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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모으는 것일까
인간은 무언가를 모으는 존재다. 스스로를 ‘** 수집가(蒐集家)’라고 하지 않더라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두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사를 할 때마다, 언제 샀는지 혹은 받았는지 기억에도 없는 물건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뭔가를 쌓아두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쌓아두었다고 모두 수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모은 물건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를 통해 나의 수집품이 된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와 어린왕자가 서로 길들이기를 하듯이.
문제는 그가 무엇을 수집하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미술품을 모으면 고상한 취미가 되고, 돈을 ‘수량 기준으로’ 모으면 능력 있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윌리엄 데이비스 킹처럼 통조림 등에 붙어 있는 온갖 종류의 라벨, 시리얼 상자 껍대기, 우편봉투 속지, 신용 사기 편지 등을 수집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주변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것을 모으기 위해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말라는 충고를 듣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수집하는 이들은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저자는 “수집 충동은 극도로 풍요로운 물질 사회에서 우리가 받은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다수가 각자의 개인사에서 받는 상처에서 비롯하기도 한다. [p. 26]”라고 대답한다. 상처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로 수집충동이 작용한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수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저자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뇌성마비를 앓았고 정신박약이었던 누나 신디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부모는 저자에게 너무 엷은 사랑만을 건네주었다.
어쨌든 부모의 사랑이 결핍된 저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나마 소유하고 결합시킴으로써 공허함을 달래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나는 사춘기의 흔한 악몽이 그렇듯,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까 두려워 스스로를 방어하려 애쓰고 있었다. 나는 뭔가 의미 있는 것을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없었으므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내가 원할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늘 아무것도 아닌 것을 소유함으로써, 현실에서는 결코 의미 있는 것을 갖지 못하는 나 자신의 마음을 달래줘야 했던 것 같다. [p. 118]”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저자는 “수집은 소유하는 능력을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행위이고, 타자성을 통제하는 훈련이며,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기념비적 건물로서 사후의 생존을 보장하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흔히 한 컬렉션에서 그 컬렉션의 수집가를 읽어낼 수 있고, 그 다음으로는, 비록 대상물 자체에서 읽어낼 수는 없더라도, 대상물을 획득하고 유지하고 전시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 수집가를 읽어낼 수 있다. 수집은 삶을 써나가는 행위[pp. 90~91]”라고 했다. 이는 이영도가 <드래곤라자>에서 인간은 지식을, 그리고 추억을 대물림하는 존재이기에 불멸자라는 의미의 말을 남겼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즉, 저자의 말은 ‘수집’이라는 행위가 필멸의 존재인 개인[단수]이 죽음을 극복하고 불멸의 존재인 인간[복수]로 존속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1596~1650)의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을 비틀어 “나는 수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에 대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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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은 누구나 수집 본능(여러 가지 물건이나 재료를 찾아 모으고자 하는 선천적인 경향)이 있다. 이 본능을 잘 살리면 재테크의 일환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재테크는커녕 쓰레기처럼 보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수집하기도 한다. 내 경우만 해도, 한때 영화 홍보물을 수집했는데, 박스에 아무렇게나 담고 보니 무게가 상당했다. 이사할 때 남동생이 그 박스를 들었는데, 꽤 힘들어했다. 나중에 박스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부모님에게 누나가 쓰레기를 가져왔다며 난리를 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윌리엄 데이비스 킹이라는 수집광을 보면 남동생은 아마 기절을 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수집한다. 그것도 무척 열정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수집할 가치가 있는 것은 거의 수집하지 않으며, 누구라도 수집하고 싶어 할 만한 것은 단 하나도 수집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돌이켜 보니, 그때까지 내가 필요로 했던 그 모든 불필요한 물건들을 그러모아 파일로 만들고, 상자에 담고, 배열하고, 난리법석을 떨면서 정리정돈하고 보니, 나에게는 분명히 컬렉션이 있었다. 나는 거대한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수집을 시작했고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p. 22
미국 산타바바라의 캘리포니아 대학교 연극무용과 교수인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수집한다. 우표로 시작된 수집은 쇠붙이, 시리얼 상자, 항공우편 봉투, 이웃 사람의 도서 대출 카드, 콜리플라워 비닐백, 명함 인쇄업자들의 명함 등으로 확대된다. 이 책의 부제는 ‘어느 수집광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이다.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끊임없이 수집에 대한 자기 관찰을 토로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폭넓게 공유되는 수집 충동은 극도로 풍요로운 물질 사회에서 우리가 받는 깊은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다수가 각자의 개인사에서 받는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수집이 그런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그 효과는 충분할 정도로 좋다. 수집은 사물에서 질서를, 보존에서 미덕을, 모호함에서 지식을 발견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수집이 가치를 찾아내기도 하고, 심지어 가치를 창조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p. 26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말한다. 우울했던 어머니, 유대감이 별로 없었던 아버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팠던 누나, 그로 인해 함께 상처 받은 동생들.. 그리고 중년의 위기, 결혼의 실패.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계속해서 사랑받기를 원했지만, 그 요구에 지속적으로 답했던 것은 수집물이었다. 이는 내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동생이 ‘쓰레기’라고 표현했던 박스는 지금도 여전히 내 옆에 자리하고 있다. 물론 나는 그 박스를 열어 보는 일이 거의 없다.
나는 옛날부터 수집가였지만, 지금은 내가 다른 수집가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 수집 형태는 시장에서 외쳐대는 대상물들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다른 수집가들과 다르다. 나는 말 없고 빈약하고 실용적 가치가 없는 물건들에 반응한다. 이를테면 안쪽에 돌멩이 박힌 채로 바닷물에 부식된 물통 뚜껑 같은 것 말이다. 비록 도착적이고 모순적일지라도 내 수집이 여전히 수집인 이유는, 수집가들에게 흔히 관찰되는 보상의 패턴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 수집은 잃어버린 사랑을 채워 준다. -p. 99
그렇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은 그 존재만으로 귀하다. 누구나 수집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나는 왜 그것을 수집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생각하다 보면 잠시 잊고 있던 깊은 상처를 발견하거나 잠자고 있던 욕망을 인지하게 될 것이다.
