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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를 서성이다가 문학동네 전집 사이에서 한국인 이름을 발견했다. 한국계 최초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순교자》라는 작품을 향한 펄벅과 필립 로스의 찬사는 순교자를 읽는데 주저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낯선 이름의 작가 김은국의 약력을 보니 <태백산맥>에서 평등주의사상을 가지고 있던 주인공 김범우의 운명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 이대위와도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김범우가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이데올로기이전에 봉건주의 타파와 민족평등이 먼저였던 것처럼 김은국 작가는 《순교자》를 통해 이데올로기라는 이념적 대립 앞에서 인간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져주고 있다.
1950년 서울에서 인류문명사를 공부하던 박군과 이군은 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지원하게 된다. 박군은 해병대로 이군은 육군본부 평양 파견대에 가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이들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은 평양에서 목사들이 북한 공산당에 의해 집단 처형된 사건 때문이다. 발견된 열 두구의 시체에는 박군의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박군이 아버지의 죽음을 애통해하기 보다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평소의 ‘광신자의 오만한 얼굴, 자기가 옳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자길 패배시킬 수 없다는 신념에 잔뜩 도취된 자의 얼굴’이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발굴된 열 두구의 시신을 둘러싸고 육본 파견대 정치정보국장 장대령은 북한 괴뢰 정권에 희생당한 순결하고 성스러운 희생자로서의 <순교자>라는 상징을 만드는 작업을 추진하는 위원회를 만든다. 이름하여 ‘합동추도예배’인데 이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은 한국군의 홍보와 공산주의의 부정한 이미지를 심겨주기 위한 것이 군의 목적이다. 장대령에 의해 임시 책임자가 된 이대위는 목사들의 집단 처형 가운데 두 명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살아 돌아온 두 목사에 대해 조사를 하게 되면서 사건이면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집단 처형 당일 있었던 진실, 모두 총살당하고 두 명만 살아남은 진실은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한 목사와 신 목사가 살아남은 이유를 둘러싸고 교회와 신도들 사이에는 온갖 억측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정작 살아남은 이들은 침묵할 뿐이었다. 이들이 살아남은 이유를 장대령은 국가 이익의 보호와 군의 선전 목적에 이용하기 위해서 신 목사에게 이대위를 보낸 것이고 이대위는 그저 순수하게 신 목사라는 인간미에 이끌려서 진실을 파헤치려고 하는데 신목사의 친구 고군목의 등장으로 신목사의 입지는 다시 좁아지게 된다.
첫째는 그가 거짓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양심은 깨끗할 대로 깨끗하다는 거고, 둘째는 그의 양심이 썩을 대로 썩었다는 거야.
합동추도예배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각종 신문에서는 기독교인들의 성스러움과 순교자들을 찬양하는 선전이 도배를 하고 합동추도예배에서 설교를 하게 된 신목사는 처형 당일에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는 열 두명을 배신하였기 때문이며 그 열 두명의 목사들은 모두 자신의 배신을 용서하고 거룩하게 죽었다는 설교를 함으로써 스스로 십자가를 진다. 이로 인해 신도들은 분노하여 신 목사를 ‘유다’라 부르며 폭동을 일으키게 되고 신 목사를 타도하기 위해 합심하는데 , 허나 진실은 그 반대였다. 처형을 주도하였던 정소좌가 포로로 잡혀오면서 사건당일의 진실이 드러나는데 , 정소좌가 두 사람을 살려 준 이유는 열 두명의 목사들이 죽음 앞에서 모두 신을 부정하였으나, 한 사람은 이미 미쳤고(미친사람은 쏘지 않는다는 불문율 때문에), 오로지 한 사람만이 죽음 앞에서 의연한 모습을 보인 유일한 신앙인이었다는 이유로 살려두었다는 말을 남긴다.
“난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 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고통받는 인간......
