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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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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남아프리카 출신 존 쿳시의 장편소설이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인종과 성, 휴머니즘과 폭력등의 문제가 빼어나게 형상화되어 있는 소설이라고 역자는 평가하고 있다.   이 소설은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불분명한 제국과 야만인의 문화가 교차하는 익명의 변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인종차별이 일상화되어 있던 남아공 이외의 곳에도 적용되는 일반적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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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남아프리카 출신 존 쿳시의 장편소설이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인종과 성, 휴머니즘과 폭력등의 문제가 빼어나게 형상화되어 있는 소설이라고 역자는 평가하고 있다.

 

이 소설은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불분명한 제국과 야만인의 문화가 교차하는 익명의 변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인종차별이 일상화되어 있던 남아공 이외의 곳에도 적용되는 일반적 상황을 암시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문명국가 변방의 치안판사였던 주인공인 '나'는 평안하게 무기력한 일상생활을 보낸다. 물론 제국의 수도에서 파견된 경찰 정보부와 군대가 제국의 적으로 야만인을 설정하고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야만인들은 제국주의자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느날 '야만인'으로 잡혀와 고문당하여 시력과 순결을 빼앗긴 처녀에게 동정을 품는다. 순수한 마음으로 그 처녀를 가족품에 돌려주기 위해 사막을 건넌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변방 야만인 부족과의 내통으로 낙인찍히고 자신도 '문명인'에게 '야만스러운'고문을 당한다. 그리고 제국의 군대는 야만인들 토벌에 나서지만 대패해 버리고 순식간에 변방의 도시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다.

 

제국주의자와 원주민, 가해자와 피해자,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주의자, 흑과 백, 선과 악처럼 이분법적인 상황설정이 두드러지는 소설이다. 허구의 존재인 야만인을 기다리는 제국의 부조리를 의식하면서 끊임없는 의문, 회의를 통해 깨어 있으려는 주인공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주인공인 '나'의 행동과 선택을 보면 부조리한 현실에 정면으로 대결하지 못하고 적당히 타협해 버리는 그런 내면의 부조리도 동시에 볼 수 있는 것 같다.

 

