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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대단한 인물이다. 그의 고향, 당시에도 상대적으로 발전한 미국의 젊은이가 23살에 조선으로 건너와 엄청난 국난을 같이 겪으며 죽는 순간까지 한국을 사랑했다. 너무 감사하다. 아쉬운 점은 역사책에서 그의 이름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마 수능 중심으로 외우다보니 언더우드, 아펜젤러, 헐버트 등 한국에서 뚜렷한 활동을 한 외국인을 다소 소홀히 다룬 듯하다. 주시경의 뒤에는 헐버트가 있었단 사실을 왜 안 가르쳐줬느냐 말이다. 주시경이 아르바이트했던 언론사의 대표가 헐버트였다. 그의 뒷받침 덕분에 주시경은 독립신문에 들어갈 수 있었고, 헐버트는 외국에 한국을 알리는 영문판을 담당해주었다. 한글학자로 불세출의 우수한 학자였고 한국인이 경시하는 한글의 우수성을 누구보다 빠르게 간파했다. 그는 세종대왕을 페니키아 문자를 발명한 칼무스만큼 훌륭한 인물이라고 세상에 세종대왕을 소개했다. 그는 육영학원을 담당하며 고종의 지원 하에 우수한 재원을 키웠다. 그 중에는 역적 이완용도 있었다. 그는 그를 뛰어난 학생이라고 했지만, 배신자라며 무척 노여워했다. 그는 고종의 비자금인 내탕금이 일본에 넘어간 것에 분통했으며, 한국을 끝까지 지원하겠노라고 다짐했던 미국이 일본의 식민화에 동조하자 루즈벨트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당시 그에 반대했던 미국인은 힐버트 하나라고 알려져있다. 안중근도 헐버트를 최고로 인정했고, 이승만이 1945년 그를 한국으로 초청했을 때 그는 이미 86세로 아주 고된 과정을 거쳐 한국땅으로 올 수 있었다. 그는 평소 한국에 묻히기를 염원했고, 힘든 여로에 지친 고령의 육신이 그만 병이 나 한국땅을 밟은지 7일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소망대로 한국에 영원히 잠든 그를 생각하며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하고 몹시 많은 것을 배운다. 한국 역사는 이런 수많은 선현들 덕분에 올바른 길로 인도될 수 있었다. 역사를 선택과목으로 만든 현 교육체제가 원망스럽고, 내가 배웠던 역사도 이렇게 중요한 인물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지 않은 점도 화가 났다. 주시경 선생을 이야기할 때, 헐버트의 공로를 한줄이라도 써서 알려줬더라면 덜 분노할텐데, 무척 아쉽고 안타깝다. 다행인 것은 지금이라도 헐버트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시금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한국인 헐버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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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첫 구절인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라는 구절 때문에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어떤 사연이길래 외국인 즉 타향에 살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내내 들었던 생각은 겉모습이 한국사람이라고 해서 한국사람이 아닌 가슴속에 애국심이라는 것이 한국사람이 아니라도 이렇게 간절하게 가질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에 오고 싶어한 그 간절한이 이루어진 것은 좋았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 땅을 밟고 일주일도 살지 못하고 이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더욱더 아쉬움이 남는 사람이었다. 80세가 넘는 나이에도 긴여행하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할거라는 것을 알면서 한국에 오고 싶은 간절함으로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로 다시 되돌아온 이방인.. 하지만 이방인이라는 모습과는 다른 이방인.. 솔직하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우리나라가 얼마나 대단하다거나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그저 과거일뿐이고 나와 상관없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다면 이 생각이 바뀔거라고 확신한다. 왜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자신도 우리나라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서 정말로 이렇게 대단한 노력을 해서 얻은 것이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나라를 사랑할수 밖에 없다는 것도 생각해 본다. 헐버트 사람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사랑하기도 했지만 특히 한글을 사랑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교육을 위하여 사민필지라는 최초의 한글 교과서를 만든 인물이기도 하고, 우리가 몰랐던 것은 아리랑에 음계를 최초로 붙인 인물이라는 것이 새로웠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노래에 현대적으로 음계를 붙여 그 시절 신문에 수록했다고 한다.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이렇게 한국에서 할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학문과 예술 모두를 지닌 인물이었다. 