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는 일제의 강제합병이 있은 지 10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0년이 되는 해 이지만, 또 4월 혁명 50주년, 광주항쟁 30주년, 6.15남북 공동선언이 있은 지 10년이 되는 해 이기도 하다. 저자는 극단의 시기 20세기의 우리 역사를, 중요고비마다 그 의미를 묻고 되새기면서 성찰해보자는 의도에서, 그 동안 자신이 발표했던 글 중에서 그것에 부응할만한 글들을 모아 이 책에 수록하였다고 한다. [한국 근현대사 100년의 재조명]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저자는 끝없이 묻고 있다. 지난100년간 우리가 세우려 한 나라, 꿈꾸던 나라는 어떤 나라 이었는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공동체를 예속하고 그들이 세우려 한 국가에 맞서, 참된 해방의 나라, 민주의 나라를 세우려고 한 민중들의 꿈은 어떻게 굴절되고, 또 어떤 대가를 치르고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지난 역사에 나타난 중요한 고비를 짚어가며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이 책은 근현대사에 대한 통사가 아니다. 우리들이 꿈꾸던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시기에, 정치세력은 어떤 국가를 꿈꾸었는지, 그래서 결국 어떤 국가가 세워졌는지 그리고 민중들은 왜 그들이 원하는 그런 나라를 세우지 못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 고비고비의 전개과정과 의미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통사에서 배우지 못한, 잘못 알려진, 그리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알게 되고, 또 그때나, 현재나 역사의 반동은 하등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총 8개의 글로 이루어진 이 책은 1장에서 6장까지는 역사적 고비에서 일어난 그 사건이 가지는 의미와 그때 지배자와 민중은 각각 어떤 나라를 세우려 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7장과 8장은 우리가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는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한다. 1장 “일제가 만들려 한 국가, 한국인이 세우려 한 나라”에서 저자는 서구 제국주의와도 다른 일제의 조선 동화정책을 분석하면서 그들이 만들려 한 국가는 대일본제국의 융성을 위해 종속적 역할을 맡도록 하는 것, 그러기 위해 일제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인간으로 만들어 독립의지를 말살하려 한 황국신민화 운동에 대해 그들의 자료로써 제시한다. 이에 대하여 독립운동은 대부분이 한국인이 살고 있는 지역과 떨어져 있었고, 분산되어 있고, 정치적 배경이 달랐지만 어느 곳에서나 공화국을 건설하고자 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2장 “해방직후 여운형의 국가건설 방향”에서는 일제가 패망한 그시점부터 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민족국가 건설활동을 펴나간 여운형과 인민당에 대한글이다. 여운형은 좌우합작만이 독립국가를 이룰수있음을 간파하였으며, 프롤레타리아독재를 반대하고 선거와 의회를 통하여 진보세력이 집권하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꿈꾸었다. 또한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의 전말을 알려주고 있으며, 반탁운동이 친일파들을 하루아침에 애국자로 둔갑시킨 과정과, 이를무기로 분단으로 가고자하는 단정세력의 논리를 보여주고있다. 3장 “해방 후 남북 주요정치세력의 국가건설 방안”에서 저자는 1947년 재개된 미소공동위원회와의 협의에 참가한 남북정당, 사회단체의 국가건설 방향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주로 남북 좌익의 차이분석에 치중하고 있는데, 그것은 당시 민중들의 지지가 우익보다는 일제강점기부터 독립에 헌신해온 그들에게 쏠려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익은 3권 분립을 통한 대통령책임제를 선호하고 있었으며, 해방 후 당면과제인 토지개혁에 대해서는 지주가 대부분인 그들 자신들의 입장인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친일파처리에서는 철저하게 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단정수립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에 반해 북로당은 인민독재공화국을 남로당은 인민적 민주주의 공화체를 지향하고 있다. 저자는 4장 “ 5장 “4월 혁명 이후, 새나라 건설방향과 혁명입법”에서 저자는 4.19혁명 이후 이루어졌던 민주화 이행 작업과 장면정부의 혁명입법의 의미와 한계에 대해 이야기 한다. 또 5장 “부마항쟁과 그러면 해방 후 지금까지 친일파들은 어떤 국가를 만들려고 했을까? 저자는 7장 “친일파가 만들려 한 국가”에서 그 해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는 말하길 우리역사에서 친일파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가 2번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해방 후이며, 그때는 우리가 알고있는대로 단정세력에 의해서 좌초되고 말았다. 두 번째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로 1990년대의 친일행위 진상규명을 들 수 있는데 해방 후와 동일하게 극우세력의 격렬한 반대속에 2005년에야 겨우 친일인명사전 1차 명단을 발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친일파 청산문제는 그들의 매국적, 반민족적 행위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상당수가 일제제국주의 파시즘을 찬양하고, 일제군국주의자들의 침략전쟁과 만행에 협력했기 때문에 징치해야 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들이 만들려고 했던 국가는 절대권력을 추구하고 영구집권을 꾀하는 극우반공 국가이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과거사 청산과 새로운 출발”에서 과거사위원회의 활동과 과제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다. 장기간에 걸친 극우반공주의적 통치는 여러 가지의 사회 병리현상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고, 정상적인 사회로의 환원을 위해서는 사회를 재조정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사에 대한 진상규명을 통해 과거사를 올바르게 기억하고 참회하여 밝고 투명한 미래를 열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즉, 과거사 청산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자는 것이다. 오늘을 바라보면 극우세력은 지금도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어렵게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과거사에 대한 규명은 하나,둘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고 있으며, 힘들게 닦아놓은 우리 민중들이 세우려 했던 나라는 파열음을 내며, 그들 지배세력이 만들려 했던 국가로 방향을 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깨어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하는 시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꿈꾸던 나라를 만들고, 지키기 위해서.. |