수집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과거로부터의 대상물들이 현재에 수집되어 미래를 위해 보전된다. 수집은 현존을 처리하는 한편, 욕망의 미스터리들을 하나하나 연쇄시킨다. 현재의 수집가가 원하거나 원치 않는 것은 과거에 원했거나 원하지 않았던 것에 의해, 그리고 미래에 원하거나 원치 않을 것에 대한 예감 속에 규정된다. 이런 욕망의 방정식을 연결하는 수학공식은 신비롭고 난해하지만, 모든 수집가들이 이런 계산에 몰두한다. 사용할 만한 물건을 때때로 수집할 만한 물건이 되기도 하지만, 수집할 만한 물건이 사용할 만한 물건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대신 특수한 영역에서 한 대상물이 사용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우는 있다. -p. 66~ 67
작가처럼 솔직히 말하자면, 타인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를 대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지루하기도 하지만, 너무 내밀한 것이 드러나 있는 것 같아 낯부끄럽기도 하다.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자신이 쓴 책에 대해서도 솔직한 견해를 나타낸다.
나는 내 수천 권의 책 중에서 3분의 1은 고통 없이 버릴 수 있고, 3분의 2는 깊은 회한 없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방대한 ‘컬렉션’은 나에게 부풀려진 자아 감각을 선사했고, 나는 그 부풀림의 증심에 공기와도 같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자리 잡고 있음을 인식해야 했다. 바로 그것이 내가 가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 나는 미래에는 그 책들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고, 그 외의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똥을 내보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상궤를 벗어난 유일무이한 책, 다른 모든 것을 대신할 책, 더 짧으면 좋았을 이 책을 갖게 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은 이 책의 페이지들을 한 장 한 장 찢어내시라. 그리하여 나를 깨끗하게 해주시기를. -p. 358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독자들이 한 장 한 장 찢기를 원하는 책을 왜 썼을까? 아마도 그랬기에 썼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수집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을 한 장 한 장 찢는 것도 좋겠지만, 자신만의 관찰기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수집이 그저 본능이라고 하기에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이 책이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수집은 어떤 의미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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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어느 수집광의 흥미로운 에세이를 읽었다. 내내 힐끗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묘한 책이다. 장서가이자 탐독가인 내게 '수집'이란 단어는 묘한 끌림을 준다. 예전 <장서가의 괴로움>을 읽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수집은 곧 나를 말하는, 내 생을 대신 보여주는 하나의 방식이라 생각한다. 저자인 킹도 "내 컬렉션은 중년이 된 나를 그린 그림이다. 수집을 한다는 것은 중년을 서술하는 방식이다"라고 말했다.
'덕후'란 말이 긍정을 함의하기 시작하면서 각양각색의 수집가들이 입에 오르내린다. 도라이몽을 애정하는 연예인부터 프라모델 수집가, 온갖 잡동사니에 집착하는 일반인까지 종류도, 범위도 정말 다양하다. 물론 호더(Hoarders), 버리지 못하는 병인 저장강박증을 앓는 이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수집가의 층위로만 한정하더라도 정말 다양하다.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둥근 쇠붙이부터 우표 수집에 이르기까지 소소한 수집에 몰두한다. 흔히 수집하는 이들의 심리를 애정 결핍으로 인한 투사 대상을 찾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얘기다. 저자 또한 어린 시절 정신지체인 누나와 함께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일정 부분 애정의 결락을 경험했다.
이 책을 읽으며 놀랐던 건, 저자의 글쓰기다. 수집을 통해 길러진 통찰력일까? 어떤 현상이나 사건에 대한 깊이 있는 글쓰기와 날카롭게 벼려진 생각의 정수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유진 오닐에 경도(그의 가족사를 볼 때 '밤으로의 긴 여로'에 깊게 빠진 건 당연해 보인다)된 그는 스스로를 '다다산업 경영자'로 말한다. 유진 오닐을 시발 삼아 예일대에 진학한 그가 대학교의 한 공간을 작업실로 배정받아 이름 지은 것이 바로 '조각 사무국'(the Sculpture Office)이다. 벽에 건 팻말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혔다. "우리는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한다".
저자는 수집가의 도구로 '취향과 감식안 그리고 지식'을 꼽는다. 수집가의 미덕으로 연결하기와 네트워킹을 꼽는다. 그만큼 (남들이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는 그들은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열정적이다.
"내 성인기 최초의 진정한 컬렉션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부터 나는 내가 소비한 모든 식료품의 라벨을 보관하기 시작했다. 시리얼, 수프, 캔디, 맥주 라벨이 시초였다."-P183
이 책에도 그의 다양한 수집품이 소개된다. '그러모으는' 행위에 어느 정도 유연한 나로서도 왜 그리도 '쓰잘데 없는' 것들을 목록화하고, 스크랩하며 '버리지' 못하고 모으는 것일까,란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빛나는 통찰은 나의 이러한 의문을 단숨에 풀어준다.
수집가가 수집하는 대상물은 말하고 답하고 영감을 제공하는 신탁과 같아서 복종, 심지어 경외심까지도 요구한다. -P78
수집가가 경험하는 대상물들은 실제든 상상이든 동떨어진 사적 세계의 마술적 도피를 허락한다.-P79
예술과 마찬가지로 수집은 세계의 낯섦을 받아들이고 배우는 하나의 방식이다. -P169
수집은 예술 창조와 관련한 어떤 것에 매우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총체로 조합하는 행위는 총체성과 통일성을 가리키는 훌륭한 메타포를 생성한다. -P284
단순한 관심, 애정 정도가 아니라 그에게 수집은 '세상을 배우는 다른 방식'이자 '존재의 외침' 같은 건 아니었을까? 그의 삶은 유년시절부터 현재(집필)에 이르기까지 순탄치 않았다. 정신지체를 앓던 누나와 함께 했던 유년의 상흔, 연애를 해보지 못한 대학 시절, 10년의 부부생활 이후의 이혼, 실직과 복직...
이 책을 마무리한 시점에서 봤을 때 그는 확실히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그 작별 인사를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흔히 '이별' 이야기로부터 한 권의 책이 집필되는 법이다(P300)"란 집필 동기처럼 그는 책을 쓰고 사랑을 얻었다. 자기 삶을 '수집'이란 키워드로 조망하며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준비를 마친 셈이다.