전쟁은 민족상잔의 비극만 낳았을 뿐 아니라, 절망도 낳았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가운데 종교조차도 그 빛을 잃었다. 동료 목사들의 죽음을 목격하며 신의 부재에 절망한 한 목사의 미친 울분의 소리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주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는 신 목사의 절규는 시대의 아픔과 인간에 대한 동정이 묻어난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이전에 , 종교이전에 전쟁이 만들어낸 포화속에서 인간실존에 대한 작가의 사유는 《순교자》안에서 미학적으로 완벽하게 형상화 된다.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가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라고 하였듯이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비극 앞에서 희망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만들어주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신 목사에게서 종교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참된 신앙의 길이란 무엇인가를 떠올려 보게 되었던 매우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산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 어쩌면 같은 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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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죽음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본능적 공포를 느낀다. 죽음은 세상의 어떤 것도 그 앞에서 무용하게 만들며, 우리가 소중히 여겼던 것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가르친다. 죽음이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힘 앞에서 우리는 무력한 존재일 뿐이다. '순교자'는 그런 죽음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책이다. 죽음 앞에서 목사들이 보인 태도를 통해 김은국은 신앙이란 무엇이며, 순교와 진실의 문제, 신자들이 당하는 고통에 침묵하는 신에 대한 질문을 정면으로 던지고 있다.
작년 여름 이 책을 읽었다. '순교자'라는 제목이 부담스러워 오랜 시간 피해다녔던 책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이라면 한번쯤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내용이기에 마음을 다잡고 읽었다. '순교'란 말은 사람을 참 불편케 하는 말이다. 순교적 상황은 대개 공포스럽고 폭력적이며,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불안과 고통을 떠앉은 채 발생하기 때문이며, 응답하지 않는 듯한 신에게 자신의 생명을 걸고 믿음을 확증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순교한다해서 신이 육체의 고통을 경감시키거나 내적 의문을 해소시켜주지 않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힘들게 하는 것은 신이 충분히 여건을 변화시킬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다. 이 때 신자는 공포와 의심에 휩싸이게 된다. 하지만 감지되지 않는다 해도 신이 그들 곁에 있으며 그것을 믿는데 신앙의 힘이 필요하다는, 이 곤혹스런 자리가 인간과 신 사이의 거리를 낸다. 믿음은 당위에서 오지 않는다. 신과 함께 한 세월과 쌓여진 신뢰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불안한 인간은 신을 의심하게 되고, 그 때 인간들이 보여주는 반응이 14명의 목사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순교자'는 6. 25 전쟁이 난 몇 달 후, 평양에서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쟁 직전 14명의 목사들이 비밀경찰에 끌려가 12명이 죽임을 당하고, 2명만 살아 돌아온다. 진상조사를 위해 화자(話者) 이 대위가 투입된다. 상관 장 대령은 이들의 죽음을 순교로 규정짓고 정치선전에 이용하려 한다. 살아남은 두 명의 목사 중 신 목사를 만난 이 대위는 신 목사에게서 진실을 숨기려 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던 차 목사들이 죽는 순간을 본 지켜 본 인민군 소좌가 붙잡히게 되고, 그로부터 신 목사가 감추려는 비밀을 듣게 된다. 인민군 소좌는 목사들이 살려달라 아우성치고 신을 부정한 채 울었다며 그들의 죽음을 비아냥댄다. 그는 남겨진 2명 중 한 명은 미쳤고, 다른 한 명은 당당히 대항했기 때문에 살려주었다 한다. 미친 사람이 한 목사고, 다른 한 명이 신 목사다. 죽은 12명의 목사들 중엔 이 대위의 친구인 박 군의 아버지, 박 목사가 있다. 박 군, 즉 박 대위는 신앙 때문에 자신과 절연한 아버지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신 목사는 편지를 통해 박 목사가 총살 직전 주어진 마지막 1분의 기도 시간을 '난 기도할 수 없어'란 말로 대신하고 죽었다 전한다. 하지만 실제는 조금 다르다. 당시 박 목사는 목사들이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부탁에도 '정의롭지 못한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정신적 지주였던 박 목사의 불신앙적 죽음으로 한 목사는 정신을 놔버리게 된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장 대령의 순교자 만들기는 계속되고, 이 대위와 고 군목은 진실의 은폐에 분노한다. 