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아주 바람직한 의도로 출발하는 듯 보인다. 현대 철학자들의 이론들에서 미학적이론들을 추려내 현대미학의 흐름을 짚어내려는 의도인 것 처럼..... 그러나 이 책의 첫 장을 넘기면서 짜증의 연속이었다. 수많은 인용글들을 마구 늘어 놓고 저자는 나몰라라 하는 식의 태도로 한 챕터 한 챕터를 마무리 하고 있다. 각각의 이론가들의 이론을 요약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지면을 동어반복과 산만한 구성으로 일관하고 있는 수박 겉핧기식 이론서가 저주스럽게도 또 한권 등장했다. 도대채 이 책의 출판의도가 무언지 다시 한 번 궁금해 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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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중권을 좋아하기 시작한게 언제였을까. 중앙일보에서 그 유명한 ‘젖소부인과 이문열‘을 읽었을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인물과 사상에 실렸던 칼 같은 논쟁을 봤을때부터였을까. 하여튼 내게 진중권은 여전히 ‘논객’이지 ‘미학’을 공부하는 학자는 아니다. 어쩌면 첫인상은 그래서 중요한 것일지도.
그랬기 때문일까. 이전에 읽었던 진중권의 ‘앙겔루스 노부스’는 문장이 나에게 착착 감기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재밌게 읽었는데 반해 본격적인 ‘강의’로 읽는 이 책은 많이 어렵다. 읽을 당시 인상 깊어 접어두었던 페이지를 다시 들추어봐도 그렇다. 인상이 깊기는 하지만 아직 내 공부가 모자란 탓인지 문장의 진의를 100% 알아낼 수 없다.
철학이고 미학이고 경제학이고 간에, 처음은 늘 어렵다. 일정 수준의 공부가 쌓이기 전까지 그 공부를 이해하는 읽은 벅차다. 그게 진중권의 미학 강의가 내게 남긴 교훈이라면 교훈이랄까. 지적인 열등감에 빠지기도 했고 미학 이해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기도 나는 결국에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쌓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상깊은구절]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사물(상품)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 만보객과 창녀, 이 두 주인공은 마이크로 코스모스처럼 그 몸 안에 사회 전체의 관계를 표상하는 자본주의의 모나드다. 하릴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만보객은 자신이 상품을 구경한다고 믿지만 실은 자신을 노동력이라는 상품으로 전시하고 다니는 중이다. 밤거리의 창녀들 속에서는 아예 상품과 판매자가 하나가 된다. 세계박람회는 상품들의 우주를 건설한다. 진열대에 전시된 수많은 상품들은 “무기물의 섹스-어필”이라는 물신주의를 실현한다. 이 물화(物化)현상이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마술환등phantasmagorie'으로 바꾸어 놓는다. 19세기 세계의 수도였던 파리는 이 마술환등의 물질적 실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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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현대 프랑스 철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다양한 철학서를 읽어봤지만, 명확하게 전체적 맥락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특히 해체론과 관련된 데리다의 주석에 관해서는 읽을수록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중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미학과 관련된 글이라 상당히 어려울 줄 알았는데, 몇 페이지를 넘어가면서 의외로 전체를 다 읽게 되었다. 미학이라는 학문의 본령에 가깝게 회화와 관련해서 20세기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어서 보람있는 읽기 시간이 되었다.
몇 편의 그림을 통해 철학과 사상을 읽어 내는 저자의 솜씨에 감탄하기에 앞서, 저자를 드러내려고 힘쓰는 면이 보이는 듯 하면서도 저자가 글 깊숙이 숨어버리는 문체적 힘에 감동하게 되었다. 이 글을 읽기 전에 진중권이라는 사람에 대해 예스 24를 통해 대충 정보를 찾아본 바에 의하면, 대단히 진보적이면서 파격적인 형식을 글을 쓴다는 것이었다. 물론 다른 책들을 읽어보지 않았서 모르겠지만, 이 책만은 미학과 관련하여 정말로 미학이라는 학문 영역에 맞게 서술한 책이라 판단이 든다. 별 고민의 흔적없이 거칠고 투박하며 경박한 투의 문체에 진보적 색깔을 입혀 펴 낸 책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미학이라는 학문 영역과 20세기 현대 철학자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정말로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인상깊은구절] 시뮬라크르의 미학은 그 극한에서 역설적으로 숭고의 미학에 합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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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학의 흐름을 알고싶어 구입했는데요 서문보면 마치 미학의 흐름을 콕 집어주도록 책이 써있는거처럼 얘기하지만 처음 10페이지 보고 책읽기를 단념했네요 흐름과 구성은 없고 현학적인 용어만 나열하지 않나, 어디서 인용문은 한페이지 마다 가져와서 초점을 흐리지 않나.. 저같은 일반인이 읽기에는 배려도 없고 저자 자신이 일방적으로 독백으로 흐르는 경향이 보였습니다.
