제가 되버린 국사교육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며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보수수구세력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소장할 만하다. 특히 자료들이 알차다. 두고두고 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
|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역사에 대해 그다지 많은 것들을 신경쓰지 않으면서 살아왔다. 이웃나라에서 역사를 왜곡하는 모습들에 적지 않게 분개하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는 그 순간부터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쳐왔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는 우리 사회의 혼란함과도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우리나라를 둘러싼 정세는 안정적이지 못하다. 주변 국가들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침을 튀기며 싸우는데 익숙하고, 우리는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그저 자본주의 체제를 택한 사회라면 우리의 구세주마냥 떠받들어왔다. 최근 이라크 파병과 관련된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서도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명분이 없음을 알면서도 파병요구를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이러한 복잡한 정세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회의 복잡성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멀게 했고, 무엇이 진실인지 알지 못한 체 너무 오랜 시간을 살다보니 이제는 진실을 이야기해줘도 알아서 외면하고 말아버리는 타성이 몸에 베였다. 치열하던 80년대에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나로서는 우리의 선배들이 얼마나 가혹한 세상에 맞서 싸워왔는지를 볼 기회가 없었다. 보수주의라는 이름을 생각하면 한 나라의 국가경제를 완전히 잠식하고도 어떠한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군국주의나 극우파, 부시 등이 생각날 따름이다. 이런 시점에서 허동현 님을 알게 된 것은 실로 큰 충격이었다. 게다가 박노자 님은 또 어떤 분이신가.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고 자라면서 단 한순간도 민족을 떠나 생각해 본적이 없는 우리와 달리 그는 역사를 개인들이 만들어낸 스토리들의 집합체로 파악한다. 한국을 사랑한 파란 눈의 한국인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둘이 만났으니 이미 이 만남은 그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한국 근대 역사에서의 많은 사건들을 논하는 글들 속에서 깊이가 느껴진다. 그저 제도권 역사 교육에 익숙해있던 나에게 몇몇 이름은 너무도 생소했고, 이런 관점으로도 바라볼 수 있구나 라는 놀라움을 느꼈다. 보수주의가 이토록 진보적일 수 있단 말인가. 허동현 님의 주장은 보수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듯 했다.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휴머니즘적 사상은 그저 다른 사상을 지녔기에 배척하고 매도하는데 익숙한, 지난 날 군사독재정권에 복무(?)했던 이들까지도 끌어안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이상야릇한 보수주의를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만들었다. 보수는 진보를 견제하는 하나의 방패라며, 지난 날 집단, 국가 이데올로기에 희생당했던 개인들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이 진짜 보수주의라고 말하고 있는 허동현 님의 이야기가 너무도 낯설고 신선하게 들리는게 그리 기분좋은 일만은 아닌 듯 하다. 둘의 역사를 놓고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않고 있다. 역사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하나의 나라나 집단에서 일괄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 하에 그들은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않았다. 이 책을 집어드는 그 순간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역사 속으로 빠져든다. 우리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사건들을 하나하나 재조명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진정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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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박노자 교수를 좋아해서 이 책을 구입했다. 그가 전작들에서 보여준 것처럼 뭔가 우리 사회와 역사에 대한 통쾌한 발언을 이 책을 통해 해줄 거라고 기대하면서 말이다. 게다가 ‘건강한 보수주의자’를 자칭하는 사람과의 서면 대담이라니, 얼마나 통쾌할까! 싶었다. 우리나라에서 자칭 ‘보수’라고 하는 사람은 모두 말 안 통하는 극우일 거라는 선입견 때문에 허동연 교수도 그런 사람이겠거니 한 것이다(그래서 처음엔 박노자 교수 글만 보고 허 교수 글은 건너뛰어야지 했다).
