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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해하는 것 자체가 비극(?)이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해하는 것 자체가 비극(?)이었다." 내용보기
슬라보예 지젝, 독일 관념론과 라깡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아우르는 방대한 저술로 자끄 라깡 연구의 권위자이자, 현존하는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고 한다.   21세기 첫 십년을 열고 마감했던 두 사건, 2001년 9.11 테러와 2008년 금융붕괴 이후 부시가 국민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썼던 언어는 서로 유사하다고 한다. 부시는 먼저 미국의 생활방식에 대한 위협을 이야기하고, 그리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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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독일 관념론과 라깡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아우르는 방대한 저술로 자끄 라깡 연구의 권위자이자, 현존하는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고 한다.

 

21세기 첫 십년을 열고 마감했던 두 사건, 2001년 9.11 테러와 2008년 금융붕괴 이후 부시가 국민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썼던 언어는 서로 유사하다고 한다. 부시는 먼저 미국의 생활방식에 대한 위협을 이야기하고, 그리고 그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신속하고 단호한 행동의 필요성을 환기 시켰다. 또한 두 경우 모두 부시는 시장 자본주의와 개인의 자유에 대한 보장으로 대변되는 미국적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서, 바로 그 가치의 부분적 보류를 요청 하였다.

 

세계는 지금 계급분야의 양극단 현상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초고소득자들은 모든 것을 비공개로 하며, 보안위협요소를 최우선 고려사항으로 하는 그들만의 외딴섬을 구축하고 있는데 반해, 대부분의 사람들은“우리는 마치 자유로운 듯이 살도록 강요”당하며 살아갈 뿐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이 책에서 현재 진행중인 위기에서 출발하여 그 조건과 함의를 규명해 보았다고 말한다. 진리는 편파적이고 우리가 어느 쪽을 편들 때에만 접근 가능하다고 말하는 저자는, 이 책에서 분석한 것은 중립적인 분석이 아니라, 편파적인 분석을 하였다고 스스로 말한다. 물론 편드는 것은 공산주의이다.

 

