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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불허전의 말뜻을 꺠닫게 하는 천의무봉의 학습만화
"명불허전의 말뜻을 꺠닫게 하는 천의무봉의 학습만화" 내용보기
몇 년 전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전국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그림을 그린 홍은영 작가는 화려하고 역동적인 그림을 선보여 호평을 얻었으며, 학습만화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높은 퀄리티로 이름이 높았다. 그런데 20권으로 완간될 예정이었던 시리즈가 18권까지 나온 뒤 갑자기 발행이 중단되었고, 많은 시간이 지난 뒤 새로운 그림 작가가 투입되어 스무
"명불허전의 말뜻을 꺠닫게 하는 천의무봉의 학습만화" 내용보기

몇 년 전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전국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그림을 그린 홍은영 작가는 화려하고 역동적인 그림을 선보여 호평을 얻었으며, 학습만화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높은 퀄리티로 이름이 높았다. 그런데 20권으로 완간될 예정이었던 시리즈가 18권까지 나온 뒤 갑자기 발행이 중단되었고, 많은 시간이 지난 뒤 새로운 그림 작가가 투입되어 스무 권을 그려서 '개정판'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

 

홍은영 작가와 당시 출판사가 결별했던 원인은 출판사의 인세 착복이었다. 출판사가 인세의 절반 이상을 착복한 사실을 뒤늦게 안 홍은영 작가는 나머지 인세를 지급할 것을 요청했지만 출판사는 듣지 않았다. 결국 재판까지 간 끝에 법원은 작가의 손을 들어 주었지만, 출판사를 홍은영 작가에게 인세를 지급하는 대신 다른 그림 작가를 고용해 새로 책을 내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개정판'은 무성의하고 투박하기까지 한 거친 그림으로 별 호응을 얻지 못했고, 많은 독자들은 홍은영 씨가 남은 이야기들을 마저 그려 주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홍은영 씨는 완전히 새롭게 그린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 시리즈를 내놓았다. 예전 책에서 부분적으로 수정하거나 보완한 것이 아니라, 내용을 다시 구성해서 그림을 모두 새로 그린 것이다.

 

이 사실을 얼마 전에야 알고, 조카에게 선물로 주려고 현재까지 나온 전권을 구매했다. 그런데 문득 책의 내용에 부실한 대목이나 오류가 있으면 이야기해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찬찬히 읽어보았다. 그런데 막상 내가 이 책에 흠뻑 빠져 버렸다.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이미 산 책은 조카에게 선물한 뒤 내가 읽기 위해 한 질 더 살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학습만화는 올컬러이기 떄문에 펜 데생이나 구성이 어느 정도 허술해도 흑백그림만큼 티가 나지 않아 성의 없이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잦았다 . 더욱이 어린이용이라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구실로, 대놓고 적당적당히 대충 그림을 그린 학습만화도 많았다. 그나마 그림은 눈 뜨고 볼 수 있을 정도의 구색은 갖추었다고 해도, 내용의 측면에서는 가관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내용이 부실하거나, 충분히 압축할 수 있는 이야기를 의미 없이 질질 끌거나, 썰렁한 개그를 넣어서 페이지를 때우거나, 숫제 원전과는 아예 다른 이야기를 창작하는 경우도 많았다. 학습만화가 격이 낮다는 선입견이 생긴 데에는, 어린이 대상이라는 점보다 이런 행태가 더욱 크게 작용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홍은영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이런 편견을 멋지게 깨뜨린다. 서평 제목에 명불허전이니 천의무봉이니 하는 표현을 썼는데, 절대 오버한 것이 아니다. 눈에 띄는 오류나 큰 실수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별달리 흠 잡을 곳이 없다. 내용은 충실하고, 그림에는 정성이 가득하고, 이야기 구성과 나레이션도 매끄럽기 그지없다. 무엇보다, 정말 재미있다. 한 권을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인 걸까! <홍은영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학습만화에서 장점이 될 수 있을 법한 요소는 다 모아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책이다. 특히 철저하고 방대한 자료 조사와, 각종 판본에서 정수만 골라내어 속도감 있고 압축적으로 날렵하게 재구성한 솜씨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1권에서 스튁스 강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작가가 작정하고 자료 조사를 정말 열심히 했다는 것을 느꼈다. 스튁스 강에 대고 거짓 맹세한 신은 1년 동안은 죽은 듯 지내게 되며, 10년이 되기 전에는 신들의 모임에 참석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전에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소재로 만든 어린이책이 많다지만, 이 이야기가 나오는 책은 없겠지'라고 생각했던 대목이었다. <신들의 계보>는 초기 신화의 기록이라서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고, 불핀치가 정리한 그리스 로마 신화와도 내용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3권에서 판도라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는 나도 모르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판도라가 연 것은 상자가 아니라 사람이 들어갈 수도 있을 만큼 커다란 항아리였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라는 표현은 엄밀히 말하면 오역으로, 르네상스 즈음에 항아리를 상자로 잘못 번역한 것이 이때까지 굳어져 쓰인 것이다. 그다지 유명한 이야기도 아닌데, 이런 점까지 찾아내서 원전에 가깝게 그려내다니. 비단 스튁스 강이나 판도라뿐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 각종 고전 원전의 내용을 다룬 대목이 수시로 나온다. 그때마다 작가에게 진심으로 감탄했고, 이런 책을 만들어냈다는 데 대한 고마움마저 느껴졌다.