한편 결정적 키를 쥐고 있는 신목사는 고통받는 신자들을 위해 자신이 십자가를 지기로 마음 먹는다. 신 목사는 자신이 12명의 목사들을 배반했다며 죽은 목사들을 미화한다. 아프더라도 진실은 숨길 수 없다던 고 군목도, 신앙을 버린 박 대위도 신 목사의 행보에 동참하기로 한다. 갖은 비난을 당하면서도 그 길을 선택한 신 목사의 의도를 알기 때문이다. 이 대위는 그들의 돌변해버린 태도에 충격을 받는다. 그러던 중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한 목사가 '하나님 없어'란 말을 남기고 죽고, 중국군의 개입으로 인해 철수 명령이 떨어진다. 이 대위는 박 대위의 부탁으로 신 목사와 고 군목을 서울로 데려가려 하지만 그들을 남아있겠다 한다. 마지막으로 권유하는 이 대위에게 신 목사는 자신의 속내를 전한다. '자신이 평생 신을 찾아 헤맸지만 찾아낸 것은 고통받는 인간 뿐이었고, 죽음 다음엔 아무 것도 없다'고. 그럼에도 '고난에 시달리는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에서 마침내 승리를 이룰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 해 3월, 이 대위는 전투에 나가 부상을 당하고 부산 육군 병원 요양소에 있게 된다. 거기서 장 대령의 방문을 받고 신 목사와 고 군목의 소식을 듣는다. 장 대령은 신 목사가 죽었으리라 생각된다 전하고, 고 군목은 부산항 근처의 한 섬에 북한 피난민촌 교회를 세웠다 알려준다. 얼마 뒤 병원에 입원해 있던 이 대위에게 고 군목은 장 대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이 대위는 친구 박 대위의 전사 소식을 듣게 된다.
이 책의 제목은 '순교자'지만 사실은 순교하지 못한 목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하나님을 비난하고 죽었으며, 모범적 전형의 신 목사도 신의 부재를 말했다. 타당하고 절실한 기원이 바람대로 되지 않았을 때, 인간이 보일 수 있는 보편적 반응을 그들은 보였다. 그들의 행동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신자이고, 결국 믿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진지해질 수 밖에 없어서이다. 소설속의 목사들은 종교인이었고, 크리스천의 자세로 살았지만 결국은 무신론자로 죽었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오해와 불신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나타나지 않는 듯한 하나님, 신자들의 고난에 무관심하신 듯한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한 김은국의 이해가 좀더 나아가지 못한 데에 아쉬운 마음이 든다. 좀 더 나갔다면 죽음이 허무한 종말이 아닌 새로운 시작일 수 있었을 터이고, 신 목사의 신앙이 그토록 공허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받은 우아함과 진지하고도 철학적인 질문, 매력적인 문장은 내 가슴에 남아있다. 덕분에 나는 내 신앙이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지를 감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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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숨 한번 쉬고…
무더웠던 일요일, <순교자> 한 권을 들고 집 앞 카페로 나왔다. 쉼없이 읽어내려갔다, 두 잔의 커피와 함께. 책을 덮기 전까지 한번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어느덧 3시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렇게 <순교자>를 만났다.
<순교자>를 집어 들었던 건, 한국계 최초의 노벨문학상 후보라는 띠지 문구보다, 6·25라는 한국전쟁을 배경하고 있었다기보다, '순교'라는 종교적 이유보다 앞선 것이 있었다. '세계문학'전집에서 발견한 '김은국'이라는 한국 작가명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을 배경하고 있고, 한국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 소설은 1964년 미국 뉴욕에서 'The Martyred'라는 제목으로 영문으로 출간되었고 도정일 문학평론가님으로부터 한국어로 번역되어 세계문학전집에서 다시 한번 세상에 태어났다. 무척 흥미롭고, 의미있는 작업이라 볼 수 있다. 게다가 책 뒷면 펄 벅의 추천사와 같이 '인간다운 믿음의 보편성'을 표현하는 '보기 드문 걸작'이 틀림없다. 이 책을 덮을 때쯤, 그녀의 추천사에 적극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보기 드문 걸작이다. 하나의 사건을 소재로 신에 대한 인간다운 믿음의 보편성을 표현하고, 신앙을 갈망하는 데서 비롯되는 의혹과 고뇌를 다루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김은국은 바로 그 어려운 작업을 해냈다.' - 펄 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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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의 시작과 끝 사이에 생긴 '이 작은 사건' (p205) 의 '작은 거짓말' 의 진실을 <순교자>는 묻고 있다. 진실은 무엇인가. 그 진실은 밝혀져야 하는가. 신 목사의 의도는 무엇인가. 인간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아니면 열두 명 중 몇몇의 부끄러운 허약함과 배반을 폭로하느니보다는 작은 거짓말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게지" p145 <순교자> 중에서...
