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래를 읽기로 결심하고 그의 데뷔작을 뽑아들면서 내가 이런 기분에 휩싸이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 책을 펼쳐들며, 나는 내가 긴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무대 위에 선 가족을 지켜보는 기분이라고 할까. 혹시 그가 무슨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객석에 앉은 나는 노심초사합니다. 핏줄의 느낌, 가족의 느낌, 바로 그것입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많은 유럽인들이 이창래의 소설을 읽었고 또 지금도 읽고 있는 중입니다. '한국인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영어로 쓰인 이 미국문학은 번역이라는 또 하나의 단계를 거쳐 이렇게 가족처럼 그를 걱정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인 앞에 놓여졌습니다. 애를 태우던 나는 책장이 넘어갈수록 긴장에서 풀려납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고이고, 때때로 나는 자랑스러움에 눈시울을 붉힙니다. 세계인에게 일본의 정서를 알린 하루키 정도의 작가를 이제 우리도 갖게 된 것입니다! 미국문단이 이창래에게 보낸 그간의 찬사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이민 2세대인 주인공 헨리, 그리고 그의 아버지. 아버지는 한국에서 일류대학을 졸업했지만 미국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청과상입니다. 썩은 채소냄새를 풍기며 살아온 아버지의 일생. 그것을 바라보는 헨리의 시선은 '곤혹스러운 경외와 경멸과 경건'으로 일축됩니다. --아버지와 가게 노동자들의 그 우스꽝스러운 말투, 그 모든 콩글리시, 스팽글리시, 은어에 몸이 움츠러들고 창피하고 화가 났을 것이다. 말 좀 똑바로 해.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평생 궁상맞게 사는 주제에 말이라도 한번 똑바로 해봐.-- 아버지가 된 헨리는 자신이 겪은 정체성의 혼란이 아들 밋(백인과 결혼해서 낳은)에게 이어지길 바라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애가 자신의 세계에 대하여 하나의 감각만을 가지고 성장하는 것이 내 희망이기도 했다. 하나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삶.-- 결코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아버지의 삶. 그에 비해 존 강(한국인, 시의원)은 한국인을 아시아인을 제 3세계인을 대표해서 미국사회를 향해 발언하는 야망과 의욕에 찬 인물입니다. 헨리는 존 강에게 가족애를 느낍니다. 그것은 제가 서두에 언급한 핏줄의 느낌, 바로 그것입니다. 어느날 식당에서 존 강과 대화를 나누던 헨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런 순간들이면 존 강이 우리가 아는 다른 언어로 말을 하기를 바라게 된다.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의 영어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에 닿을 수가 없다.-- 하지만 존 강도 결국엔 몰락하고 맙니다. 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헨리는 이제 돌아가신 아버지의 삶과 존 강의 삶을 공평한 애정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가 말하는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다. 아버지의 언어, 늘 맹렬하게 돌진해 나가는 그 언어의 충돌과 강타와 중단. 나는 이 도시의 거리들에서 아버지의 언어를 들어보기 위해 언제까지나 귀를 쫑긋거리며 다닐 것이다. 헨리는 침묵과 여백의 미를 아는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대단히 한국적이면서 또 동시에 세계적인 인물입니다. 우아한 신뢰감을 주는 인물입니다. 아마도 헨리 박이 한국의 어느 거리를 걷고 있다면 그 거리의 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마음을 뺏기고 말 것입니다. 이 매력은 고스란히 이창래의 몫이겠지요. 많은 평론가들이 그의 문체에 상당분량의 칭찬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말하더군요. 자신의 소설을 특히 시인들이 좋아한다고. 번역을 감안하고 읽더라도 그의 문체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아름답고 예리한 그의 통찰력이 작품의 첫 장부터 맨 마지막 장까지 고른 품질로 지속된다는 겁니다. 이런 작가를 갖게되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내가 읽어야할 그의 또 다른 작품들을 생각하니, 곳간에 두둑한 식량을 비축해둔 것처럼 마음이 풍요롭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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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예전에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가 각광을 받는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지만, 뭐 찾아보겠단 생각을 하진 않았다. 웬지 80년대 한국영화처럼 미국 이주 한인들의 애환을 그리는 뻔한 이야기일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고. 몇년전 뚤루즈 시내에서 맛없는 한국식 음식 장사를 하는 분이 이야기했을때 그 작가가 이창래라는 것을 다시 떠올리게 됬고, 이제 처음으로 작품을 접했다. 사 실 진지한 리얼리즘 계열의 미국소설을 접해본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즐겨 보는 보네거트는 아주 독특한 장르라 해야겠고, 그 밖의 여러 SF도 그렇고... 폴 오스터는 뭐 문체는 유사할 지라도 이야기 소재가 리얼리즘적이라 하긴 어렵고. 