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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일들을 겪는다. 그 중에서도 가족과의 이별은 많은 상실감과 함께 견디기 힘든 상처를
남긴다. 더군다나 그 상처를 오롯이 여성 혼자서 감내해야 한다면 어떠할까? 아마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지낼 것이고, 그 후의 삶도 고단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여성들이 경제적 독립을 한 현대의 경우에도 그러할진대, 만약 전통시대였다면 어떠했을까? 더군다나 가문을 보존하고 지켜내야
하는 종부의 입장이라면? 아마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는 전통시대, 그 삶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명문가의
규수로 태어나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자신보다 스물여섯이나 많은 사대부와 혼인한 여인이 있다. 두 번이나
부인을 잃고 슬하에 세 딸을 둔 홀아비와 혼인한 그녀는 혼인하자마자 3품 숙부인에서 종 내에는 1품 정경부인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종부로서 대를 이어야
하는 그녀는 첫째 딸과 둘째 딸을 낳자마자 질병으로 잃었다. 지아비는 환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배지를
떠돌았다. 처음 유배를 당했을 때 노심초사하는 시어머니를 보다 못해 유배지로 모시고 갔고, 그곳에서 기대하던 아들을 얻었으나 역시 질병으로 잃고 만다. 지아비가
유배지를 옮기고 난 후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혼자서 초상을 치른다. 남편이 유배에서 풀려 조정에 나아감에
따라 기쁨도 맛보았으나 그것도 잠시, 남편은 또 다시 유배길에 오른다.
가문을 잇기 위해 양자를 들이고 양자와 함께 남편의 유배지로 따라간다. 양자의 나이 열다섯이
되자 혼자서 양자의 관례를 치렀다. 남편이 별세하자 3년상을
치렀고, 이번에는 며느리가 손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두
번째 며느리를 맞았지만 3년 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또 세상을 뜨고 만다. 세 번째 며느리를 맞이한 것이 그녀 나이 예순 무렵이니 한 여인의 일생이 온통 고통과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여인은 아계 이산해의 증손인 이수빈의 2남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나 조선 숙종 대 남인정권의 핵심인물이었던 유명천과 혼인하여 진주 유씨 가문의 종부가 된 한산 이씨였다. 유명천이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이라 불리는 세 차례의 정치적
환국 속에서 신분의 상승과 추락을 극명하게 겪은 지라, 한산 이씨 부인 역시 열여덟에 혼인하자마자 3품 숙부인에서 서른셋에는 1품 정경부인에 오르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 차례나 지아비와 함께 유배지를 떠돌았고 끝내 미망인이 되는 아픔을 겪었다. 세 번이나 아이를 잃은 끝에 가문을 잇기 위해 양자를 들였으나 손주 하나 보지 못해 노심초사하기도 했다. 이씨 부인은 자신의 나이 예순 살이 되자 육십 평생을 돌아보며 가슴 속 깊이 묻어둔 슬픔을 붓으로 써 내려갔다. 한글로 자신의 자서전을 쓰고 [고행록]이라 이름 붙였다.
우리는 한산 이씨의 [고행록]으로 인하여 전통시대 사대부가 여인의 고통과 슬픔으로 점철된 일생을 알게 되었다. 당시 여인의 몸으로 자서전을 썼다는 사실도 일반적인 일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꿋꿋하게 이겨내며 고통스러운 삶을 견뎌내었다는 것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또한 이씨 부인은 [고행록]에 자신과 집안의 일은 기록하였지만 지아비 유명천의 정치적 상황은 일절 기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당시 바깥 일은 여인들이 일절 관여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씨 부인이 보여준 종부로써, 사대부가 여인으로써 가문을 지켜내고 자신의 삶을 극복한 강인한 면모는, 당시 그 시대를 살아간 여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의 강인한 여성상이 전통시대 이러한 여인들의 삶으로부터 전해내려 온 유전자 덕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