그의 작은 거짓말...그의 신앙의 진리.
"우린 그들에게 빛을 보여주어야 해요 [...] 그건 나 자신의 십자가요"
"나는 인간이 희망을 잃을 때 어떻게 동물이 되는지, 약속을 잃었을 때 어떻게 야만이 되는지를 거기서 보았소. 그렇소. 당신이 환상이라 부른 그 영원한 희망 말이오. 희망 없이는, 그리고 정의에 대한 약속 없이는 인간은 고난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 희망과 약속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면 다른 데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그래요, 하늘나라 하나님의 왕국에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p271 <순교자> 중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은 진실의 사냥꾼인가, 진실의 보호자인가? 당신은 진실은 진실이기 때문에 밝혀져야 한다고 믿는가?(p152-153) 진실은 덮어두어도 진실이라 믿는가?
'왜 사람을 속이는 겁니까?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당하는 고통은 고통일 뿐 거기에는 우리가 이승 너머에서 찾아낼 어떤 정의로움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을 속여야 합니까(p254)' 라는 나(이대위)의 원망과 '나는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 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고통받는 인간, 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뿐이었소. 우린 그들에게 빛을 보여주어야 해요. 그건 나 자신의 십자가요(p255)'라는 신 목사의 고백 사이에서 나는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떤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
"인간을 사랑하시오. 대위. 그들을 사랑해주시오! 용기를 갖고 십자가를 지시오. 절망과 싸우고 인간을 사랑하고 이 유한한 인간을 동정해줄 용기를 가지시오" (p283) 신 목사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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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조차 종교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김은국의 <순교자>. 독서토론이 아니었다면 굳이 읽지 않았을 거다. 모든 종교를 존중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활자에서 맹목적으로 한 종교에 대한 당위성이 묻어난다면 상당히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허나 내 짐작은 기우였다. 이 책은 종교를 초월한 ‘무엇’이 있었다. 6․25전쟁 발발하기 직전 평양의 기독교 핵심 인사 목사 열네 명이 공산군에 체포된다. 공산군 선전으로 이들을 활용하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모진 고문 끝에 총살당한다. 어찌된 일인지 두 명만 살아 돌아오는데, 진실을 알고 있는 둘 중 한 목사는 미쳤고 신 목사는 함구한다. 진실을 밝히려는 이 대위와 진실을 왜곡해서라도 열두 명의 목사를 순교자로 만들어 공산당을 비방하고 남한 정부를 선전하려는 장 대령의 갈등이, 그 전에 박 대위와 그의 아버지인 박 목사의 종교 갈등이 형성된다. 공산당에 당당하게 맞섰으나 총살당하기 직전 마지막 기도를 거부하며 신에 대한 미심쩍음을 품은 박 목사의 인간다운 모습은 후에 아들과 화해하도록 유도했고, 이 대위와 장 대령은 신 목사의 행동을 주시하며 그들이 말한 진실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문제가 아님을 깨닫는다. 전쟁으로 피붙이를 잃은 적 있는 이 대위와 장 대령은 군 상하 관계이기 전에 부자 관계로 비치기도 했다. 그들의 수평 관계는 박 대위와 박 목사의 부자관계와 닮은 구석이 있다. 서로를 증오하는 듯 보이면서도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신 목사에게도 갈등의 대상이 있다면, 그는 신뿐이다. 끝까지 의연한 태도를 보여 살아남은 신 목사는 실신한 종교생활을 실천하던 목사들의 인간다운 모습을 지켜본다. 몇몇의 목사들은 목숨을 구걸하기도, 다른 목사를 힐난하기도 한다. 과연 이들의 죽음을 순교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의 제목이 ‘순교자들’이 아니라 ‘순교자’인 까닭은 신 목사가 바라본 - 작가가 바라본 - 진정한 의미로 순교한 이는 인간다운 모습을 내비치면서 품위를 잃지 않은 박 목사밖에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신 목사가 그들을 ‘순교자들’로 만든 행위는 일종의 신에 대한 도전이다. 다분히 비아냥거림도 섞여 있다. 