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에 이런 서평을 쓴다는 것은 좀 안 맞을지도 모른다. '또문'에서는 그래도 충실하게 청소년을 위한, 그리고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려고 했으므로, 나처럼 비판하는 것은 억울한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 속에는 청소년과 대학생들이 직접 등장해서 구체적인 청소년과 그들의 문제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지루하다. 그 사진이나 이야기, 소재 등은 모두 식상하단 말이다. 왜 그럴까? 나는 적어도 나의 청소년기를 되돌아볼 때(현재는 대학3학년), 이 책 속에서 말하는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대체로 낯설다. 즉, 책 자체는 다양하고 자유로운 의식을 가진 것 같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몇몇 청소년의 집단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온다. 아주 공부 잘하는 학생들(그들도 소외된다), 그리고 대다수의 평범한, 아무런 특색도 없는 그런 평범한 학생과 청소년은 이 책에 없다. 흔히 눈에 띄는 그런 청소년만 있단 말이다. 그들에 주목하는 담론은 많았다. 그리고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정말 다수인 일반 학생들의 문제와 고민을 다뤄줬으면 한다는 것이다. 해결할 수 있어 보이는 것만 드러내지 말고(물론 이들도 실제 해결된 것은 거의 없다), 해결할 수 없더라도 그 모습 그대로의 청소년을 다뤄 줬으면 한다. 답답한 비판처럼 보일지라도, 나의 느낌 그대로가 그렇다. 여기에 내 학창 시절의 나와 내 친구들은 없었으니까. 평범해서 보이지 않는 학생들은 없었으니까. |
| 나의 10대는 극과 극을 달리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시절이 지금도 돌아가고픈 꿈의 고장이었다면, 고등학교는 창살 없는 감옥이요,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종종 꿈에 나타나 가위 눌리게 하는 악몽이다. 중학교 시절에도 우리는 종종 선생님께 꾸지람을 들었고, 매도 맞았지만, 꼴등 하는 애도 자유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위해 손을 들 수 있었고, 교과서에 나오는 실험을 해 볼 수 있는 실습실과 실험을 중시하는 선생님들이 있었고, 중간, 기말고사 성적만큼 환경미화나, 합창 대회, 체육 대회에서 자신의 숨겨진 끼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올라가니 특별 활동도 없고, 학급 회의도 없었으며, 1등이 선거없이 반장이 되고, 100% 예외없이 오후 10시까지 학교에 붙잡혀 자율 아닌 타율 학습을 해야 했다. 어른이 되고서야 그 시간을 추억으로나마 떠올릴 수 있었지만, 그래서 가장 왕성한 시간을 회색빛에 찌들려 살 수 밖에 없는 한국의 현실이 안타깝다.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변화하는데, 왜 우리의 교육 현실은 뒷걸음질 치는지 알 수 없다. |
|
학교에 아이들이 없다. 아이들의 마음은 이미 학교를 떠나버렸다. <스승의 은혜>보다는 <교실 이데아>나 <열맞춰>를 부르는 게 더 익숙해 보인다. 학교는 재미없고 쓸데없는 것들만 배우는 곳이 된지 오래다. 벤자민 바버가 미국의 어린이들에 대해 '우리 어린이들의 진정한 교사는 학교 교사나 대학 교수가 아니라 영화 제작자, 광고주, 연예인들인 대중문화 종사자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듀크 대학, 스탠포드 대학, MIT보다 디즈니, 스필버그, MTV가 더 영향력이 있다'라고 말할 때, 결코 그것이 남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학교에는 아이들만 없는 것이 아니다. 교사도 없다. 그들의 마음 역시 학교를 떠났거나 떠나려고 하는 것 같다. 교육에 대한 희망의 목소리보다는 절망과 좌절, 자조의 목소리가 훨씬 많은 것이 오늘날 학교의 현실이다. 이러한 고민의 와중에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의 글쓴이들은 이 책이 멀어진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작은 다리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십대들, 스스로의 삶을 적극적으로 꾸려 가는 청소년들이 많아지고, 그들과 일상을 함께 하는 어른들이 다시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이 출간 된지 벌써 5년째에 접어들고 있지만 아직도 희망의 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한 구절처럼 '세상에 절망만큼 사악한 것은 없다.' 다시 한번 희망을 갖고 이 책을 펴보자. 박혜란의 글 <세상에 그 정성으로 공부나 하라지?>는 흔히 '극성스런 오빠부대'로 불리는 여학생들에 대한 기록이다. 한 인기가수의 어머니로서 아이들의 팬레터에 적힌 수많은 사연들을 자연스레 접하게 되면서 아이들이 바라보는 가정, 학교, 사회는 어떠한 모습이며 그들의 꿈과 희망은 무엇인지를 애정 어린 시선 속에 담아내고 있다. 이경애의 글 <새로 쓰는 교무일지>를 읽다 보면 우리의 아이들이 얼마나 황폐한 공간 속에 노출되어 있는지 아연실색하게 된다. 학생들의 문제상황에 속수무책인 교사들. 글쓴이는 나름대로 처방전을 내 놓지만 그것이 과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 미지수이다. 오늘날의 청소년문제는 결코 학교에서 해결할 수가 없다. 그것은 학교가 무능해서라기보다는 가정의 불화, 사회의 구조적 모순, 세대간 의사소통의 단절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제발 부탁드려요>와 <더 이상 때리지 말라!>는 학교에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체벌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어째서 우리 나라에서는 '교권'과 '학생의 인권'이 서로를 배척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그러나 해결의 단서는 있다. '교권'의 회복은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위로부터 획득되어야 하며 '학생의 인권'은 '청소년의 인권' 또는 '자녀의 인권'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이 책에는 많은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모두 나름대로 재미있고 유익한 글들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느낄 수 있었지만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민주적인 의사소통이 거부된다는 것이다. 약자의 정정당당한 문제제기는 '하극상'으로, 조직의 위계질서를 해치는 것으로, '사회주의적 발상'으로 왜곡되고 폄하된다. 순응과 적응만이 이 사회가 찬양하는 가장 큰 미덕이다. 대다수의 언론 역시 억압받는 자들을 대변하고 힘있는 자들의 횡포를 감시하는 '사회의 공기'로서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권력계층의 주장을 전달하기에 바쁘다. 아니, 언론 자체가 권력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그러한 비민주적 의사소통과정이나 약육강식의 논리가 학교에서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교사, 새로운 학교가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학교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훈련장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공공성'의 철학이 논의되고 가르쳐지며 새로운 '청년문화'가 꽃피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곳이 교사가 서있어야 할 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