지젝의 책은 어렵다. 이 책뿐만이 아니라 그전에도 읽다가 관두기를 몇 번씩이나 했던 책들도 있다. 마음 독하게 먹고 이 책을 읽으면서도 가뜩이나 어려운데 더욱 가독율을 떨어뜨린 것이 두 가지나 있다. 하나는‘세계 금융위기와 자본주의’라는 부제가 그것이다. 부제를 보고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관한 책으로 오인했던 것이 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다른 하나는 번역상 외국어 표기 문제였다. 씸벌, 이딸리아, 스딸린주의, 메씨지, 알까에다, 꾸바로 이어지는 표기는 읽기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 의미를 헤아리느라 머리를 싸매게 만들기도 한다.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부에서는 위기에 대한 우리의 인식 및 반응을 규정한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으며, 2부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공산주의적 실천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8년 금융붕괴에 있어 진정으로 놀라운 것은, 그 발생이 난데없이 시장을 강타한 예측 불가능한 사건이었다는 생각이 사람들에게 너무나 쉽게 받아 들여진 것이라고 한다. 또한 위기는 사람들을 뒤 흔들어 그들로 하여금 자기 삶의 근본원리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강제하기도 하지만, 가장 자발적인 최초의 반응은 패닉이며, 이는 기본으로 돌아가기로 이어진다고 한다. 부시는 즉시 구제금융을 실시한다고 하였으며, 이는 사실상 금융사회주의에 해당하는 일 이었다. 그렇기에 공화당 의원들 마저도“그릇된 결정을 내린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의 결과를 감당하게 하는 게 아니라, 그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확산시킨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메인스트리트의 복지는 월스트리트에 의존하기 때문에, 또한 트리클다운 효과를 위해서도 구제금융이 필요하다는 구제금융 제안자들의 의견은 관철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제금융 논쟁에서 구제금융에 저항하는 포퓰리스트들은 올바른 이유로 그릇된일을 행하였고, 구제금융 제안자들은 그릇된 이유로 올바른일을 행하였다고 지젝은 말한다. 그러나 구제금융과 같은사건들은 사실상 공갈의 한형태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탈이데올로기화에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즉, 현재의 위기에있어 지배이데올로기의 중심과제는 붕괴의 책임을 자본주의체제 자체가 아니라, 부차적이며 우연적인 일탈로 돌리는 서사를 강요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현 위기에서 희생자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실행가능한 전세계적 대안을 제시하지못한 좌파의 무능력이라고 말하는 그는, 우리는 분노를 행동화하여 스스로 상처를 입히는 포퓰리즘적 유혹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멸종 위기종을 구하고, 지구를 온난화에서 구하고, 치료를 받을 돈이 없어 죽어가는 환자를 구하고, 굶어 죽는 아이들을 구하는 문제들은 조금 기다려도 된다고 하면서, 그러나 은행을 구하라는 요구는 즉각적 행동으로 반응해야 할 무조건적인 명령임을 우리는 금융위기에서 보고 있다. 단지 본질적으로 시장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킨다는 것, 즉 단순히 사람들의 믿음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이것은 지배이데올로기의 기본적 전제들이 의문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오히려 현재의 위기를 충격요법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금융위기가 발휘하는 일차적 효과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의문보다는, 더 심도 있는 구조조정을 강제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초석이 될 것 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를 결속시키는 것은‘잃을 것은 족쇄밖에 없다’는 프롤레타리아의 고전적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모든 것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는 것 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따라서 공산주의 이념에 계속 충실하기 위해서는 이념에 실천적 긴박감을 부여하는 적대를 역사적 현실 안에서 찾아내어야 한다. 지젝이 말하는 그 네가지 적대란 생태적 파국의 위협, 지적재산권과 관련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기술-과학적 발전의 사회 윤리적 함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제된 자를 포함된 자로부터 분리하려는 간극이다. 에릭 홈스 봄은‘사회주의는 실패했고, 자본주의는 파산 상태다. 다음에 무엇이 올 것인가?’하고 의문을 던지지만, 지젝은 망설이지 않고‘그 답은 공산주의다’라고 말한다. 사회주의는 네가지 적대 가운데 마지막 것은 건드리지 않고 앞의 세가지만 해소하려 했다고 지젝은 보고 있다.

 

또한 지젝은 네번째 적대와 다른 세가지 적대 사이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 비판을 도구적 이성이라든지, 근대 기술문명 비판으로 왜곡하는 말만 번지르한 일반화를 배격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앞의 세가지 적대는 인류의 생존의 문제에 관여하지만, 네번째는 궁극적으로 정의의 문제에 해당되기 때문에, 오직 배제된 자에 관해서만 공산주의란 용어의 사용이 정당화 될수 있다고 한다. 그는 공산주의의 이념은 끈질기게 존속하고, 때때로 폭발하는 영원한 이념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뗄수없이 결합되어 있었지만, 이제 그 사이의 고리는 끊어졌다고 주장한다. 그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하자. 돌아오라! … 이제는 다시 진지해질 때이다.’로 압축된다.

 