책 후반부에 이르러, 뭔가 아쉬운 마음에서인지 결말이 꽤나 지루하게 늘어진다. 결단을 못 내리고, 사랑을 주저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결론은 "독자 여러분은 이 책의 페이지들을 한 장 한 장 찢어내시라. 그리하여 나를 깨끗하게 해주시기를(P358)"이란 당부처럼 깨끗하게 망각하면 그만이다.
장서가로서 난 book collector는 아니다. 대상과 장소, 시간을 막론하고 반가운 마음이 앞서 불특정 다수에게 마구 책을 선물한다. 나를 알고 지내는 사람 중에서 책 한 권 못 받아본 사람이라면... 글쎄다. 누구에게 어떤 책을 줬는지도 꼼꼼하게 기록해놓았다. 그럼에도... 분명 나 또한 책을 '그러모으는' 사람이다. 이 책을 읽으며 수집의 의미, 수집 대상이 갖는 보편타당한 존재 이유 등을 두루 고민하게 됐다. 앞으로도 난 모으면서 나누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건, 이 책의 번역에 대해서다. 원문의 결은 잘 모르겠지만, 번역가의 '미친 글빨'에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지점이 있었다. 저자는 스스로 다다산업 경영자라 했었다. 그것에 착안한 번역인지, 볼드 처리된 문장을 읽어보면 흔히 말하는 '라임'이 제대로 살아있다. 이런 위트 넘치는 문장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주 흥미로웠다.
"라벨에 대한 나의 관심은 한계가 없었다. 나는 그것들을 개봉할 때 그냥 찢지 않고 이음매를 따라 손가락을 넣은 뒤, 접착 부위가 부드럽게 개봉되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것은 다다에 다다른 또 다른 라벨로 연주하는 음악이었다."
>> 수집가가 완성한 세계는 여전히 갈망되는 모든 것의 집대성이자, 그것을 여기에 위치시킨다(Place It Here)는 기대감의 총체다. -P45
사용이 물건의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사실, 가장 값진 물건은 손대지 않은 물건이라는 사실, 그것은 패러독스였다. -P97
내 수집은 잃어버린 사랑을 채워준다. 내 수집은 그 대상물 속에 깃든 다른 신에게 응답한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그것을 거기-없는 신(the god Not-There), 또는 내재성의 부재라 부르고 싶다. -P99
하나의 컬렉션 속으로 들어오는 모든 대상물은 결혼 의식을 경험하고 특별한 완성을 경험한다. 우리는 소유되고 보유되기를 바라며 태어나고, 수집할 만한 대상으로 태어난다. -P166
애초에 그 컬렉션은 '내 소비에 관한 것'이었지만, 내가 자기의식적 수집가가 됨에 따라 오히려 그 컬렉션이 내 소비 행태를 좌우하기 시작했다. -P193
나는 컬렉션의 불필요함과 가치 없음에 집중함으로써 컬렉션의 가치와 필수성을 찾아내려고 했다. -P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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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모은다. 상품에 붙어 있는 라벨, 시리얼 상자 껍데기, 내용물이 잘 안 보이도록 하는 우편봉투의 속지 등등. 그것들은 모았다고
어떤 가치가 생기는 것들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nothing)이다.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것을 모으는가가 아니다(그래서 미안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대하여”는 정확한 제목이 아니다). 왜 그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모으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모으는 행위는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와
같은 게 이 책에서 핵심 질문이다. 그는 그렇게 묻고, 스스로를
파고들고 있다. 어릴 적부터 비롯된 이 가치 없는 것들에 대한 수집벽에 관한 스스로의 병리학적 분석인
셈이다.
자신에 대한 자신의
분석이므로 이게 얼마나 정확할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정신상담을 받는 얘기도 나오지만, 자신의 심리를 자신이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것은 아마 터무니 없는 욕심이다.
그러나 그의 분석은 확신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의 분석의 결과는 늘 의심스럽다. 늘 조심스럽다. 그래서 계속 질문한다. 독자가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그 와중에 수집에
관한 정말 많은 정의와 설명이 따르고 있다. 이런 것들이다. “수집벽은 취미가 아니라 병명(病名)이다. “수집가가 완성한 세계는 여전히 갈망되는 모든 것의 집대성이자, 그것을 여기에 위치시긴다는 기대감의 총체다.” “수집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수집은 소유하는 능력을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행위이고 타자성을 통제하는
훈련이며,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기념비적 건물로서 사후의 생존을 보장하는 일이다.” “수지은 현대적 삶의 거대한 엔진을 흉내 내는 멍청한 행위이다.” “수집은 모두 술어에 해당한다. 주어와
목적어는 자아와 기억이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한 수집에 대한 이 책을, 수집이라는 행위를 수십 년 동안 지속한 후 몇 년 동안이나 집필했다. 수집에 관한 생각이 그 동안 많이 다듬어졌으리라. 그 산물이 바로
위와 같은 생각들이다. 그의 생각인 셈인데, 어찌 보면 지나치게
심각한 이 문장들은 다 기억할 수 없다. 기억할 필요도 없을 지 모른다. 이 문장들이 심각하다는 것은 그가 생각을 지나치게 오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수집이라는 행위를 그렇게 오랜 사고 과정을 통해서 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
수집은 벽(壁)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누가 시켜서도, 무엇을 위해서도 한 게 아니다. 그러니 수집에 관한 그의 어록은 차라리 잊는 편이 나을 지 모른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
그 문장들을 읽어보면, 또 다른 느낌이 든다. 어차피 이
책은 자신의 무가치한 행위에 대한 병리학적 해석이 아닌가? 그러니 그 과정을 통해 드러난 수집이라는
행위에 분석은 어느 정도 진실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현대 중산층의 삶 자체가 컬렉션이라고
하는 한에 있어서 그 수집 행위를 모든 현대인이 숙고해봐야 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의 생각을 들여다
보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 그렇다. 수집은 그런 것일
수 있다.
그가 분명히 결론을
내리고 있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그의 결론을 유추하자면 그가 아무 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들을 모으는
이유는 기억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잊혀짐에 대한 두려움. 더
나아가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가 모은 상품의 라벨 1만 8000개는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단지 그런 게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지일 뿐이지만, 그걸 통해서 한 때 존재했던 존재를 증명하는 것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얘기다.