어쩌면 이는 신과의 갈등을 풀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종교를 초월한 무엇, 어떠한 틀(종교)에도 얽매이지 않고서도 순수하게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죽어가는 신 목사 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독자들은 신 목사를 ‘순교자’로 바라볼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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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전쟁 영화나 전쟁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다. 전쟁에 대한 책 또한 마찬가지다. 그다지 읽은 게 없다. 순교자는 전쟁 자체보다는 전쟁에 대한 간접적인 책이다. 읽을 마음이 없었는데 이웃블로그에 리뷰를 보고 읽게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공산정권에 14명의 목사들이 체포된다. 그중 12명이 처형당한다. 그리고 2명이 살아남았다. 왜 살아남았을까? 여기에 문제와 촛점이 맞추어진다. 어찌되었건 12명의 목사는 순교자가 되었고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 있는 살아남은 자, 신목사는 침묵뿐이다. 그는 왜 침묵하며 갖은 욕설을 다 받아내고 있는 건가?
재미를 위한 책이 아니다. 책을 사서 음미하면서 천천히 읽어야할 책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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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인간의 고뇌에 대하여 6. 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초겨울 평양. 육본 파견대 정치정보부에서는 6. 25전쟁 발발 직전, 평양에서 일어났던 열네 명 목사들의 긴급체포와 집단 처형이라는 사건 경위를 조사하게 된다. 이 사건을 담당하게 된 장대령과 이대위 그리고 처형 현장 가운데서 살아남은 신목사. 그 하나의 사건을 두고 등장하는 세 명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시선으로, 각자의 관점으로 진실을 향해 혹은 진실을 외면한 채 소설 <순교자>의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열두 명의 순교자들은 위대한 상징이야. 그들은 고난받는 교인들의 상징이자 궁극적인 정신적 승리의 상징이지. 그 순교자들은 결코 싼 값에 팔아 넘겨선 안 돼. 빨갱이들에 대한 그 순교자들의 정신적 승리를 모든 사람이 목격하도록 해야 한단 말야.”(75쪽) 이 사건의 총책임을 맡게 된 장대령에게 사실과 진실은 더 이상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장대령에게 있어서 그 목사들은 단지, 남한 정권의 선전을 위한 주요한 소재이자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장대령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닌, 북한 정권에 의해 죽음에 이른 목사들 곧 ‘순교자’들이 정권 선전을 위한 매우 적당한 소재이며 훌륭한 도구이고 성스러운 상징물이 되어준다는 이용가치에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진실이야.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이야말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고, 자네들은 그걸 줘야 하는 거야.”(213쪽) 장대령의 명령 하에, 이 사건을 일선에서 담당하게 된 이대위는 진실이란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밝혀져야 하고 알려져야 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선전 목적에 맞추기 위해 진실을 비틀 수는 없는 것이며 진실이 비틀어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진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대위에게 있어서 진실은 그것이 추악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저 진실이기 때문에 밝혀져야 마땅한 것이다. “목사님의 신이건 그 어떤 신이건 세상의 모든 신들은 대체 우리에게 무슨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당신의 신은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지도 않을뿐더러 인간의 비참, 살육, 굶주린 백성들, 그 많은 전쟁, 그리고 그 밖의 끔찍한 일들과는 애당초 아무 상관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253쪽) 이대위의 이러한 의구심과 회의는 무릇 이대위 개인에게만 머물러 있는 괴로움이 아닌,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과 고난 속에 처해 있는 여타의 무수한 인간들이 품고 있는 번민이며 고뇌이다. 