가끔 노벨 문학상을 타는 작품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읽기에 조금 어렵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의 감정을 바로 적셔주는 이해하기 쉽고 강하게 다가오는 작품들도 수상의 영광을 가진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c******4 2010.05.22. 신고 공감 5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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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사유가 빚어낸 또 하나의 부조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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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은 징글맞게 감각적이다.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언어다. 보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는 언어다. 내뱉는 것이 아니라 혀에서 또르르 굴려 튕겨내는 언어다. 살갗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감각하는 언어다. 말 자체가 의미를 생성하고 소통을 내포하고 있는 언어다. 새초롬히 앉았다,는 말에서 위풍당당함을 연상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새초롬이란 말 자체가 얌전한 듯, 부끄러운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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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은 징글맞게 감각적이다.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언어다. 보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는 언어다. 내뱉는 것이 아니라 혀에서 또르르 굴려 튕겨내는 언어다. 살갗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감각하는 언어다. 말 자체가 의미를 생성하고 소통을 내포하고 있는 언어다. 새초롬히 앉았다,는 말에서 위풍당당함을 연상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새초롬이란 말 자체가 얌전한 듯, 부끄러운 듯한 홍조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개 하나 얼린하지 않는 마을이란 말에서 적요롭고 한적한 마을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이지러진,이란 말에서 풍만함을 연상하는 사람을 찾는 일은 겨드랑이에 깃 돋은 사람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 발표가 날 때마다 화가 씨굴씨굴해진다. ‘사뿐히 즈려밟고’라든지, ‘이지러는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믓이 흐리고 있다’라든지, ‘개진개진 젖은 눈은 주인의 눈과 같이 눈곱을 흘렸다’라든지, ‘아둑시니같이 눈이 어둡던’이라든지, ‘넌즛넌즈시 그 물을 대신 길어도 주었다’라든지, ‘붙배기 키’라든지, ‘돋쳐 오르는 아침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라든지,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이라는 말을 대체 어떤 언어로 바꿔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말은 너무 교교하고 풍만하고 도도해서 이국의 언어를 수용하지 않는다.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 출신 존 쿳시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여러모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닮았다. 우선 두 작품 모두 부조리를 기반으로 한다.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곤은 소통과 인과관계가 부재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살아간다. 그런 그들이 탄생과 죽음, 살아감에 대한 실존적인 물음 앞에서 오지 않는 고도, 절대 이상향을 선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고도’는 그들의 삶을 연명케 하는 원동력이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제국의 수하들은 제국을 존속시키는 수단으로 오지 않는,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는 야만인을 기다리다, 급기야 원정대를 보내 유목민과 어부들을 포획하여 야만인을 조작하고 그들에게 폭력을 가함으로써 변경邊境인들 위에 군림한다. 여기에 이성적인 인간은 치안판사뿐인 듯 보이지만 그 또한 암암리에, 또는 무기력을 빙자하여 제국의 영속화에 기여함으로써 부조리한 일면을 드러낸다. 소통의 부재는 치명적이고 슬프다. 고도를 기다리는 그들 모두는 같은 질문을 몇 번씩 하게 만들면서도 동문서답을 일삼는다. 야만인을 기다리는 대령과 준위에게 치안판사의 말은 은퇴를 앞둔 늙은이의 푸념이거나 야만인을 옹호하고 제국에 반하는 배신의 행각으로 읽힐 뿐이다. 더구나 치안판사가 사랑을 느끼는 유목민의 딸, 고문으로 시력을 잃은 그녀와의 소통의 어긋남은, 그것이 개인의 내밀한 욕망을 좌절케 한다는 점에서 더욱 부조리하다. 치안판사가 그녀의 일그러진 발을 씻기고 몸을 닦아주는 행위는 분명 그녀를 향한 지고한 사랑의 표현이지만, 판사에게 몸을 허하고 싶었던 그녀에게는 내침이자 원망일 수밖에 없다. 때로는 배려가 독이 되기도 한다. 사색의 시간을 지켜주려는 침묵이 외면으로 읽히기도 하고 달뜬 한기를 다독이기 위한 온기가 광포한 열을 몰고 오기도 한다. 지나친 배려는 그래서 종종 어긋나고 서럽다. 소설의 종반에, 치안판사는 역사의 바깥에서 역사의 안쪽으로, 자신의 내면으로 귀를 기울인다. ‘오염된 물이다.’, ‘이곳의 물을 마시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흙 묻은 오른손이 입에 닿지 않도록 해야겠다.’라는 독백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것은, 사람은 왜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물질적 이익에 부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편에, 진실의 편에 서려고 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정의에 대한,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라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스스로를 향한 해답과 연결된다. 정의와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났음에도 정의와 진실을 짓뭉개고 그것에게 실소를 보내는 이들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지만 말이다.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존재의 시원과 현실을 외면한 채 고도를 기다릴 것이다. 야만인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부재했으므로. 야만인의 형상을 구축하여, 가상의 위협으로 공포에 빠진 변경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의지하게 만들었던, 제국의 존속을 위해 부재를 실재로 왜곡했던 제국인들은 사라졌다. 그렇다면 부조리도 사라진 것인가? 이제 그들의 적은 야만인도, 제국인도 아닌 추위와 배고픔이 가져온 죽음의 공포다. 하지만 존 쿳시는 그곳에 무연한 희망을 부여한다. 눈이 나리는 광장에서 눈사람을 만들며 하늑이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절망을 본다면 그것이야말로 지독한 부조리가 아니고 무엇이랴. 잘 다듬어진 이야기와 노는 일은 언제나 기껍지만 우리 문학이 제 대접 받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시악(마음속에서 공연히 생기는 심술)하다.
r********7 2004.07.07.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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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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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역사에 순교자로 기록되기를 원하는 것 같군. 하지만 누가 당신을 역사책에 기록해줄까? 국경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문제들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냐. 조금만 지나면 잊혀질 것이고, 변경은 이후 20년 동안 다시 평화로워질거야. 사람들은 먼 과거의 역사에 관심이 없거든.'  한 선배가 적어놓은 책의 구절이 와닿아 찜해놓았던 책. 찾아 본 다른 서평들도 마음에 들어 쉽게 집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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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역사에 순교자로 기록되기를 원하는 것 같군. 하지만 누가 당신을 역사책에 기록해줄까? 국경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문제들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냐. 조금만 지나면 잊혀질 것이고, 변경은 이후 20년 동안 다시 평화로워질거야. 사람들은 먼 과거의 역사에 관심이 없거든.