진짜 10페이지 읽다가 단념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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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를 읽고 진중권의 다른 책을 읽고 싶어서 구입했던 이책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고등학교 때 미학 오디세이를 힘겹게 읽었기 때문에 현대미학 강의를 사고 한동안은 읽지 않았었다. 구입한 뒤 1년 쯤 지나고 미대에 들어간 후에 읽을 결심이 들었고, 대만족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미학과 순수 미술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순수 미술로 표현된 강력한 생각이 미학이라는 학문으로 해석되고 다시 미술가에게 영향을 주어 미술 작품의 의미를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 공생관계인 것이다. 다시 책에 대해 얘기로 돌아오면,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기본적이고 그렇다고 깊이가 없는 것도 아닌 저명한 미학가(철학자) 8명의 생각을 이해하기 쉽게 하나하나 그들의 저서를 짚어주며 이야기 해준다. 미학 길라잡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더욱 신뢰가 가는 점은 이 후로 질 들뢰즈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을 해석하여 낸 책인 '감각의 논리'를 읽었는데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가 잘 정리해 놓아, 읽는데 불편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가끔 인문학 저자들이 실수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어렵게 쓴 만큼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취미로 자가출판을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책의 내용은 누군가에게 전달 되어야 할 '무엇'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독성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진중권이 저자로써 믿음이 가는 이유는 그가 이해하기 편하게, 처음 그의 책을 읽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는 것이다. 몇년 전, 꼬꼬마 대학생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책이고 두고두고 읽을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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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롤 압박 주의, 개인 관심사에 따른 발췌가 많습니다)
숭고도 시뮬라크르도 참 흥미로운 테제이기에 이 책을 구입하면서 이미 아트앤스터디에서 관련 강의를 들었다. 책을 구입한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 "서양미술사 1" 이후로 신간이 안 나와서 아껴 읽고 있었다. 제목에 '1'이 붙어있으니 '2'가 나와야 할텐데 나오지 않아 기다려왔는데, 마침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 예판에 들어가서 주문해둔다.
이미 2003년에 현대미학의 중심을 꿰뚫는 듯한 이 책이 나왔었다니 대단하다. 8명의 쟁쟁한 현대사상가들의 미학에서 공통적으로 숭고와 시뮬라크르라는 테제가 흐르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한 문장 한 문장 받아적고 싶을 만큼 각 장이 알찬 느낌이라 막 읽을 수 없어서 천천히 읽다보니 책 8권을 읽은 것 같다. 분명히 쉬운 것은 아닌데 재미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1. 발터 벤야민: 알레고리와 멜랑콜리 이 부분에서 독일 초기낭만주의를 새롭게 해석한 벤야민의 기여를 본다. 최근에 읽은 "우리는 왜 지금 낭만주의를 이야기하는가"에 나왔던 낭만주의자들의 성찰, 비평에 대한 이야기를 되새기게 된다. 비평 또한 예술의 한 과정이 된다.
"또 하나 그의 '비평' 개념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거은 독일의 초기 낭만주의자들이다. 이들에게 비평은 예술을 매개로 한 철학적 성찰, 즉 "예술이라는 성찰매체 속에서의 인식"이었다. 그들은 이 인식을 인간 주체가 예술에 '관해' 얻어낸 것이 아니라 예술 '속에서' 스스로 이루어지는 예술의 자기인식이라 보았다. 비평은 작품을 스스로 말함에 이르게 한다." p. 26
벤야민이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비교하는 부분도 흥미롭다. 괴테는 통일성, 완전성, 내용을 중시하고, 벤야민이 해석한 낭만주의자들은 무한성, 자유, 형식을 중시한다. "낭만주의자들은 예술에 대한 예술작품들의 관계를 전체성Allheit 속의 무한성Unendichkeit으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 작품들의 전체성 속에서 예술의 무한성이 충족된다는 것이다. 반면 괴테는 그것을 다양성Vielheit 속의 통일성Einheit으로 규정한다. 즉 작품들의 다양성 속에서 예술의 통일성을 항상 다시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앞의 무한성은 순수한 형식의 무한성이고, 뒤의 통일성은 순수한 내용의 통일성이다." p. 27
초기 낭만주의자들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을 재해석해서 자신들의 예술론에 적용했다. 벤야민도 그것을 읽어낸 듯하다. "벤야민에게 "이념은 단자다". 그 안에는 "현상의 표상이 그것들의 객관적인 해석들 속에 예정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념'은 가장 개별적인 것이면서도 그 안에 가장 보편적인 것을 표상하는 단자Monade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단자는 신성의 섬광 속에서 만들어진다." p.30
cf. 뜨거운 초현실주의의 열정, 차가운 구성주의의 이성 p. 40 거리두기(브레히트의 소격효과)와 벤야민. "영화예술은 작품으로의 몰입을 막아 관중으로 하여금 늘 비평적 태도를 갖게 한다". p. 52
2. 마르틴 하이데거: 진리의 신전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에서 진리가 현전한다고 했다. 작품 속에서 진리가 빛난다는 그의 주장에서 숭고가 두드러진다. 그가 말하는 예술작품은 신전이고, 그의 미학은 종교적 외경의 색채를 띤다.