 

더욱이 갖가지 출처에서 나온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한데 모여 있는데도, 산만하거나 잡다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같은 인물에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를 한데 모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냈을 때에도, 산만하거나 앞뒤가 맞지 않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위화감이나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드는 곳도 없고 여러 이야기를 서로 합쳐놓았건만 삐걱대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는 것을 줄줄 늘어놓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고, 지식의 전달을 표방하는 학습만화에서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이 책은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되면서 조금씩 덧붙여지거나 변형되었고, 고대 그리스 작가들이 독자적으로 각색하여 쓴 작품도 많다. 그래서 하나의 소재를 두고도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가 전해오는 경우가 많으며, 출전에 따라 결말이나 등장인물의 이름이 달라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아예 한 가지의 원전만을 따르는 경우라면 몰라도 여러 가지 원전의 내용을 취합하는 책이라면 곤란한 부분이다. 작가 자의로 한 가지 버전을 택하려니 기준이 애매하고, 여러 가지 버전을 모두 늘어놓으려니 난잡해지기 십상이다. 홍은영 작가는 이런 경우에 우선 가장 잘 알려진 버전을 택해 중심 이야기를 진행했다. 그리고 이야기의 첫머리나 끝부분에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간명하게 한두 컷으로 정리해 막간 삽화처럼 살짝 끼워넣었다. 마치 페이지 하단의 주석처럼,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읽으면 좋고 관심이 없는 사람은 지나쳐도 줄거리의 중심 줄기를 따라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구성한 것이다. 이야기가 산만해지지도 않고, 여러 버전의 이야기도 충실히 소개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작가가 심사숙고하면서 고심했다는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부분이었다. 

 

비단 특정 에피소드의 세부적인 전개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내용 구성에서의 짜임새도 돋보인다. 조상 이야기를 한 뒤 그 후손들에 대해서 차례로 이야기하거나, 특정 등장인물이 나오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한 뒤 그 인물이 나오는 다른 신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준다거나, 등장인물이 꽃으로 변하거나 동물이 된 신화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놓았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신화에서 어떤 인물이 나올 때 그 인물이 나오는 다른 신화에 대해서 언급하는 일도 종종 있는데, 잠깐 언급하면서도 중요한 부분은 모두 알려줄 뿐더러 이질적이거나 잡다한 느낌도 전혀 없게끔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많은 자료를 섭렵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각각의 이야기 조각을 해체하여 완전히 재조립했을 때에야 비로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홍은영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그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시감 같은 것을 느꼈는데, 얼마 뒤 그 기시감이 <아발론 연대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서왕 이야기에 대한 수많은 판본을 버무려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낸 책이었는데, 내용도 흥미진진했지만 물 흐르듯 유려하고 자연스러운 전개도 기억에 남았다. <아발론 연대기>를 워낙 재미있게 읽어서 후에 아서왕 신화의 중세 원전 번역본을 여러 권 읽었는데, 그때서야 <아발론 연대기>가 얼마나 방대하고 압축적이며 깔끔하게 재구성된 책인지를 깨달았더랬다. 중세 원전들에서는 수많은 이야기가 중구난방처럼 산산조각나 흩어진 채로 대충 연결되어 있는 모양새였던 것이다. 각종 중세 원전에 비하자면, <아발론 연대기>는 조각난 천을 기웠지만 바느질한 흔적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솜씨있는 패치워크같은 저서이다. 그리고 그런 기분을 <홍은영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서 다시 느낀 것이다. 여기에 입체적인 느낌까지 받을 정도로 생생하고 역동적인 연출까지 더해지니, 금상첨화라는 말로도 부족할 지경이다.

