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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5년까지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짓밟혀 백성들이 애를 먹었던 게 36년이라면, 타이완 사람들은 무려 58년이나 일본 사람들에게 짓밟혔다. 우리보다는 느슨하게 다스렸고 알차게 발전시켰다는 말도 있지만, 남의 나라 사람들한테 제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어찌 개발과 돈 몇 푼에 바꿀 수 있으랴.
타이완의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1989년에 만든 <비정성시 Bei qing cheng shi / A City of Sadness>는 일본에게 나라를 찾은 다음에도 야만의 시대를 살 수밖에 없었던 타이완 사람들을 그려내고 있다.
남의 나라 사람이면 그래도 탓이라도 해보지, 제 나라 사람한테 억눌려 살아야 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나라를 지키라고 맡겼던 장군 자리를 박차고 총칼로 나라를 삼키고 만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이 다스리던 군사정권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랫동안 허덕였듯이, 중국 공산당이 나라를 잡기 앞서 국민당 사람들이 대륙에서 타이완으로 건너와 백성들의 입과 귀를 틀어막고 제 뱃속만 채우는 일로 1945년부터 1949년까지 타이완 백성들을 괴롭힌 일들을 영화에 담았다.
2.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에 살며 밥집을 하며 돈을 번 임아록에게는 아들이 넷 있다. 복도 많은 늙은이다. 옛날에 일을 할 수 있는 사내를 많이 갖고 있는 게 돈을 벌 수 있는 길이었므로.
쌀 장사를 하는 맏아들 임문웅(진성용)은 아버지를 닮아 건달에 가깝다. 일본이 타이완을 다스릴 때 군의관으로 싸움터에 나간 둘째 임문상은 중국 대륙 어디선가 사라져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셋째인 임문량(고첩)은 일본 때문에 싸움터에 끌려나갔다가 혼쭐이 나서 병원에서 지내다 다시 깡패들과 어울려 대륙에 쌀과 마약 따위를 몰래 보내거나 들여오는 일을 한다. 여덟 살 때 다친 탓에 귀가 안 들리고 말을 하지 못하는 막내 임문청(양조위)은 사진관을 꾸려간다.
아버지와 아들 넷이 세상과 부딪쳐 나아갔다 밀려오는 삶을 되풀이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 집안이 어떻게 세상의 담을 넘지 못하고 가라앉는지 영화는 담담하게 보여주지만, 집안만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타이완이라는 나라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3. 맏이 문웅은 아버지를 모시고 쌀 장사를 하면서 소박하게 살고 싶었으나 셋째 문량이 나쁜 짓을 하면서 말려들게 되고 대륙에서 온 깡패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막내인 문청은 잘못된 세상을 바꾸려는 마음을 가진 동무 오관영이 제 집에 머무르는 탓에 썩어빠진 나라를 생각하게 되고 잘못된 것을 고치려고 나서는 사람들 무리에 끼게 된다.
나쁜 길로 가는 아들과 좋은 길로 가려는 아들이 나뉘어 있으니, 집안으로 보면 포트폴리오가 되어 한쪽으로는 가지 않을 듯한데, 세상 일은 만만치가 않다.
피붙이들이 모여 종이 돈을 태울 때, 아버지는 외친다. "돈을 벌게 해주세요...돈 많이 법시다..." 그런데 아버지의 바람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문량 때문에 크게 어긋난다.
"당신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이오..." 나쁜 뜻을 갖고 임씨 집안을 해코지하는 사람이 일러바친 탓으로 일이 꼬인다.
4. 157분이라는 긴 시간을 이어가면서 아들들의 삶과 썩어빠진 나라를 엮어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삶과 죽음은 하늘에 달린 것"이라며 뒷날을 꿈꾸는 감독의 생각은 힘이 모자라 어쩔 수 없이 밀릴 때는 있는 그대로 두고 볼 뿐이어서 그럴까?
오관영의 누이인 오관미(신수분)가 병원의 간호사로 일하면서 이들의 삶을 담담하게 지켜보는데,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문청과 종이에 글을 써서 사랑을 하게 되는 모습만 사람답게 사는 모습일 뿐, 내리누르는 힘에 억지로 버티지만 피가 터지고 살이 터지는 아픔을 겪게되는 백성들의 삶이 이어진다. 그래서 '슬퍼하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란 뜻의 영화 이름이 붙었는지 모르겠다.
문청으로 나오는 양조위는 우리 나이로 스물여덟 살의 젊고 말쑥한 모습이어서 보기에 좋다. 벙어리와 귀머거리로 답답한 삶을 살면서도 끝내 바른 길을 찾아가는 삶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내 눈에는 문청으로 나온 양조위 보다는 오히려 맏아들 문웅으로 나온 진성용이 돋보인다. 배가 나오고 때로는 깡패같이 굴면서 걸걸한 목소리를 높이지만, 늦둥이 아이를 챙기고, 잡혀간 문량이나 문청을 빼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머리에 오래 남는다.
5. 맏아들 문웅이 아버지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나온다. 공자가 태어난 나라인데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어떻게 봐야 할까?