"인간이 근원적 진리의 주체임을 부정하는 하이데거의 반反인간주의는 전통적인 미적 범주론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근대미학에서 미와 숭고를 구별하는 척도는 인간 주체의 인식능력이었다. 즉 인간의 인식능력의 크기와 조화를 이루는 것은 '미'이고, 그것을 압도적으로 초월하는 대상이나 힘은 '숭고'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적 주체성이 파괴되면서 이 구분의 척도도 사라진다. 그리하여 그가 '미'를 "작품속에서 진리의 빛남"이라 규정했을 때, 이 규정은 외려 '미'라기보다는 전통적인 숭고의 감정, 즉 종교적 외경의 감정에 더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아직 '미'라는 낱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의 예술론은 사실상 숭고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p.84-85(근대 미학과 하이데거 미학의 비교)
cf. 파울 클레와 숭고: "클레에 따르면 현대예술의 본질은 보이는 것의 재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의 가시화에 있다고 한다." p. 88
3. 테오도르 아도르노: 진리, 가상, 화해 현실과 거리를 두는 예술, 타자화 되고 비동일성을 갖는 예술이 현실의 부정적 측면을 보여주고 간접적으로 현실 비판에 참여한다.
"현대예술은 미적 주체의 의식적 가공으로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 비판적 리얼리즘처럼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을 재현해 보여주며 성토하지도 않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처럼 '전망'이라는 이름의 섣부른 '화해'의 상태를 그려 보여주지도 않는다... 이들의 작품은 현실을 소리 높여 비난하지도 언젠가 도래할 유토피아도 제시하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의 그 모든 부정성을 보여주고, 우리로 하여금 그 끔찍한 삶의 조건에 계속 깨어 있게 해준다.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예술은 사회에 참여engagement 해서는 안 된다. 사회와 거리를 두고 그것과 급진적으로 다른 타자로 머무는 것. 그것이 예술이 사회를 비판하는 방식이다... 모든 것을 물화物化하는 사회에서 예술은 사회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타자'로 남는다." p.95
타자에 대해 생각했던 ㅂㄷ교수님 강의와 박준상의 "빈 중심"이 생각난다. 고통은 나만이 체험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술은 그 고통을 공유할 수 있도록 돕는다. "예술의 진리는 의미를 통해 말하는 논증적 진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증언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체험으로써 나타내는 것은 오직 예술적 인식만이 할 수 있다... 예술은 사회 속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체험하게 해준다." p.98
아도르노는 미적 주체성을 해체함으로써 근대 미학을 비판한다. "예술작품을 감각적 쾌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근대의 향수미학은 이제 거부되어야 한다. "본질 구성적 의미에서 예술 향유의 개념은 사라져야 한다." 새로운 예술은 조화로운 아름다움의 관조가 아니라 고통스런 쇼크의 체험이다. "오늘날 작품은 더이상 감각적 직관Anschauung의 대상이 아니다. 새로운 예술은 향유가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근대의 예술가 미학도 거부된다. "작품은 피조물이 아니며 인간은 창조자가 아니다. 따라서 천재의 개념은 허위다." p. 105
4. 자크 데리다: 회화 속의 진리 데리다는 고흐의 구두 그림과 관련해서 하이데거의 해석에 대한 샤피로의 반박을 분석하면서, 왜 그 구두가 꼭 농부 아낙네의 것이거나 고흐의 것이어야 하냐고 반문한다. 그는 전통으로 회귀한 샤피로나, 예술에서 근원적 진리를 찾고자 하는 하이데거를 넘어서고자 한다.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은 정해져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니체가 말하는 관점주의Perspektivismus, 즉 하나의 예술작품이 열어주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이다. 해석자와의 만나 ㅁ속에서 새로이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을 생성해내는 예술작품의 끊임없는 미적 창조력. 바로 거기에 예술작품의 진리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p.142
5. 미셸 푸코: 위계 없는 차이의 향연 현대 사회에서 윤리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던 푸코의 자기배려의 윤리학, 미학적 윤리학을 그의 존재미학을 통해 읽는다. "푸코 자신의 사상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미학적 기획은 외려 '성의 역사' 시리즈의 두번째 책인 "쾌락의 활용"에서 그가 전개하고 있는 '존재미학'의 구상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푸코는 주체를 객체화하던 계보학적 기술에서 벗어나, 이제 적극적으로 억압적인 근대의 도덕적 주체형성 방시을 대체할 새로운 대안을 찾는다. 그 대안의 가능성으로 그가 제시하는 것이 바로 '자기의 배려'라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존재미학이다." p. 148
