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니 '사진'에게도 최초의 순간이 있었다. 인류의 긴 역사에 비하자면 지독히도 짧은, 하지만 오늘날 카메라를 꺼내 들고 셔터를 누르는 행위만큼 보편화된 것이 어디 또 있을까 싶다. 한 번 받은 탄력에 가속도가 붙은 듯 나날이 새로운 제품들이 출시되고 있는 요즘이기에 쏟아져 나오는 사진들 역시 양으로만 따지면 어마어마하다. 그런 와중에서 다시 과거 사진이 희귀했던 시절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만큼 모순된 행위도 없을 듯하다. 하지만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을지라도 명품은 명품인 법, 아니, 오히려 시간은 그들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한 하나의 조건과도 같이 느껴진다. 1826년 경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에 의해 최초의 사진이 탄생한 이후 지금껏 인류는 수많은 사진을 찍어왔다. 오늘날 사진이 현실 세계를 놀라울 정도로 정밀하게 재현해내고 있지만 처음부터 사진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최초의 사진들은 오늘날의 그것에 비한다면 사진이라기 보다는 그림과도 흡사해 보였다. 실패한 판화 마냥 희미하게 잡힌 풍경 그 어딘가에도 오늘날처럼 사람이 살았으리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초의 사진들은 너무도 고색창연했다.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의 du temple 광장은 죽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활기찬 인간의 면모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초창기 사진들로부터 오늘날의 사진과 같은 면모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 당시 카메라는 오늘날과 같이 취미로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기에는 너무도 비쌌으니 말이다. 고위층 인사들의 모습들이 주를 이룬 초창기 인물 사진들은 그들의 명석함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산물이었다. 애덤슨과 힐의 사진, 펠릭스 나다르가 찍은 장 프랑수와 밀레의 모습은 꼭 다문 입술, 근엄함이 느껴지는 표정을 자랑한다. 그것은 현실이기보다는 새로이 창조된 또 하나의 세계였다. 피사체를 어떠한 각도에서 어떻게 바라보느냐를 설정하는 것은 사진을 찍는 자의 몫이다. 그렇기에 사진은 개인의 창조물이며,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이다. 로저 펜튼의 크림 전쟁 사진과 아마도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인간다운 대우를 받고 있는 영국 병사의 모습은 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도로시어 랭이 찍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먼 곳을 응시하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역시 1929년 미국 사회를 강타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뉴딜 정책임을 주장하는 정부의 목소리가 뒤에 깔려있다. 존 하트필드의 사진은 또 어떠한가? 나치즘과 파시즘 등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의 귀신들이 전 세계를 점령하던 그 시절, 불끈 쥔 주먹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인류의 열망을 드러내는 듯하다. 이는 오늘날에도 다수의 언론들이 여론을 선도하기 위해 사용하는 선전전과 그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사진이 보여주는 세상이 아무리 희망적이라 할지라도 실재하는 절망까지 변화시킬 순 없는 법이기에 스페인 병사의 죽음 앞에서 조용히 셔터를 눌렀을 로버트 카파의 윤리성에 대해, 표면적인 문제는 드러내지만 그 이면에 깔려있는 깊은 의미까지 건드리지 못하는 깊이의 부재에 대해 많은 이들은 이야기한다. 세계의 변화하는 속도는 점차 빨라져 그 변화를 처음 주도했던 인간마저도 소외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많은 이들은 사진을 남기고, 사진 속 세상은 시간이 무색하다 싶을 정도로 평면에 갇혀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다. 과학은 사진마저도 가공시켜버렸다. 사진에 가미된 주관성 못지 않게 과학 기술에 의해서도 진리는 파괴되어 버리고 그렇게 남은 것은 기교이다. 하지만 그 기교 역시 세상의 틀로부터 자유롭진 못하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진리일 것이다. 사회가 변화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다. 사진 속 피사체의 일부는 사람일 것이고, 그 사람들은 형태는 물론 다르겠지만 가족을 이루고 살 것이다. 자본에 의해 사랑마저도 상품화되고, 현대 사회의 단발성이 가족의 영역에도 고스란히 전도되는 지금이지만, 가족을 통해 행복을 꿈꾸는 인류의 염원만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염원을 담는 것이 사진을 찍는 이의 몫이 아닐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