지젝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우리에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탈이데올로기화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금융위기로 시작되어 신자유주의가 하루 아침에 종말을 고할 것 같았지만, 이제는 그 위기를 극복했다는 듯이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에게 더 큰 시련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라는 것과는 별개로, 그 자체로 하나의 이념이 되어 세계를 지배할지도 모른다. 지젝의 주장을 그냥 지나쳐 버릴 수만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젝의 다른 저작을 읽기전에 프로이트와 라깡에 대해서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도저히 읽는것 만으로 이해하기가 너무나 힘이든다. 이책을 읽고서 제대로 이해했는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k*****1 2011.05.04. 신고 공감 10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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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etarians at Risk for Losing Everything As Well As Chains
"Proletarians at Risk for Losing Everything As Well As Chains" 내용보기
1부에서는 우파에서부터 근본주의자와 급진 좌파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데올로기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비판을 가하고 결국에는 공산주의가 다시금 필요한 이유를 밝힌다. 라깡에 기대어 이데올로기 그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도 물론 제시한다. 이데올로기의 힘과 작동 방식에 관한 여러 가지, 조금은 생소한 사례들이 제시된다. 지젝이 제기한 비판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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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서는 우파에서부터 근본주의자와 급진 좌파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데올로기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비판을 가하고 결국에는 공산주의가 다시금 필요한 이유를 밝힌다. 라깡에 기대어 이데올로기 그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도 물론 제시한다. 이데올로기의 힘과 작동 방식에 관한 여러 가지, 조금은 생소한 사례들이 제시된다. 지젝이 제기한 비판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토마스 프랭크는 경제적 계급적대가 오늘날 미국에서는 근면한 기독교인와 퇴폐적 자유주의자 간의 대립으로 환치되었음을 지적했다. 즉 계급전쟁이 문화전쟁으로 전치된 것이다. 그래서 단 2%의 최상위 부자들에게만 세금을 늘리려는 오바마 정책에 그렇게 많은 보통사람들까지도 반대하는 포퓰리즘적 보수주의가 득세할 수 있었다. (pp. 68-71)

폰지 사기로 구속된 메이도프가 자신의 계략이 결국 무너지지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 것은 그의 개인적 악덕이나 비합리성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관계에 내재한 문제 때문이었다. 합법적 업무를 피라미드 사기로 변형시키려는 유혹은 자본주의적 순화과정의 본질 자체에 속하는 내적 추진력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원동력 자체가 합법적 투자와 무모한 투기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자본주의적 투자의 핵심은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는 내기이며 미래로부터 차용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통제 불가능한 어떤 상황 변화가 안전한 투자로 간주된 것을 파산으로 이끌 수 있다. (pp. 76-77)

지젝은 탈레반 같은 근본주의자들을 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진정한 혁명세력으로 높이 평가하는 시각을 견제한다. 그는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여 “파시즘의 발흥은 실패한 혁명을 증언한다”는 주장을 적극 옹호한다. 급진 이슬람주의의 발흥은 이슬람국가들에서 세속적 좌파가 소멸한 것과 정확히 상응한다. 예컨대 아프가니스탄은 불과 30년 전만 해도 소련과는 독립적인 강력한 공산당이 존재했었다. (pp. 146-149)

그리고 1부 후반부로 가면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자유주의화된 좌파 혹은 개량주의적 점진주의까지 포함해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다시 “공산주의”의 기치를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가 구태의연한 이데올로기적 유토피아라는 생각이 든다면, 오히려 오늘날 자본주의 그 자체야말로 진정으로 유토피아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탱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승리가 끔찍했던 20세기 전체주의적 유토피아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유토피아는 역사의 종말에 도달했다고 믿었던 1990년대였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공산주의의 필요성은 유토피아적 사고가 아니라 현실적 필요성에서 나온다. 세계화된 경제질서 속에서 상품화된 식량, 물, 석유의 부족사태가 제3세계 국가들을 기아로 몰아넣고 있는 지금, 공산주의가 다시 문 앞에 와 있다. 물, 에너지, 환경, 문화, 교육, 건강 등을 시장에 맡겨 둘 수는 없다.

2부는 이른바 새로운 ‘공산당 선언’과도 같다. 2부는 오히려 1부보다 쉽게 읽힌다. 지젝의 어투는 확신에 차 있다. 그는 공산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오늘날 공산주의 이념을 실천할 현실적 적대관계를 붙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젝은 그러한 적대관계로 생태적 파국의 위협,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기술-과학적 발전의 사회, 윤리적 함의, 새로운 형태의 (빈부간) 아파르트헤이트의 생성 등 네 가지를 내세운다.