이대위의 실존적인 이 질문 앞에 과연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난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 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고통받는 인간…… 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255쪽) 목사들의 죽음을 단지 선전 도구로, 이용 수단으로 여겼던 장대령조차도 숙연케 만든 신목사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다. 소설은 신목사가 가장 성스러운 존재가 되려는 순간 마치 연극에서의 암전처럼 신목사의 성스러움을 암전시킨다, 잠시 동안. “우린 절망에 대항해서 희망을 가져야 하오. 절망에 맞서서 계속 희망해야 하오. 우린 인간이기 때문이오.” (256-257쪽) 그러나 암전 가운데 핀조명이 떨어지듯 신목사야말로 저자 김은국이 진정한 순교자로서 그려지길 원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을 유다로, 배덕자로, 겁쟁이로 낮추고 희생함으로써 교인들에게 또한 무의미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인간들에게 절망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힘이 곧 희망임을 드러낸다. 처형 가운데 인간이 희망을 잃었을 때 어떻게 동물이 되는지, 약속을 잃었을 때 어떻게 야만이 되는지를 지켜보면서 인간이란 희망이 없이는 결코 고난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신목사에게 있어서 진실이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뛰어넘은 그 무엇 곧 절망 가운데 희망이 되어주는 그 무엇이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신목사의 고뇌 앞에서 또한 진정한 순교자의 길을 걸어간 그의 뜨겁고도 처연한 발걸음 앞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인간의 운명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숱한 고난과 고통 속에서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인간을 사랑하시오, 대위. 그들을 사랑해주시오. 용기를 갖고 십자가를 지시오. 절망과 싸우고 인간을 사랑하고 이 유한한 인간을 동정해줄 용기를 가지시오.” (28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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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신을 만든다. 나라별, 부족별로 존재하는 신화를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신을 만든 이유는 그 만든 신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무엇보다 삶의 희망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들 위에 신을 만들어놓고 끊임없이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이생의 의미는 견딜만한 무엇이 있음으로써 삶이 주는 지독한 고통을 참을 수 있는게 아니냐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신을 경배한다. 그러나 그 행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을 경배하기보다는 신을 경배하는 자신들을 위무함으로써 현실의 고통을 잊고자하는 경향이 뚜렷해 보인다. 신을 경배하는 척하면서 실은 사람을 무한히 사랑하는 행위가 종교가 아닌가 묻고 싶다. 결국 사람이 만든 신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삶의 당위성을 주고 위로를 준다면 신은 역시 우리에게 신으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나는 전쟁을 몸으로 겪어보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전쟁에 대해 두 가지 공포를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겨울에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에 겪게 될 비참에 대한 강렬한 공포심이다. 이건 아마도 추위를 두려워하는 지극히 내 개인적인 입장을 피력한 경우가 되겠다. 다른 한 가지는 어린아이들이 맞닥뜨릴 전쟁의 상황에 대한 가혹함이다. 어른들의 이기심과 욕심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될 어린아이들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누구라도 전쟁의 스위치를 쉽게 누르지 못할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평양에서 일어난 열두 명의 기독교 목사의 처형 사건을 배경으로 신 목사와 이 대위, 그리고 장 대령이 벌이는 진실에 대한 공방전이 이 책의 내용이다. 대학 강사였던 이 대위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육군에 들어갔고, 부상을 당해 치료를 받고나서 육군본부정치정보국에 귀속되면서 그때 막 점령한 평양으로 가게 된다. 평양에서 그는 빨갱이들이 행한 비열하고도 참혹한 목사처형사건을 맡게 되는데 정보국의 입장에서는 이 사실을 통해 국제적으로 북한군의 만행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열두 명의 목사가 처형되었고 두 명의 목사가 살아남았다. 