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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원조격인 희곡이다. 여성이 제 목소리를 내기 힘든 19세기에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당당히 문을 박차고 나가는 엔딩이 인상적인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세기가 된 지금에도 '여성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시 당하기 일쑤다. 왜일까? 여성들의 개인적인 성향 문제일까? 아니면 사회구조적인 분위기에 매몰된 탓일까? 그도 아니면 '여성운동'이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여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 탓일까? 한참 부족한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마지막 이유 때문인 듯 싶다.
흔히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고 말하곤 한다. 여성운동이 제 힘을 발휘하기도 전에 산산히 흩어져버려서 흐지부지 되기 일쑤인 것은 '여성 문제'를 제대로 접근해서 남성 지배적인 사회에 당당히 입장을 발휘하려고 해도 번번히 '현실의 벽'에 부딪혀 버리기 때문이다. '현실의 벽'이란 여성은 '가정적'이어야 한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말한다. 여성은 밖에 나가서 '자아실현'을 하기보다는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늘 희생해야만 하는 존재로 인식되는 것을 말한다. 설령 사회에 큰 공헌을 이룰 정도로 걸출한 인재로 발탁이 된다 하더라도 '결혼의 굴레'에 갖혀버리면 임신과 출산, 자녀 양육과 교육, 살림과 가사 등을 도맡아서 해내고 난 뒤에야 허락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남편들은 직장에서 출장, 야근, 회식을 하면서도 '가정'을 위해서라고 변명하지만, 아내들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출장도 안 되고, 야근도 안 되며, 회식은 더더군다나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왜 이런 차별이 생겨버린 것일까?
물론, 임신과 출산이 전적으로 '여성의 몫'인 탓이 크다. 불룩한 배를 내밀고서 출근이라도 하면, 아무리 '여초 직장'이라고 하더라도 눈치가 보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임산부에게 가중한 일을 강요할 수 없잖은가 말이다. 더구나 출산이 가까워지면 짧게는 세 달, 길게는 삼 년 동안 직장일에 집중할 수 없게 된다. 어린 젖먹이를 내버려두고(?) 출근이라도 할라치면 '독한년' 소리 듣기 십상이고, 그렇게 해서라도 '출세'가 하고 싶으냐..라는 빈정거림을 듣기 일쑤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식을 사랑할 줄도 모르는 비정한 엄마(또는 며느리)라는 불명예스런 딱지라도 받게 되면 '일과 가정'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갈림길에 서서 고민해야만 한다.
반대로 '남자'의 경우에는 전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남자는 결혼을 하면 더욱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아빠가 되면 웬만해선 직장에서 짤리지도 않는다. 여자와는 달리 '처댁(시댁의 반대말, 처가의 높임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얼마든지 사회생활에 매진할 수 있다. 오히려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가정적인 남성을 '무능력자'로 낙인을 찍을 정도로 말이다. 오히려 가정에 소홀히 할수록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남자의 세계'다.
이런 '사회구조적인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이 책을 읽어보면 느낌이 남달라질 것이다. 주인공인 '노라'는 남편을 사랑하고 가정에 헌신적이었는데도, 남편은 노라를 자신의 명예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할 뿐이었다. 노라는 남편이 쥐꼬리만한 수입으로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도 불평 한마디 없이 자녀 셋을 낳고 기르면서 알뜰살뜰 살림을 해왔다. 심지어 신통찮은 벌이를 하던 남편이 과로로 건강이 나빠지자 의사의 권유대로 '요양'을 가서 남편의 생명을 살려내는 일까지도 했다. 엄청난 돈이 필요한 일인데도 말이다. 물론 곤궁한 살림에 큰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범죄(?)'를 저지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오직 사랑하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매달 '빌린 돈'을 갚기 위해서 허드렛일까지 도맡아 하면서 아끼고 또 아끼며 살림을 해나갔다. 이 모든 일을 남편에게 비밀로 하고, 남편과 아이들은 좋은 음식과 좋은 옷으로 호강(?)을 시키면서도 노라 자신은 늘 싼 음식과 싸구려 옷을 챙기면서도 절대 티나지 않게 했더랬다. 그런데도 남편은 자신의 명예만을 걱정하는 쫌생이처럼 굴었다. 아내가 자기 몰래 저지른 범죄(?)가 들통나면 자신의 명예와 처신이 깎일 것만 걱정하며 노라에게 험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때 노라는 결심을 한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않고 아내로서 존중하지도 않는 남편과는 같이 살지 않겠노라고 말이다. 심지어 남편과 가정에 헌신적인 아내를 '법적'으로 보호하지도 않는 사회는 잘못되었노라고 당당히 선언하기까지 했다. 