“공통적인 것”(the commons)에서 배제되는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이 여전히 존재하며, 그것은 더욱 배타적이고 철저한 과정이다.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었던 고전적 이미지의 프롤레타리아와 달리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상징적 실체를 빼앗기고, 유전자 염기는 심하게 조작되고, 살 수 없는 환경에서 비실대며 지내는, 모든 실체적 내용이 결여된 추상적 주체로 영락할 위험이 처해 있다. (p. 185)

이어 지젝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대비시키면서 사회주의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가 사회주의의 예로 드는 것들은 공동체주의, 포퓰리즘, 아시아적 가치에 입각한 자본주의 등이다. 그러면서 영원한 유토피아로서의 공산주의가 아닌 현실적 필요성에서 나오는 공산주의를 옹호한다. 2부를 요약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꽤 흥미롭고 새로운 주장들을 담고 있어서 1부에 비하면 술술 읽힌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맑스, 레닌, 라깡 등의 이론과 현대 사회주의의 역사에 대해서 약간씩의 지식이 없다면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극우에서부터 극좌에 이르기까지 신랄한 비판을 쏟아부으면서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가속화시키는 프롤레타리아화를 극복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으로서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지젝의 주장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덧붙임]

1. 제목과 관련하여

 한글 번역서에는 원서에 없는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 책의 내용과 그다지 부합하지는 않는다. 1부의 내용 중에 세계금융위기와 관련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오늘날 계급적대가 문화화, 이데올로기화, 혹은 물신화 되어 있어서 피지배계급이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으로 쉽사리 나아간다는 주장을 현학적인 수사와 잘 알려지지 않은 사례들을 동원하면서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잠깐 등장할 뿐이다. 좀 더 솔직한 부제라면 “신공산당선언” 정도가 어울렸을 것이다.

2. 번역과 관련하여

잘 읽히지 않는 책이다. 특히 1부가 그렇다. 무엇보다도 원서 자체가 술술 읽힐 만한 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는 그렇게 쉽지 않은 책을 역자가 주로 직역을 했기 때문에 번역서의 가독성은 더더욱 떨어진다. 번역의 문제부터 몇 가지 짚고 넘어가겠다.

전체적으로 번역은 오역은 없어 보이지만 그다지 매끄럽지는 못하다. 번역 어휘 선택도 항상 최선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부사나 수식어구의 위치도 재정렬해야 더 매끄러워질 문장들이 많이 있었다. 원문을 최대한 그대로 살리고 싶어서 직역을 위주로 했던 것이라 해도, 어차피 영어와 한글이 전혀 다른 구조와 표현법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말에 가깝게 의역하는 것이 어쩌면 저자의 의도를 더 잘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자의 말이 아니라 TV 광고를 번역한 부분에서도 직역 어투가 그대로 나오는 걸로 봐서, 역자가 원서의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직역 어투를 고집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예컨대 110-112쪽에 번역된 스타벅스 광고는 마치 한국어에 익숙하지 못한 Korean American 2세가 번역한 것 같은 문장이다.

이것보다 조금 더 나은 직역어투의 예를 들어보자. 수없이 많지만 마침 노트북 앞에서 책을 읽다가 시간을 내서 기록해둘 수 있었던 것들 중에서 몇 가지 예만 들면 다음과 같다.

수에즈운하 동편의 이스라엘 부대가 이집트 군사들에 의해 괴멸되던 패닉의 순간에 일어났던 일들의 믿을 만한 녹음기록을 뒤편의 오디오기계가 재생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p. 87)

è  이 길지 않은 문장에는 ‘의(of)’가 네 번 나오는데, 번역이 너무 무성의하다. 영어에서 of는 한국에서 ‘의’로 1:1 매칭이 되기는 하지만, 그 의미는 주술관계, 소유관계, 동격관계, 수식관계 등 다양하다. 의미에 맞게 풀어 써주는 것이 낫다. 이렇게 ‘의’를 그대로 쓰는 관행은 해방 이후 영어책을 일본에서 번역한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본어 특유의 ‘노(の)’를 하나하나 ‘의’로 번역해서 써왔던 데서 비롯된다. 이 문장에서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일들의 믿을 만한 녹음기록’에서 ‘의’는 무척 어색하다. 그리고 ‘-에 의해+수동태’는 완전히 영어식 표현이다. 또 하나, ‘오디오기계’에서처럼 외래어와 한국어가 결합되는 합성어는 띄어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좀 더 확실한 건, 강 이름이나 산 이름 같은 경우에 ‘나일 강’ 처럼 띄어써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편이 좀더 한국어문법에 맞고 자연스럽다. ‘수에즈운하 동편에 주둔한 이스라엘 부대가 이집트 군사들에 괴멸되던 패닉의 순간에 발생한 일들을 녹음한 믿을 만한 기록을 뒤편에 있는 오디오 기계가 재생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합리적 반유대주의’라는 공식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은 1938년 로베르 브라지야크에 의해서인데 그는 자신이 ‘온건한’ 반유대주의자라고 생각했다. (p. 99)