잘 기억은 안나지만 업다이크나 토니 모리슨도 뭔가 문장/문체로부터 뭔가 상기할만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주인공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빼곤, 오히려 3-40대 뉴요커의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폴 오스터와 유사하다고도 얄팍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듯하다. 제목 에서처럼 전 작품에서 '언어'의 문제에 대한 정교한 고민과 집착의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다. 2세대 주인공의 시각으로 이민 1세대와 2세대가 겪는 고민들, 한마디로 원하는 만큼 섞이지 못하고, 또 원하는 만큼 거리를 둘 수도 없는 입장에 대한 뿌리깊은 고민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 기껏 6개월 남짓의 미국생활 경험밖에 없는 나로서 '실감'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유학다녀온 지인들이 이야기하는 배경, 이민간지 오래된 큰형의 이야기의 배경을 다소간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는 느낌이 든다. 이야기 전개와는 별도로, 원문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들 정도로 문장이 문체가 세련되었다는 인상이 들었다. (세번째 언급하는) 폴 오스터를 여러번 떠올리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본다. 전후맥락을 떠나서 그 느낌을 전달하기는 어렵지만, 한국인이 가지는 언어습성 특히 남성들의 습성에 대해 이민 2세 남성의 판단을 반영하는 다음 문장에서 나즈막한 감탄을 냈다. "나는 이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어쩌면 침묵이라는 그릇된 명예에 너무 자주 의존 하고, 이익을 얻기 위하여 그것을 남용하는 지도 모른다." 이것이 한국식 유교문화에 익숙한 남성들의 태도이다. 그런 한국 남성이 미국사회의 주류로 진입하기 위해, 아니 리더로 등극하기 위해 정치판에 뛰어들어 사람들을 설득하는, 나름 감동적인 논리... " 지금은 악당이 누구지? 안됐지만 나는 세상은 악마와 성자들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있는 만 명의 흐릿한 영혼이 지배한다고 생각해. 나도 그들 가운데 하나야. .... 진실하게 말을 해도 악마나 배반자가 되지 않는 방법이 틀림없이 있다는 것을 자네도 알아야 하네." 이 발언을 한 인물은 결국 몰락한다. 그것이 그가 진실하게 이야기하지 못해서 인지, 그의 진실이 Native Speaker들 사이에서 통하지 않아서인지... 혹은 그 동류들에게 왜곡되어 전달되서 인지, 그 사이에 자리잡은 고민이 이 작품의 시발점이 아닐까 싶다. |
| 원제는 Native speaker 이 글의 작가가 재미교포라는데. 헨리박이라는 재미교포의 이야기이다. 한때 외국에 나가 살면 참 재미있겠다. 우리나라 사는것보다 훨 낫겠다 생각한적 있었다. 특히 고3때. 근데 이거 읽어보니까 역시 우리나라가 좋은건가. 희멀건 백인들의 뭐 그리 대단하다고 노랭이라고 놀리는가. 하기야 그들입장에선 그럴수 있는건가? 아니 그렇게 우위적인 입장이면 더 그러면 안되는거 아닌가. 두꺼운 책인데 무겁지 않아서 좋다. 이것저것 생각하면 복잡하니까 이상. 여기까지. 읽다보면 작가가 정말 글을 잘 쓰는 사람이구나 느끼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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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솔직히 이 책의 섹시함에 반했다. 나는 그날 여느 때처럼 교보문고에서 책의 표지들을 손으로 스치면서 책 사이를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네이티브 스피커'......나는 이렇게 직설적이고 적나라하고 그래서 섹시한 책 제목을 본 적이 없었다. '네이티브 스피커'는 당시 나의 화두였다. 이 나라의 토박이들이 외국인 노동자라는 이방인에게 휘두루는, 오로지 무기라고는 이 땅에 붙박인 네이티브 스피커라는 정체성뿐인 '쥐뿔도 없는 사람들의 쥐뿔'......그런데 이것을 제목으로 한 책이 있다니...무슨 내용일까. 어떤 책일까. 나는 당장 그 책을 빌려서(나중에 사서 읽지 않은 것이 후회됐지만......나는 그 당시 마음에 드는 책을 마음대로 소장할 만큼 넉넉치 못했다) 허겁지겁 읽었다. |
| # 책을 읽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헨리와 그 주변인들이 겪는 힘든 생활이 바로 우리 나라에서 일하기 위해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에서 온 대졸자와 그들의 자식들이 겪는 일이 아닌가. 한 세대 뒤에 우리 나라에서도 LA 사태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나. # 번역에 대해 말이 많은 최근, 이 책 만큼 번역이 잘 된 책을 읽으니 묘하다. 정말 고심해서 단어를 고른 흔적이 보이는 문장을 만날때마다 최근의 정 모 아나운서 이야기가 생각나서 피식. 마시멜로 만큼이나 퍼석한 책이 잘 팔린다고 했을때부터 그건 거품이었지뭐야. 번역자를 따라 읽어볼 리스트가 하나 더 늘었다. 정영목 씨. |
| 서점에서 우연히 보게 된 이책... 그려24에서 바로 주문을 했다. 호기심으로 시작해 마지막까지 이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작가의 직접적인 경험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것은 한번쯤은 그가 한국인으로서의 헨리박을 생각해 봤을거라는 것이다. 미국인이지만 이방인인 사람... 주인공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적나라한 자기 정체성과 이방인들의 모습들...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미국에서의 이방인들의 삶... 주인공은 이 책에서 완벽한 페르소나적인 인물역할을 '직업'으로 삼으며 살아간다. 그 뒤에 가려진 인간본연의 내적 갈등과 이방인들을 바라보는 정체성의 고찰... 우리는 영원한 이방인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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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라는 첫인상의 압박을 딛고
소설의 내용은 낯설다.