헐버트라는 인물이 더욱더 위대하다고 느낀 것은 을사늑약을 저지하기 위해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파견되어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전세계적으로 알리라고 노력한 인물이라는 점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자기가 태어난 나라의 문제도 아닌데 자신의 생각을 믿고 실천에 움직이고 옳다고 믿는것을 실천하는 마음이 대단함을 느끼게 되었다. 후반부에 헐버트라는 인물에 대한 대략적인 정리를 읽어보면 헐버트라는 인물이 얼마나 대단함을 느낄수 있는 내용이 이 책의 전체적으로 묻어남을 알수 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완벽할수가 있을까 하는 욕심이 생길정도로 자신보다 남을 사랑하고 특히 한국사람이 아니면서 한국사람보다 더욱더 한국을 사랑한 인물.. 아마도 이런 사람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다면 한국사람으로 다시 태어날거라고 생각을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로 한국을 사랑한 사람이다. 이 책을 읽는내내 느꼈던 생각은 한국에 대한 사랑과 한국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자신에 대한 생각이나 자신에 대한 걱정보다 어떻게 한국이라는 나라를 이렇게 사랑할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 지금은 한강을 바라보는 양화진에 묻혀 있다고 하는데.. 이 책을 읽어보고 감사한 마음으로 전하고 싶은 생각이 이 책을 읽는내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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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아이들과 도보관광으로 양화진 외국인 묘역을 다녀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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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는 고종이 젊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개설한 육영공원 개교에 맞추어 조선에 왔다. 그는 육영공원에서 정부 관리나 지식층에게 서양식 교육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여 신교육에 대한 많은 사회적 관심을 유발하였다. 또한 당시 배재학당, 이화학당, 광혜원 등 근대식 학교와도 교류, 지원하면서 조선의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편 헐버트는 이방인이면서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심도 있게 공부하면서, 그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의 수고 덕분으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불과했던 조선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큰 계기가 되었다. 헐버트가 '한국혼'으로 불리우게 된 주요 업적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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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 김동진 지음/ 참좋은친구 출간/ 2010.08.23. 역사를 잊고 사는 민족은 아픈 역사를 되풀이 할 것이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대한제국은 열강들의 힘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갓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고종황제는 기울어가는 제국을 살리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우리나라는 일본의 야욕 앞에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은 과거이지만 현재이기도 하다. 대한제국의 멸망과 국권을 빼앗기고 한일합방의 치욕 속에서 우리 민족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 결과가 지금에도 많은 문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정치, 경제, 문화, 의식, 언어에도 일본제국주의의 잔재가 무서우리만치 녹아들어 있다. 그래서 지난 100년 전의 사실이 우리에게 너무나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대한제국은 왜 멸망했는가? 미국에서 건너온 파란 눈의 이방인 헐버트는 <대한제국멸망사>에서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첫째, 지배 계급의 부패였다. 헐버트는 한국의 멸망이 일차적으로는 내재적 모순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관찰사가 5만 달러에 매관되고 현감이 5백 달러에 거래되는 현장을 바라보면서 이 나라의 장래는 결국 패망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민생을 괴롭히는 것은 이러한 매관의 연쇄 현상으로 나타나는 아전의 횡포였다. 이것은 결국 민심의 이반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그의 전망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왕실과 그 주변의 지배 계급이 문명 진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명치유신 이후 미완성된 자본주의의 모순을 타개하기 위해 정한론으로 무장한 일본대륙론자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명치유신 이후 착검과 특권이 박탈된 사무라이들이 그들의 살길을 찾아 서구의 문물과 관료 제도를 받아들이고 있을 때 조선의 지배 계급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주자학적 중화사상에 안주하면서 세계의 대세를 읽지 못했다. 