한 선배가 적어놓은 책의 구절이 와닿아 찜해놓았던 책. 찾아 본 다른 서평들도 마음에 들어 쉽게 집어들었지만 내게는 결코 쉽지 않았던 책

익명의 변방 지역을 배경으로 평화롭던 그 곳에 야만인들에 관한 얘기가 떠돌기 시작한다. 그 지역의 행정 책임을 맡고 있던 주인공 치안 판사는 한가로운 시골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야만인 색출과 토벌을 목적으로 나타난 중앙정부의 군인들을 상대하기 시작하면서 단조롭고 평화롭던 생활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30여년을 그곳에서 지낸 주인공에게 제국의 중앙정부가 적으로 간주하는 야만인들, 즉 변방의 다른 부족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농사 짓고 고기 잡고 가축을 기르던 평화로운 사람들이었을 뿐, 오히려 제국에 밀려나 자기 땅을 잃고서도 군사적, 정치적 저항도 못한 채 때가 되면 찾아와 원시적인 교역을 요청하는....힘 없는 사람들일 뿐이었는데....어느 새 제국은 그들을 적으로 공포하고 잡아다 고문하고 살인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제국은 아무 힘도 없는 그들을 왜 적(야만인들)으로 만들고 제국의 국민들에게 적개심과 분노를 심어주면서 그들과의 전쟁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해야 했을까? 싸울 힘도 없고 싸울 의사도 없는 그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살인하면서까지 제국이 얻으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주인공인 치안판사는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제국에 반기를 들었던 것은 아니다. 군인들의 색출 작업에 암묵적인 동조를 하였고 일이 진행되도록 도와주기도 하였다. 잡혀온 야만인 포로들이 거짓 증언을 강요 당하고 끔찍한 고문을 당하며 죽어갈 때 그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 버리길 그래서 다시 전처럼 한가로운 변방의 자유가 자신에게 주어지기를 그는 바라고 있었다. 물론 군인들의 그러한 행위에 심증적으로 동의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비교적 자유로운 시절, 20-30대 초반에 이 책을 읽었다면 지루했을 것이다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고 다양한 인간 관계를 맺으면서 내 자신이 구속이나 억압적인 상황에 대해 매우 저항적이라는 사실 (그렇다고 대들며 싸우거나 논리적으로 비판하지도 못하면서)을 깨닫기 시작했는데...어느 순간....내가 피해자일 뿐만 아니라 자의는 아니더라도 가해자, 아니 최소한의 공모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그래서 흑도 백도 아닌 회색지대에 엉거주춤 서 있는 내 모습...그래서 때로는 내가 속한 그룹의 악랄함, 추함, 비겁함 등을 폭로하고 싶으면서도...때로는 자의 반 타의반 그 inner circle의 공모자가 되어...그런데, 그러한 현상은 나 개인의 경험 (현실?) 이기도 하지만 더 크게는 우리 공동체, 사회, 국가, 근래에는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그게 실제하든 아님 정말로 허상이든)를 야만인으로 만들고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분노와 적개심을 심어주고 싸움을 하게 만들고...대부분의 연약한 사람들은 거기에 놀아나고 결국 남는 건 죽은 영혼들과 땅....야만인들도 죽고 제국의 국민들도 죽고 살아남는 건 오직 제국과 그 주동자들 뿐인....이전에는 땅과 권력을 놓고서 제국에게 야만인들의 존재가 필요했다면, 오늘날은 돈을 놓고서 가진 자들에게 일도 안하고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못나서 못사는 가난한 야만인들이 필요하고, 교회나 나라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교회나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종북의 야만인들이 필요한 건 아닌지.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야만인은 끊임 없이 만들어진다, 그 형태를 바꿔가면서.  

주인공은 고문으로 아버지를 잃고 본인도 고문으로 몸이 다치고 눈이 멀게 된 남겨진 여자 야만인 포로를 만나기 시작하면서 생각의 확신을 행동으로 점점 옮기게 된다. 결국에는 주인공 자신이 감옥에 갇히고 제국의 군인들에게 고문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면서 모든 명예를 잃게 되는데....

존 쿳시라는 작가를 처음 알았지만 좋았던 것은....사람에 대해, 인간에 대해...매우 깊이 생각하는 작가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해, 현실에 대해 실망과 절망이 쌓일수록 내게 남는 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 뿐이었는데(2012년 한국의 상황을 생각해보라.) 그 가려운데를 긁어주는 작가 같았다. 주인공이 자신에게 해가 될 줄을 알면서도 야만인 여자 포로를 가족에게 데려다 주는 위험한 여행을 감행했던 건 타부족에 대한 사랑이나 연민이었다기 보다는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자기의 도리였을 뿐이기 때문이었고, 졸대령이나 중앙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면서도 야만인들의 무식함, 더러움 등등에 대해 역시 싫은 내색을 하는 것도 솔직한 접근이었다. 주인공이 하는 생각과 행동은 인간으로서,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가질 수 밖에 없는 저항감.....야만인들이라는 허상을 세워 제국의 권력을 지키려 하는 절대 세력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지 어떤 의협심이나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은 왜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물질적 이익에 부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편에 서려고 하는가?" "나는 왜 진실이 내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데 내 자신에 대한 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이에 대해 저자(존 쿳시) "우리가 정의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 "우리가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라고 각각 대답한다고 한다. 정의와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결국 이 책이 주고자 하는 저자의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 아닐까...우리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희망을 버리지 않아야 하는 이유...

반면 주인공이 자신을 고문했던 만델 준위에게 나중에 묻는 질문,,,사람을 그렇게 짐승처럼 대하고도 바로 밥은 넘어가는지...손은 씻고 밥은 먹는지...하는 부분에 대해 저자도 뭐라고 답은 못하고 그냥 의문만 갖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의문을 품듯이. 치열한 사유의 작가 조차도 도저히 이해 안되는 인간들의 행동이라는 게 있었던 걸까. 잔인함...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무감각...

이 책이 술술 넘겨가며 빨리 읽히는 책이 아니었던 건....한 구절, 한 구절이 치열한 작가의 생각을 깊게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같이 생각하다 보면, 그 의미를 유추하다 보면 한 페이지 나가기가 쉽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이 시대의 아픔, 모순에 대해 문제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회색지대에 머물고 있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위로와 도전을 동시에 주는 책이 될 것이다.    