그 중 젊은 목사인 한 목사는 이 사건으로 인해 정신이 이상해지고 그날을 생생하게 증언할 신 목사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사람들은 신목사가 마치 유다처럼 다른 목사들을 배신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라 생각하며 신 목사의 고백을 기다리고 있다. 이 대위는 신 목사의 증언을 듣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하면서 신 목사에게 질문 하나를 던진다. “목사님의 신- 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신 목사는 이 대위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쪽으로 삶의 방향을 택한다. 처형당한 열두 명의 목사들이 어떤 행동을 보였으며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은 채 자신이 유다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이 대위는 젊은 무신론자답게 진실만을 고집하고 있다. “우리의 선전목적에 맞추기 위해 진실을 비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장 대령은 이런 이 대위에게 반박한다. “ 왜 꼭 진실을 말해야 해?” “진실은 묻어두어도 여전히 진실이야. 그걸 꼭 까발리고 떠들어야 하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신과 그 신을 만든 사람들과 사람들이 신을 만든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신을 위해 단 하나 뿐인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 이것을 순교라고 한다. 이때의 신은 신일 수도 있지만 개인이 가진 이념이나 국가일수도 있다. 박 목사와 신 목사, 그리고 장 대령 모두 순교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은 신을 만든 사람들을 위무하기 위한 순교였다. 사람은 한 순간 무너질 수 있는 약한 존재이고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절망에 빠지기 쉬운 나약한 존재다. 반면, 구약성서에 나오는 욥처럼 하나의 믿음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며 수용하는 의지력을 지닌 것도 사람이다. 신 목사가 진실을 감추는 대신 택한 것은 전쟁의 회오리 속에 갇힌 나약하고 절망에 빠진 평양 시민들에게 그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의지를 나눠주는 거짓 증언이었다. 그러므로 신 목사의 순교는 신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순교라고 할 수 있다. 진실만이 최고의 선이라고 믿었던 이 대위는 신 목사나 장 대령을 통해 차츰 자신이 믿고 있었던 진실이 과연 최고의 선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말로만 떠도는 무수한 진실들의 혼탁한 공기나 대중의 광기에 호소하는 일부 광신도들의 폭력보다 더욱 소중한 의미는 바로 사람들에 대한 사랑, 그것이야말로 진실보다 더 값진 것이 아닌가라고 되묻고 있다. 누가 진실을 안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어제 내린 폭설이 덮은 세상은 희고 깨끗하다. 곧 저 눈이 녹은 물로 인해 거리는 한동안 질척거릴 테지만 그 질척거림을 미리 생각해서 마음을 찌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순간만은 겨울이 주는 매서운 광기보다는 흰 눈이 주는 세상의 평화를 고요히 즐길 뿐이다. 진실만을 원하던 이 대위의 외침이 사람들의 비참과 절망 앞에서 가라앉듯 지금은 햇살에 튕겨져 나오는 눈의 흰빛을 통해 내 마음을 정화하는 것으로 나는 겨울을 노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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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라는 단어가 주는 부담스러움 있었다. 그럼에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전쟁'이라는 화두와 한국작가가 분명한데 번역본이란 사실이 궁금했기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순교자를 읽으면서 얻은 재미는 종교적인 이데올로기도 있었지만,독특한 '추리력'의 느낌때문이었다. 사실 누가 죽였을까? 또는 배후에 정말 무엇인가가 있었을까는 소설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절제된 인물들의 마음을 읽어가려 애쓰는 순간 알았다. 소설에 내가 이미 빠져 들어가고 있었음을!
소설의 시작은 광적인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박군의 아버지와 종교에 대해 믿음이 없는 아들을 인정하지 않는 박군의 아버지에 대한 일화로 시작된다.마치 앞으로 <순교자>란 소설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 갈 것인지을 암시하는 커다란 복선 같은 느낌이랄까.