대원군의 쇄국이 당시로서 일말의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좀 더 유연하게 서세동점에 대처하면서 자신의 정책을 변용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물론 당시에 이러한 보수파에 대항한 개화파가 있었지만 그들은 일을 너무 조급하게 서둘렀다. 그들은 지금이 아니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now or nothing)는 조급함에 사로잡혀 있는 분별없는 젊은이들(ill- advised youngmen)이었다. 그들의 진심이 아무리 순수한 것이었고 우국 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김홍집과 어윤중이 저자거리에서 돌멩이에 맞아 죽는 것을 바라보면서 헐버트는 그들이 난세에 살아남는 지혜를 갖추지 못 했음을 안타까워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본심과는 달리 그들이 친일적 성향을 보인 것은 그들의 경륜이 익지 못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민중적 정서는 일차적으로 그들이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헐버트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내재적 모순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외재적 요인 즉 미국의 무신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헐버트의 입장이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미국은 한국과 국교를 맺은 최초의 서방 국가이며 그 조약에서 미국은 한국의 안전과 이익을 존중하겠노라고 약속했다. 한국은 자신의 독립이 유린될 때에는 이를 막아 줄 수 있는 국가로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에게 구원을 요청할 권리를 갖는다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그러나 한국민에게 환난이 닥쳐오고 그토록 되풀이하던 공언이 순수한 것이었음을 입증했어야 할 무렵에 미국은 그토록 약삭빠르게, 그토록 차갑게, 그토록 심한 멸시의 눈초리로 한국민의 가슴을 할퀴어 놓음으로써 한국에 살고 있는 점잖은 미국 시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망국의 낙조가 비치는 대한제국의 지도자와 국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자신의 민족이 자신을 정복한 민족과 대등하게 될 때까지 자기 민족의 교육에 전념해야 하며 순수한 인간성을 무기로 하여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하여 느끼고 있는 멸시를 상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충고로 글을 끝맺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교육이 국가흥망의 열쇠이며 민족의 자존을 회복하는 것이 지도자의 책무라는 것은 변함없는 교훈으로 남아 있다(주간조선, 1999). 멸망해가는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울분에 젖은 많은 선각자들과 함께 파란 눈의 이방인, 헐버트도 우리나라를 위해 많은 역할을 했다. 김동진의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를 읽고 깊은 감동과 함께 부끄러움이 밀려오는 것은 왜일까? 23살의 젊은이가 이 땅에서 헌신한 헐버트의 일대기를 통해 그의 숭고한 박애정신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일본에 항거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에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황제의 밀사, 헐버트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그의 삶과 정신을 교육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우리에게 남긴 헐버트의 정신과 사상은 무엇인가? 첫째, 그는 한국학의 대가이자 민족주의자였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진정한 가치와 성공 잠재력을 발견하고 한민족에게 긍지를 심어주었다. 그는 한글을 열심히 공부하여 우리말의 우수성을 일찍이 깨닫고 한글로 된 책 <사민필지>를 출간하여 교과서로 사용하였다. 또한 구전되어 오던 아리랑을 채집하여 악보로 만들었다. 그는 우리 문화를 위대하게 여겼고, 타민족의 주권을 불법으로 강탈한 강대국의 침략주의에 일생을 두고 투쟁하였다. 둘째, 그는 위대한 교육자이자 계몽주의자였다. 특히 그는 교육을 통해 한민족의 발전을 이루고자 노력했다. 육영공원의 교사로 취임하여 근대교육의 도입에 남다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학교교육뿐만 아니라 국민교육을 중시하였다. 청소년들에게 교육의 장을 제공하고, YMCA를 창립하는 등 국민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셋째, 그는 정의를 실천하는 평화주의자였다. 헐버트는 국경을 초월하여 모든 나라에 자유와 평화가 정착되기를 바라는 평화주의자이자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정의의 실천가였다. 일제의 침략주의에 분연히 맞섰고 자신의 모국인 미국의 비도덕적 외교정책에도 반기를 들었다. 넷째, 그는 원칙을 지키는 합리주의자였다. ‘편법은 원칙을 이기지 못한다(Expediency must always yield to principle). 라는 좌우명으로 일관된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일관된 가치관 속에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로 실용을 추구하는 합리주의자였다. 다섯째, 헐버트는 박애주의자였다. 그는 한국을 사랑했을 뿐 만 아니라 모든 계층의 한국인을 사랑했다. 