우리나라만 해도 술과 담배를 보는 눈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술은 먹을거리일 뿐이므로 어른과 아이들이 같이 마셔도 되지만 어른 앞에서 연기를 피워내는 담배는 앞에서 해서는 안된다는 건 남쪽 사람들이다. 내가 어렸을 때도 설이면 절을 하러 마을 어른들 집에 가면 술은 얼마든지 내주었다. 그런데 담배는 어른들 앞에서 피면 버릇없는 놈으로 몰리면서 혼이 났다. 그래서 어른들이 안 보는 데서 피울 수밖에 없었다.
이와 달리 담배는 연기가 나는 기호품일 뿐이므로 같이 해도 되지만 술은 많이 마시면 어른도 몰라보게 되므로 같이 해선 안 된다고 한 건 북쪽 사람들이란다.
타이완 사람들은 담배 쪽을 보면 우리네 북쪽 사람들과 닮았나 보다.
타이완 사내들이 술을 마실 때 가는 술집 이름이 '조선루'로 나온다. 반갑다고 해야 할까, 엉뚱하다고 해야 할까?
6. 오래 기다린 영화 디브이디라서 나오자마자 값은 보지도 않고 덥썩 사고 말았다. 그런데 디브이디 껍데기는 2,900원짜리와 다를 바가 없이 싸구려고, 보너스는 하나도 없으며, 베니스 영화제에서 으뜸인 황금사자상을 받았다는 글자도 틀렸다. (GOLEN -> GOLDEN)
화면은 처음에는 벌겋게 빛이 번져 보이기도 하고 뒤로 갈수록 나아지지만 썩 좋지는 않다. 게다가 밑에 중국 글자가 같이 나오며, 말하는 것을 우리말로 옮기지 않은 것도 있다. 이렇게 만들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나오기 어려운 디브이디라 하더라도. 많이 아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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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 전에 보다가 말았다. 초반에 기시감이 느껴져서 그만 두었던 영화를 DVD 돌려주기 전에 봐야 될 것 같아서 처음부터 다시 봤다. 일본에 오키나와가 있다면, 한국에는 제주도가 있고, 중국에는 대만이 있다. 본토로부터 버린 자식 취급 당했던 섬이다.
1945년 일제에서 해방 되는 대만이 배경이다. 임아록의 큰 아들 문웅이 ‘광명’이란 아들을 얻으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의사인 둘째는 일제의 의해 끌려간 뒤 소식이 없고, 셋째 문량은 마음이 병들어 돌아왔고, 막내 문청은 귀머거리 사진사이다.
영화는 격랑의 중국 현대사와 맞물린 임아록의 아들 삼 형제 이야기를 보여준다. 역사는 미친 듯이 파도 치는데 의외로 영화 속 인물의 삶은 물 흐르듯 잔잔하다. 인간의 삶은 개인이 머무는 시대적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시대적 공간’은 시간과 공간의 공존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서로 다른 이유로 민족을 내세운 장개석과 모택동이 있다. 영화에도 그런 인물은 존재한다.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서 서슴없이 폭력을 행하며 이익을 꾀하는 자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삶을 선택하는 자. 그 가운데 문웅은 가족을 지키려는 가장의 역할에 충실하다. 문량은 일확천금에 눈먼 자, 문청은 민족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자다.
문청은 직업이 사진사이다. 그는 순간을 영원으로 남기는 엄연히 기록하는 자이다. 감독의 페르소나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못 듣지만 지식인 친구 못지 않게 열성적으로 조국의 미래를 고민한다. 그와 관미의 대화는 필설로 이뤄진다. 무성영화의 자막 같은 대화 내용이 까만 스크린 위에 흰 글씨로 나타난다. 전체적인 영화의 정적에 두 사람의 대화가 장단을 맞추는 느낌이다.
인상적인 것은 카메라의 시선이다. 거의 고정되어 있다. 현란하고 빠른 움직임은 드물다. 프레임 안에서 인물들이 움직인다. 트레킹이 있지만, 그것은 사건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마작장에서 문웅의 부하가 죽을 때 카메라는 문웅을 비추다가 쓰윽 움직인다. 그리고 피투성이 부하가 들어온다. 균형이 깨어지고 긴장이 느껴진다. 어떤 경우 카메라는 병원 문, 문웅의 집 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비춘다. 그런 장면을 볼 때 영화가 극사실주의를 표현하는 느낌이 든다. 영화가 영화 같지 않고 실재를 다루는 것 같다.
주인공의 결말을 기준으로 본다면 영화는 비극적이다. 문웅은 죽고, 문청은 연행되어 행방이 묘연하고, 문량은 제정신을 잃었다. 집안 남자들이 떠난 집에는 여자들이 시끄럽게 떠든다. 늙은 아록은 여전히 살아있고 문량과 저녁을 먹는다. (문량이 제사밥을 먹는 행위는 이어질 죽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래도 그는 밥을 먹는다. 밥은 삶이다.) 문웅과 문청이 떠났어도 삶은 멈추지 않는다. 문청의 아들도 무럭무럭 자란다. 어떤 의미에서 영화는 비극이 아니다. 주인공은 영화 말미에서 사라졌지만, 삶은 계속 된다.
어떻게 표현하면 신파조로 끝날 내용을 관객이 인물에 쉽게 동화되지 않도록 카메라의 시선을 비정하게 다룬 감독의 의도가 뭘까를 생각했다. 나처럼 마디마다 마주치는 삶의 비루함과 자신의 나약함 앞에서 허물어지는 자에게 거리두기를 통해 삶을 거시적으로 보란 뜻 일 까. 왜냐하면 그럼에도 삶은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