(아마도) 나는 무언가를
수집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의 기준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아마도’를 괄호 안에 넣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수집이라는 행위가 너무나도 그 범위가 넓기 때문이다. 내 사무실
책장에 꽂혀 있는 약 1,000권의 책을 컬렉션이 아니라고 부인할 이유도 분명치 않다. 그러나 한번도 내가 책을 읽는 행위(책을 모은다는 것보다 더 본질적이다. 책을 사고도 읽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실 그래서 책을 수집한다고는
할 수 없다)의 이유에 대해 스스로 분석해 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
시절, 다 쓴 볼펜을 모았던 것, 연습장을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행위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나도 조금은 수집벽이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보다도 더 가치가 없었던 것을.
그는 솔직하다. 그 솔직함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하지만, 병리학적 분석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 그래서 그의 병리학적 분석
결과는 레퍼런스가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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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집에 무엇인가를 쌓아놓는 사람들. 버리지 못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정리를 못한다 말하지만 그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다. 언젠가 필요하기도 하고 또는 마음 한 구석에서 왠지 모르게 이것을 모으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은 살면서 관심가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거창하게 말해 수집가라는 표현이 나오기도 하지만 나한테는 관심이 없는 것이라도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것이 있다. 최근 <잃어버린 것들의 수집가>라는 소설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는데..문득,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는 무엇을 수집(?) 하고 있었을까? 단순히 호기심이 아니라 늘 나에게 부족했던 것들을 상징화 하면서 모았던 것을 알았다. 저자 또한 그랬다.
제목처럼 정말 저자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우표 수집을 시작으로 음식 커버까지 모으기도 했었는데 이건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남들과 달랐던 누나로 인해 부모로부터 사랑을 덜 받았고 관심 역시 그러했다. 성장 과정에서 가장 필요로 했던 가족의 사랑이 저자에게는 불안함을 주었고 이는 훗날 수집가라는 별명이 붙게 만들었다.
책은 저자의 인생 이야기를 담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수집이 감초 처럼 첨가 되었다. 일상적인 이야기들 저자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흥미롭다. 때론 너무 일상적이어서 굳이 뭔가 싶다가도 누구라도 이런 생각을 가지는구나...타인이라서 완벽하고 성공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그 만큼 자신 또한 노력을 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저자를 볼 때면 특별한 것만이 삶이 아니다. 저자가 모았던 아무것도 아닌(타인의 시선에서)것이 윌리엄 데이비스 킹 에게는 특별한 존재다. 즐겁고 소중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만이 아닌 자신을 성장하게 하는 도구 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폭넗게 공유되는 수집 충동은 극도로 풍요로운 물질사회에서 우리가 받는 깊은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다수가 각자의 개인사에서 받는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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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아무짝에 쓸모 없는 시리얼 박스, 참치캔, 녹슨 못 등을 끊임없이 모아대는 어느 교수의 에세이다. 읽다보면 도대체 왜 이런 것까지 모아대는건지 경악스러울 때도 있지만, 작가의 맛깔나는 변명 속에서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게 되었다. 어찌되었건 우리 모두는 한 때 '자신에게만 의미있는 무언가'를 집요하게 모았던 수집가 아니던가. 내 방 박스 속에 가득 들어차있는 물건들을 볼때마다 요즘은 저자가 자꾸만 생각이 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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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를 수집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다. 각종 피규어나 값어치 있는 물건을 진열해 놓는 수집가가 있고, TV 프로그램 <세상의 이런 일이>에선 잡동사니와 쓰레기더미에 파묻혀 생활하는 출연자가 심심찮게 소개된다. 때로는 짐스럽지만 차마 외면할 수 없고 버리지 못한다. 그들에게 수집은 단순히 무언가를 소장하는 것 이상의 의미, 삶의 위기 속에서 나를 달래주고 공허함을 채워주는 행위이다. 나아가 자아를 확장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연결고리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는 삶의 위기를 맞이한 중년 남성의 자전적 에세이다. 저자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캘리포니아대 연극무용과 교수로, 이혼으로 인한 가정의 붕괴, 사회적 성취에 대한 회의감에 휩싸여 정신 상담을 받는 와중에 이 책을 집필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수집이다. 열여덟 살에 수집품이 이미 톤 단위를 넘었고, 이혼할 즈음엔 차고를 가득 채울 만큼 어마어마한 부피가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란 바로 그의 컬렉션을 일컫는 말이다. 수집벽의 기원은 어렸을 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덟 살 터울의 친누나 신디는 선천적 뇌성마비와 신경쇠약 탓에 부모의 관심을 독차지했고, 잦은 신경질과 히스테리로 마치 집안의 여왕인 양 군림했다. 그는 누나와 부모를 이해하는 착한 아이 역할을 맡아야 했다. 마치 그것이 자유의지인마냥. 그 와중에 수집은 그에게 허락된 취미였고, 거기서 위안을 찾기 시작했다. 비교적 흔한 우표 수집부터였다. 가족들은 왜 우표를 비뚤게 붙이고 기준에 맞게 나열하지 않았냐며 참견했다. 일반적인 사람에게 수집이란 정리하고 분류하는 일련의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필요한 것은 남들이 원하는 질서가 아니었다. 자유와 스스로에 대한 가치였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서 의미를 발견했다. 수집광은 이렇게 탄생했다. 컬렉션은 그가 말하듯 대부분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다. '스타키스트 으깬 살 소형 참치. 광천수 포장' 같은 통조림 라벨, '리지스 피넛 퍼터 스윗 앤드 크런치 콘 퍼프' 시리얼 상자. 너트와 볼트를 비롯한 잡동사니 투성이자 '싸구려 백화점'이다. 일반적인 수집가는 소장가치를 분석하지만, 그는 잡동사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의미를 찾았다. "나는 뭔가 의미 있는 것을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없었으므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내가 원할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늘 아무것도 아닌 것을 소유함으로써, 현실에서는 결코 의미 있는 것을 갖지 못하는 나 자신의 마음을 달래줘야 했던 것 같다."(p.118)고 소회한다. 저자 윌리엄 교수는 말한다. "중산층의 삶은 그 자체가 컬렉션이다."라고. 번듯한 사회적 지위, 안정적인 경제력, 그리고 배우자, 아이들로 꾸려진 가정. 이 조건을 채우기 위해 아둥바둥 살아간다. 남들에게 인정받는, 질서와 안정을 상징하는, 이름하야 중산층이란 컬렉션이다. 그가 겪은 중년의 위기는 중산층 컬렉션의 붕괴이자 그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었다. 그럴수록 일반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수집품에 천착했다. 역설적으로 둥근 철물 잡동사니에서 더없는 행복을 발견하고, 전단지, 각종 상품 라벨 광고 문구에서 창조성을 느꼈다. 속사포처럼 터지는 수집 목록들, 수집과 수집가에 대한 단상에 웃음이 터졌다. 너무 흔한 나머지 오히려 독특하게 다가오는 것들. 어느새 잡동사니에서 자유와 의미를 찾는 기벽에 공감이 갔다. 사회가 부여한 역할과 가치 속에서 벌거벗은 나 자신의 실존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하지 않았는지. 