어떻게 자신을 미적-도덕적 주체로 세울 수 있는가. 자기 스스로 자기를 형성하기 위한 배려가 필요하다. 그리스인의 '너 자신을 배려하라'에서 차용한 것 같은데, 그리스인들이나 푸코가 왜 존재미학에서 하필 '배려'라는 개념에 집중했을까 하는 문제는 좀 더 연구해볼만한 주제인 듯하다. 특히 '배려하라'와 '알라'가 전도되었다는 푸코의 문제의식을 보고 있으려니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 생각난다. "어쩌면 나는 지배와 권력의 테크놀로지에 지나치게 역점을 두어왔는지도 모른다. 요즘 나의 관심은 점차 자기 자신과 타자의 상호작용, 그리고 개인이 행사하는 지배의 테크놀로지에서 얼마나 개인이 자기 자신에게 작용하는가에 대한 역사, 즉 자기의 테크놀로지로 기울어졌다.("자기의 테크놀로지" 관련 푸코의 글)" p.172-173
이 부분에서도 "향연"을 읽었던 ㅂㄷ교수님 강의가 생각난다. 에로스는 신과 인간의 중간자였다. "지혜를 갖고 있지 않으나 지혜를 사랑했던 소크라테스는 에로스의 현신이며, 그가 대변하는 철학의 정신은 곧 에로스처럼 신과 인간의 중간자demon로 존재하는 방식, 말하자면 인간이면서 늘 신적으로 되기 위해 늘 자신의 한계를 초극하는 초인의 존재미학이었던 셈이다. 그리스에서 철학은 이렇게 에로틱의 문제 영역에서 탄생했던 것이다." p. 180 "그들(고대 그리스인)이 실천했던 '금욕'은 모두에게 강요되는 도덕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존재미학의 한 종류였다." p. 181
푸코의 자기의 테크놀로지, 자기배려의 윤리학에서 초기낭만주의자들의 도덕에 대한 태도, 도야 이론의 그림자를 본다. 이들 모두 고대 그리스인들의 존재론과 윤리학을 이상으로 상정하고 있다. "푸코의 관심은 그리스인들이 자신의 윤리적 주체로 세우는 그 미학적 방식에 가 있다. 보편적 윤리규준이나 도덕규범을 개인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이렇다할 금지 없이도 윤리적 방종에 흐르지 않고 제 삶에 형식과 스타일을 부여한 그들의 테크놀로지... 푸코는 그것의 가능성을 오늘에 시험해보려고 했던 것이다... 때로는 미적 원리가 도덕규범보다 더 큰 윤리적 구성력을 가질 수가 있다. 개인들을 어떤 보편적 규범에 강제로 종속시키는 도덕적인 방식이 아니라,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자기를 구성하는, 미학적으로 자기를 형성하는 가능성을 푸코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존재미학에서 보았다." p. 181
6.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새로운 유물론 미학의 정초 들뢰즈도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일까. 그의 생각에서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불분명함을 본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을 읽으면서, 예술을 감상하는 과정에서 그림과 보는이 사이에서 자기중심과 타자중심 간의 리듬, 힘의 오고감이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재현에서 해방된 선과 색. 이것이 현대회화의 특징이다... 들뢰즈에게 회화가 가시화해야 할 그 '비가시적인 것'은 '힘'이다. 회화의 임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 '힘'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 비가시적인 힘의 가시화." p.209
7.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형언할 수 없는 숭고함 사실 리오타르의 숭고론이 궁금해서 이 부분을 가장 먼저 읽었다. '형언할 수 없는 숭고함'이라는 소제목처럼 현대예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숭고함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리오타르는 현대예술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리오타르의 미학과 함께 소개된 바넷 뉴먼의 미니멀리즘이 흥미롭다. 선과 색을 통한 표현 자체를 완전히 최소화한 그의 그림은 무섭기까지 하다. "서구예술은 어느새 인간의 가장 깊은 체험을 묘사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 시대의 황폐함과 도덕적 충격을 표현하려면 무엇보다도 서유럽의 전통과 단절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유럽 미술의 전통과 단절하기 위해 그(바넷 뉴먼)가 사용한 전략이 바로 '미'를 거부하고 '숭고'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은 그리지도, 지시하지도, 상징하지도 않는다. 언어로 번역되지도, 연상을 통해 지시하지도, 암시를 통해 상징하지도 않는다... 그의 회화는 바깥의 숭고를 그리지 않는다. 그저 화면 위에 숭고가 일어나게 한다." p.233
