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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성로마제국은 신성하지도 로마 같지도 심지어 제국 같지도 않다"는 유쾌한 지적과 "웃음은 자신이 우월하다는 사고의 결과물"이라는 냉철한 사고의 소유자. 귀족에게 모욕을 당하자 검술지도를 받아가며 앙갚음하려다 오히려 망명에 오르게 된 다혈질의 사나이. 이처럼 매력적인 혁명 전야의 사상가 볼테르를 오래 전부터 찾아 읽고 싶었다.
그러나 <철학서간>은 78년도에 출간되고 오래 전 절판되었기에 단념하였다가 이번에 <캉디드>를 읽게 되었다. 내가 읽은 <캉디드>는 “지만지고전천줄” 출판사에서 올해 출간한 판본으로 <낙천주의자, 캉디드>가 아니다. 역자가 원저 앞에 “낙천주의자”라고 적극적으로 부연함이 부적절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에 손에 닿지 않았던 것이다. 출판사 “지만지고전천줄”의 <캉디드>는 이해를 돕는 200여 개의 각주가 달려 있었지만 가격이 다소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따로 대형서점에 따로 발걸음을 하여 만나게 된 <낙천주의자, 캉디드>이다. 2.
내가 다른 출판사의 책을 읽고 <낙천주의자, 캉디드>의 리뷰를 쓰고 있음은 놀랍게도 역자가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바라던 각주가 <낙천주의자, 캉디드>에도 대개 달려 있었다. 즉 대동소이하였다. 반면에 편집과 도판은 오히려 신판보다 탁월하며 가격은 보다 저렴하였다. 그럼에도 신판이 나왔으니 동일한 역자의 구판은 더 이상 간행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달리 고민할 필요도 여유도 없다. 구매결정.
<캉디드>의 줄거리 자체는 단순하다. 캉디드에게 고난과 불운이 계속되는 가운데 삶에 대한 태도를 묻고 있다. 결말에 이르러 일상적인 노동을 통해서 설혹 고단한 삶일지라도 지탱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보다 주목할 만한 사항은 성직자, 유대인, 원주민, 여성에 대한 볼테르의 인식과 묘사이다. 3.
성직자에 대한 볼테르의 깊은 적대감은 소설 곳곳에 배치되어 성적 일탈과 축재를 비난한다. 이는 당시 종교전쟁의 상흔과 분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볼테르는 런던의 증권거래소를 찬양하면서 그 곳에서는 종교가 어떤 제약도 발하지 못하는 공간임을 역설한 바 있다.
유대인에 대한 증오도 만만치 않다. 가톨릭에서 원칙적으로 금하는 대금업은 현실에서는 상업발전과 연계되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기에 외적 존재인 유대인에게 할당되었다. 토지를 부여받을 수 없는 유대인에게 대금업은 생계를 위한 거의 유일한 직종이었으나 이로서 더한 차별과 탄압을 받게 된다. <캉디드>에 출현하는 유대인의 모습은 어떠한가? 종교재판소 재판관과 함께 묶여 캉디드에게 살해당함은 우연일 수 없다.
원주민에 대한 시각 역시 전형적이다. 황금의 가치를 모르는 순진하고 착한 원주민과 식인을 하는 야만의 원주민이 불편한 공존을 이룬다. 유럽인의 식인공포는 지나치게 과장되고 끊임없이 변주된다. 캉디드가 절대절명의 순간 기독교의 교리로서 원주민을 설득하고자함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식인이 아니면 원주민은 엘도라도로서 다음의 모험을 위해 존재할 따름이다.
여성은 앞선 성직자, 유대인, 원주민보다 심각하게 파괴되어 있다. 그것은 캉디드의 행복에 종속되어 본연의 개성을 잃게 되는 퀴네공드에게서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다. 캉디드는 징집, 종교재판, 난파와 지진 등 온갖 재난을 모두 겪으면서도 사랑하는 퀴네공드와 함께 살겠다는 희망을 품고 산다. 반면 퀴네공드는 남성들의 전쟁 속에서 유린되며 유대인, 종교재판관, 총독 등은 계속하여 그녀를 갈취하고자 한다. 여성의 이와 같은 운명은 전대인 노파의 삶에서도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부여된 유일한 ‘미덕’이자 ‘무기’인 미모조차 캉디드에게 최후의 불행은 안겨주기 위한 장치로서 철저히 파괴된다. 끔찍하다. 캉디드에게 자신의 동생을 넘겨줄 수 없다는 남작에게 캉디드는 소리친다.