시간적 배경은 미군과 유엔군이 평양으로 북으로 올라가고 있는 상황이였다. 퇴각하던 공산군은 목사들을 집단처행했다.그러나 누군가에게 그 죽음은'순교'였다. 처음에는 목사들의 죽음을 순교로 위장하여 반공정신(?)을 고취하려는 군의 작전이란 것이 무섭다 생각하며 읽었다. 그런데,순교자를 읽어가다 보면,배후에 누가 있었던 것일까? 에 대한 호기심은 저마다 무겁게 누르고 있었을 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람들의 심리적인 동요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읽어야만 했다.
"열두명의 목사들은 모두 이유없이 도륙당했습니다.그들은 신의 영광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그들은 인간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그들의 죽음에 대해 당신의 신은 그렇게 무관심할 수가 없었습니다.(중략)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있는 판에 신을 찬미하다니요?" 여전히 전쟁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그때마다 나 역시 묻고 싶었다.정말 신은 있는 것인가? 있다면 왜 이리 인간들에게 잔혹한 것일까? 이대위의 말처럼 신은 인간의 고난을 이해하지도 않을 뿐더러 인간의 비참 살육 전쟁에 대해 상관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에 나 역시... 공감했으며 진정 신이 있다면 오늘날과 같은 전쟁은 사라지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묻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신을 가진 이들은 신에게 무엇인가를 요청하지 않는다.그들은 신이란 무엇인가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신이 자신들을 돌보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으로 절망의 순간을 견디어 내는 것일 뿐.
목사들의 처형(순교)과 과연 신이란 존재하는 가에 대한 질문은. 신목사처럼 자신만의 절망 하나로 귀결되는 느낌이였다. 종교를 가진 자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할것이고,비종교인들은 다양한 생각으로 신의 존재유무를 생각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종교의 유무를 떠나서 신목사의 마음도 되고,박군의 마음도,이대위의 마음도 순간순간 이해가 되였고..때로는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순교자는 분명 신의 존재에 대한 범인들의 투정과 절규가 맞을텐데.. 이상하게도 불편하지가 않았다. 신에 대한 원망이란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라는 질문까지 하게 했으니까. 재미있게(?) 읽어도 되는가 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빨려 들어가며 읽었다. 추리소설도 아니고,조금은 무거울 수 있는 주제였는데도 말이다. 생각해 보건데,순교자 속 등장하는 인물들마다의 마음과 생각이 궁금했기때문은 아니였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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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전집에 한국사람이 포함될 줄이야. 처음에는 한국인이 맞나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젠 당당히 세계속에 한국인이 우뚝 설 차례인 것이다. 올해가 6.25 발발한 지 60년이 됐다. 현 세대에겐 6.25전쟁이 마치 국사책에서 나온 역사마냥 아득히 멀게만 느껴질 것이다. 물론 이제 30대로 들어선 나도 그렇게 느껴진다. 하지만 부모님은 매해 6월만 되면 어김없이 6.25전쟁 얘기만 한다. 그때의 암담한 현실을 설명하는데 ’전쟁’이란 공포에 온몸이 다 떨렸다. 전쟁과 평화. 이 단어들의 조합이 어딘지 어색하기만하다. 인간도륙의 현장, 피로 물들어 버리는 땅위에서 평화가 과연 도래할 것인가? <순교자>는 그 토대 위에 세워진 인간의 보편적인 특수성을 말하고자 한다. 한국군이 평양을 점령한 그때의 일이다. 14명의 목사가 북한군에 끌려갔다가 2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왜 2명만 살았을까? 이 물음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펼쳐진다. 6.25전쟁을 발판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지만 칠흑같은 어둠만 펼쳐지는 전쟁 속에서 왜 인간은 희망을 가져야 하며 그 희망은 인간을 어떻게 만드는지, 같은 동포나 인간으로서 생각하게 만든다. 카뮈의 실존주의를 이어받은 김은국. 고통받는 인간들을 보고만 있는 신은 과연 존재해야 하는가? 총탄이 오고가는 전쟁 속에서 과연 인간의 목숨은 무엇일까? 인간은 희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가? 그렇다면 6.25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진정 당신이 대한민국이라는 땅위에서 두 다리로 멀쩡히 걷고자 한다면 이 책을 단 한페이지라도 정독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