 

내용뿐만 아니라 그림의 완성도도 정말 훌륭하다. 언뜻 보면 세밀한 그림과 꼼꼼한 채색만이 눈에 들어오지만, 자세히 보면 뒷배경이나 갖가지 소품의 디자인 등 주변적인 부분에도 많은 정성을 쏟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거기에 색감은 깔끔하고 채색은 명료해서, 그림을 보다 보면 상쾌한 기분마저 들 정도이다. 인물의 머리카락이나 옷 등에는 몇 단계로 명암을 구획하여 채색했는데, 자칫 어지러워보이기 쉬운 이런 채색기법을 홍은영씨는 깔끔하고 멋들어지게 소화해낸다. 특히 새벽의 여신 에오스나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처럼 이미지가 '색'과 직결되는 신들의 그림에서 홍은영씨의 색감과 채색이 빛을 발하는데, 머리카락과 옷의 몽환적인 색채가 신비로운 느낌까지 자아낸다. 물이나 숲 등 한두 가지 색채로 대충 때우기 십상인 배경을 채색하는 데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홍은영씨의 그림은 정교하되 번잡하지 않고, 깔끔하되 단순하지도 않다. 튀폰의 어깨에는 뱀 백 마리가 있다거나, 머리가 50개에 팔이 백 개인 헤카톤케이르 등, 신화에서 막연하게 허풍적으로 묘사된 캐릭터도 되도록 충실하게 그림으로 그려낸 점도 돋보인다.

 

신화에서의 묘사를 십분 반영하고, 여러 신의 개성이나 특징을 고스란히 구현한 캐릭터 디자인도 훌륭하다. 창이나 방패, 지팡이 등 여러 신의 지물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시와 성탑의 수호신인 레아가 탑 모양의 왕관을 쓰고 있는 등 신화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된 특징도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요소를 결합해서 나타냈건만, 막상 캐릭터 그림을 보면 어색하게 조합된 느낌이 전혀 없다. 등장인물에게 각종 지물을 들려주기만 하고 끝낸 것이 아니라, 여러 특징을 토대로 하고 캐릭터의 인상과 분위기까지 고려하여 세심하게 캐릭터를 디자인했다는 것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특히 주요 캐릭터들의 개별 일러스트는 멋지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2권부터 올림포스의 신, 바다의 신, 저승의 신 등 일정한 테마로 꾸며진 캐릭터 일러스트 갤러리가 있는데, 완성도가 하늘도 뚫을 기세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 실감했다. 그림도 정성들여 그렸고, 헤라 일러스트의 테두리에는 헤라를 상징하는 공작새가 그려져 있는 등 등장인물의 신화적 묘사를 충실히 반영했으며, 일러스트 테두리에도 우아하고 정교한 아르누보풍의 곡선 장식을 한껏 넣어 정성들여 그렸다. 초반부에는 한 명씩 서 있기만 하던 캐릭터 일러스트 구성도 뒤로 갈수록 다양해져서, 나중에는 캐릭터들이 갖가지 다채로운 포즈를 취하는가 하면 요정들의 모습이나 에피소드의 한 장면이 테두리를 구성하기도 한다. 신화의 묘사를 꼼꼼하게 표현한 구성도 찬탄할 만하지만 그림 자체도 정말 잘 그렸기 때문에, 처음 본 순간 미니 포스터나 카드로 만들어진다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더랬다. 그림이 예뻐서 인기도 많을 거고, 그림만으로도 그리스 신화의 신에 대해 어느 정도 공부할 수 있을 정도로 특징과 지물도 충실히 반영했고, 무엇보다 이렇게 멋진 그림을 책의 부록페이지로만 남겨두기에는 아쉬우니 말이다.

 

형편없는 책에 대해서는 결함을 조목조목 들면서 자세하게 비판해도, 정말 훌륭한 책에 대해서는 멋지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게 되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서평에서는 찬사로만 일관해서 서평으로는 밋밋할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고 남는 감상이라고는 그야말로 찬탄밖에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홍은영씨는 비단 어린아이뿐 아니라 어른이 보아도 손색없는, 온 가족이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는데 그 단계를 훨씬 뛰어넘었다. 깐깐한 어른이 보아도 흠 잡을 곳이 없는 그림과 내용 구성에, 비주얼 그래픽을 배우는 사람이 참고자료로 삼아도 손색없을 그림의 완성도에, 속도감 있으면서도 충실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전개까지.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서평 제목에 쓴 천의무봉이나 명불허전이니 하는 표현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상 가는 찬사를 뜻하는 표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이다.

p*******1 2010.12.12. 신고 공감 15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