è  전형적인 수동태 문장이다. 원문이 수동태라서 그대로 번역했을 것이다. 지젝이 굳이 능동태로 만들 수도 있었을 이 문장을 수동태로 만든 것은 “The best expression of … was by Robert, who regarded himself as a…”와 같이 Robert에 대한 수식어구를 문장 맨 뒤에 간략하게 덧붙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한글과 다른 영어의 특징이자 묘미이고, 어디 가서 영어 곧잘 한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이런 식으로 문장을 구성하는 게 당연하다. 여기서 ‘who’ 이하는 이른바 관계대명사 ‘계속적 용법’이라 불리는 것으로, 흔히 앞문장을 해석한 후 who 이하를 해석하면 된다고 알려져 있다. 역자는 이러한 해석 방법에 충실히 따랐다. 원문을 바꿔서 “Robert, who regarded himself as a…, expressed the best formulation…”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겠지만, 물론 이 경우 그 뉘앙스는 조금 달라진다. 그렇지만 위 번역처럼 원문의 구성을 그대로 번역하는 건 문제가 있다. 한국어에는 수동태 표현이 잘 쓰이지 않는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관계대명사 ‘계속적 용법’은 앞 문장에 이어서 해석하기보다는 ‘제한적 용법’처럼 수식관계로 바꾸어 해석해주는 편이 나을 때가 많다. 따라서 위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자신을 온건한 반유대주의자로 여기는 로베르 브라지야크는 1938년 합리적 반유대주의라는 공식을 가장 잘 표현한 적이 있다.’

… ‘진정한’ 실존적 선택—이런저런 상품의 피상적 선택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전면적인 실존적 참여를 포함하는 선택—이라는 주제에 갖가지 변주를… (p. 129)

è  이런 식으로 하이픈으로 삽입하는 문구는 사실 한국어문법에 고유한 표현이 아닌 것으로 안다. 영어를 그대로 번역한 문장이 하도 많이 유통되다 보니 어느새 이런 표현이 마치 한국어문법에 원래부터 있었던 양 번역서가 아닌 순 창작물에도 이런 식의 표현을 종종 보게 된다. 가능하다면 하이픈 없이 그냥 수식어구로 적절히 배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문장에서 또 하나 더 심각한 문제는 번역된 삽입구가 무슨 말인지 한눈에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영어식 표현으로서 ‘명사+of+명사’를 그대로 직역한 점, including으로 시작되는 이 삽입구를 ‘포함하는’이라고 그대로 번역해서 당최 무엇을 어디에 포함한다는 것인지 중요하지도 않은 표현 때문에 잠시 문맥을 잃기 쉽다는 점, contrary to인지 as compared to인지 모르겠으나 ‘-에 대립하는 것으로서’라는 표현이 무척 문어적이기도 할 뿐더러 ‘대립’이라는 강한 표현 때문에 괜히 초점이 분산된다는 점 등등 문제가 많이 있다. 다음과 같이 바꾸면 좋았을 것이다. “… ‘진정한’ 실존적 선택—이런저런 상품을 피상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 실존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비롯하여—이라는 주제에…”