"'숭고는 지금'... 그 기획의 요체는 회화를 이끄는 주요 미적 범주를 '미'에서 '숭고'로 바꾸어놓는 데에 있었다... 뉴먼 역시 서구회화의 역사를 "미의 관념과 숭고의 열망 사이의 투쟁"으로 요약한다. 서구예술의 고질적인 문제는 절대자에 대한 관계를 표현하려는 욕망(숭고)을 완전한 창조의 절대성(미)과 혼동하는 데에 있었다는 것이다... 현대예술을 추동하는 것은 미를 파괴하려는 열망이다." p.240-241
"'미'의 왕국에 머물렀던 고전주의자들과 달리 낭만주의자들은 '숭고'를 묘사하려 했다. 뉴먼은 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숭고를 실천한다. 화폭에서 모든 이미지를 지우는 것이다. 그의 캔버스에서 재현은 사라지고, 형태와 색채는 최소로 환원된다. "거의 무로 환원된 시각적 기쁨은 무한한 것에 대해 무한히 사고하게 해준다."... 묘사를 포기함으로써 현대예술은 이 세상에 묘사할 수 없는 것Nicht-Darstellbares이 존재함을 증언한다." p.243
8. 장 보드리야르: 스캔들이 말하는 것 선입견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지난번 박정자의 "마그리트와 시뮬라크르"를 읽으면서 생겨난 보드리야르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쩌면 보드리야르의 '내파' 개념은 그렇게까지 부정적인 의미나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드리야르가 현대 사회를 기술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는지도 모르는데, 그것이 곧이곧대로 읽어지지 않는 것이다. 진중권은 박정자보다 훨씬 객관적인 태도로 보드리야르의 미학을 소개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으로 인한 내파는 원본 자체를 없애고, 계급, 사회, 역사, 예술의 종언을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최근에 관람한 "이것이 미국미술이다: 휘트니 미술관"을 보면서, 이제는 더이상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겠다던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차이의 극한이 외려 차이를 지우고 동일자의 무한증식으로 전락하는 이 극한현상을 일컫는 말이 바로 '내파implosion'이다. 여기서 실재와 가상, 현실과 재현, 원본과 복제, 기의와 기표의 차이는 스스로 붕괴하고, 두 대립항들이 서로 구별되지 않고 하나로 결합된 거대한 시뮬라시옹의 세계가 탄생한다. 그 세계 속에 이제 새로움은 없다. 새로운 것의 발생에 대한 기대도 없다. 발생은 이미 모두 발생했다. 모더니즘의 기관차였던 '혁신'도 이제는 있을 수 없다." p. 261
"예술이 더이상 없기 때문에 예술이 죽는 게 아니라, 예술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예술은 죽는 것입니다.(보드리야르)" p. 2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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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도전!!
올해 초 교보에서 충동적으로 구매했다가.. 한 두 챕터 읽고 손 놓았던 책인데, 마음잡고 첨부터 다시 읽었다.
[미학오딧세이] 생각하고 집어들어다가..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다 읽고 나니 뿌듯하근영..
오딧세이 같은 경우는 에세이 형식으로 편하게 읽었고, 재미도 있었던 거 같은데.. 미학강의는 이론적으로 보다 심화된 내용을 담고 있어서.. 각오는 좀 하고 읽어야겠더라. 게다가 8명의 철학이론을 대략 2-30페이지로 요약했으니.. 고도의 집중력도 요하고.
무튼.. 현대미학 관련해서 책을 선택했던 건.. 드라마든, 뭐든.. 가끔 리뷰 포스팅을 할때마다, "철학과 이론의 기근"을 절절히 느꼈기 때문인데.. 하지만 책을 보면 볼수록.. 더욱 절망스러운 건 왜인지..-.- 모르는 게 약이라고.. 걍 생긴대로 살 걸 그랬나보다..
그래도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라고 하는 부제가 있는 것처럼.. 현대미학에 대해 진중권이 하나의 흐름을 잡아주고 있어서.. 그나마 옆길로 새지않고 독해할 수 있었던 듯 싶다..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과거엔 <회화>라는 것은 실재를 재현하는 '복제'였고,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은 <재현적 인식론>에 기반하였었다. 하지만, 실재(원본)와 복제 사이의 일치여부는 누가 보증할 것인가? 누군가 그린 '고무신'이 정말 사람들이 신고 다니는 '고무신'인지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그건 고무신일 수 도 있지만, 자길 두고 떠나간 '그녀...' 를 의미할 수 도 있다.
요런 식으로 <재현적 인식론>이 흔들거리면서.. 현대의 <예술>은 "관찰자의 해석"에 의해 결정되기 시작한다. 어차피 실재와 복제 사이의 일치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면, 복제(작품) 뒤의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의미는 관찰자의 철학과 비평으로 풀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누군가 그린 '고무신'을 그저 고무신을 '재현'한 작품으로 보아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그림에선 보이지 않는 작가의 "슬픈 상처"를 해석해낼 수 있는 비평이 등장할 때.. 비로소 '의미'가 발생한다는 거지.