남녀를 구분하지 않았고, 귀천을 따지지 않으면서 박애주의를 실천하였다. 여섯째, 헐버트는 명예와 신의를 중요시하였다. 한성사범학교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자 정부에 학교 개량을 건의하였다. 헤이그 특사 파견사건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자 한국 일은 포기하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그는 한민족과 고종황제의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며 미국에서 특사 정신을 이어갔다. 헐버트가 그렇게도 완수하려고 했던 고종황제의 내탕금이 이미 일본에게 지급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그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86년 23살의 나이로 한국의 제물포에 도착한 이후 63년 만에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1949년 7월에 우리 땅을 다시 밟았지만 일주일 후 1949년 8월 5일 한 평생 사랑했던 한국 땅에서 운명하였고 한강 변의 양화진에 고이 잠들어 있다. 헐버트의 고귀한 한국사랑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하여 1999년에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를 발족하였다. 헐버트박사를 기념하는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후손들과도 유대관계를 갖고 헐버트의 한국사랑에 대한 감사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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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라는 이름만 알고 있었던 내게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황제의 밀사’라는 저자의 헐버트라는 사람에 대한 표현이 유독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평소 한국역사에 대한 무지함이 부끄러우면서도 막상 역사에 관한 책들을 쉬이 선택하지 못하는 내게 이 책은 어쩌면 하나의 도전이기도 했다. 책 표지를 펼치자 책날개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과연 그는 어떤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책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저자는 책머리 글에서 이 책을 저술한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인간 헐버트가 누구인가를 밝히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그의 삶을 재조명하여 헐버트 박사를 세상에 알리는 것. 역사서에 약간의 부담감을 가진 나로선 어쩌면 이 책을 선택한 것이 내게 역사공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 그가 이룬 업적이 너무 방대해서 그것을 모두 요약하기는 힘들기에 내가 특히 감동 받았던 부분을 언급하며 이야기 해보려 한다. 처음 이 책을 골랐을 때보다 책을 읽으면서 점점 더 헐버트라는 사람이 궁금해졌고, 그에 대한 존경심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의 한글사랑이었다. 그는 내한 초기에 의사소통을 위해 한글을 배웠으나 후에 한글을 심도 있게 연구하여 한글학자가 되었다. 또 한글에 관한 수많은 논문을 발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글의 기원에 관한 책도 썼다. 그는 한글을 200개가 넘는 다른 문자와 비교해 보았다면서 ‘어느 문자도 문자의 단순성과 소리를 표현하는 힘의 일관성에서 한글보다 더 나은 문자는 없었다’라며 ‘한글이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문자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라고 한글을 정의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과연 한글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요즘 우리 사회는 너무나 무분별하게 영어 단어를 한글로 표기하여 한글은 파괴되어 가고 국적 없는 단어가 범람하고 있다. 특히나 외국어 공부에 대해서는 엄청 강조하면서도 마치 공기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살듯이 한글의 편리성과 우수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한글은 함부로 대하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돌아보게끔 했다. 그리고 그가 내게 일깨워준 다른 가르침은 나라사랑에 대한 마음이었다. 지금의 나라 사랑은 헐버트가 활동했던 구한말과 같이 나라를 잃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아니지만 나라 사랑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필요하다. 아무리 지구촌이 장벽을 허문다 해도 나라는 나를 존재케 하고 나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주는 유일한 보호막이다. 자기 나라와 자기 민족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타민족과 타 문화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저자가 던진 이 질문에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던 그간의 내 태도에 대해서 반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읽은 것을 계기로 헐버트가 저술한 한국사를 먼저 읽으며 한국역사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떠들썩하고 요란스럽게 나라 사랑을 외쳐댈 필요는 없다. 