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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드샤 칸, 비폭력 군대의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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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는 ‘비폭력 전투’라는 놀라운 발명품을 제공했고, 바드샤 칸은 그 발명품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간디와 함께 인도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인물, 바드샤 칸에 관한 전기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바드샤 칸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런 인물이 있었는가 하는 감탄으로 한 장 한 장 읽어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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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는 ‘비폭력 전투’라는 놀라운 발명품을 제공했고,
바드샤 칸은 그 발명품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간디와 함께 인도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인물, 바드샤 칸에 관한 전기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바드샤 칸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런 인물이 있었는가 하는 감탄으로 한 장 한 장 읽어내려갔다.

 

 

 

 

          바드샤 칸. ‘칸 중의 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칸의 본명은 칸 압둘 가파르 칸이다. 인도의 국경지방인 파탄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평생을 영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파탄과 인도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책의 말미에 가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파탄지방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지방을 말한다고 한다.

        파탄 지방은 대대로 복수의 가치를 매우 높게 여겼고, 무혈투쟁도 서슴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바드샤 칸의 오랜 기간동안의 비폭력투쟁은 마침내 파탄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수 만 명이나 되는 비폭력 군대인 ‘쿠다이 키드마트가르’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하는 것을 보면서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더구나 그 영향은, 사람들이 수 천 년 동안 가지고 내려왔던 생활방식을 바꾸는 것이었다.



        비폭력투쟁이라는 바드샤 칸의 투쟁방식은 일견 매우 소극적이고, 대책이 없는 것 같은 방식이지만, 결국 비폭력이 폭력을 이겼다는 사실은, 그 투쟁방식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게 만든다.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극단주의적 대결신봉주의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예수님의 가르침 또한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안타까운 점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간의 화합을 위해 통일 인도를 추구했던 바드샤 칸은 간디와 마찬가지로 절충론자로 오해받기 쉬웠고, 결국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들에 의해 감옥에 갇히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대중이란 얼마나 무지몽매한가.

        신념을 위해 살다가 죽은 사람들의 일생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스승이라고 불릴만한 사람이 아닌가.