그렇기에 저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모으고 가치를 찾아나가며, 스스로의 가치를 재정립한 것은 아닌지 말이다. "컬렉션들은 그저 소유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수행된다. 그것들은 삶을 구조화하고 역할을 부여한다."(p.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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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이라니. 이것은 지금의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너무나 멀리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너무나도 긴밀하여 좀처럼 떨쳐낼 수 없는 기벽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흔히 집안 가득히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를' 물건들을 미처 버리지 못한 채 기약할 수 없는 쓰임을 예상하며 보관해둔다. 그것 뿐이랴, 언제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과거의 그 순간'을 추억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특별하게 여겨지는 순간에 취득한 물건들을 서랍이나 작은 상자 등 어디에든 보관해둔다. 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는 바로 그런 것들에 대한 책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때로 갑갑함을 느꼈다. 넣어둔 그것들이 필요해진 언젠가의 순간에 그것을 넣어둔 곳을 잊어 오히려 더 많은 곳을 뒤져가며 찾느라 헤매일 뿐이고 때로는 그것을 보관해두었다는 사실조차 까먹을텐데도 기어코 얇은 식빵 봉투를 묶어놓은 철사끈을 주방 어딘가에 매어두거나, 하는 일들을 이제 그만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버릇처럼 쓸 일도 필요한 적도 없었던 그것을 버리지 않는 자신을 끊임없이 자각하며 책을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추억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기억은 물건에 남아있지 않는다. 때로 물건으로 인해 그 순간이 환기될 수는 있을 지언정 언제고 그것을 손에 쥐고 추억만 하고 앉아있지는 않으니. 그럼에도 모아놓은 영화표나 작은 엽서, 사진들이 서재 구석에서 꽤 많은 부피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옛날부터 수집가였지만, 지금은 내가 다른 수집가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 수집 행태는 시장에서 외쳐대는 대상물들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다른 수집가들과 다르다. 나는 말 없고 빈약하고 실용적 가치가 없는 물건들에 반응한다. 이를테면 안쪽에 돌멩이가 박힌 채로 바닷물에 부식된 물통 뚜껑 같은 것 말이다. 비록 도착적이고 모순적일지라도 내 수집이 여전히 수집인 이유는, 수집가들에게 흔히 관찰되는 보상의 패턴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 수집은 잃어버린 사랑을 채워 준다. 내 수집은 그 대상물 속에 깃든 다른 신에게 응답한다.'
나는 수집에 대해 떠올리며 필요와 추억을 말했지만, 저자는 상실과 보상에 대한 의미를 드러내며 자신의 어린시절을 밝힌다. 일견 대수롭지 않은 수집물이라 여겨질지 모르지만, 저자와 내가 수집을 통해 떠올린 것들의 의미는 꽤나 감성적인 부분에의 충족과 맞닿아 있다. 저자는 자신의 수집이 다른 여타의 수집가들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물질적인 가치로 본다면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수집이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그것과는 가장 유사한 모습으로 그러나 매우 집요한 관심으로 이어졌던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의 수집이 더욱 눈길을 끄는 매혹이 되는 것이다.
'소망컨대, 내가 물려주는 것들 가운데서 내 아이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면 좋겠다. 희망컨대, 내 아이들이 어디선 나름의 기쁨을 찾아내면 좋겠다. 그 기쁨은 이 모든 것들 가운데 있을 수도 있고, 모든 것을 다시 포장하는 이 책 속에 있을 수도 있으며, 모든 것을 뛰어넘어 그애들 자신의 컬렉션과 회상 속으로 움직여가는 과정 속에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소망하는 것이다. 수집은 내가 내 삶을 붙들고 있는 더 큰 패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라고 하지만 문득이 김춘수 시인의 '꽃'이 떠올랐다. 불러주었을 때 의미가 되었던 것 처럼, 모았을 때 비로소 어떤 의미를 부여받는 것들도 있다. 그것들은 귀한 가치를 가진 유일무이한 것일 수도 있으나, 흔하디 흔한 공산품일 수도 있다. 그가 시리얼의 상자를 모았던 것 처럼. 중방 한 켠에 매달아 놓은 빵끈이 내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물려져내려온 '언젠가'를 위한 궁상같은 작은 수집벽인 것처럼. 텍스트를 읽어내는 눈길을 건조하였을지라도, 곧 나의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떠올리자 여러 상념들이 떠돌게 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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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서는 심심치 않게 무엇인가를 일반의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모으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된다. 누군가는 이러한 그들을 보고 집착이라 하기도 하고 수집벽이라고도 하며, 일종의 정신병이라는 것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이들을 표현함에 있어 앞 서 언급한 저러한 용어들을 사용하고 싶지 않다. 이는 나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무엇인가, 누군가에게는 쓰레기와 같은 것들을 모으고 싶다는 충동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실, 내 안에 이러한 면모, 열망이 남아 있다는 것이 선천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후천적인 어떤 상황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이러한 마음이 선천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본성에는 무엇인가를 수집하는 벽이 본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고, 이게 만약 후천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어떤 것에 시달려서 이러한 열망을 내포하게 된 것일 것이다. 사실, 이렇게 보면 내가 무엇인가를 모으고 싶어 하는 일련의 행동들은 정신병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나 그러면 어쩌겠는가? 정신병이라고 하더라도 무엇인가를 모음으로써 해소할 수 있다면 이는 중요한 치료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책세상에서 출간 된 에세이 윌리엄 데이비스 킹의 어느 수집광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는 굉장히 특별한 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 책은 정말 수십 년간 쓸모없는 물건들을 모아온 저자가 이 과정에서 자신이 느낀 어떤 일련의 일들을 에세이 형식으로 담은 책이다. 그래서 정말 책이 어떤 하나의 흐름으로 흘러간다기 보다는 인생의 단상단상에 관해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풀어쓴 책이라고 하는 것이 더 알맞겠다 하겠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놀라게 되는 것은 이 책의 저자가 자신의 수집벽에 대해 묘사하는 과정 자체가 묘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자신이 수집을 시작하게 된 시점부터 수집을 하면서 느끼게 된 감정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상호과정까지 모두 우리내 삶과 엇비슷하게 맞아 들어가는 측면이 존재한다. 나아가 이러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왠지 모를 위로를 받는 다는 점은 이 책이 가진 강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어쩌면 이 책은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조금 부각 된 것이 작가가 가지고 있는 수집벽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아도 이 책은 인간의 삶에 대해 여러 가지 단상들을 만들어내는 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무엇인가를 모은다는 것이 인간에게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사실 내겐 분명치 않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은 나와 같이 무엇인가를 실제로 모으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열망을 내포한 이들에게 무엇인가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는 것 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책이니만큼 많은 이들이 이 책을 한번쯤 읽어보길 꼭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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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윌리엄 데이비스 킹지음 | 안기순 옮김 | 책세상