먼저 자신의 본분을 다하면서 나라의 품격을 올리는데 솔선수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것부터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글을 마치며, 구한말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었으며 우리의 운명을 뒤바꾼 회한의 시대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 시절 활동한 서재필, 이승만, 김구, 주시경, 안창호, 이상재 등 한국인 선구자들을 주로 떠올린다. 그분들 외에도 많은 외국인이 열정을 다하여 구한말의 근대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개화의 시작과 함께 이 땅을 밟은 외국인 교육자, 의사, 선교사들의 역할은 이 땅의 근대화를 위한 중요한 한 축이었다. 1880년대 중반부터 선교사, 교육자들이 이 땅을 밟기 시작했으며, 많은 외국인이 미지의 땅 조선에 서양문물을 접목하면서 우리나라 근대화에 공헌하였다. 이들 중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이 헐버트다. 그는 교육자, 한글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선교사,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 유달리 이 땅에서 폭넓게 활동하였다. 그는 특히 심도 있게 한국 역사와 한민족을 탐구하여 우리 민족에게 긍지를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구한말 주권 수호 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오늘날까지 역사의 증인이 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활동도 우리의 역사와 똑같이 소중하게 보존하고, 그들의 공과를 가려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특별한 손님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 땅에서 호흡했던 외국인들의 공과를 우리나라 사람과 똑같은 잣대에서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그들의 공적에 걸맞은 감사를 표하고, 그들이 남긴 훌륭한 정신을 기억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예를 다하는 민족으로, 보은은 아는 문화민족으로, 그리고 성숙한 세계시민으로 국제사회에 인식됨으로써 국가 인지도가 한층 더 높아질 것이다. 이 책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게 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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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 참좋은친구 김동진 지음
책표지를 보면은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황제의 밀사 라는 말이 가슴 깊숙히 와 닿네요. 전에 텔레비젼 프로그램에서 헐버트에 관련된 책을 설명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크게 기억이 나질 않지만 우리나라 한글에 큰 획을 그으신 분이라고 했던것 같아요. 마침표와 띄어쓰기를 제시한분이 바로 헐버트라고 하더군요. 이 작으마한 사실로 헐버트에 관련된 책을 찾아보았는데 이제서야 만났네요. 보면 볼수로 정말 뼛속까지 한국인이구나 라는 느낌이 강렬한게 다가옵네요. 독립운동가로, 선교사로, 교육자, 한글학자, 역사학자, 언론인으로써의 생을 한번 너무나 잘 나타낸 책이네요.
1886년 7월 육영공원의 교사가 되려고 한국에 발을 들였다. 여기부터 고종과 인연은 시작된다. 수업시간에도 고종이 참관하기도 했단다. 을미사변이후에는 외국인이라는 이점을 노려 고종이 잠자는 침전에서 불침번을 설정도로 헐버트를 믿었던것 같다. 헤이그 특사를 받기도 했다. 또다른 특사는 바로 내탕금에 대한 것이다. 고종이 중국덕화은행에 맡긴 금액을 고종도 모르게 일본이 찾아간 사실을 알고 헐버트는 자기가 죽기전까지 그 돈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헐버트가 한국학생들의 교육수준은 자기사 생각했던 것과 다른게 낮았다고 한다 교사양성을 위해서 가르치는 학생들도 거의 기초적인 교육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고 한다. 한글에 대해서는 사나흘만에 글을 익히고 일주일만에 읽을수 있는 음성언어로서 아주 특별한 글을 가졌지만 천대시하는 것에 못마땅해 했다. 조선에 온지 3년만에 지리, 천체, 각국의 정부형태, 풍습등을 한글로 쓴 사민필지를 발표했다. 일본이 판매 금지시키기 전까지 최고의 한글교과서였다. 헐버트는 (한국평론)에 '한글은 대중 의사소통의 매체로서 영어보다 우수하다'라고 국제적으로 소개 한적도 있다.
미국사람에도 불구하고 헐버트는 미국에게 한국이 위험할때 도와주기로 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정신을 위배했다며 '지금이라도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한국에 교육투자를 강화해야 한다' 라고 호소했다. 헐버트의 한국인의 교육의 필요성을 일갈한 말이다. 또 루즈벨트 대통령은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의거 미국의 도우을 호소한 고종황제의 요청을 거절한, 정식을 조약을 맺은 친구의 나라 한국을 배신한 사람이다' 라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회고록을 보면 (은둔의 나라)저자인 그리피스에 대해서 조선에 와보지 않고 일본사람의 말만 듣고 쓴 책은 진정한 조선과 조선사람의 모습을 담을수 없다'고 기록한다. 조선의 대변인이라고 해서 전혀 손색없는 행동이었다. 또 헐버트는(하퍼스)에 세계적인 조선의 발명품을 기술한 내용도 있다. 이동식 금속활자, 거북선, 현수교, 폭탄, 소리글자 한글이다.