 

t*****d 2013.02.16.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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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 같은 문명에 맞선 한 문명인의 소중한 야만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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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 이 : 존 쿳시옮긴 이 : 왕은철펴낸 이 : 들녘총 쪽수 : 278 한 줄로 제목을 만든다면 : 야만 같은 문명에 맞선 한 문명인의 소중한 야만 찾기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원제는 "Waiting for the Babarians" 이다. 즉, "바바리안을 기다리며"이다. 바바리안은 야만인, 미개인, 속물인, 교양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스스로를 교양인이라 생각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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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 이 : 존 쿳시

옮긴 이 : 왕은철

펴낸 이 : 들녘

총 쪽수 : 278

 

한 줄로 제목을 만든다면 : 

야만 같은 문명에 맞선 문명인의 소중한 야만 찾기

 


 

"야만인을 기다리며" 원제는 "Waiting for the Babarians" 이다. , "바바리안을 기다리며"이다. 바바리안은 야만인, 미개인, 속물인, 교양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스스로를 교양인이라 생각했고, 그들의 기준으로 이방인들이 내뱉는 소리는 바바(ba-ba)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바바리안'이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바바리안' 속에는 그들이 바바- 소리밖에 말하지 못한다는, 그러니까 자신들처럼 논리 정연한 사고를 갖추지 못한, 미개한 종족이라는 멸시적인 시선을 내포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우리나라 역시 서양 사람들을 오랑캐라고 불렀고, 중국 역시 서양 사람들을 무지하고 동물적인 오랑캐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예의가 바르고 위아래  질서가 있지만, 저들은 도무지 예절이 없고 예법도 없는 미개한 사람들에 불과했다. 단지 그들은 총과 칼로 정복하는 동물과 같은 종족이었다.

 

쿳시의 2003 노벨문학 수상작품인 "야만인을 기다리며" 이런 이분법적 사고에 충만해 있는 문명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대적 배경과 지리적 배경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있는, 정확하게 어떤 실체적 사건을 중심으로 두고 있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홀가분하게 문명인이 가지는 야만인에 대한 인식의 야만성을 제대로 폭로할 있게 작품이다.


 

말을 타고 이동하며 다니는 야만인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을 개척하고 정복한 문명인들이 곳에 성을 세우고 야만인들을 적으로 간주하며 생활하고 있다. 주인공은 이곳의 치안판사로 문명국가에서 파견한 성의 실질적인 대표이다. 그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재판을 담당한다.

 

그는 문명국가의 덕을 입고 있고 사실상 왕처럼 군림하였지만, 어느 정부에서 파견된 군대가 야만인들을 포로로 잡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주인공은 야만인들과 경계를 마주하고 오랜 기간 생활하면서 그들이 그저 물고기를 잡아 먹고 생활하는 어부들이거나, 말을 타고 유목 생활을 하기에 특별한 거처가 없을 뿐이지, 악의를 가지고 전쟁을 하는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사고는 국가를 배반하는 것이며, 국가의 가치관과 주적개념을 송두리째 바꾸는 개념이다. 군대는 문명인을 자초하고 야만인을 적으로 간주하여 잡아들이지만, 정작 포로들에게 하는 야만적인 고문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군대가 떠나고 주인공은 군대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자신의 순결과 시력까지 잃게 야만인 여자를 거두어들여 자신의 곁에서 생활하게 한다. 그녀와 함께 있지만 그녀를 사랑할 없었던 그는 야만인 부족에게 다시 돌려주기로 결심을 하고 시간 이동한 끝에 그녀를 이동 중인 야만인들에게 넘겨주고 되돌아온다. 그는 적과 내통한 스파이 혐의로 감옥에 갇혀 힘겨운 고문을 받는다.

 

책을 읽으면서, 동양으로부터 종이 위대한 유산을 훔쳐간 서구인들이 자신의 문화를 문명으로 포장하고 모든 문화를 미개하고 야만적인 것으로 멸시하고 조롱한 세계 근현대사가 떠올랐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야만이이었고, 우리들에게는 그들이 야만인이었지만, 그들의 야만은 동적인 총칼과 대포를 앞세워 먹과 붓으로 막아선 정적인 문명을 미개하다고 짓밟았다.

 

소설은 글로써 야만과 문명을 대비시키거나 논리적으로 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다. 소설은 이야기로만 사실을 전달하고 주인공의 마음을 의심케 한다. 건조한 고비사막처럼 소설은 읽는 내내 마른 먼지가 폴폴 날린다. 심지어 주인공과 야만인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조차 시간은 먼지 속에 갇힌 것만 같다.

 


노벨문학상 작가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자극적인 설정과 예상 가능한 직선 전개로 노벨문학상 작가라는 기대에 다소 미치지 못했다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 사라마구보다는 노벨문학상 작가임을 조금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역시 노벨문학상이라는 묵직함에 비하면 전체적인 인문학적 깊이와 소설적 재미는 다소 떨어진다고 본다. 그러나 소설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고뇌하게 하고, 문명인이라고 자처하는 자신에 대한 문명의 개념과 정의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자기 반성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훌륭한 소설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의 소설이 주는 다른 효과는 권력과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이다. 최근 우리는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 마약인지 새삼 깨닫는 중이다. 권력이라는 약에 한번 취하면 초심은 몽땅 잊어버리고 오직 권력만을 쫓아다니는 중독자가 되어 스스로 팔목을 열어 주사기를 꽃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그는 최고 권력자에서 죄인으로, 그리고 다시 권력자로 바뀌는 지위의 순환을 통해 권력의 실체를 투사한다.