“...이 곳에서 겨우 설거지나 하고 있던 당신의 누이를, 하지만 저렇게 추해졌는데도 내가 그녀를 아내로 삼겠다고 했소. 그녀를 생각하는 나의 이 착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아직도 우리의 결혼을 반대하고 있다니! 화가 치미는 대로 한다면 당신을 다시 죽이고 말았을 겁니다!”
퀴네공드는 이후로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추해져갔고, 성질도 까다로워지고 참을 수 없게 변해갔다”고 한다. 하지만 퀴네공드는 캉디드와 살며 과연 행복했을까? 퀴네공드의 입장에서 <캉디드>되받아쓰기가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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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캉디드가 독일의 한 성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시작해 겪게 되는 파란만장한 역경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 소설 전체의 줄거리이다. 캉디드는 그의 스승 팡글로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최선이며, 그것이 신의 목적이고 은총이라는 주장을 하는- 의 영향을 받아 여행에서 겪게되는 많은 고통들을 모두 신이 준비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낙천주의적 모습을 보여준다. 역경을 반복해 보여줌으로 해서 과연 이렇게까지 연속되는 고난이 신이 여기는 최상이겠느냐를 독자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행하는 도중에 만나는 성직자들, 귀족들의 생활상을 풍자적으로 묘사해 사회의 부조리와 부패한 모습을 끊임없이 들추어낸다.
이야기의 구성은 있을법한 일을 꾸며낸 일반적인 소설의 틀을 벗어나있다. 읽다보면 도저히 현실에 있을법한 일이라고 수긍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고난을 만들어내고 절묘한 상황에 누군가가 나타나 도와주는 설정으로 다음 이야기를 이어간다. 잠깐 숨을 돌리게 한 후 또다시 역경에 처하고 다시 벗어나고를 반복하는 것이다. 과장된 고난과 이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야기가 끝나기 직전까지- 낙천적인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 캉디드의 모습을 통해 그의 비판없고 생각없는 낙천주의를 비웃게 된다. 그리고 캉디드의 후반부터 여행을 함께 하게 되는 염세주의자 마르탱을 함께 보여줘 주인공의 맹목적인 낙천주의를 더욱 부각시킨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이 낙천주의를 극으로 몰아부쳐 비웃길 바라는 풍자소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맘껏 비웃을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이 계속 낙천주의를 선택할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는지, 왜 그렇게 낙천주의를 고수하는지 혹은,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최선을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과연 옳은지를 단 한번의 재고조차 없이 무조건적으로 믿는 주인공의 모습은 충분히 어리석어 보였지만, 나는 낙천주의 자체를 비웃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이 삶의 법칙이라면 틀린 것은 사실이다. 세상은 원인과 결과가 명확한 일들이 훨씬 많고 사건은 신의 뜻에 따라서가 아닌 인간 -탐욕스럽거나 선하거나 한- 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세상을 신의 뜻이라는 잣대 하나로 해석하기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이 허다하다. 캉디드가 겪은 일들도 바로 그런 일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낙천주의는 삶의 법칙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한가지 방식이라 생각한다. 이런 일, 저런 일 많은 삶을 살아가는데 내가 겪는 그 일들을 바라보는 해석 방식 중의 하나라는 말이다. 힘든 일이 일어나도 곧 괜찮아 질거라는 믿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을거라는 믿음, 이것은 사람이 세상을 좀 더 씩씩하게 살아나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빠져나가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이제까지 끝이 안보였으니 아마 끝도 없을거라는, 터널을 빠져나올 수 없을거라는 사람과 시작이 있었으면 끝이 있겠지 하고 믿고 가는 사람, 끝이 있든없든 걸어야지 별수있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과연 어느쪽이 터널을 빠져나갈 힘이 더 생기겠는가. 낙천주의란 그런 것이다. 쨍하고 해뜰날이 있을거라 믿고 사는 것. 미래를 바라보는 눈이 긍정적인 사람에게 현재의 고난이 모두 신이 준비해 둔 것이라는 믿음이 더해지면 그것은 자동차에 더 강력한 모터를 달아준 격이 된다. 