헐버트의 한은 아직도 남아있다. 한국의 통일과 고종의 내탕금을 찾아오라는 소명을 받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내탕금에 대한 서류는 고문서실에 먼지와 함께 있고, 통일에 대한 노력을 쉽사리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헐버트의 한 만이 있겠냐만 어찌보면 우리나라와 뼈와 피가 통하는 민족도 아닌 외국인이 우리나라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다는 사실만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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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이 일제식민지로부터 광복된 지 70년이 가까워온다. 거의 사람의 한 평생에 가까운 세월이니 오래되었다면 오래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을 돌아보면 일본과의 그때의 숙원(宿寃)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독도 문제일 것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 자체가 여전히 그들은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학살하고 수탈했던 지난날의 역사를 반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식민지 지배의 옅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는 뜻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그들의 야욕을 숨기지 않았고, 그 첫 번째 재물은 바로 조선이었다. 당시 조선 역시 점차 근대화에 눈을 뜨고, 많은 서양인들이 조선을 방문하고, 일부는 조선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헐버트도 그 시대에 조선에 온 미국인이다. 국사 공부를 할 때 헐버트의 이름을 들어본 것도 같고 안 들어본 것도 같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기술할 때 헐버트가 언급되는 것 같기는 한데 그 동안 우리 역사에서 헐버트는 그리 비중 있게 다뤄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후에 돌아보니 헐버트란 인물이 우리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헐버트가 교육자 자격으로 조선에 입국한 후 고종의 총애와 신임을 얻고, 일제가 조선 지배의 야욕을 드러내고 마수를 뻗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고종의 밀사로서 활동하였던 이야기와 헐버트가 얼마나 조선과 한민족을 사랑하고 아파했는지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헐버트가 외국인으로서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아끼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평생의 노력을 바쳤다는 것도 결코 작지 않은 일인데, 그 외에 한글 교본을 쓰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쓰고, 아리랑을 비롯한 우리 노래들을 채록하고,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 분의 능력과 노력, 심성과 용기가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도 알데 되었다. 머리말에 “헐버트는 육신은 이방인이었지만 정신은 한민족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한평생을 한민족과 함께 호흡하면서, 심지어 자신의 모국을 비난하면서까지 불의에 고통 받는 민족을 위해 온몸을 불살랐다. 그는 지식인과 인격을 겸비한 지성의 모범이었으며, 확고히 정립된 가치관 속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신념과 용기를 가진 행동가였다.”라고 그 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거의 적확하다는 생각이다. 헐버트는 평생을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고, 1945년에 광복을 맞이하는 것도 보았다. 1949년에 대한민국 정부 초청으로 815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했다가 그 여독으로 결국 한국에서 사망하였고, 자신이 젊은 시절에 즐겨 찾았던 마포나루 한강 변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생전에 그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에서 그가 얼마나 한국과 한민족을 사랑했었는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우리 근대사에서 헐버트란 인물은 그렇게 가벼운 인물이 아니다. 교과서에서도 비중을 그렇게 가볍게 둘 수 있는 인물이 결코 아니다. 내 자신만 보아도 이러한 위인을 지금까지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이제라도 새롭게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말미에 보면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그분을 기리고 알리는 사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고, 그분의 후손들과 연락하고 방한할 수 있도록 일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이다. 마지막으로, 헐버트가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남북으로 갈라져 싸우고 있고, 북한은 공산 독재 체제에서 가난과 압제로 신음하고 있으며, 남한은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 여전히 사회적 갈등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아파하지 않을까.