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다 연극을 볼 때면 배우에게 감탄부터 하게 된다. 저 많은 대사를 어떻게 막히지 않게 입에 붙도록 외우기까지 몇 번이나 희곡을 읽었을까. 또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먼저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희곡 -‘이(爾)’. 영화는 자주 보는 편이지만, 연극은 일 년 가야 한 편이나 볼까 말까하다 보니 몇 년 만에 읽은 건지 가물거릴 정도로 오랜만에 희곡을 감상했다. 몇 년 전 입센의 '인형의 집'을 읽은 이후 처음으로 끝까지 읽은 희곡이었다. '이'는 책 표지에도 나와 있듯이 배우 이준기씨를 스타로 만들어준‘왕의 남자’의 원작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이(爾)는 왕이 신하를 높여 불렀던 호칭인데 이 작품 속에서는 연산군이 공길을 부를 때 ‘이’라고 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은 신분의 두 사람, 만인지상 군주 연산과 멸시와 천대 속에서 살아가는 만인지하 천민인 광대 공길. 연산군은 자신을 뿌리에서 흔들어대는 외로움을 온갖 놀이와 유희로 애써 잊으려하고, 공길을 통해 놀이, 성애를 충족시킨다. 공길은 왕의 입맛에 맞는 무대를 펼치고, 점점 권력에 길들여져 간다. 그런 공길을 보다 못한 장생은 그것은 광대의 길이 아니라고 일갈해 보지만, 공길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장생: 얼빠진 놈! 왜 놀고 왜 웃겨? 억지로 짜내는 게 웃음이야? 맘에도 없는 소리로 웃겨야 하고, 살살 꼬리치며 눈치나 봐야 하고. 잡놈들의 짓거리야. 잡놈의 짓.(경대를 얼굴에 들이밀며) 니 꼬라지를 좀 보라구. 이 꼴이 그렇게도 좋아? 이 잔나비 같은 자식아!(32~33) 공길: 승명패! 이걸 보이면 뭐든지 가질 수 있고 누구든지 부려, 오라면 와야 되고 가라면 가야 돼. 이게 뭐야? 힘이라는 거야. 내가 이제 그걸 가졌어. 왕이 나에게 힘을 줬다고. 이젠 예전에 내가 아니야. 왕도 내가 울고 웃겨. 이걸 깊이 새겨. 안 그러면 내가 너를 죽여. 나 무시하는 놈 다 죽일 거라구. 그러니 너도 입 조심해.(34) 자신의 가슴이 벌렁거릴 때만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는 천생 광대인 장생은 광대의 길을 두고 공길과 갈등을 빚게 된다. 거기에 공길에게 연산군의 총애를 뺏길까봐 노심초사하는 장녹수의 질시까지 해서 이 작품은 공길-장생, 그리고 공길-녹수, 두 갈등을 주축으로 전개된다. 녹수가 공길을 해치려는 음모를 가하자, 장생은 공길을 지켜주기 위해 기꺼이 광대답게 죽어갔다. 그 뒤 공길이 펼친 놀이판에서 권력을 소재로 삼자 팽팽한 긴장감이 드러났다. 공길이 다시 광대로 돌아온 것이었다. 대사에 크게 의존하는 희곡 장르라는 점에서, ‘이’의 대사 깊이는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주제의식을 돋보이게 했다. 특히나, 인생은 한바탕 꿈인데 그것이 왜 이리 아프기만 한 것이냐는 연산의 토로나, 비단 도포에 빠져 얼빠졌던 자신을 버리고 다시 가슴이 벌렁거리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됐다고 고백하는 공길의 대사는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이나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일상적인 생활을 드러내는 드라마 속 대사와는 확연하게 차별이 됐다. 이준익 감독이 왜 이 작품을 영화로 각색했는지, 충분히 그 매력을 느낄 수 있었고, 우리 원작이 드문 연극계에서 2000년 초연에서 오만석이 공길역을 맡아 주목받는 배우로 발돋움하게 된 이후 지금까지도 여전히 인기를 누리는 이유가 충분히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요즘처럼 가벼운 가벼운 트렌드를 좇는 추세에서 '이'는 읽고 나면 배우의 육성과 몸짓을 무대에서 직접 감상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켰다. 그만한 깊이와 무게가 실려있는 작품이었다.
군주 연산과 광대 공길의 마지막이 비극임에도 덧없지도 비장하지도, 안타깝지도 않게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마 영화 ‘왕의 남자’ 의 엔딩신이 강하게 각인돼 있던 덕이 아니었나 싶다. 희곡 ‘이’에서와 달리 ‘왕의 남자’에서는 반정군이 물밀듯 밀려오는 그 긴박함 속에서 공길과 장생이 줄 위에 올랐다. 그리고 인정전 현판이 보이는 가운데 구름이 한껏 끼어 있던 높은 하늘을 향해 한껏 비상하는 공길 (이준기)과 장생 (감우성)의 몸짓에서 화면이 정지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 마지막 장면을 연상한 덕에 조금은 덜 아프게 연산군과 공길의 마지막을 지켜볼 수 있었다. 왕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광대에게는 광대의 길이 무엇인지 절규하게 했던 작품 ‘이'. 그 물음은 결국 사람답게, 왕답게, 광대답게 사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저마다의 존재 의미에 대해 돌아보게 해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