메씨지, 씨스템: 외래어 표기법상 ‘메시지’(message), ‘시스템’(system)으로 표기하게 되어 있는 것을 굳이 ‘메씨지’, ‘씨스템’이라고 번역한 것은 그것이 영어 발음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법을 거스르면서까지 새로운 번역어를 주장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외래어 표기법을 몰랐기 때문일까? 영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하기를 원했다면, 예컨대 ‘스트리트’을 ‘스트릿’으로, ‘아크로님’을 ‘애크러님’으로 표기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녀를: ‘his/her’를 번역한 것인데… 미국에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사고방식 때문에 ‘a person’을 대명사로 다시 쓸 때 ‘he’ 하나로만 써서는 안 되고 ‘he/she’로 써야 한다. 여기서 슬래시(/)는  ‘or’에 해당한다. 그래서 ‘his/her’는 번역하면 ‘그 혹은 그녀의’이다. 그런데 국문법에서는 ‘그’가 ‘주로’ 남자를 가리키기는 하지만 여자도 가리킬 수 있으므로 ‘his/her’는 ‘그의’로 번역해도 무방할 것이다. 역자는 국어 표현에 존재하지도 않는 ‘그/녀가’, ‘그/녀를’ 등의 표현을 개발했는데, 새로운 번역법을 주장하려는 명백한 의도가 아니었다면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다.

‘-에 있어서’: 일본어 문투

이 외에도 용어나 어휘 번역이 부자연스러운 경우가 많이 있었다. 책 앞부분에서만 해도 ‘문제점’이 이렇게 많이 발견돼서 이렇게 따지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얼마 지나고부터는 그냥 꾹 참고 읽어 나갔다.

용어에 대한 설명도 균형감이 없다. 문맥을 파악하기 위해서 주석이 필요한 용어는 그냥 둔 채 그다지 몰라도 되는 용어는 오히려 장황한 주석이 달린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번역자도 영어 번역본을 텍스트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솔직한 의견으로는 그냥 영어본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최근에 읽었던 수많은 한글 번역본 중 가장 거슬렸던 책 중 한 권.



c*****g 2011.02.21. 신고 공감 5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내용보기
예전에 많은 사람들이 들뢰즈와 푸코에 대해 관심을 가졌듯이,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그래봤자 얼마 되지도 않지만) 슬라보예 지젝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런 관심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서 그의 여러 저작들이 번역되고 있고, 주요 저서 대부분이 번역되어서(지젝 자신이 꼽는 자신의 주저 4권이 이미 번역되어 있다) 그에 대해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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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많은 사람들이 들뢰즈와 푸코에 대해 관심을 가졌듯이,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그래봤자 얼마 되지도 않지만) 슬라보예 지젝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런 관심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서 그의 여러 저작들이 번역되고 있고, 주요 저서 대부분이 번역되어서(지젝 자신이 꼽는 자신의 주저 4권이 이미 번역되어 있다) 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싶은 있는 사람은 큰 어려움 없이 그의 논의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젝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사상가들 중 한명이 된 것 같다.

 

‘현존하는 철학자들 중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슬라보예 지젝은 어떤 의미에서는 처음부터 오해를 받으며 알려지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서 라깡을 알고자 그를 찾게 되었었고 이로 인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지만 그는 히치콕과 수많은 대중문화를 통해서 라깡을 얘기하고 정리했을 뿐이고, 오히려 그는 라깡을 통해서 헤겔과 맑스 그리고 레닌을 얘기하고자 할 뿐이다. 그는 그렇게 끝없이 우회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달했고, 그렇게 우리는 그를 오해하며 그의 논의를 접하게 되었다.

 

라깡에 대해서 그리고 헤결과 맑스, 레닌에 대해서 논의하며 그들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들뢰즈와 푸코 그리고 데리다와 같은 이들과는 다른 입장을 갖고 현대 사회와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며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지젝은 라깡을 얘기했지만 결국 헤겔에게 향한 철저한 헤겔주의자였고, 최근 들어서 레닌을 자주 언급하면서 적극적으로 레닌의 정신을 다시금 환기하고 그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자고 얘기하며 철학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그런 그의 입장의 변화 과정 속에서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고 앞으로의 세상을 예언하며 다시금 공산주의라는 깃발 아래에서 세상을 바꾸자고 선동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그가 의도하는 것은 비비꼬면서 얘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다시금 세상에 배회하도록 하려는데 있는 것 같다.