‘끊임없이 발견하고 보관하는 남자의 수상록’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집요하게 수집하는 한 남자의 에세이를 접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극무용과 교수인 저자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우리가 흔히 가치가 있다고 믿는 대상을 사들이는 수집가가 아니다. 한때는 타인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를 뒤지기도 하고, 버려진 쇠붙이를 가져와 광이 날 때까지 집요하게 문질러대기도 하던 사람이었다. 책의 제목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열정적으로 수집한다.’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고 번역된 용어의 다른 표현은 아마도 ‘무가치한 것’,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책의 시작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당시 43세이자 교수였던 저자는 이혼을 앞둔 암울한 상황이 전개된다. 아마도 이혼에 앞서 아내의 집에서 자신의 짐을 챙겨 나오는 장면으로 생각된다. 이 책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는 저자가 7년 간 써내려 간 개인적인 수집기이자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본 성찰의 흔적이다.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수집하며 ‘무언가’의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감을 드러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타인의 존중받기를 원하는 분열적인 자화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7년간의 자기 기록 과정을 거쳐 이 책이 마무리되는 지점에서 50세가 된 저자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 결혼을 앞둔 시점에서 마무리되는 희망적인 책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수집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
우선 저자의 수집관은 매우 독특하다. 무언가를 수집하기 위해 돈을 들여 구입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수집할만하다고 생각할만큼 가치있는 대상을 수집하지 않는다. 저자 자신이 말하는 자신의 수집행태는 매우 독특하다.
“내 수집 행태는 시장에서 외쳐대는 대상물들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다른 수집가들과 다르다. 나는 말 없고 빈약하고 실용적 가치가 없는 물건들에 반응한다.”(99면)
“나는 (…)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 깃든 의미 있는 어떤 것에 끌린다.”(99면)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반응’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요한 관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어쩌면 타인이나 사회가 의도한 욕망이 한 개인에게, 우리에게 투사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전 세계적으로 물신화된 가치체계에 익숙해져 무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가치있다고 믿는 어떤 대상은 의식화된 사회의 욕망이 아닐까. 반면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끌리고 반응하는 것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자기 가신에 대해 알기’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신에 대해 솔직한 사람이 나타낼 수 있는 솔직한 반응들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대상들에 반응하는 행위는 현대 예술에서 작품과 관객사이의 반응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근대 예술에서 우리가 작품을 볼 때, 우리는 작가의 의도 파악에 노력을 기울였고, 작가는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일종의 텍스트로 제한하여 관객에게 제시하는 점이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현대 예술에서는 작가가 텍스트를 배제해버렸거나 아니면 최소한으로 제한하여, 작가의 의도롤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 또는 관람자는 작가의 작품을 통해 보다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경험과 배경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마치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느껴진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특징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43세의 교수이었지만, 중년의 초입에 이혼이라는 인생의 한 고비를 건너는 상황이었다. 저자에게 수집행위는 이러한 인생의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약과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폭넓게 공유되는 수집 충동은 극도로 풍요로운 물질사회에서 우리가 받은 깊은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다수가 각자의 개인사에서 받는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수집이 그런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그 효과는 충분할 정도로 좋다.”(26면)
“비록 도착적이고 모순적일지라도 내 수집이 여전히 수집인 이유는, 수집가들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보상의 패턴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 수집은 잃어버린 사랑을 채워준다.”(99면)
평생 수집을 하면서도 중년이 된 저자가 자신의 중년기 7년 간 써내려간 이 독창적인 기록물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둘러싼 맥락에서 소환되고 재해석되고 있다. 저자는 개인적인 차원과 비개인적인 차원에서 수집행위를 다름과 같이 해석하기도 한다.
“개인적 수준에서 수집은 사랑과 그 사랑의 상실에 대해 말해준다. 또한 수집은 자기 가치와 자기 혐오에 대해 말해주고,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서투름에 대해 말해준다. 비개인적 수준에서는 20세기 말이라는 시대의 풍요과 과도함에 대해 말해준다.”(215면)
결국 솔직하게 개인의 부족함을 고백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보고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놓치지 않고 있는 저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저자의 수집행위는 우표수집으로 시작했지만, 어릴 때 어머니가 애써 모은 우표들을 동생과 함께 못쓰게 만든 후 중단했던 모양이다. 반면 쓰레기통을 뒤지고, 쇠붙이를 주워오거나 자신이 소비한 식표품의 라벨을 수집하는 행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되고 소모되는 개인의 저항적인 의미로서도 그 의미를 확장해서 볼 수 있을것 같다. 이 부분은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야기하는 ‘무한긍정적이고 자기소모적인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한 개인이 표출할 수 있는 저항적이고 부정적인 자기 존재의 확인 절차와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저자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버전으로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우리가 세계를 소비하듯 우리를 소비하는 이 걸신들린 세계를 통제하는 방식 중 하나가 바로 수집이다. 우리는 가치를 지배함으로써 정체성을 긍정하게 된다.”(26면)
바로 이 ‘우리를 소비하는 이 걸신들린 세계’는 뼈속까지 내면화된 물신화, 상품소비주의적인 우리의 무비판적인 삶에 대해 우리는 ‘No’라고 말할 수 있는 ‘부정성’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내가 판단한 이유이다. 한 개인이라는 인간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수반될 것이다. 저자의 수집을 통한 ‘저항행위’는 다음에서 엿볼 수 있다.