다만 나는 캉디드와 같은 낙천주의는 비난하고 싶다. 캉디드에게는 비판 정신도 없고, 반성도 없고, 대책도 없다. 자신이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비판도 없이 그저 스승의 가르침 하나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사수하고, 반복되는 고난에 대해 되짚어보고 교훈을 얻거나 반성하는 기색도 하나 없고,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해나가야 하겠다는 제대로된 대책도 없다. 그저 죽기 직전에 누군가가 나타나서 살려주면, 와-하고 좋아하고는 역시 신의 뜻이 최선이라더니 맞구나로 끝이다. 이런 캉디드가 끝까지 살아남았던 것은 볼테르가 살려두어서지 신의 최선이어서가 아니다. 세상은 이 소설처럼 누군가가 뜬금없이 나타나 목숨을 구해줄 때 보다는 삶을 이끌어나가려는 자신의 노력이 필요할 때가 더 많다. 살기가 힘들때는 내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살아지고’ 있는 것처럼, 그저 살아있으니까 사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얼른 기운을 추슬러 다시 삶을 짊어져야 한다. 살아 나가야 한다. 소설의 마무리를 보면 끝까지 논쟁을 하는 팡글로스와 마르탱의 대화 끝에 그는 맹목적 낙천주의를 고수하기 보다는 그만 농장으로 ‘일’ 을 하러 가자고 한다. 드디어 낙천주의 하나 덜렁 쥐고 삶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수동적 자세에서 논쟁하기를 멈추고 무언가를 만들어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세상이 어느 하나로만 해석되지 않는 다는 것을 그도 결국 알게된 것 같다. 그리고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든, 어떤 생각이 옳든 그것과 상관없이 삶은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비관주의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런 결말이었다면, 진작에 마르탱의 설득에 넘어가는 것으로 결론내었으면 그뿐이다. 과연 그는 낙천주의를 아주 버린 것일까? 삶은 어떻게든 꾸려나갈 수 있는 것이지만 이왕 선택할 수 있는 것, 능동적 낙천주의로 삶을 살아갈 때 세상은 한결 살아갈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볼테르도 그 말이 하고 싶었을 것이다. 수동적이고 생각없는 낙천주의를 버리고 능동적으로 살아가자고. 능동적 낙천주의로 재무장한 캉디드가 속편에 등장한다면 훨씬 흥미진진한 소설이 될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수많은 성공서에서 그런 캉디드를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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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낙천주의자 캉디드
낙천주의자, 캉디드의 세계..
이건 유쾌한 서영씨가 꿈꾸는 삶이 아니야.. 막연한 낙천주의 할려면 뭘제대로 알고는 해야할꺼 아니야.. 그래서 낙천주의에 대해 알고싶어서... 두권의 책을 샀지.. 그중 하나... 낙천주의자, 캉디드였어..
18세기 봉건주의와 왕의 전제정치에 맞서 나타난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사건이 많기 때문에 내용 전개가 지루하지 않았고.
낙천주의자였기에 가능했던 퀴네공드와의 결혼.. 낙천주의란 무엇인가... 캉디드가 퀴네공드를 찾으러 다닐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 |
| 캉디드는 이 책의 주인공의 이름이면서 불어로 ''천진난만한'', ''순진한''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낙천주의란 말은 어떤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비관주의라는 말의 반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주석을 참고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낙천주의란 ''세계는 최선의 것이며 악의 존재조차 신의 예정조화를 돕고 있다''라는 개념이다. 그러나 캉디드가 겪는 이 황당한 이야기는 볼테르 자신이 인생에 대해 내리는 액면 그대로의 낙천주의는 아닌 듯 하다. 왜냐하면 ''낙천주의자''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만큼 아이러니를 떠올리게 하는 글을 좀처럼 만나보지 못했다. 주인공 캉디드는 마치 <허풍선이 백작="">의 여행처럼 황당하고 <향수>의 그루누이처럼 천신만고의 길을 가면서 세계 여행을 한다. 세상은 모든 것이 옳고 최선의 것으로 되어 있다고 정말 철썩 같이 믿고 있던 우리의 순진남 캉디드. 모든 것이 완벽했던 성에서 사랑 때문에 내쳐진 캉디드가 겪는 여행 이야기는 한마디로 겪을 일 다 겪어보기로 예정된 한 남자의 이야기 같다. 결국 시골의 한적한 마을에 도착해 캉디드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추론은 그만두고 일합시다. 일을 하는 것만이 삶을 견딜만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을 생각하면 이것이 정말 볼테르가 보여주는 ''낙천주의''인지 어리둥절하기만하다. 