그러나! 웬 걸. 이건 내가 기대한 피 튀기는 논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허동연 교수도 말이 안 통하는, 내지는 억지스러운 보수와는 격이 다른 사람이었다. 오히려 나중에는 허동연 교수의 글을 더 열심히 읽게 되었다(이런!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자’가 있었다니! 허동연 교수 같은 보수주의자가 정말 많아지길 바란다). 허 교수는 정말 근거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100년 전 우리 역사를 진단하고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방향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두 학자의 글이 모두 나름의 합리성과 근거를 갖추고 있어서 100년 전 우리 역사의 모습을 보는 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 가지 관점만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으로 우리의 근대,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접하고 싶은 사람에게 정말 좋은 책인 것 같다. [인상깊은구절] '인간의 얼굴을 한 근대'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가슴과 머릿속에 들어 있는 화두입니다. 그러나 타자와 더불어 살기와 근대 만들기는 무엇이든 뚫을 수 있다는 창과 어떤 창도 막을 수 있다는 방패의 관계처럼 동시에 이룰 수 없는 목표는 아닐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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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만큼 '소통'에 목말라 하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대통령마저 '소통'을 지상 최대의 과제로 여길만큼 우리에겐 그렇게 절실한 것인가 보다, 그럴만도 한것이, 나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도, 소통의 부재를 여러 차원에서 느끼게 된다. 세대차이에서도 그렇고, 계급차이에서도 그렇고, 정치적 의식에서 역시 그렇다. 진정한 대화가 불가능 한 것이라고 느끼는 가운데, 이 둘의 대화는 더욱 흥미롭다. 바로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정치적 의식에서 대척에 서있는 사람들이 한국 근대사에 대해 대화를 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 진보와 보수의 관계는 톰과 제리, 강아지와 원숭이와 같은 관계가 아니던가? 이들의 소통방식은 대화가 아닌 고성방가 혹은 물리적 폭력을 통해 이루어져 왔던게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는 박노자 교수의 역사적 인식에 깊은 공감을 하고 있던 터라서, 자칫 편견을 가지고 독서를 할 위험이 있어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여러가지 역사절 사실에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들의 정치적 이상이 결국은 인간의 행복이라는 점에서 더욱 크게 느껴졌다. 결국 진보와 보수의 이상은 인간의 행복이라는 절대적 목적을 향한 다른 방법론이 아니던가 라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그들이 갖는 조그마한 차이는 보수는 조금 더 원칙을 지키려는 입장이고, 진보는 조금 더 목적을 위한다는 입장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진보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허동현 선생의 의견이 조금 더 탄탄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노자 선생은 아직 한국인의 상식 선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급진적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허동현 선생은 나와는 성향이 다르지만, 오히려 그의 역사에 대한 인식은 논리적이고, 한국인의 상식선에 더 부합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역사인식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은 꼭 읽어볼 책이다. |
| 박노자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그의 또다른 책이 나왔다는 소식은 매우 기쁜 일이었다. 특이 그의 다른 저서인 '나를 배반한 역사'를 읽으며 우리 역사 중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안타까운 시기로 생각해온 개화기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었기에 이 책에 대해서도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박노자와 허동현 두 저자의 지상 논쟁을 가끔씩 읽으면서도 내가 너무 우리 역사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 기회에 꼼꼼히 이 책을 읽으며 많은 도움을 얻었다. 무엇보다 이 논쟁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우리의 개화기가 그저 혼란스럽고 어리석기만 했던 때는 아니었다는 점에 있다. 그 안에서 우리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많은 고민과 실천들이 있었고 비록 그것이 일제 강점의 현실 앞에서 좌절되었음에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역사적 교훈은 다시 한 번 우리를 둘러싼 열강들의 판도가 조금씩 변하고 있는 이 시대에 눈여겨 보아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 역시 매우 가치가 있다.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조금은 다른 그들의 논쟁은 우리 역사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보여줌으로써 좀 더 깊이 역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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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와 허동현 두 학자의 눈으로 우리의 개화기를 보고 있다. 편지를 통한 논쟁 형식이다. 역사를 보는 다양한 시각을, 더구나 그 역사적 시기가 오늘날과 아주 유사한 100년 전을 바라보기 때문에 아주 흥미로웠다. 박노자 선생은 퇴계와 기대승의 편지를 통한 논증을 예로 들었다. 아주 적절한 예이다. 두 분은 그렇게 자유롭게 우리의 과거와 오늘을 바라보고 독자들에게 다양한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다만, 주제들이 이미 어느정도 결론이 난 부분이 많아서, 실제 글을 읽어 보면 치열한 논쟁이라기 보다는 다정다감한 담소 정도로 보는 게 적당할 것 같다. 즉, 나는 당신의 생각에 반대한다가 아니라, 그건 이런 식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당신과 내가 지향하는 점은 같지만, 정도일 것 같다.
두 분은 각각 나는 보수주의자 나는 '개인적 진보주의자'라고 하는데, 개인적 취향 때문인가, 박노자 선생의 관점이 상대적으로 더 흥미롭기는 하다.
갑신정변이나 황사영 백서, 갑신정변 등이 무척 흥미로웠다. 역사책에서는 지나치게 일도양단해서 설명하는 경향이 있는데, 결국 역사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그리 감정적으로 호오를 나눠서 판단할 수 없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이다. 또, 처음에는 적과 아군을 나누는 게 재미있지만, 그런 재미는 금새 사라지고 만다. 역시, 역사를 이루는 미세한 주름들을 차분히 펴가며 살펴보는 것이 진정한 역사의 맛이다. 그 살펴봄은 나에 대한 살펴봄이기도 하다. 나에 역사와 너의 역사를 어떻게 그리 쉽게 구분할 수 있게는가? 역사는 우리의 역사일 뿐이고,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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