그렇게 고생하며 한인들은 표면적으로는 잘 자리를 잡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의 시선에 대해 놀랐다. (저넘은 양넘이야.. 색깔만 한국인이지.)
열심히 '어륀지'만 연습하고 있지.. 과연 그 머리 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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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보다 한국판 제목이 더 어울린다. 주인공의 마음의 행적의 갈래가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된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표현이지만 묘하게 공감되는 희안한 소설문구들. 미국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런 운명에 굴복해야만 하는 인간의 한계를 묘사한 소설이라고 극단적으로 간략하게 생략해버릴수 있는 위험이 있는 픽션이지만....겉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는 미국사회에서의 유색인의 마음의 행로가 다이나믹하고 치밀하게 묘사되어있써 어느새 거기에 휘말려 버린다..뒤로 갈수록 이 소설 끝나면 무슨 재미로 사나..생각이 들어버린 오랜만에..정말 오랜만에 느낀 완독후유증 을 느낀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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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이방인'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면 '소외'가 아닐까. 마르크스로에 의해 널리 알려진 개념인 '소외'는 비단 생산의 과정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맑시즘과 정신분석학을 결합시킨 프롬에게 소외는 현대 사회의 병리성, 특히 소비을 통해 야기된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와 프롬은 소외를 경제적 현상과 관련지어 설명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원한 이방인'에서 표현되는 소외는 인종적 차원에서 일어난다. 주인공 헨리 박은 이민 2세대로 능수능란하게 영어를 구사한다. 그럼에도 그는 혹시 자신의 억양이 아직도 어색하지 않나 하고 언제나 신경을 쓴다(35쪽).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하이데거나,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언어철학자들의 명제를 생각해 보면, 헨리의 언어생활은 그 자체로 불안전하고 소외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WASP가 아닌 황인종. 그것도 일본인도 중국인도 아닌, 한국인. 다사다난한 한국의 근대는 미국에서도 비슷하게 재현된다. 헨리의 아버지는 도미 과정에서, 엔지니어 신분으로부터 야채장수로의 급격한 신분 하락을 겪는다. 억척스런 장사 기질로 돈을 모으는 데 성공하지만, 강도를 만나고, 아내를 먼저 잃는 등 결코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삶을 이국에서 마감한다. 기회의 땅이라고 인식된 땅에서 돈으로써 부유층의 거주 지역에 입성하지만 영원한 이방인으로 말이다. 존 강은 헨리 박의 또 다른 모습으로 읽힌다. 스파이의 세계에서 어두운 일을 하는 헨리에 비해 존은 엘리트 코스를 착실히 밟아 백인 주류 세계에 편입 중이다. 그는 차기 시장 후보에 출마할 계획이다. 헨리는 존을 의심과 동경의 눈초리로 쳐다 본다. 하지만 존 역시 인종적 갈등과 주류 세계로부터의 멸시를 감당 못 하고 주저 앉고 만다. 그조차 영원한 이방인이었던 셈이다. 최근 들뢰즈에 관심이 생겨 그 쪽 책을 읽고 있다. 입문서 정도밖에 못 읽었지만, 탈근대의 핵심이 차이의 긍정이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민족, 계급, 인종, 젠더를 횡단하는 차이의 수용이란 문제 제기에 대해 '영원한 이방인'은 암울한 답을 제시한다. 위계질서를 벗어나, 각각의 차이가 그 자체로 인정될 수 있는 사회는 유토피아에 불과한가. 어두운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