그런데 잠깐 생각을 해보니, 볼테르가 살아간 시대(1700년대 후반)와 현대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개념이 같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즉, 이 책에서 여기 저기 튀어나오는 철학적 용어들은 볼테르 시대의 산물이고 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서 쓰임이 있다는 생각이다. 역자는 이 책을 철저한 철학 소설이면서 유럽인의 의식세계와 풍속까지 엿볼수 있는 재미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읽고 나니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몇가지 잡동사니지만 호기심이 간 것들을 정리해보면, 17세기부터 외국인이 일본에 가는 것이 금지되었는데 네덜란드인만이 나가사키와 교역의 권리를 얻었다는 점. 당시 교역을 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밟는 배교행위를 해야만 했다. 성직자의 동성애가 만연했던 것으로 묘사되어있는데 사실인 궁금함. 외부와 단절된 채 금은보화를 하찮게 여기는 신비한 엘로라도에 대한 묘사. 당시에 영국만이 사상이 지유가 있었고 유럽은 철저하게 인간의 본성이 억압당하는 시대였다는 설명. 등등 심각한 철학적 문제 제기나 논쟁거리를 제공하는 책은 아니지만 어쩐지 낙천주의를 풍자하면서도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 볼테르의 입장이 바로 인생의 불완전함이고 이 세상의 부조리가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향수>허풍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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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은 현재의 상태와 다르게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만큼. 그 모두는 필연적으로 최선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즉, ‘모든 것은 잘되어있다.’라는 주장은 어리석은 것이며 ‘모든 것은 최선으로 이루어져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16p~17p-
이 이론은 ‘순진한’ 이라는 뜻을 이름으로 가진 캉디드라는 어린 소년에게 스승 팡글로스가 가르쳐주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낙천주의자, 캉디드>의 주인공 캉디드는 이 이론을 진리로 여기고 있었다.
즐겁게 최선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살던 캉디드는 그가 사랑하는 퀴네공드에게 입을 맞추자마자 그녀의 아버지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고 그 길로 쫓겨나게 된다. 내쭃겨진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세상의 실제 모습은 캉디드 스스로 최선의 모습이라고 위로하긴 했지만,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최선의 모습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캉디드에게 다가온 것은 자유가 억압된 군대라는 세계였고, 그 다음으로 전쟁, 지진, 종교 화형식같은 사건들이 계속 이어진다. 한편, 죄를 피해 도달했던 엘도라도에서 싣고 온 다이아몬드로 부자가 되었을 때는 그의 주위에는 사기꾼들만 득실댄다. 볼테르는 세상의 사건들을 통해 캉디드에게 냉혹함을 알려준다.
캉디드에게만 세상이 잔혹했던 것은 아니었다. 책 속의 퀴네공드의 경험. 남작의 아들의 경험. 마르탱의 경험. 팡글로스의 경험. 특히, 한때 공주였던 노파가 만났던 경험도 캉디드의 눈으로 본 것 보다 훨씬 악독하고 잔인한 세계였다. 그랬기 때문에 저자 볼테르는 그녀의 하소연을 위한 공간을 할애해 준 것일지도 몰랐다.
캉디드는 그가 겪고 들은 모든 탐욕, 폭력, 미신, 기만 앞에서도 ‘모든 것은 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의심하지 않는다. 엘도라도에서 얻은 부를 사기 당했을 때 만나게 된 마르탱과 '충족이유율'이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만난 사람들 (파케트, 지로플레, 포코퀴란테)이 캉디드의 믿음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말함에도 의심하지 않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작의 아들과 팡글로스가 극적인 만남을 통해 다시 등장하고, 캉디드와 마르탱에 팡글로스까지 합세하여 이어지는 논쟁은 마지막 장소인 콘스탄티노플에서 싱겁게 끝을 맺는다.
캉디드 일행과 그곳에서 만난 이슬람 승려와 터키 노인의 대화는 캉디드와 마르탱로 하여금 “이 세상이 최선이냐 그렇지 않느냐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그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작은 것을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결말을 얻어내게끔 한다.