 

그의 소설이 주는 다른 재미가 있다면 늙은 치안판사인 주인공과 젊은 야만인이 나누는 사랑이다. 사랑은 머물러 있지 않고 진종일 찰랑거리지만, 소통이라는 창을 통하지 않으면 썩고 만다. 그는 소통하며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에게는 불소통의 시간들이었다.

 

쿳시는 부커상을 2 수상한 역량있는 작가이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며 그의 작품들은 그런 상을 받을 만하다. 이제 그의 소설을 조금 들여다 봄으로써 그의 내면을 공유하고 싶은 욕심이 동한다.


 

~~~~~~~~~~

 

내가 지난 20 동안 치안판사로서 싸워야 했던 문제는 가장 저질적인 마부들이나 농사꾼들이 야만인들을 모욕하고 경멸한다는 것이었소. 특히, 경멸이라는 것이 식사 예절이 다르고 눈꺼풀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말고는 구체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라면, 당신은 그것의 뿌리를 어떻게 뽑을 있겠소? 내가 때때로 원하는 뭔지 아시오? 나는 야만인들이 들고일어나서 우리에게 교훈을 가르쳐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해줬으면 좋겠소. (88)

 

나는 하루종일 벽을 응시한다. 그걸 골똘히 응시하면 거기에 스며 있는 고통과 타락의 흔적이 나타날지 몰라서다. 그러다가 눈을 감고, 아주 희미한 음을 들을 있을 정도로 청각을 집중시킨다. 여기에서 고통을 당했던 모든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벽에서 벽으로 울리는 소리를 잡아내기 위해서다. …

 

이틀간 독방에 갇혀 있다 보면, 입술에 맥이 빠지고, 말소리도 이상하게 들린다. 정말로, 인간은 혼자 살도록 만들어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말도 되는 얘기지만, 나는 식사시간을 중심으로 하루를 보낸다. 나는 개처럼 게걸스럽게 먹는다. 짐승처럼 살다 보니, 진짜 짐승이 돼가고 있다. (137)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아이가 두들겨 맞는데도 아이를 보호해줄 없다는 아는 여느 아버지의 모습과 다를 없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의무를 다할 없기 때문에 자신이 결코 용서받지 못하리라는 안다. 자신이 그런 아버지여야 하다니. 더구나 그것 때문에 비난까지 받아야 하다니. 그건 참을 없는 것이다. 그가 죽고 싶어했던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138)

 

일상적인 삶의 고독에서 감옥의 고독으로 옮겨가는 것은 고통은 아닌 같았다. (145)

 

그러나 나는 지금, 자유라는 얼마나 원시적인 것인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145)

 

꿈속의 유령 외에는 아무도 얘기할 사람이 없이, 바퀴벌레들 사이에서 달을 보내고 나니, 나는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다. 다른 사람의 몸을 만지고, 다른 사람한테 몸이 만져지고 싶은 욕망이 너무 커져서 때로는 신음소리를 내야 정도다. (162)

 

그들은 끔찍한 일을 계속 수행할 것이다.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해야만 최종적인 진실을 말하게 된다는 그들의 신조다. (163)

 

나는 죄수들을 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자신이라도 구하는 길을 택하자. 언젠가 누군가가  이것에 대해서 얘기하게 된다면, 그리고 훗날 누군가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면, 제국의 변방 오지에도, 마음속에서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적어도 사람은 있었다는 얘기를 있도록 해야겠다. (177)

 

공기에는 한숨소리와 비명소리가 가득하다오. 그건 있는 법이오. (191)

 

당신은 역사에 순교자로 기억되기를 원하는 같군. 하지만 누가 당신을 역사책에 기록해줄까? 국경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문제들은 그렇게 중요한 아냐. 조금만 지나면 잊혀질 것이고, 변경은 이후 20 동안 다시 평화로워질 거야. 사람들은 과거의 역사에 관심이 없거든. (194)

 

고난에는 나를 기품 있게 만드는 아무것도 없다. 내가 고난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통도 아니다. 내가 겪어야 하는 것은 육체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에 종속되는 것이다마시고, 대소변을 보고, 가장 아픈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196)

 

나를 고문한 사람들은 고통의 정도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오직 하나의 육체 속에는 하나의 육체로만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내게 보여주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온전하고 정상적인 상태에 있을 때만 정의에 대한 생각을 즐기다가, 머리가 붙잡히고 파이프가 목구멍 속으로 쑤셔넣어지고, 속으로 소금물이 부어져 기침을 하고 구역질을 하고 도리깨질을 하는 상황이 되면, 언제 그랬냐 싶게 정의에 관한 생각들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육체 말이다. (198)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물속의 고기들이나 허공의 새들이나 아이들과 같은 시간 개념 속에서 사는 불가능하게 만드는가? 그건 제국의 잘못이다. (228)

 

그러나 나는 우물쭈물하면서 이름 없는 지역을 관망만 하고 있었다. 참자, 사람은 떠날 것이다. 조만간 다시 조용해질 것이다. .. 나는 이렇게 스스로를 유혹하면서 방향을 잘못 잡고 말았던 것이다. (233)


YES마니아 : 플래티넘 i*******n 2017.01.13.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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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이란 바로 우리들 자신일지도...
"야만인이란 바로 우리들 자신일지도..." 내용보기
"Waiting for the Barbarian" 영문학 수업을 들으면서 왕철(왕은철에 생소하다)교수님께 배웠었다. 원서를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변역서를 읽으면서 원서를 읽었을 때의 애뜻한 기억이 감돌았다. 원서에서 제목만큼이나 충격이었는데 여인(원주민)의 눈이 뜨겁게 달군 포크를 바로 보아 거의 장님처럼 되었을 때, 치안판사(나)를 나무에 매달아 팔을 늘어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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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ing for the Barbarian" 영문학 수업을 들으면서 왕철(왕은철에 생소하다)교수님께 배웠었다. 원서를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변역서를 읽으면서 원서를 읽었을 때의 애뜻한 기억이 감돌았다. 원서에서 제목만큼이나 충격이었는데 여인(원주민)의 눈이 뜨겁게 달군 포크를 바로 보아 거의 장님처럼 되었을 때, 치안판사(나)를 나무에 매달아 팔을 늘어뜨리는 장면, 죨장군의 고문하는 장면, 그리고 야만인을 철사로 잇어서 광장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장면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나를 존 쿳시의 소설속으로 강하게 끌어들었다. 또한 치안판의 혼자하는 독백이나 내러티브가 내 마음 속에도 그대로 돼 묻고 있다 '과연 우리는 누구를 두고 야만인이라 일컬을 수 있을까?' '제국은 과연 역사속에서 무엇을 남겨두는걸까?' 오늘날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가관도 아니다 그런 현실을 방영이라도 하듯이 '웨이팅 포 더 바바리안'은 우리 사회에서 존재하는 그런 일상들일 것이다. 소설을 무거운 마음으로 덮고 리뷰를 쓴다........