여성은 태어나면서부터 '남자들의 보호'가 없이는 살 수 없게 만든 세상에 대한 경고를 던진 셈이다. 여선은 어릴 때는 '아버지'의, 결혼을 하면 '남편'의, 남편이 죽으면 '아들'의 보살핌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사회에 경종을 울린 <문제작>으로 보아야만 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희곡이 초연했을 당시엔 수많은 관객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고 전해진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말이다. 당시 사회분위기를 대변해주는 '남편 헬메르'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는 '상식', 그 자체였지만, '아내 노라'의 대사와 몸짓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여성도 당당히 사회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세상이 되었고, 자신의 존재를 세상이 인정하는 시대가 펼쳐졌다. 하지만 여전한 것도 있다. 바로 '현실의 벽' 말이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굴레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그러한 것들이 '상식'처럼 떠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라는 말한다. 자신은 아버지의 '인형'으로 자랐고, 결혼한 뒤에는 남편의 '인형'이 되고 말았다고 말이다. 노라 스스로는 '남자' 못지 않은 어려운 일을 해냈고, 충분히 사랑받고 존중받을 만한 일이었다고 자부했지만, 아버지에게서도, 남편에게서도, 누구에게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 사실을 인식한 순간에 노라는 떠날 준비를 마쳤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제대로 된 교육(공부)'을 받겠노라고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노라는 잘못한 일이 없다. 그런데도 남편에게는 '종속'을 강요받았고, 사회로부터는 '온전한 사람'으로 인정 받지 못했다. 사회는 노라에게 '남자의 도움(또는 보살핌)'을 받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치부해버렸다. 노라는 이처럼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한 '교육'을 다시 받겠노라고 당당히 선언한다. 그래서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집을 떠난다.
이런 노라를 비난할 수 있을까? 남편은 몰라도 자식을 버리면서까지 '교육'에 집착하는 이기적인 여자로 낙인 찍을 수 있을까? 그래선 절대로 안 된다. 반대로 아내와 자식을 나몰라라하고 집을 떠나는 남편이 있으면 '무정하다'는 비난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사나이 가는 길'을 막지 말라는 그럴 듯한 핑계까지 마련해주면서 말이다. '여성이 가는 길'은 왜 축복해주지 않느냔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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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문학의 교본으로 유명한 작품으로 알고 있었는데 막상 작품을 제대로 읽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좋은 아내와 좋은 엄마로 가정을 지키던 노라가 모종의 사건을 겪고 자신을 대등한 인간으로 아내로 여기지 않는
남편에 절망하며 집을 떠난다는 내용인데 1879년에 이 작품이 초연된 것을 생각하면 정말 파격적인 결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를 보면서 느꼈던 해방감을 이 작품의 결말에서 느낄수 있어서 좋으면서도 집을 떠난 노라는 어떻게 생활했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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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페미니즘 희곡, '인형의 집' 의외로 작가는 남자다. 무척이나 짧기 때문에 몇 시간만에 완독 가능하다. 여자라는 존재는 남자에게 종속되어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마치, 남자의 부속물인 것처럼. 여자라는 존재를 단독자로 설명하기에는 어딘가 조금은 부족한 느낌이 드는 나 역시 남성중심주의 문화에 얼마나 세뇌가 되었는가.. 놀랍다 남편은 분명 노라에게 친절했다. 하지만, 그 친절은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이었다. 남편에게 있어서 노라는 자신이 꿈꾸는 완벽한 가정에 필요한 사람 -귀여운 아내, 아이들을 잘 돌봐주는 아내, 살림을 알뜰하게 잘 하는 아내-에 지나지 않았다. 노라도 물론 그런 남편을 사랑했다(고 믿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에게 그토록 숨기고 싶어했던 비밀이 드러난 순간, 모든 것이 투명해졌다. 노라는 그것을 그토록 숨기고 싶어했지만, 모든 것이 알려지길 차분하게 기다렸다. 자신은, 아버지가 갖고 놀던 인형이 이제 남편에게 전해진 것 뿐이라며, 자신은 더이상 누군가에게 인형처럼 재밌게 놀고 싶지 않아졌다. 노라는 이제 자기 자신을 찾는 진지한 여정을 시작했다. 아내이기 이전에,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여성은 누군가의 부속물도 누군가의 인형도 아니다. 어머니라는 존재를 숭배할 필요도 혐오할 필요도 없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자식을 낳은 여자에게 필연적으로 부여되는 이름일 뿐이다.