|
1960년대 중반부터 한국 현대사에 관심을 기울여온 역사학자 서중석은 '해방'을 한국 현대사 최대의 사건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해방 직후의 역사적 과제를 민족 통일 전선, 민주정부 수립, 토지 개혁, 친일파 척결 네 가지로 정리한다. 이 네 가지 역사적 과제에 참여한 핵심 인물이 바로 몽양 여운형이다. 여운형은 1944년 8월에 조직한 건국동맹을 중심으로, 김구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을 준비를 했다. 좌우파가 골고루 참여한 건국동맹의 강령은 이러하다. "첫째 각인각파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제를 구축하고 한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고, 둘째 연합국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일체독립을 저해하는 반동세력을 박멸하고, 셋째 민주주의적 건설과 노농대중해방에 치중하겠다…."(115, 116쪽) 해방된 그날부터 좌의 여운형(위원장)과 우의 안재홍(부위원장)이 이끈 건국준비위원회는 자주적으로 나라 세우기에 착수했다. 안재홍은 경성방송을 통해 8월 16일 오후 3회에 걸쳐 경위대 신설, 정규병 편성, 식량확보, 물자배급 유지, 통화안정 등이 포함된 방송연설을 했다. 건준은 치안대를 조직하고 전국 곳곳에 지부를 조직하고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 세력(연안에 있던 조선독립동맹)과 연계를 시도했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에 의해서만 통일국가 건설이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할 독자적 정당의 필요성 때문에 인민당을 창당한 여운형은 독점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독재를 반대하고 노동당이 집권한 영국의 의회민주주의와 비슷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운형은 해방 후 실시된 첫 여론조사에서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 '생존 인물 중 최고의 혁명가' 항목에서 모두 1위를 할 정도로 대중의 신망이 높았다. 좌우합작을 주도한 여운형은 극좌와 극우 양 세력으로부터 12번 테러를 당했고 결국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격으로 암살당했다. 극우 인사들과 조중동 수구 언론은 '이승만 위인 만들기'에 분주하다. 이는 오늘날 수구세력의 정체성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이 바로 친일파와 모리간상배의 후계자들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친일 경찰과 친일 관리 비호의 우두머리'라고 불릴 만한 반민족적 정치인이다. 이승만, 한민당, 친일파가 주축이 된 단정운동세력은 보수적이고 외세의존적이며 극우 파시즘 성향이 매우 강했다. 해방 후 미국무부도 이승만의 극단적인 반공주의와 파당성이 한국 문제를 풀어가는 데 도움이 안될 것으로 판단해 그의 귀국을 억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좌익을 억누르고 정국의 헤게모니를 잡는 데 이승만이 필요하다고 본 맥아더사령부의 조치로 주한미군사령부의 환대를 받으며 귀국하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승만 정권은 편협한 파당의식과 수구냉전논리를 내세운 친일파들의 반공국가였다. "친일파들의 반공국가가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건강한 사회가 아니라 일제강점기에서부터 시작된 수구냉전 논리로 무장된 반공국가이며, 그리하여 그 반공국가는 '정적 죽이기', 억압과 독재, 부정부패비리로 얼룩진 국가가 될 수 밖에 없음을 지적해야 했다."(18쪽) 이승만 정권의 극우반공체제가 저지른 민간인 집단학살의 3대비극은 제주4·3주민 집단학살, 보도연맹원 집단학살, 여순사건이다. 제주 4·3 주민집단학살은 관공리, 경찰, 사설 청년단체의 폭력을 수반한 억압과 횡포, 부정부패, 민생 문제, 친일파 문제 등이 초래했다.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1949년 2월까지 약 4개월간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는데, 신고된 희생자 1만 4,000여 명의 두 배쯤 되는 2만 5,000명에서 3만명이 희생된 것으로 본다. 저자는 여순사건의 원인으로 남로당 프락치, 분단에 대한 두려움, 단정운동, 친일경찰의 횡포에 대한 울분 등을 지적한다.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여순사건은 동족상잔을 가져올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다고 하면서 여수 주둔 국방경기대인 14연대 병사들이 남로당 프락치인 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의 선동에 따라 일으킨 14연대 반란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순사건이 일어난 데에는 남로당의 모험주의적 투쟁 행태와 더불어 단선단정 문제, 친일 경찰 문제, 민생 문제 등이 얽혀 있다.
"민간인 집단학살은 극우반공체제를 형성하는 데 유력한 기제로 작용했다. 전국 어디에서나 있었던 집단학살은 목격자 또는 그 사실을 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시효 없는 공포를 갖게 했고, 피학살자 가족들을 따라다닌 연좌제의 굴레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공포와 피해의식은 극우반공체제에 순응하는 인간형을 만들었고, 극우반공체제에서의 역사에 대한 무지와 왜곡, 의식의 전도현상이나 굴절 현상은 역으로 이 체제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었다. 극우반공 이데올로기는 공포와 피해의식, 무지와 왜곡의 집적과 체계화, 의식의 전도 또는 굴절을 이용하여 억압적 공격성을 가차 없이 발휘하여 장기간 극우반공체제가 지배하는 암울한 사회를 만들어냈다.(23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