이슬람 승려 : “악이 존재하건 선이 존재하건 무슨 상관인가? 대술탄께서 이집트로 배를 보낼 때 배 안에 쥐들이 편히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염려하시던가?” -246P-
터키 노인 : “공무에 관여하는 사람은 가끔 비참하게 죽는다. 나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전혀 알고 싶지를 않아. 나는 내가 가꾸는 밭에서 나는 과일을 그곳에 내다파는 걸로 족해. 노동은 우리를 커다란 세 가지 악, 즉 권태와 방탕, 그리고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걸세.” -247P, 248P-
마르탱 : “추론을 그만두고 일합시다. 일을 하는 것만이 삶을 견딜 만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249P-
캉디드 : “정말 멋진 명언이로군요!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농원을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250P-
결국, <낙천주의자, 캉디드>를 통해 볼테르가 라이프니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세상이 선한가? 악한가? 논쟁하는 것은 살아가는데 그리 중요하지 않거든? 입 아프게 떠들지 말고, 당신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꺼! 그게 더 중요한 문제야.”정도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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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를 읽지 않았다면 캉디드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스쳐가는 수 많은 책들 중에서 나와 인연이 닿지 않으면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는 책들 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담 보바리'의 해설에서 캉디드가 나온다. 주인공 보바리 부인이 연애소설을 읽지 않고 한번이라도 캉디드를 읽었더라면 그렇게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았을 거라는 견해가 들어가 있다. 도대체 볼테르의 책이 어쨌기에 이 정도란 말인가. 당장 구입해서 읽어 봤지만 '철학소설'이라는 장르와 흡인력 없이 다가오는 책의 첫 부분을 읽다 팽개쳐 버렸다. 그게 작년의 일이었다.
1년이 지난 후에 이 책을 꺼내든 것은 그 사이에도 다른 곳에서 볼테르의 책에 대한 언급이 많아 궁금증만 는 이유도 있었다. 거기다 읽다만 책의 목록에 올라와 있는 '낙천주의자 캉드디'가 몹시 눈에 거슬렸다. 저걸 빨리 읽어야 할텐데 하다가 늘 망설임만 커가고 있었다. 큰맘을 먹고 다시 꺼내들고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그러나 왠걸. 책을 들자마자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분명 작년에는 흡인력 없다고 팽개쳐 두었던 책이였는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역시 책도 읽는 때가 있는 것일까. 이런 내막이 있었기에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무엇 보다도 1년 넘도록 질질 끌었던 책을 읽어 버렸다는 사실이 너무 후련했다. 그러나 책 속의 캉디드를 생각하고 있노라면 이런 후련함이 오래 가지 않는다. 낙천주의자 캉디드라고 해야 할지 불행한 캉디드라고 해야 할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캉디드는 툰더 텐 드롱크 성에서 남작의 딸 퀴네공드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쫓겨난다. 지상의 낙원이라 여겼던 그 성에 아름다운 퀴네공드와 철학자 팡글로스 선생님을 두고 온다는 사실이 캉디드는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때부터 캉디드는 수 많은 불행을 겪고 놀라운 만남을 갖게 된다. 끔찍한 전쟁, 죽음, 사기등 그 안에 내제된 삶의 철학을 겪으며, 유럽과 아메리카가 대부분이었지만 여러 대륙을 여행하게 된다. 자신의 운명에 드리워진 삶을 피하다 보니 그렇게 여러 곳을 여행한 결과도 있었지만, 캉디드는 스승 팡글로스의 진리를 확인하고 싶었다. '모든 것은 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스승의 말을 무작정 좇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읊어대는 이 구절 때문에 캉디드의 곁에는 크고 작은 일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캉디드가 팡글로스의 말을 이해하고 실천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 그 갈급함 때문에 그가 여행을 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 과정에서 살인과 배신을 일삼는 캉디드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 하다.
퀴네공드를 구하려고 그 모든 것을 감행할 때도 많았지만 그녀는 캉디드의 환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때가 더 많았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틈타 계획없이 동선을 끌어가는 모습은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난해하게 만들었다. 그가 소중해 마지 않는 사람들이 죽었다 살아나고 꿈의 땅에 도착하기도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찾고자 하는 것을 알아가기엔 세상은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팡글로스와 캉디드는 '모든 것을 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를 믿으며 낙천적인 사고를 갖으려 하지만 그들의 상황은 그런 낙천주의를 민망하게 만드는 것들 뿐이었다.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은 물질을 뺏앗거나 얻으려고 달려드는 이들에 지나지 않았으며, 도처에 그들을 위협하는 것들이 널리고 널려 있었다. 그들이 세상의 중심이고 심오함을 품고 이상향을 좇는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시골에서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는 친구들과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할 운명에 처하고 만다.
