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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사나이, 영화사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흑백영화다. 1949년에 만든 것이라 요즈음의 깜끔한 컬러 영화와 견주기 어렵지만, 짜임새나 알맹이는 요즈음에 뒤지지 않는다.
친구가 일자리를 주겠다고 해서 오스트리아 빈까지 간 홀리 마틴스(조셉 코튼), 가자 마자 기다리는 것은 초청한 해리 라임(오슨 웰즈)의 죽음이다. 돌아갈 비행기 값도 없으니, 이런 낭패가 ...
또 죽음을 전해 들었지만 알 수 없는 뭔가가 잇는 듯 해서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비록 2류 소설가이지만, 뒷 이야기를 파헤치기로 한다.
해리가 길에서 죽었을 때, 2명이 옆에 있지 않고 또 한사람, 제3의 사나이가 곁에 있었다고 옆 건물 관리인이 이야기한다.
누군지 밝히려고 사고가 있었던 날에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빈(비엔나)은 네 나라가 네 조각으로 나누어 치안을 맡고 있는 터라 해리의 집을 다루는 나라는 영국이며 캘러웨이 소령(트레버 하워드)이 해리의 죽음을 파헤치고 있었으나, 해리를 나쁜 사람으로 보아 홀리와 다투게 된다.
해리와 사귀었던 애너 슈미트(알리다 발리)는 체코에서 빈으로 왔지만 해리가 만들어준 불법 여권으로 클럽에서 연극을 하고 있어 들키면 러시아로 잡혀 갈까봐 걱정이 많다.
애너(안나)를 만난 뒤 홀리는 마음이 끌린다. 저렇게 참한 안나를 두고 해리가 죽다니... 애너도 홀리를 마음에 들어 한다. 그러나 아직도 죽은 해리를 못 잊어 하니...
2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 빈에서 병원에 쓸 페니실린을 빼돌려 아픈 아이나 어른들을 더 아프게 만드는 나쁜 사람이 해리다. 설마 나쁜 짓을 했으랴 싶어 두둔하고 나섰으나, 친구로서 홀리의 마음이 답답해진다. 해리가 경찰에 쫓겨 하수구에서 돌아 다닐 때, 길고 긴 하수구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고 여기저기서 소리나는 가운데 해리가 살길을 찾아 달아나는 모습은 다른 영화에서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흑백이라 조금 아쉽지만, 그런대로 화질은 깨끗한 편이다. 그러나 오래된 영화라 보너스가 없으니, 그냥 ''명화극장''을 보는 셈이다. 기차는 소리내어 가자고 하는데, 안나는 그 기차를 떠나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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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영화의 초반부를 볼때만 해도 그레이엄 그린의 원작소설을 읽고있던터라 서부소설작가로서의 필명 덱스터가 가져오는 오해가 가져오는 코메디 (음, 이번 작품 속엔 오해는 하나로 충분한걸까?) 와 라틴적 '롤로'와 앵글로 색슨적 '마틴'의 이름을 가진, 불안정하고 감성적이고 따뜻한 남주의 주변으로 친절한듯 음산하게 다가오는 인물들의 원작의 설정 (영화는 너무 대놓고 나쁜놈이란 티를 팍팍낸다)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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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나 지인, 심지어 가족까지. 우리는 그들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사람은 변하지 않아요" 영화 속 해리의 애인 애너는 결코 그가 악인일리 없다고 확신하며 두둔하지만, 그리고 이십년 친구 홀리 또한 해리는 적어도 살인과 같은 악행을 저지를 인물이 아니라고 자신했지만 결국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물론 애너는 인정하지 않지만)
어떤 이에 대한 좋고 나쁨의 판단은 얼마나 확고한 신념과 객관적 정보를 바탕한 것일까?
친구 A앞에서는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허물없이 지내면서도, 친하기로는 마찬가지일텐데도 B란 친구 앞에선 짐짓 의젓해보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말과 행동에 조심하는 경우. 평소에 말수가 적은 아내가 그녀의 친구나 회사 동료들 앞에선 주도적이고 쾌활하게 대화를 하는 낯선 모습을 문득 발견한 적은 없는가. 아니면 어느 살인자의 어머니가 내 아들은 결코 그럴 아이가 아니라면 절규하는 장면까지. 우리 내면 속에 수만가지 색깔의 인격의 실타래가 있다고 하면 우리는 관계하는 타자 모두에게 매번 똑같은 것을 꺼내는 것만은 아니다. 가족, 연인, 회사동료, 친구A,B,C .. 저마다에게 조금씩 다른 실타래를 보이는 한편 어떤 것들은 가능하면 숨기고 한번도 보여주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에겐 그렇게 쉽게 보임음에도. (내게는 어머니에게 의젓함을 보여주기가 아직까지도 여간 쉽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책을 펼칠 때 늘 같은 페이지가 나오는 것처럼, 지구란 행성에선 달의 한쪽 면만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는 어떤 이에 대해서는 늘 비슷한 양상과 면모를 보게 된다. 결국 그것은 그가 가진 모든 성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우연한 한 단면, 국소적인 진실에 불과할 수 있는 셈이다. 그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어쩌면 인간의 인격이란 애초부터 보편성과 자기동일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를 둘러싼, 그가 놓여진 환경- 어떤 사람들고 관계하고 어떤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느냐-에 따라 어느 면이 좀 더 발현되고 또 다른 면은 위축되거나 잠재되는 것일뿐. 환경의 우연한 산물에 불과할 수도 있다.
영화 속 도시의 밤과 흔들리는 조명이라는 흑백의 교차, 그리고 거대하게 왜곡된 그림자야말로 인간에 대한 불안정한 인식과 불확실한 세계를 말해주는 것일 수도. 플라톤의 동굴의 우상처럼 말이다 .
영화의 마지막 장면. 애너를 말없이 기다리는 홀리와 그를 냉정히 지나쳐버리는 그녀. 여자란 남자에 대한 종합적 판단-어쩌면 사람 모두-을 둘의 관계에 좀 더 좌우되는 경향에 대해 다시금 곰곰히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한가지, 대회전차 안에서 해리와 홀리가 대화를 나누던 장면. 해리가 그 아래로 까마득히 점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저 점들이 얼만인 줄 알아?"하며 묻던. 인간애가 사라지는 경계는 바로 사람이 점으로 보기 시작할 때부터다. 선과 악은 반대편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깝게 이웃한 사인지도 모르겠다.
안톤 카라스의 멋진 치터 주제 선율도 그렇고 1949년작이지만 지금 봐도 멋진 영화다. http://blog.naver.com/dannyp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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