즉, 현대미학에서 예술작품은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낸다. "히밤.. 어떻게 안보이는 걸 보이게 한다는 거야? " 라는 의문이 들텐데.. 당연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신기한 체험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것이 예술인 것이고.. 현대미학은 이를 '숭고의 체험'이라고 지칭한다. 비가시적인 것, 즉 합리적인 인간의 인식도구로는 파악 불가능한 것을.. 불현듯 체험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감정이 곧, 숭고라는 거다. 음.. 이건 어마어마하게 광대한 자연을 보았을 때의 감정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내가 매일 바라보던 모니터가 문득 날 처량하게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때의 느낌?..ㅎ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숭고를 이야기하면서, 시뮬라크르는 이미 얘기가 다 된 듯 싶다. 실재와 복제의 일치여부를 판단할 수 없게 되면서.. 이제 우리는 실재없는, 혹은 원본없는 '복제'만을 만나게 된다. 바로 그런, 영원히 홀로 외로워야 하는 '복제'가 바로, 시뮬라크르 이다.
말하자면, 시뮬라크르는 아까 그 어느 작가가 그린 '고무신'이다. 작가가 '고무신'을 그리는 순간, '고무신'은 홀로 남겨지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채 떠돌아다닌다. 누구는 '이별의 처연함'이라 할 것이고, 또 누구는 '전통의 붕괴'라고 할지도 모르고.. 또 어떤 이는 '보릿고개의 가난'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고무신'의 의미가 아니며, 동시에 모든 것이 '고무신'의 의미가 된다.
우리가 상상하는 가상세계가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이 가능한 곳인 것처럼.. 시뮬라크르가 가지는 '의미'는 어느 곳에도 없지만, 어느 곳에나 있다.
결국, 현대미학에서 <숭고>는 예술의 인식론적 특징을, <시뮬라크르>는 예술의 존재론적 특징을 말하는 듯 하다. 뭐, 내 인생이 '오독'의 인생이다 보니.. 이 [현대미학 강의] 포스트도 한낱 오독의 결과일지 모르겠지만서도, 우선은 이렇게 읽고 보련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인상적으로 보았던 디씨만화 하나를 가지고 얘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책에 나왔던 8명의 철학자들이 이 만화 혹은 그림을 봤다면 어떤 얘기를 할까.. 싶어서, "이것은 예술입니까?" 라는 주제를 각 철학자들에게 던졌다는 가정하에.. 각 철학자들의 코멘트를 상상해보았다.
그림 제목은 [키컸으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벤야민: "우왕ㅋ굳ㅋ 역시 디시 만화군요.. 정말 예술입니다! 디시만의 이 '저급한 아우라'라니..ㅎㅎ 그림판으로 대충 끼적거린 것 같지만, 외모지상주의를 비꼬는 풍부한 비평가능성을 가진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이데거: "님하, 여기서 예술을 본다구요? 아무리 예술작품이라는 것이 현존재(인간)의 실천적 해석에 의해 가능하다지만, 이딴 허섭쓰레기에서 세계의 '존재'가 개시된다고 보십니까? 어우.. 인터넷처럼 누추한 공간에서나 널려있는 이런 걸가지고 예술이라니..ㅉㅉ"
아도르노: "이거 대단한데요.. 이런 병맛인 그림은 처음입니다! 말도 안되는 내용의 그로테스크한 느낌이기도 하지만, 기존 사회의 소통방식을 부정하는 <수수께끼>를 담고 있습니다. 아.. 정말 이런 작품을 통해서야말로..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우리가 소원하는 '개별성의 타자'가 드러나는 것이죠! 하이데거 꺼졌!" (※병맛:: 내용이 이상하고 말이 안되는 만화를 지칭, 어원->병신같은 맛..-.-)
데리다: "흠.. 님들 얘기 다 맞습니다.. 고로 이 그림은 답이 없죠."
푸코: "다들 그림 자체를 보시는데.. 저는 그림 속 주인공에게서 '아름다움'을 봅니다.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스스로의 스타일과 형식으로 삶을 재구성해내는 <자기 테크놀러지>를 가진 저 아이야 말로 존재자체로 '예술작품'이라 할 만 합니다. (...) 아무도 안 듣네.. 이 숑키들..-.-"
들뢰즈: "이 그림은 정말 충격적이네요. 뭔가 불쾌한 폭력적인 감각을 통해서 제게 '새로운' 감각의 체험을 열어주었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그려지는 듯 하면서도, 어느 순간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사리지기도 하고.. 호.. 마치 '나'라는 존재의 존재지평이 확장되는 듯 한 느낌이랄까..ㄷㄷ 근데 하이데거 저 무개념은 아직도 있네요..ㅋㅋ"
리오타르: " 하이데거 너무 까지마세염. 애가 좀 보수적이라 그렇지 공부는 촘 한다능..ㅜ.ㅜ 물론, 하이데거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에요. 이 그림 같은 경우도, 처음 봤을 때.. 쾌와 불쾌의 혼합된 감정이 밀려오면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봤던 거 같아요. 바로 이게 '숭고의 체험'이잖아요.. 제가 본 것이 어떤 건지 정확히 묘사는 못하겠지만.. 분명 이 그림 안에 없는 '무엇'이었어요."
