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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삶이 일치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 어려움의 강도는 그 사람이 어떤 위치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낮은 위치에 처 했든 높은 위치에 처 했든 똑같이 만만치 않은 일이다. 삶의 낮고 높음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 앎과 삶이 일치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낸 국어 교사가 있다. 내 나이도 적지 않은 가 보다. 이 분은 나 보다 한 살 많은 데, 참 성실한 삶을 살아 오셨다. ㅋ 이 얘기를 하려고 한 건 아니고. 이 분은 국어교사이고 국어 교사로서 앎, 국어교사로서 삶을 일치시킬려고 노력하고 실천하신 분이다. 한겨레 신문이 가끔 실리는 칼럼을 읽어 보기는 했으나, 한 권의 책으로 만나는 느낌은 또 다르다.
제목이 삶을 위한 국어교육이다. 언제부터인가 성실한 교사이든 그렇지 않든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어느쪽으로부터든 좋은 평가를 받는 교사는 이론적으로 전문가인 교사이다. 그래서, 좋은 점수를 뽑아 내는 교사이다. 아니면, 적어도 점수와 상관없이 많은 것을 아는 교사이다. 저자는 이런 상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 의문은 국어교육이 왜 존재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이다. 국어는 시험 이전에 삶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인데, 나는 왜 잊고 있었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지로 되돌아가 양 발을 대지에 굳건하게 뿌리 내려야 한다. 대지는 어디인가? 우리의 삶이다. 우리의 삶을 외면한 국어를 위한 국어는 기만 자체이다. 저자는 이러한 대전제 위에 다양한 자신의 수업 경험을 제시한다. 사실,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의 성실성과 진정성에서 많은 감동을 받게 된다. 또 한편 저자의 다독에 놀라게 되고, 지나가면서 읽었던 이반 일리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다시 내가 이해한 방식대로 정리해 보자. 왜 국어교육이 필요한가. 그것은 우정을 위해서다. 우정이 유효한 사회를 위해서다. 인간을 위해서다. 이반 일리치의 말이 기억난다. 인간을 공생공락하게 해 주는 것은 자전거, 도서관, 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의역해 본다. 이제 변증법이 아니라 삶의 시대가 도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