“나는 컬렉션의 불필요함과 가치 없음에 집중함으로써 컬렉션의 가치와 필수성을 찾아내려고 했다.”(316면)
저자에게 ‘수집’이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가 되고 있다. 저자 자신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때로는 저자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행위이지만 저자에게 자신을 성찰하는 도구이자 대상이 되고 있다. 책의 첫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과 수집의 의미를 성찰한다.
【수집광의 수상록 – 몽테뉴적 자기 성찰】
책을 읽어나가다보면 500여년 전의 한 사람이 자신에 대해 성찰한 글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몽테뉴의 수상록인데, 이 책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에서도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다. 물론 이 책에서는 ‘수집’이라는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점이 좀더 다른 부분일 수는 있겠다. 몽테뉴는 자신의 화려한 귀족의 신분과 법관, 보르도 시의 시장을 지낸 배경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고 자신을 들여다본다. 저자 윌리엄 교수도 역시 자신의 작은 키를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자신의 열등함을 드러내기는 서슴지 않는다.
“사실 때로는 그 사전 삽화 컬렉션이 나 자신보다 더 가치 있다는 생각도 든다. (…) 나는 그 컬렉션을 질투한다. (…) 나는 종종 나 자신이 중년의 비평가로서, 또 망설이는 사람으로서, 망가진 채로 남겨진 그 어휘 사전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낀다.”(283면)
‘물러남의 대가’라고 몽테뉴를 표현한 어느 출판사의 홍보문구를 본 기억이 난다. 이 물러남은 아마도 몽테뉴의 ‘소심함’을 드러내주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성찰하는 인물로서 자신과 ‘거리두기’에 대가라는 의미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멀찌감치 두고 들여다보는 사람을 의미할 터이다. 혼란과 비극의 시대 한 가운데서 어느 특정 사상이나 인물에 경도되어 살아가지 않았던 몽테뉴에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란 상당히 메말라 보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몽테뉴의 인간 관계는 사심을 초월한 보다 독립적인 한 개인으로서 주체적인 관계맺기의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윌리엄 교수에게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내가 품는 의혹은 (…) 수집이라는 것도 대부분 관계를 맺기 보다는 관게에서 물러나는 방식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222면)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자신의 수집물(또는 행위)이 무엇을 반영하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묻고 있다. 연극무용과 교수답게 저자는 자신의 연극에 관한 인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이야기한다.
“내 분노와 욕망이, 그리고 내 정체성의 탐구가 내 물건들 사이에서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내 드라마는 하나의 인식에 도달한다. 그 인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Anagnorisis라고 불렀던 것으로, ‘다시 알기’ 또는 ‘자기 자신에 관해 알기’를 뜻하며, 비극 형식의 본질 중 하나다.”(314면)
개인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며 저자가 보여주는 자기 성찰의 절정은 바로 시리얼 상자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두 딸과 함께 자신이 수집한 1579개의 시리얼 상자를 자신이 학과장으로 있는 학과의 강당으로 가지고가서 바닥에 초대형 퀼트처럼 펼쳐놓았다. 자신의 집 창고에 모아 두었던 종이상자들을 펼쳐 배열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짐으로서 한 개인의 정체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예술이 되었다. 다시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물들이 세상에 노출되어 연결됨으로써 보다 분명한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1500여개의 종이 상자들은 윌리엄 교수와 두 딸이 먹어치운 시리얼 상자였다. 한 가족이 거부할 수 없는 물질사회에서 살아온 삶의 흔적이자 이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세태를 반영하기도 하는 1차 사료로서의 역할도 하는 대상물인 셈이었다. 곧 개인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남긴 존재 증명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윌리엄 교수도 무가치한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는 어떤 유의미한 특징을 이미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앞서 저자가 언급하기도 했지만, ‘자신에 대해 알기’라는 과정은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곧 모든 시작에는 그 끝이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태어남 뿐만 아니라 죽음도 있다는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저자 역시 자신이 죽고나면 자신의 컬렉션이 어떻게 될까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궁금해하고 있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삶의 유한성을 반추하며,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로서 자신의 수집물들에 대한 행방을 역시 고민한다.
“어떤 인간 존재도 다른 어떤 존재를 진정으로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정말로 그 어던 인간 존재도 뭔가를 진정으로 소유할 수 없는데, 죽음이 소유를 휩쓸어가기 때문이다.”(361면)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수집품이 유용한 물건들이 아님을 잘 알기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임도 안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수집물들이 스미소니언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며, TV프로그램 소품으로나 쓰이길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물건들이 아이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아이들이 이 부분에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두 딸들 역시 아버지의 수집물들을 물려받기를 원한다고 말한 대목이 흥미롭다. 물론 아직 어린 나이를 떠올린다면 그 결정은 언제든 바뀔 수 있겠으나, 저자는 강요하지 않고 아이들에 대한 희망을 단순히 덧붙이고 있다.
“내가 물려주는 것들 가운데서 내 아이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면 좋겠다. 희망컨대, 내 아이들이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을 찾아내면 좋겠다.”(336면)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을 찾아낼 줄 아는 능력은 개인의 세계관과 마음가짐에 달려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의 번성기는 바로 마지막 날, 나머지 모든 것의 날이다. 창조에 뒤따르는 휴식은 뭔가가 되기를 멈추는 순간이고, 그것은 곧 죽음의 리허설이다. 그 휴식의 본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알고 느끼는 방식이다.”(350면)
“수집은 소유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행위이고, 타자성을 통제하는 훈련이며,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기념비적 건물로서 사후의 생존을 보장하는 일이다.”(90면)
어떤 의미에서 저자의 수집품들은 자신의 일부이자 인생의 축약품으로서 자식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고, 자신의 연속성으로서의 바램과 희망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별적이도 무가치해보이는 사물들이 오랜 시간 동안 모이고, 그 주인에 의해 끊임없이 분류가 되고 정리되고 하면서 그 수집물의 전체는 낱개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서 새로운 의미를 띠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수집가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본능으로서 연속성을 보장받는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저자의 자기 성찰 과정을 상기해보면 몽테뉴의 자기 탐험과 성찰 행위와 매우 유사함을 깨닫는다. 세계에 저항하고 독립된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존재를 느끼고 깨닫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로서 저자의 수집행위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거울과 창문과 같은 수단으로서의 수집행위】
글의 초입에 언급했던 수집이 저자에게 갖는 의미로 다시 돌아가본다. 저자가 분명히 언급하고 있듯이 ‘수집’은 자신을 반추하고 성찰하는 ‘거울’의 기능을 가지면서도,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외부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의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의 경우처럼 평생동안 무의식적으로 쌓아가는 수집물이 주는 역할은 예술활동을 통해 보편적으로 기능하는 ‘자기 성찰’의 수단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이 시에서처럼 내가 예술을 나 자신을 바라보는 창문으로 이용한 경우는 드물었다.”(146면)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이라는 수단은 곧 ‘자아의 확장’ 수준으로 이어졌다.