 

그에 대해서 관심이 있기는 했지만 고작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정도만 읽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안다고 말하기 보다는 한번 읽어봤다는 정도만 얘기할 수 있는 수준이라 최근에 발표한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그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발표하던 시절의 민주주의에 대한 결론에 비해서 얼마나 달라진 입장을 갖게 되었는지 보다 확연하게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수준에서 그에 대한 논의를 멈춰야 할 것 같다.

 

그는 이전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현란한 글쓰기를 통해서 이 시대를 분석하고 그 분석을 통해서 비판적 입장을 갖는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보다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을 촉구하고 있고, 더 대담한 생각과 행동이 필요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전처럼 라깡과 헤겔 그리고 맑스, 여기에 레닌을 더해서 그는 현재를 분석하고 전망을 논의하고 있는데, 이론적인 내용이 아니라 일종의 정세 분석에 가까운 내용이기 때문에 그의 생각에 좀 더 선명하게 접근하게 되는 것 같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간단하게 말해서 지젝이 쓴 21세기 공산당 선언 정도인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고, 맑스의 ‘공산당 선언’이 갖고 있었던 통찰력과 통렬함에 비해서는 조금은 부족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흥미로운 분석으로 가득하고 여러 생각들을 해보게 만드는 논의를 전하고 있다.

 

지젝은 진정한 2000년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9.11 테러와 최근에 일어난 세계금융위기를 통해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허황된 믿음인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그 허위와 거짓된 믿음으로 인해서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결국 그 믿음은 그가 항상 언급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며 그 이데올로기가 단순히 이기적이지만은 아닌 선한 동기에 의해서 점점 더 상황을 악화되게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현재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 방식과 형식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고, 그 분석에 따라 그는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를 붕괴시켜야 한다는 과감한 혹은 이전의 맑스와 레닌의 결론을 반복한다. 그러기 위해서 현재의 안락함에 만족하기만 하고 있는 기존의 진보적 / 좌파적 입장을 갖고 있는 이들도 비판하며 사회주의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떨쳐내고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을 다시금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금융위기로 인해서 미국에서 취해진 다양한 경제적인 조치들과 중국에서 경제발전을 위해서 보이는 모습들에서 현재의 자본주의 / 사회주의 체제 모두 동일한 방식(국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과 20대 80의 사회라는 경제적 불평등)을 통해서 사회주의적인 정책과 지배가 이뤄질 수밖에 없고 이는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아시아적 가치를 중시하는 자본주의’와 ‘러시아의 푸틴과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와 같은 속물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게 세상은 더욱 옳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이들에게 다시금 공산주의라는 깃발 아래에서 합류하자고 독촉한다.

 

현재의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 수동적이고 종속적이며,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배제된 자들을 위한 제도로 다시금 변화를 보여야 한다고 처방하며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언급하며 외부로 향하는 것과 전복시키는 방식이 아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재구성 혹은 일종의 체질개선과 같은 방식으로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일종의 다른 방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의 결론은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믿음, 즉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많은 이들이 곤궁하게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자본주의 제체를 공산주의 체제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 같고,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이를 위한 분석과 결론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루 하루 큰 변화 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고,

남들에 비해 별다를 것 없는 직장 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그의 대담하고 과감한 제안에 조금은 갸웃거리게 되기도 하고, 실현 가능성(어쩌면 이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야 말로 지젝은 빨리 벗어던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의 논의의 핵심일지도 모른다)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가 들려주는 하나의 제안에 대해서 한번쯤은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가 어떤 이유에서 레닌을 다시 말하고,

그리고 바울을 언급하는지 이 현란하고 조금은 어렵지만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려는 선언에서 약간은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씩 그의 저작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하지만... 그전에 프로이트와 라깡에 대한 지식을 조금이라도 더 채우고 읽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우선되는 것 같다.

 

y*******o 2010.09.26. 신고 공감 3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