거기다 캉디드가 엘도라도를 버리면서까지 찾아 나섰던 사랑하는 퀴네공드는 생명럭을 잃어 버린 여인으로 전락하고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따라 그녀와의 결혼을 감행한다. 결국 캉디드에게 남은건 작은 땅과 오두막, 변해버린 여인, 그리고 독특한 친구들 뿐이다. 그들이 그 공동체를 이끌어 가지 않는다면 당장에 먹고 마실 것이 사라져 버리기에, 철학에 대해 진리에 대해 운운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시골의 오두막은 그들의 처음 열의를 모두 다 빼앗아 버린 종착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퀴네공드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 철학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적이 있다. 한때는 철학을 운운하고 남작의 딸로써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던 그녀였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위치와 그녀에게 닥친 불행은 그 모든 것을 앗아가고 말았다. 비단 불행이 그녀에게 닥친 것만은 아니지만 자신이 가진 것조차 잃어 버릴 정도의 열정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퀴네공드가 성에서 호위호식하며 살고 캉디드만이 온 세상을 떠돌았다면 과연 그녀 나름대로의 철학을 지킬 수 있었을까. 혹은 캉디드는 아름다운 성에서 그녀만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고 생각했을까. 그 안에서는 낙천적인 사고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캉디드가 여행하면서 겪게 되는 대부분의 불행이 낙천주의를 비판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옹호한 것도 아닌, 세상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물론 소설적인 요소의 드러남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캉디드와 그의 주변 사람들이 시골 농가에서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끝으로 맺어지는 책이 의미를 간과하기란 쉽지 않다. 희망적인 요소를 조금은 남겨 두었다 하더라도, 캉디드가 겪은 것들에 비하자면 무엇을 버리고 건져야 하는지 헷갈릴 뿐이다. 그런 여지의 채움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나 역시 그들만의 독특한 공동체와 의식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들이 결코 조화를 이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작은 세계를 매일매일 마주쳐야 하는 그들에게서 더 이상의 불행은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한가닥의 긍정적인 사고라도 붙들기를 바라는 마음은 절대 그들을 동정하고 있음이 아니다. |
| 지금으로부터 약 250여년전, 볼테르의 철학소설 캉디드. 옛날 책이라 무지 어려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단 술술 읽히는 책이다.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주인공 캉디드가 온갖 인생역경을 겪으면서도 낙천주의를 지켜나가려 한다는 줄거리인데, 그의 곁엔 낙천주의자인 스승 팡글로스와 여행중 만난 비관주의자 마르탱이 있어 이념의 대립을 주도한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그에게 있어 중요한 인물은, 아름다운 연인 퀴네공드. 퀴네공드는 그의 삶의 최선이자 목표 그 자체였다. 이 소설은 시대상을 반영한다손 치더라도 상당히 허무랭랑한 구석이 많아 일종의 우화로 보아도 좋을 듯 싶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 이르러서는 신랄한 현실비판과 풍자로 인해 허구가 오히려 현실을 강조한다고나 할까.. 게다가 책의 말미에 실린 볼테르의 화려했던 연대기를 보게되면, 캉디드의 삶이 그의 삶과 너무나 닮아있어 이것이 그의 자전적 소설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는 듯.. 어쨌튼 그의 책을 통해 들여다본 250여년전의 삶. 세상. 지금과 별반 다른게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는 반복된다더니.... 나에겐 이 책의 비관 Vs 낙관의 대립보다도, 역사는, 인류는 과연 발전하는 것일까라는 회의가 더 크게 자리를 잡는다... 특히 책의 말미에 이르러 추해진 퀴네공드(아름다움을 잃었다고 표현해도 될것을 꼭 '추하다'는 단어를 써야했을까? 원문이 궁금해지는 부분이다.)에 대한 캉디드의 생각이라든지, 그녀의 오빠가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하는 귀족의식은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게 하는.. 그것이야 말로 '추함' 그 자체가 아닐런지.. 그리고 결말이 반지의 제왕만큼이나 의외성이 있으면서 의미심장해서, 책을 읽고 난 여운이 향기롭다. 수백년을 거쳐 내려오며 칭송을 받을 만큼, 인정할만한 수작! 이 책을 통해 2004년을 살고 있는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250년 전의 볼테르를 생각해본다... PS> 책의 크기와 모양새, 디자인이 고전소설을 '읽고 싶게' 잘 포장해준다. 특히 책의 크기는 한 손에 들어도, 양손에 들어도 느낌이 참 좋은 크기.. |