한 인간으로서 모든 여성이 존중받길 희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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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보러가기 전에 원작이 있다면 무조건 읽고가는 주의라서 공연 하루전에 서둘러서 읽었다. 책은 130페이지 정도로 적은 분량이지만, 내포된 의미는 그에 반비례 할 정도로 강한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다. 극중 남편은 노라를 계속해서 귀여운 종달새라고 부르는데, 내가 노라도 아닌데 기분이 나빠질 정도로 노라를 그렇게 부를 때마다 짜증이 났다. 단순한 애칭이 아니라, 호칭그대로 자신을 위해 언제나 예쁘게 노래만 하는 종달새로 있어주길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라서 매우 불쾌했다. 19세기말 여성은 그저 남편 혹은 아버지의 소유물로 여겨졌으며, 스스로 돈을 빌리거나 독립된 주체로서 행동할 수 없었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남편을 위해 서명을 위조해 돈을 빌릴 수 밖에 없었던 노라를 자신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비난하는 헬메르는 남성, 여성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도 실격이다. 자신을 위해 서슴없이 죽을 각오도 할 수 있는 부인을 향해 오직 자신의 미래만 생각하고, 비난을 퍼붓는 그는 이기적이고, 책임감이 결여된 인간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그녀를 사랑해서라기 보다는 혼자 남겨진 후의 주변의 시선과 비난이 두려워 노라를 붙잡는 헬메르의 모습은 정말 치졸하기 짝이 없었다. 노라는 자신을 한 인간으로서가 아닌 인형으로만 대하는 곳에서 벗어나 자유와 독립을 향해 떠났지만, 과거의 여성들은 대부분 이런 억압과 부당함 속에 살아왔다. 현재는 여성의 인권문제에 관심도 높아졌고 사회 곳곳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고통받는 또다른 노라들이 있는한 페미니즘 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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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크 입센의 인형의집 - 민음사 제목처럼 정말 아기자기한 책이다. 이책은 페미니즘 문학중 가장 유명하다해도 과언이 아닌 책이다. 이 작품이 언제 만들어 진 지 떠올리면 정말 시대를 초월하는 책 인것 같다. 다들 한번씩 이책을 꼭 읽어 봤으면 좋겠다. |
|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리뷰입니다. 읽어봐야지 하고 미루다가 좋아하는 작품에 인용되어서 이제야 읽었네요 ㅎ 생각보다 더 생각해볼 점도 많고 마음을 울리는 문장도 많아서 곱씹고 또 곱십고 다시 돌아가서 읽어보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꽤 자주 생각나는 책이에요. |
|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리뷰입니다.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해서 읽어보았습니다. 읽어보니 왜 유명한지 알겠고 생각한 거리를 많이 주는 소설이었습니다. 더 많은 여성중심, 페미니즘 소설들이 궁금하고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 노라는 남편에게 철부지로 취급받아왔다. 아버지가 하는 말에, 남편이 하는 말에 순종해주었다. 책에서 노라는 그런 아버지와 남편에게 잘못이 있다고 말한다. 노라는 딸이기 전에, 아내이기 전에 '나'를 찾기위해 집을 나가며 책이 마무리 된다. 여러 책을 읽다보면 참 한마디씩 질책해주고 싶은 주인공들이 있다. 그렇지만 노라에게는 유독 잘못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 같다. 이유는 시대는 다르지만 여성으로써 겪는 그 어떤 부조리함을 느껴보았기 때문이다.. 노라 같은 이들 덕분에 적어도 지금만큼의 여성인권이 형성되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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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2. 24 구매) 희곡은 읽기가 좀 힘들지만,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주인공인 노라는 전형적인 가정주부처럼 보이지만, 읽으면서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점차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억압된 그녀의 상황이 안타까웠지만, 노라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으면서 마지막 결말까지 도달한 게 좋았다. 시대적 상황과 함께 그 때의 여성들이 어떤 식으로 얽매여왔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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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이 소설이 최초의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한다. 작가는 남성 중심 사회의 모순을 사회문제로 다루면서 이 소설을 썼다고 하는데 대상 독자를 남성으로 잡았을까, 아니면 여성으로 잡았을까? 입센은 아마도 양측을 다 독자로 생각하고 썼을 것이다. 나는 여성 독자로 이 책을 읽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사유 재산 혹은 인형과 같은 역할을 맡았다. 이 상황을 여성이 깨닫는 시점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여성의 사회 참여나 창조적 능력, 인격의 도야 등은 무시되고 기껏해야 조력자 정도로만 허용되었다. 남성의 뒤에 서서 인형으로 사는 것이 한 인간으로 독자적으로 성장하는 것보다 쉬울 수 있다. 그러나 가정에 갇혀 숨어 사는 일은 사회 발전과 인간으로서의 성장을 얻을 수 없다. 사회가 남성의 손에 쥐어준 여성의 자아를 여성이 되찾는 일. 당연하지만 쉽지는 않다. 이미 제 것인 양 손에 쥔 것을 대가 없이 내놓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쉽지 않기에 자신의 것을 되찾아오는 일에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주인공 노라가 남편이 주어야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버리고 스스로 만들어 가겠다는 결단과 용기를 내듯이 두려움과 비겁함을 떨치고 일어날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작가는 모든 여성들에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