p*********n 2008.02.12.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처음 시작할 때 가졌던 ''진리''와 ''비폭력''의 유산만큼은 끝까지
"처음 시작할 때 가졌던 ''진리''와 ''비폭력''의 유산만큼은 끝까지" 내용보기
아프가니스탄의 파탄인들로 불리는 인도의 북서부 국경지역에 자리잡고 사는 사람들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보복을 하다가 죽는 것이 오히려 더 영예로운 일로 여길 정도였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야만인'', ''잔혹한 사람'', 그리고 ''반역적인 살인자''라는 수치스러운 이름까지도 떠 안고 살아야만 했다. 그런 그들의 잔인성과 불명예는 한 위대한 인물의 등장과 함께 역사의 저
"처음 시작할 때 가졌던 ''진리''와 ''비폭력''의 유산만큼은 끝까지" 내용보기
아프가니스탄의 파탄인들로 불리는 인도의 북서부 국경지역에 자리잡고 사는 사람들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보복을 하다가 죽는 것이 오히려 더 영예로운 일로 여길 정도였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야만인'', ''잔혹한 사람'', 그리고 ''반역적인 살인자''라는 수치스러운 이름까지도 떠 안고 살아야만 했다. 그런 그들의 잔인성과 불명예는 한 위대한 인물의 등장과 함께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른바 에크나스 에아스와란이 지은 『비폭력적인 이슬람의 전사 바드샤 칸(Badshah Khan)』(실천문학사)이란 책에 등장하고 있는 바드샤 칸이란 실제 인물을 통해서이다. 1890년 부유한 지주 베람 칸의 아들로 태어난 칸은, 가이드라는 영국군 입대를 계기로 영국인의 차별에 부당성을 느끼고, 자신과 민족을 둘러싼 무지와 가난의 해방구를 찾고자 우트만자이라는 학교를 세우고, 민족의 독립에도 눈을 뜨게 된다. 그 후 칸은 비폭력의 사상을 최선봉장이었던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 마하트마 간디와의 만남을 통해 평생토록 비폭력의 자유 투사로 헌신하는 삶을 다지게 된다. "두 가지 목표를 항상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조국을 해방시키는 것과 굶주린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들을 입히는 일입니다." 하는 기치를 내 걸었던 시점이 그의 나이 스물 세 살의 때였다. 그토록 혈기 왕성하던 청년의 때에 그는 이미 결혼을 해 아들까지 낳은 상태였지만, 가정사에만 매달릴 수 없었던 그는 아그라에서 열리는 진보적 무슬림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곳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는 칸은 북부 산악 인근 지역에 위치한 바자우를 방문해, 며칠 동안 단식하면서 더 큰 알라의 대답을 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기 고향에 돌아와 교육과 농사와 위생법을 가르치려고 착수하였지만는 아내가 열병으로 세상을 뜨는 아픔까지 겪게 된다. 하지만 그런 침통한 상황은 자신에게 주어진 민족의 계몽과 자립의 기반이라는 열매 속에서 극복돼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혼을 하여 다시금 안정을 찾은 칸은 국경 지역의 경제, 사회, 교육 분야에서 향상 운동을 추진하는 기구인 ''이슬라 울 아파게나''라는 정치적 조직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그는 그 조직의 수장 자격으로 1920년 인도 국민회의파 나그푸르 대회에 참석했는데, 그 이후 그의 활동과 생각이 인도 전역에 폭넓게 인정이 돼 많은 사람들로부터 "바드샤 칸! 칸들의 왕"이란 호칭까지 얻게 된다. 하지만 당시 그 지역의 행정장관의 회유책을 받은 아버지는 칸을 만류하기에 이른다. 그때 칸은 아버지와의 숨가쁜 단판을 지었다. "아버지, 만약에 모든 사람들이 매일 기도 드리는 일을 그만둔다면, 저에게 너도 그들을 따라서 그만두라고 말씀하실 건가요?", "제 생각에는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민족을 섬기는 일도 기도 못지 않은 신성한 의무입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때 그의 아버지는 더 이상 아들을 잠재울 수만은 없었던지 "그것이 신성한 의무라면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하며 강렬한 지지를 더해 주게 된다. 칸은 1929년 "투쟁을 하되 총이 아니라 목숨을 가지고 싸우는" ''쿠다이 키드마트가르'' 즉, ''신의 종들''이라는 조직까지 결성하기에 이른다. 그들의 표어는 ''자유''였고, 그들의 무기는 ''섬김''이었다. 그러한 칸의 비폭력 저항주의의 근저에는 자신보다 10년 앞서 비폭력 저항을 내세웠던 간디와의 조우를 통해서 더 활발한 힘을 얻게 된다. 그가 인도 전역에 비폭력의 물결을 일으켰던 간디와 대화를 할 수 있었던 1930년 3월 위대한 간디의 ''소금행진''을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그 이후 국민회의파 카라치 대회와 같은 여러 가지 회의의 실무위원회 자격으로 두 사람의 만남은 지속되었다. 그때마다 두 사람은 힌두교도와 무슬림을 설득하여 화합과 통합만이 살길임을 역설했다. 그들의 만남은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때를 번갈아 가면서 감옥에 자주 투옥되고 또 석방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런 그들이 감옥 속에서 영국으로부터 받은 회유책은 동일했다. 그것은 인도에 대한 영국의 포기 운동을 철회하라는 압력과 함께 제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대영제국의 후원을 촉구해 달라는 부추김이었다. 그 회유와 압력에 굴하지 않았던 그들의 인내심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인도는 마침내 1946년 과도정부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의 인도''를 열망했던 그들의 꿈과는 달리 인도는 독립하자마자 분리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칸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948년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간디와의 영 이별을 고하게 된다. 그와 궤를 같이한 탓이었던지 칸도 국경지대가 파키스탄의 땅이 되면서 파키스탄의 인민당 당수로 선출되지만, 잦은 군사 쿠데타로 인해 감옥의 투옥을 반복하며 탄압 받다가, 끝내 아프가니스탄으로 망명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 1988년 1월 20일 수 차례의 발작과 페감염으로 페샤와르 레이디 리딩 병원에서 98세의 일기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처럼 바드샤 칸은 생애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30여 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야만 하는 암울한 상황을 맞이해 왔다. 하지만 그런 곡절의 생애에도 불구하고 그가 처음 일을 시작할 때 가졌던 ''진리''와 ''비폭력''의 유산만큼은 끝가지 고수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의 비폭력 저항주의의 사랑은 이슬람을 넘어서서 모든 민족으로 하여금 그들이 지니고 있는 행동하는 사랑을 위한 잠재력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힘주어 내 품는 말은 오늘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구에서 문명과 인류가 사라져버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오늘날의 세계는 비폭력을 통해서만 대량생산되고 있는 핵무기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 (2003년 12월 15일, 권성권 올림)
s*****e 2003.12.1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