| 앙드레 지드는 바이블, 세익스피어 도스도예프스키와 함께 캉디드를 최고로 꼽았다는데,, 난 사실 그냥 그랬다. 내가 앙드레 지드와 같은 지성이 아니라서 그런가? 물론 내가 그다지 철학적인 인간이 아니라는것은 인정한다. 18세기 계몽사상에 대해서도, 프랑스와 독일의 7년전쟁에 대해서도 배경지식은 없는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어찌 캉디드의 역사적인 위트와 페러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내가 이 책에서 감동 받을 수 없엇던 이유는 사고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성의 문제가 아닐지.. 우리가 홍길동전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리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 처럼....(혹시 나만 매말라서 감동을 못 느낀건 아니겠지?^^) 하지만 이 책의 메세지는 분명하다. 팡글로스의 가르침,,, '모든 것은 최선의 상태로 되어가고 있다.'가 아니라, 노동의 중요함이다. 한 노인이 캉디드에게 했던 말,, "노동은 우리를 커다란 세가지 악, 즉 권태와 방탕, 그리고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쉬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이것이 계몽사상의 가르침 인가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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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주의자, 캉디드’는 계몽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로 알려져서 조금은 고리타분한 느낌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는 흥미롭고 쉽게 읽히는 작품이었다. 즉, 나름 재미있다. ‘모든 것은 최선의 상태다’라며 항상 모든 것을 긍정하는 순수한 청년 캉디드가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삶에 대한 새로운 입장을 갖게 된다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이기는 하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그가 겪는 경험들은 지금-현재에 읽게 된다고 해도 꽤 흥미로운 구성을 갖고 있다. 항상 긍정하는 캉디드는 절망과 고통, 불운과 배신 등을 경험하며 자신이 갖고 있던 긍정을 버리고 점점 더 절망과 비관적인 시각을 갖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고 있다. 그리고 그는 부정을 경험한 다음에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마치 변증법과 같이... 그는 두 개의 시각을 경험하며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작품에서는 진실된 사랑과 우연한 만남을 통한 깨달음 그리고 격변하는 세상을 풍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유럽의 영향력을 직간접적으로도 느낄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모험소설이기 보다는 철학소설이기 때문에 철학적 물음과 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으로 읽히게 되고 있다. 모험소설의 구조를 갖고 있는 철학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기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철학적인 물음 속에서 실천적이고 현실적은 결론을 찾는 마지막은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긍정 아닌 긍정은 묘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개인적으로는 작품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가 세상을 향한 비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마르탱이었는데, 사람에 따라서 선호하는 캐릭터가 많이 다를 것 같다. |
| 작가 볼테르 철학적 사상이 표출되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바로 느끼게 해주는 글이다. 주인공 캉디드의 인생유랑?과 그과 연계된 각종 인물의 삶의 굴곡에서 낙천주의와 비판주의 대립 그리고 중세 시대의 인간에 대한 사고 등이 많이 표현된다. 퀴네공드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은 그 자신이 이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목표이자 보람이라고 생각하며 유럽에서 아메리카, 아프리카 지역을 탐험하면서 겪는 고초속에 낙천주의에 대한 회의와 포기에 유혹되지만 매번 삶을 희망적으로 긍정적으로 보게 하는 사실을 발견하는 주인공. 이상세계인 엘도라도의 삶의 묘사는 정말이지 유토피아적이기만 하다. 그리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정착한 농원에서의 삶은 현실속에 유일한 결과물이자 즉시해야 할 사실임을 알게 해준다. 철학주의에 대한 선전용? 목적소설로 무척이나 따분하면서도 매끄럽지 못한 표현이 원문의 그대로인지 번역의 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끝가지 읽고 나니 이런유의 소설도 쓸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