“궁할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그 컬렉션을 사랑하고 또 증오하면서도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208면)
“내 컬렉션은 중년이 된 나를 그린 그림이다. 수집을 한다는 것은 중년을 서술하는 것이다.”(209면)
“나는 내 메타포들을 수집한다. 나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서 나 자신의 비유적 형상을 그려낸다.”(238면)
“좀처럼 말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정의할 뿐인 한 권의 책. 그 책(사전삽화 컬렉션 북)은 표현하지 않는 내 자아를 표현하고 있었다.”(281면)
이처럼 여러군데에서 자신을 바라보면서 ‘수집’이라는 행위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끊임없이 묻고 스스로 대답하고 있다. 한 인간의 다사다난한 인생을 하나의 박물관으로 생각해볼 때, 윌리엄 교수가 말하는 수집이란, 곧 이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물을 지속적으로 분류하고, 가치를 부여하며 평가하는 행위가 평생 지속된다.
누구나 수집행위는 본능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실례로 무형이기는 하지만 우리 손 안의 모바일 기기로 사진을 찍고 이미지를 소유하는 행위를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거의 매일 우리는 사진을 찍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과물들을 폴더에 소유한다. 윌리엄 교수의 수집물처럼 낱개로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판단할 수 없다. 반면 이러한 수집물들이 평생동안 모이고, 분류되어 하나의 집합체로서 특징을 띠게 되면 그 자체로 새로운 생명력을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의 매일 찍은 사진들이 어느 날 사용자에 의해 분류되고, 재배열되고 관리된다면 그 사진들은 새로운 형태로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진들 중 어떤 특정 주제하에 ‘선별된’ 사진들은 더욱 주인의 의도를 반영하는 자아의 확장 버전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수집물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은 ‘자아의 표출 도구이자 자신을 성찰하는 수단’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글을 마무리하며】
글을 읽으며 확인하게 되는 것은 수집행위 및 그 과정은 곧 수집가에 대한 실존적인 자기 발견 수단 및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책을 수집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책장을 잘 들여다보면 책의 목록을 통해 그 수집가의 욕구와 욕망을 상당히 읽어낼 수 있다. 이 사람의 관심사가 무엇이고,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이 사람의 열등감은 무엇이고, 어떤 것에 대한 결핍을 인지하고 있을까 하는 점들도 그러하다. 영어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한 이는 영어 관련 책이 많을 수 있고, 어떤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유독 그 부분에 대한 책을 많이 구입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 이런 수집의 양상은 보다 의식적인 측면이 강하다. 반면 윌리엄 교수의 수집 형태는 상당히 무의식적인 자기 표출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위에는 저자의 누나와의 관계(오랜 시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로부터 받은 상처 내지는 트라우마가 반영되어 형성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수집’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보살피기도 하였다. ‘수집’행위는 자신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효과도 보여주었다. 물론 직간접적으로 결혼생활에도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 모은 1570여개의 시리얼 종이상자, 800개가 넘는 우편봉투 속지 컬렉션, 6000장이 넘는 명함 등은 의식적인 수준을 넘어 저자의 무의식이 투영된 어떤 실체, 저자의 분신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부쩍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고, 대부분은 생활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다 버리고, 정리하여 간단하게 살라고 하는 책/운동이 활발히 눈에 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간소하게 살라고 하는 현대사회에서 윌리엄 교수와 같은 수집광의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많은 이들이 간소하게 살라고하는 ‘유행’에 동조하는 가운데, 저자처럼 ‘싫다’라고 과감하게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는 ‘부정성’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토록 많은 것이 제공되는 세상에서 최소한으로 소유하고 살을 빼는 것은 이중의 박탈처럼 보일 수 있다.”(26면)
누구나 여행이 부정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회만 된다면 여행은 반드시 해야하고, 개인의 성숙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라 말한다. 반면 ‘나는 여행이 싫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 자신도 그렇게 말하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여행이 좋다’라는 점은 수긍을 하면서도 다수의 집단적인 견해 앞에서 자신의 ‘부정’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책을 덮으며 내가 이해하는 저자의 수집행위는 바로 자신을 드러내고 집단적인 견해에 도전하는 행위와 다름아니다.
내가 윌리엄 교수처럼 상당한 수집품을 소유했다면, 나는 이 거대한 컬렉션을 어떻게 처리하게 될까. 나는 모든 것에 그 시작과 마찬가지로 끝이 있다는 진리에 따른 것같기도 하고 결국은 그렇게 하기 힘들것 같기도 하다. 왜나하면 나 자신도 윌리엄 교수처럼 ‘집요함과 애착, 물건에 대한 끈질긴 욕망을 갖는다는’ 게자리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불교의 만다라 예술과도 같이 정성들여 완성한 자신의 모래 그림들을 한 순간에 손으로 쓸어버리는 것처럼 내 컬렉션도 내 임종 전에 소각장에서 모든 컬렉션이 불에 타오르는 것을 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소멸과 함께 나의 정체성의 연장이었던 컬렉션도 무(nothing) 속으로 사라진다는 행위로서 말이다.
이 책은 수집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자, 불완전한 존재를 자각하는 자화상을 그린 결과물이다. 아울러 유별난 한 개인의 행위를 통해 우리의 통념을 뒤집어 볼 수 있게 해주기도 하며, 우리 자신에게 삶의 실체를 자각하게 해주고 질문을 던지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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