보드리야르: "이런 볍진들.. 저 그림 안에 뭐가 있고, 뭘 본다는 거야? 당췌 저게 말이 되는 내용이고 그림이라고 생각하는거야? 미친다.. 게다가 요즘 같은 시대에 '의미'라는 게 있을 거 같애? 백만개의 인간이 있으면 백만개의 의미가 있다는 건데.. 히밤 이건 없는거나 마찬가지잖아. 응? 물론, 그렇다고 이게 예술이 아니라는 건 아냐.. 예술이 없다는 건, 모든게 예술이란 의미도 되니까.. '같기도'에 가깝겠지. 예술 같기도 하고? 아닌거 같기도 하고? ㅋㅋ"
흠.. 각 학자들의 이론적 특징을 짚어내고 싶었는데.. 이론자체를 잘 모르다보니,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ㅎㅎ; 그래도 왜 이런 코멘트를 적었는지 알고 싶으시다면.. [현대미학 강의] 일독을 권해드립니당..
**Book Comment 개인적으로는 현대미학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약본인만큼.. 전체 골격만을 대강 이해하는 수준이고.. 보다 풍부한 사유를 위해서는 인용된 원서를 읽어야겠지요. 그리고 책자체가 원서에 대한 진중권의 1차독해 결과인만큼, 진중권에 대한 어느 정도 신뢰가 있다면 더 편히 읽으실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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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상당수 틀린 주장을 펼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전문 미학자는 아니니까요. 진중권이 들려줘도 재미없어 책의 뒷표지, '진중권이 들려주면 미학도 재미있다'는 말은 순 뻥이다. 고전 미학과는 천지차지, 현대 미학은 복잡 난해하다. 깊이 숨겨진 진리를 찾는게 찾기만 한다면야 더 보람 있겠지만은,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온통 미로를 헤매는 기분, 골치가 아프다는 말이 사실은 여기서 시작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이 책을 두 번이나 정독한 이유는 이 참에 나에게도 알쏭달쏭한 현대 미학을 확실하게 정리하고 픈 욕망 때문이었다. 발터 벤야민, 보드리야르, 아도르노, 자크 데리다, 시뮬라시옹, 시뮬라크르 하나도 빠짐없이 그 이름 만큼은 알고 있어 여기저기 잘난척만 수두룩, 하지만 알맹이가 없는 지식이다 보니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탈탈 털리고 말거라는 공포심. 내 공부의 동기는 모두 이 공포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확히 알아냈느냐? 글쎄올시다. 두 번 세 번을 봐도 모르겠는게 이 현대 미학이라는 장르. 게다가 존경하는 진중권 선생, 이 분이 참 쉽고 재밌게 쓰시는 양반인데 도통 이 책에서만큼은 그 능력을 발휘해내지 못하신다. 무시무시한 번역문과 전문 용어가 두서없이 남발될 때는 이 분을 대단히 존경하는 나 조차 '자기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걸까 '라는 외람된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변명을 좀 하면, 우선 번역의 문제가 있다. 이 책에 실린 인용문들은 당연 한글로 번역이 되어있는데, 그게 마치 재연을 포기한 현대 미술처럼 의미 전달을 포기한 문자 예술처럼 보인다. 둘째, 용어의 문제다. 예컨대 '숭고의 부정적 묘사'. 여기서 부정적 묘사라는 건 적어도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뭔가를 나쁘게 표현했다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좀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호하다. 설명은 당연 친절하지 않다. 사실 이것들도 크게는 번역의 문제다. 아마 외국 철학자들의 용어를 내포된 의미가 아닌, 표면적 의미만을 따라 번역하다 보니 이런 문제들이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대미학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인용문의 영어 번역본을 찾아보고 미학가들이 사용하는 중요 용어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는 입문을 원하는 사람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다. 현대미학의 보이콧, 재현의 포기 지금 난 현대미학의 텍스트를 이해하려는 욕심을 버렸다. 그러자 오히려 현대미술의 전반적인 그림이 명료하게 떠오르는 것 아닌가. 이러쿵 저러쿵 어려운 설명을 늘어 놓으며 자기 존재를 확립한다 해도 현대미술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모두 '재현'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왜냐고? 위에서 부터 칸딘스키, 말레비치, 몬드리안, 잭슨 폴록의 작품들 첫째, 재현은 저급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떡 그림을 아무리 잘 그렸다 한들 그게 실제 떡보다 뛰어날 수 있겠는가? 재현은 필연적으로 '실재'와 '그림' 사이에 위계를 만들어 낸다. 그려진 것은 결코 실재보다 뛰어날 수 없다. 이 한계를 깨고자 하는 노력이 바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요, 몬드리안의 파랑, 노랑, 빨강이며 잭슨 폴록의 혼돈의 페인트다. 현대미술은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된다. 둘째, 비판을 위해 예술은 사회에서(실재)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정신병자같은 대통령의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올바른 정치인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듯이,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예술은 그것과 급진적으로 다른 타자로 머물러야 한다'(p.95). 예술은 그렇게 다른 상태로 머물러 끝까지 저항해 나간다. 예술의 비재현성은 곧 반면교사의 실천인 셈이다. 셋째, 재현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떡을 그린 그림은 '떡은 떡이다'라는 동어반복의 멍청한 진술을 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비재현의 놀이는 '우리에게 친숙한 사물의 모습이 은폐하고 있는 형상들을 새로이 열어 보여준다'(p.168). 