[인상깊은구절]
대령이 앞으로 나온다. 그는 번갈아가며 포로들 위에 몸을 굽히고 그들의 벌거벗은 등에 한 줌의 먼지를 문지르고, 그 위에 숯으로 무슨말인가를 쓴다. 나는 그 단어들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읽는다. 적, 적, 적, 적(enemy).
9***7 2004.02.1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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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다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내용보기
우리는 우리의 현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와 이상을 포용하는, 어렵지만 바른 길을 가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진실된 감정을 기저에 두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을 던져 직접 실행해야 하는 수고를 필요로 한다는 당연한 명제로 연결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야만적인 것을 그것 자체로 인정하라는 발상의 전환을 조건으로 내걸고 있
"다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내용보기

우리는 우리의 현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와 이상을 포용하는, 어렵지만 바른 길을 가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진실된 감정을 기저에 두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을 던져 직접 실행해야 하는 수고를 필요로 한다는 당연한 명제로 연결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야만적인 것을 그것 자체로 인정하라는 발상의 전환을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유산의 현존재는 그것을 창조한 위대한 천재들의 노고뿐만 아니라, 이름도 없는 동시대의 부역자들의 노고에도 힘입고 있기 때문이다. 

야만의 기록이 없는 문화란 있을 수 없다. 문명화된 것과 비문명화된 것의 '변경'은 양 세계의 대척점이 아니라 상호 새로운 발전을 가능케 하는 열쇠가 숨겨진 신'엘도라도'라는 것, 이것이 작가 쿳시가 주고자 하는 절절한 외침이 아닐까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야만인'을 기다리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타자로서의 '야만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야만인'이 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w******1 2006.05.07.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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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또 다른 야만인을 필요로 하는가?
"당신은 또 다른 야만인을 필요로 하는가?" 내용보기
2003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해마다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 작가 다수의 문학상 수상경력. 부커상 2회 연속 수상. 남아프리카 출생. 네덜런드인. 존 쿳시... '존 쿳시'라는 이름에 붙는 수식어는 참 많습니다. 2003년도 노벨 문학상을 탓기 때문에 그렇다기 보다도 그 동안 계속해서 많은 문학상을 휩쓸었으며 해 마다 빠짐없이 그 해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후보에 올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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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해마다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 작가 다수의 문학상 수상경력. 부커상 2회 연속 수상. 남아프리카 출생. 네덜런드인. 존 쿳시... '존 쿳시'라는 이름에 붙는 수식어는 참 많습니다. 2003년도 노벨 문학상을 탓기 때문에 그렇다기 보다도 그 동안 계속해서 많은 문학상을 휩쓸었으며 해 마다 빠짐없이 그 해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후보에 올랐기 때문에 그의 글씨기 솜씨와 철학, 사상 등은 이미 객관적으로 훌륭한 검증을 거쳤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야만인을 기다리며'. 이 소설은 단순히 보면 한 제국이 원주민들이 거주하는 땅을 침범해서 그들을 몰아내고 그 곳을 식민지로 만든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제국의 이름은 거론 되지 않았으며, 식민지와 원주민들도 그들이 누구이며 그 땅이 어디인지 명시되어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바로 남아프리카의 과거와 현실임을 짐작하는 것이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존 쿳시는 이 작품에서 제국의 이름과 그 땅과 원주민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을까요? 그건 바로 이러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기때문일 것입니다. 미국와 영국은 이라크라는 땅에 침입해서 야만적으로 보이는 이라크인들을 내 쫒았으며 명목적으로는 해방과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를 준다고 하였지만 야만인들은 결국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끝났고 미국은 그 땅을 거의 통치하고 있다시피 하지만 그들에게는 해방이 없고 자유는 멀고 민주주의라는 것은 이해 할 수 조차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늘 생활하는 사회에서도 그런 일들은 일어납니다. 커다란 회사는 작은 중소기업을 침입하고 그들을 구속하려 합니다. 힘이 센 고등학교 일진은 그 밑에 있는 아이들을 괴롭히고, 돈을 뜯고, 폭력을 행사합니다. 그들은 제국이고 중소기업고 약한 아이들은 야만인입니다. 