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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상태로 『기타 잇키』 리뷰를 쓴다는 게 별로 달갑지 않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간 못 쓰고 넘어가겠지? 그럼 드미트리는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 외에는 기억하는 게 하나도 없겠지? 이렇게 살 거면, 책 안 읽고 그냥 사는 게 낫지 않겠어? 이런 저런 사정으로 몇 자라도 끄적여야겠다.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드미트리는 그냥 압도당해버렸다.
양장본에, 1220쪽, 무려 2kg이 넘는 무게. 판형도 신국판보다 더 컸다.
이 정도 덩치라면, 드미트리는 무작정 덤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얇은 책보다는 두꺼운 책을 좋아하고, 활자가 큰 것보다는 활자가 작은 게 좋다. 그래서 눈도 나빠졌나 보다. 제길슨. 게다가, 정확한 계기는 기억 나지 않지만 출판사 '교양인'은 내가 좋아하는 곳이다. 검색을 해 보니, 『축의 시대』를 낸 곳이더군. 이 책에 관해서는 다음에 얘기할 기회가 있을 테고. 이 자리는 『기타 잇키』를 이야기할 곳.
교양인이 펴내는 '문제적 인간' 시리즈의 6번째 권이다. 이 시리즈가 다루는 인물을 살펴보자. 스탈린, 로베스피에르, 네차예프, 히틀러, 프로이트, 장칭. 이념이나 국가, 활동했던 시대는 모두 다르나 시리즈명대로 정말 '문제적' 인물들이다. 그리고 기타 잇키......
일본에서 천황을 부정한다는 건?
부제가 '천황과 대결한 카리스마'다. 뒤늦었지만, 고백하자면 이 부제야말로 이 책의 매력을 올려줬다.
천황. 드미트리도 일본인이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일본에서 천황은 신성불가침의 존재다. 조선의 왕과 달리 일본의 천황은 서구 모더니티의 공격 속에서도 살아 남았다. 아니, 살아 남은 정도가 아니라 메이지 유신 때 민족주의의 구심점으로 작용하며, 일본의 근대화를 성공시킨 주역이다. 종전 이후에도 천황(제)은 살아 남았고, 지금도 천황은 건재하다. 섣불리 비유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겠으나, 일본 사회에서 천황과 맞선다는 의미는 기독교인이 성경을 부인한다거나, 대한민국에서 정부의 정통성은 북한에 있다고 주장한다거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요와 공급 법칙에 오류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즉, 주장의 진위를 떠나, 죠오오오올라 무모한 행위다. 웬만한 베짱이 있지 않고는 뱉을 수 없다. 일단 뱉었다 하면 사회에서 철저히 매장당한다.
기타 잇키. 그가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다. 그는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 아니 그 이전부터 천황 기관설을 이야기하며 시종일관 천황과 맞섰다. 천황은 일본의 극우 세력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인데, 그렇다면 기타 잇키는 좌파일까? 아니다. 통상, 기타 잇키는 우익으로 분류됐다. 이 책의 저자인 마쓰모토는 일본 우익의 사상을 구성하는 요소로 사생일여, 낭만주의, 농본주의, 천황론, 제2유신론, 내셔널리즘, 아시아주의를 거론하는데, 기타 잇키는 농본주의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우익에 해당한다. 이 때문인지, 기타 잇키가 배후로 지목된 2.26 사건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에 영감을 주기도 한다. (참고로 기타의 천황론과 일본 극우세력의 천황론이 뭐가 다른가 하면, 극우세력의 천황론은 이른바 천황본체론이다. 기타가 국민이 있기에 천황이 존재한다고 한 데 비해 우익은 천황이 있고 국민은 천황을 받드는 존재로 묘사한다.)
당혹스러울 것이다.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라는 저작에서 풍겨지는 사회주의자로서의 기타 잇키와 미시마 유키오가 존경했던 우익 사상가로서의 기타 잇키. 기타 잇키는 좌파인가, 우파인가. 책의 저자인 마쓰모토 겐이치는 그간 혁명은 좌익, 내셔널리즘은 우익이라는 이당대립 속에서 기타 잇키는 사이비 혁명가(37쪽)로 평가 받았으나, 이런 이분법으로 기타 잇키를 볼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기타 잇키는 누구인가?
1,200쪽이 넘는 책을 읽다 보면, 그가 어떻게 해서 사회민주주의자에서 국가개조론자로 옮겨 갔는지를 추적할 수 있다. 사도라는 변방에서 태어난 그는 출생 당시에는 부유했던 집안에서 자랐다. 돈이 있고 없고와는 상관 없이, 당시는 메이지 유신 이후 민권론이 일본 열도를 달구던 시기. 자연스레 기타 잇키도 서구 모더니티에 물든다. 건강 문제로 학교를 자퇴한 뒤, 그는 지방 매체에 논란이 되는 글을 수차례 발표한다. 그 시기에 이미 그는 국민이 있기에 천황이 존재한다는 천황 기관설을 주장한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라는 책을 발간하지만, 바로 금서 처분받는다.