회색 빛깔의 콘크리트 더미에 갇힌 좀비들의 머릿속에 날카로운 느낌표 하나를 넣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예술의 의미다. 넷째, 현대미술은 묘사가 불가능한 것을 묘사하려고 한다. 재현으로는 절대로 이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 따라서 미술은 뭔가 알 수 없는 것을 그려놓고 이것이 바로 그 묘사가 불가능한 어떤 것이라고 우기기라도 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예술의 사기성을 느끼는 지점이 바로 여기일 것이다. 말로는 뭘 못하겠는가? 하지만 이 말은 우리가 내면의 진리를 보지 못하는 장님이요,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됐다는 의미 아닐까? 현대예술은 작품 스스로가 말을 걸어온다. 그 얘기를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작품은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다.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ⅲ, 바넷 뉴먼 현대미술의 수용법 현대미술은 아무것도 재현해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뒤에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왜 이걸 예술이라고 부를까? 하이데거는 "이것이(그림) 말을 했다"라고 말한다. 작품이 직접 자신의 진리를 말해줬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작품에 대한 감상이 자신의 주관적 견해가 아님을, 이유는 없이 그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한다. 문제는 이 하이데거의 독단이 작품의 진리를 하나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언부언 횡설수설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의 진리만을 얘기한다.' 하이데거의 수용법은 어딘지 모르게 거만함이 느껴진다.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면 바보가 될 것 같은 기분. 어디 무서워서 미술관이나 갈 수 있겠는가? 예술에 대한 현대인의 지적 컴플렉스는 여기서 시작된다. 하지만 여기에 하이데거의 한계가 있다. 현대미술은 재현을 포기함으로써 더 이상 그것이 지시하는 실제 사물을 갖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적 진리는 어째서 단 하나의 진리를 지시하는가? '이것이 진리다'라는 말은 '이것'이 맞다는 얘기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에 대해' '맞다'는 말인가? 고정불변의 진리가 존재하는 순간 현대미술은 다시 딱딱한 고전미술로 회귀하고 만다. 데리다는 바로 이 부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더 놀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데리다에 의하면 '작품의 진리는 결코 한 번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나의 해석은 다른 해석으로 확장되고 다른 해석은 또다른 사람들에게 또다린 진리를 열어줄 수 있다. 데리다가 강조하는 것은 '예술작품이 열어주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이다'. 해석자와의 만남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을 생성해내는 끊임없는 미적 창조력. 바로 거기에 예술작품의 진리가 놓여 있다'(일부 문장 수정. p.142). 나는 앞서 작품의 얘기를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예술은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썼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문제는 사람이다. 상상력이 빈약한 자, 규칙에 얽매인 자, 차이의 놀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작품의 얘기를 들을 수 없다. 이 모든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장 보드리야르를 만나야 한다. 차이의 놀이, 좋다. 하지만 차이는 정말로 무한히 계속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차이의 생성이 극점을 지나고 나면 더 이상 '유의미한 차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도 예술입네, 저것도 예술입네, 예술은 도처에서 피어나지만 그 중에 진짜 새로운 사건은 없다. '"현대예술의 모든 움직임에는 일종의 무기력, 즉 더이상 스스로 초월하지 못하여 점점 더 빠른 순환 속에서 자체로 되돌아가는 것이 있다". 그는 무질서하게 범람하는 현대예술을 암세포의 증식에 비유한다'(p272). 보드리야르는 예술에 종언을 고한다. 지나가는 여자의 몸매도 예술, 멸치 국물의 맛도 예술, 자동차도 예술, "예술은 더이상 없기 때문에 죽는 게 아니다. 그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세상에 너무 예술적인 것이 많다 보니 뒤샹과 워홀은 오히려 예술을 범상한 것으로 만들어 그것을 예술로 만든다. 가치가 범람하는 세계 속에 던져진 무가치의 역습. 이어지는 현대예술이 저마다 무가치를 주장하며 두 사람을 따라해 보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뒤샹과 워홀은, 어쩌면 이 세계 마지막 현대예술가였는지도 모른다. 뒤샹, 그리고 워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아직 살아있다고 주장한다. 보드리야르와 진중권은 거기에 쐐기를 박는다. 그럼에도 그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 무가치와 그 무의미 뒤에 무언가가 감춰져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무가치한 예술을 무시할 경우 우리는 모종의 "죄의식"을 느끼게 되고, 거기에 편승해 현대예술은 마치 가치 있는 양 포장된다. "바로 거기에 전문가 범죄가 있다."(p.273) 우리 나라의 돈 많은 범죄자들이 현대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리는 현상은 이 말에 더할 나위 없는 증거를 제시해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