제국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야만인이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 야만인이 되어야만 튼튼한 제국이 있는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는 실제로 원주민들이 야만인으로 취급 받으면서 제국의 침략을 받고 고통을 받게됩니다. 그러나, 야만인은 없습니다. 다만 제국이 그들을 찾으러 다니는 것 뿐입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그 사실을 가장 극한 상황 속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상처 받은 원주민 여자에게 연민을 느끼면서,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을때 음식을 가져다주면 아이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그는 비로소 야만인이라는 것은 제국의 상상속에 존재하는, 그리고 제국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는 야만인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어이없는 쳇바퀴 세계관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는 회개합니다. 극적으로 회개합니다. 제국의 지배자들에게 맞고, 찢기고, 고문을 당하지만 그는 결국 복종하지 않습니다. 신념은 때린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진실은 고문을 당한다고 해서 거짓이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결국은 승리자가 됩니다. 소설을 통해서 존 쿳시는 '당신은 또 다른 야만인을 찾고 있는가?' 라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던집니다. '미국이여, 당신네 나라는 이라크 말고 또다른 지배해야 할 야만인들이 필요한가?' 혹은, '당신은 회사에서 또 누군가와 경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도태시키며 밟고 일어서야 하는가? 그게 또 누군가?', '당신은 반에서 1등을 하기 위해서 2등부터 30등까지를 스스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만약 한반에 1명 뿐인 학교라면 자신이 1등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테니까 말이다.
w***e 2003.11.13.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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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Waiting for the Barbari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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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Waiting for the Barbarians) J. M. 쿳시 저 | 들녘 원제 Waiting for the Barbarians | 2003년 09월   오늘의 술약속은 상대방의 갑작스런 출장으로 인해서 다음 주로 미뤄지고 말았다. 오랜만에 술자리에서 벗어나 오후 6시에 퇴근을 하고, 운동을 잠깐한 후에 어제부터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책장을 전철 안에서 다시 열었다. 저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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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Waiting for the Barbarians)

J. M. 쿳시 저 | 들녘

원제 Waiting for the Barbarians | 2003년 09월

 

오늘의 술약속은 상대방의 갑작스런 출장으로 인해서 다음 주로 미뤄지고 말았다. 오랜만에 술자리에서 벗어나 오후 6시에 퇴근을 하고, 운동을 잠깐한 후에 어제부터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책장을 전철 안에서 다시 열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계속 읽어내려간 책의 마지막을 덮고서 나는 이 책을 조심스럽게 다시 한번 매만지게 되었다. 정말 오랫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소설은 제국의 변방도시의 치안판사인 '나'의 독백으로 시종일관 서술된다. 소설의 내용은 비교적 단순한데 간단하게 요약을 하자면, '나'는 수도에서 파견된 경찰 정부부와 군대가 제국의 적으로 야만인을 포로로 잡고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반대한다. 30년 가까이 변방의 치안판사로 지내온 '나'는 야만인들이 제국을 위협한다는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다. '나'는 포로로 잡혀온 야만인 여자를 그들의 부족에게 데려다 주기위해서 사막을 건넜다. 그렇지만 그것은 수도에서 온 이방인인 경찰 정보부와 군대에게는 제국에 대한 반역으로 낙인찍히고 결국 '나'는 제국의 적으로 낙인찍혀 엄청난 고문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제국의 군대는 야만인들을 토벌에 실패하고 대패해버리고, 순식간에 변방의 도시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다.

 

사실 이 소설은 너무나 많은 의미와 상징들을 자연스럽게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면에서 해석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일단은 식민제국주의와 인종주의의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것들이 가지는 야만성, 즉 식민제국주의와 인종주의가 보다 발달된 서구물질문명의 기초 하에서 이루어졌고, 우리는 그들의 논리에 지배되어 세상을 보고 그것이 옳다고 느끼지만 실은 그 문명이 가지는 야만성은 우리가 반대로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덜 발달된 문명보다도 더 잔인하고 폭력적이라는 아이러니. 또한, 권력에 대한 조롱과 비판,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타자를 만들어야 되는 국가 정책 (반공과 반일로 체제를 유지했던 한국도 예외일 순 없겠지만 어쨌든), 인간성에 대한 물음 등 너무나 많은 의미들을 지니고 있어 어느 한 면으로만 이 책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 너무나 무의미할 정도이다.

 