일본에서 활동할 길이 닫힌 순간에 마침 중국에서는 한창 혁명이 진행 중이었다. 기타 잇키는 중국으로 건너간다. 신해혁명의 주역이면서도, 혁명 뒤 권력 일선에서는 배제된 쑹자오런을 따르던 기타 잇키는 짧았던 환희를 뒤로 하고 씁쓸함만 가득 안고 일본으로 돌아온다. 신해혁명의 영광도 잠시, 혁명이 변절되는 과정을 지켜본 것만으로 모자라, 혁명 동지였던 쑹자오런이 허무하게 암살당하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중국에서 거세지는 반일 감정을 목격하면서 기타 잇키는 중국에서는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일본에 돌아온 그는 유죤사 3인방으로 국가 개조론에 헌신한다. 산업화가 진행되는 사회에서 흔히 목격되는 도시와 농촌 간 불균형 문제는 산업화 속도가 빨랐던 일본에서 극심했다. 게다가 미국과 영국 등 서구의 압박은 갈수록 거세졌다. 중국에서 돌아온 기타 잇키는 법화경을 독경하면서 나날을 보내는 한편, 일본을 근본적으로 변혁하고자 하는 무리와 친분을 강화한다. 기타의 혁명론은 다소 기괴하다. 프롤레타리아를 혁명의 주체 세력으로 본 사회주의자와 달리 기타는 하급 장교들 - 특히 시골에서 상경한 - 의 무장 봉기로 혁명을 성취할 수 있다 믿었다. 기타의 바람대로 이들은 이후 2.26을 일으킨다. 2.26은 혁명이 되지 못하고, 쿠데타에 머물면서 배후로 지목된 기타 잇키는 총살당한다. 기타가 어느 정도로 무장 봉기 세력에 가담했는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으나, 기타가 쿠데타를 지시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장교들의 쿠데타 사실을 사전에 알았으나, 그에 관해 조언해 주는 역할 정도였으니, 사형은 기타에게 너무 가혹한 처벌이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기타 잇키는 2.26을 도련님에게 투구를 빼앗겨 진 싸움, 이라 얘기했다. 도련님이란 당시 천황을 일컫는다. 천황을 도련님, 으로 부를 수 있는 베짱. 과연 천황과 맞선 카리스마라 할 만하다. 기타에게 천황은 한 명의 인간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기타가 천황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일본 극우세력과 기타의 차이라고 한다면, 기타는 천황을 인정하면서 천황을 혁명 원리로 이용하고자 한 점이다. 그런 면에서 기타는 만약 가능했다면 자신이 천황이 되고자 했을 것이다.
본인이 천황이 되고자 한 인물, 무모한 이카루스의 후예라고 봐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기타에게는 굉장히 예리한 현실 감각이 있었다. 러일전쟁에 찬성하면서도,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벌이면 패망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예측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기타는 제2유신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보았을까? 도시와 농촌, 빈자와 분자 간 부의 양극화 문제를 조정해야 하고 중국과 함께 아시아를 이끌어야 하며, 조선과는 대등한 입장에서 공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식민지 조선을 생각하는 문제는 좀 더 예민하게 접근해야 한다. 기타의 생각이 발톱을 감춘 맹수의 속임수 같은 느낌도 들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당시 일본 지식인의 사고 중에서는 식민지 조선을 향한 생각은 굉장히 전향적이었다 할 만하다.
저자 마쓰모토 겐이치에 아쉬운 점
기타 잇키에 관해서는 이 정도로 마치고, 책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인과 관계가 명쾌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1,200쪽이 넘는 분량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특히, 신해 혁명의 전개 과정은, 드미트리가 그간 읽어본 적 없던 내용이라 신선했다. 쑨원과 이승만의 행적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중국과 한국의 근대사가 겹쳐진다는 묘한 지적 쾌감도 일었다. 하지만, 기타 잇키라는 한 인간을 이해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책이지 않나 싶다.
주관을 배제하고 드러난 사실만을 기술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기타의 행동이나 사고가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꽤 있었다. 예컨대, 기타가 언젠가부터 불경을 독송하며 종교적 인물로 변하는데, 이를 분석하는 대목이 약하다. 중국 혁명에서 기타가 펼친 활약이나, 기타의 혁명관 변천 역시 책만으로는 추측하기 힘들었다. 또 한 가지 지적하자면, 한 번 나왔던 내용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이 책은 동북아 근대를 이해하는 데 훌륭한 책이다. 식민지 조선을 기술하는 부분은 거의 없으나, 일본과 중국의 사건사고 많았던 20세기 초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더구나 기타 잇키라는 인물은 지금 우리의 현재와도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앞서도 말했듯, 그가 배후로 지목된 2.26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을 감행하게 한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5.16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기타 잇키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살펴 보는 것은 꽤나 재밌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