책을 찾는 누군가에게 꼭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s****t 2009.01.1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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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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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한 말들로 버거웠다 웃기는 만화책이라도 볼 것을..그래도 굳건히 책장의 반을 넘기고 있을때 나도 모를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 흘리고 있었는지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알 수가 없다 내겐 너무 어려웠던 책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나보다 말로 표현 못할 가슴 시림만으로도 좋다 그것으로도 족하다!..누군가 절망속에서의 막연한 기대와 함께 그를 느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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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한 말들로 버거웠다 웃기는 만화책이라도 볼 것을..그래도 굳건히 책장의 반을 넘기고 있을때 나도 모를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 흘리고 있었는지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알 수가 없다 내겐 너무 어려웠던 책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나보다 말로 표현 못할 가슴 시림만으로도 좋다 그것으로도 족하다!..누군가 절망속에서의 막연한 기대와 함께 그를 느껴 보길 바란다
y*****7 2008.10.2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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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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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소설을 읽고 싶었다. 오랜만에 픽션다운 픽션에 퐁당 빠져보고 싶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이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결과는 기대 이상이였다 -사실 그래서 다짜고짜 별 5개를 주고 이번 리뷰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제국은 끊임없이 희생양을 찾는다. 그것이 바로 제국 자신의 존속요건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희생양의 또다른 이름은 곧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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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소설을 읽고 싶었다. 오랜만에 픽션다운 픽션에 퐁당 빠져보고 싶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이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결과는 기대 이상이였다 -사실 그래서 다짜고짜 별 5개를 주고 이번 리뷰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제국은 끊임없이 희생양을 찾는다. 그것이 바로 제국 자신의 존속요건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희생양의 또다른 이름은 곧 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적으로서 야만인들을 경계한다. 그러나 그들이 야만인에게 저지른 잔혹행위는 그들 자신의 야만성을 폭로하는 결과를 낳는다 -문명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 그것은 인간의 역사를 두고 수없이 거듭되어 왔다. 우리는 과거의 폭력은 지탄하면서, 오늘 여전히 지구 반대편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폭력은 방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습게도 제국주의자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야만인들을 두려워한다. '우리' 와 다르기 때문에 야만인들은 두려운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다르다' 는 것은 또 무엇인가. 누가 타인을 야만인이라 이를 수 있는가. 누구나의 마음속에 잔혹성이, 야만성이 깃들어 있음에도 말이다. 그들은 무지한 대중을 선동하고 진실에 눈을 가리운 대중들은 덩달아 잔인해진다.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치안판사는 이 순간 혼자 깨어있어 진실을 마주하려 노력한다. 그는 제국의 마지막 휴머니스트이자 자신의 책무를 다하려는 지식인이다. 그러나 숭고한 신념에 의지하여 꿋꿋히 버티어 나가는 고귀한 영웅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책속의 치안판사는 그저 살고자 몸부림치는 한 인간일 뿐이다. 그도 자신의 목숨앞에서 비굴해지며 자신의 기본적 욕망을 채우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또 스스로 인정하듯 그 역시도 제국의 미친 상상에 전염된, 제국의 일원이다. 그는 야만인 포로들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폭력을 참다 못해 나서지만, 그 역시 자신의 '정의'에 회의를 느낀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두들겨 패는 것이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정의라는 말을 한 번 입 밖에 내면 그 끝이 어디일 것인가? p.184 창조의 기적, 어쩌고 하면서 뭔가 말하려고 했을 테지만, 그것은 한 줌의 연기처럼 손에 잡혀지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딱정벌레와 지렁이, 바퀴벌레와 개미 같은 벌레들도 그들 나름의 다양한 방식으로 창조의 신비일 텐데, 우리는 그들을 발로 짓이기며 사는 것 같다. p.183 결국 제국주의자들은 제 풀에 꺾여 돌아가고 버려지듯 남겨진 변방의 백성들은 겨울을 맞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치안판사는 야만인이 아닌 겨울의 추위와 배고픔이 그들이 정말 두려워해야 할 대상임을 확신한다. 야만인은 어차피 처음부터 부재하는 적들, 제국의 프로파간다를 위한 도구가 아니였던가. 300쪽도 안되는 분량이지만 참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해주는 책이다. 내가 읽으면서도 놓쳤던 부분이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상징적인 부분도 있을 테고, 이 리뷰를 작성하면서 생략한 부분도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직접 읽어보고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해볼 수 있었으면 한다.

[인상깊은구절]
나는 죄수들을 구할 수가 없다. 따라서 내 자신이라도 구하는 길을 택하자. 언젠가 누군가가 이것에 대해서 얘기하게 된다면, 그리고 먼 훗날 누군가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면, 제국의 변방 오지에도, 마음속에서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는 얘기를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m***t 2005.09.1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