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과연 어떤 지도자가 남북의 통일을 이끌고 사회적 갈등을 청산할 수 있을지 우리는 또한 고민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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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라는 이름을 예전에도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단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른 선교사들처럼 종교인으로써 미계한 조선을 계몽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땅을 찾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책의 소개글을 보면서 그의 독립 운동 이력에 눈길이 갔다.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써 신변에 위협이 따랐을텐데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순수한 사랑으로 약소국의 도긻 운동을 돕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텐데 대단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의 인격이 훌륭하기도 하지만, 그가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이 각별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신학대학을 졸업한 젊은 헐버트는 국운이 쇠퇴해 가는 조선으로 건너 와 선교와 함께 교육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조선인들에게 서양 문물을 전달하는 역할에 그쳤지만, 조선에서의 생활이 길어지자 그는 점점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조선인과 조선땅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된다. 당시 뜻은 원대했으나 정치적 세력이 부족했던 황제 고종은 헐버트와 가까이하며 여러 가지 정치적 사건에서 헐버트의 도움을 받게 되고, 헐버트는 고종을 볼모로 잡아두려는 대신들로부터 그를 지켜내기도 하고, 일제의 만행을 전세계에 알리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은 특사들을 암암리에 돕기도 한다. 또한 일제가 강탈해 간 고종의 내탕금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 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어느 일본인이 경천사 10층 석탑을 뜯어다가 자신의 사택 마당에 옮겨놓은 사건을 알고 그것을 꼬집어 비판하여 결국 석탑을 다시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하는가 하면, 일제의 토지조사계획에 의해 땅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조선인들을 위해 자신의 명의로 그들의 부동산을 매입한 후, 한 푼의 돈도 받지 않고 그 집들을 그대로 원 주인들에게 돌려주기도 하였다. 또한 자국의 이익을 위해 고종과의 약속을 져버리고 일본의 만행을 모른척한 루즈벨트 대통령을 꼬집어 비판하면서 일본의 조선 침탈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를 알리는 글을 끊임없이 언론에 기고하여 조선 독립을 위해 힘썼다. 그 밖에도 한글과 조선 역사 등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헐버트는 한글에 관한 논문을 쓰고, 상고사부터 조선 후기까지의 우리 역사를 집대성한 책을 출판하였고, 조선인들의 교재로 여러 분야의 기초 상식들이 총 막라된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업적들이 있지만, 그 어떤 업적들 보다도 그가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선인의 후손으로써 고맙고 미안하기까지 하다. 헐버트의 둘째딸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는데 당시 고종의 밀명을 수행하고 있던 헐버트는 둘째딸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그의 부인은 그 후 우울증까지 앓았다고 한다. 부인의 입장에서 봣을 때, 자기 나라도 아닌 극동의 작은 나라에 미쳐 가정도 돌보지 않는 남자가 야속햇을 법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놀라운 점은 헐버트가 조선인이나 조선 문물에 대해 무척 잘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조선에 온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한글을 모두 깨우쳤고, 그 우수성을 꿰뚫어 보았으며, 조선 역사에 관해서도 과거에 조선인들이 저술한 여느 역사서에 못지 않은 방대하고 자세한 내용을 담아 편찬하였다. 심지어 그가 저술한 역사서에는 과거에 대마도가 조선의 지배 관할 하에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오늘날 한일 관계에서 격는 독도 문제를 연상하게 하는 부분도 등장한다. 게다가 그는 조선인에 대해 일방적으로 좋은 면만을 말하지 않고, 장단점을 고루 이야기 하였는데 그 장단점이 당시 일제의 침탈에 힘없이 무너졌던 조선사회의 약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교사였으며, 학자였으며, 계몽운동가였으며,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헐버트... 한국을 너무 사랑했던 그는 소원대로 지금 이 땅에 잠들어 있다고 한다. 그의 노력이 지금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따져보기 이전에 그의 조선에 대한 사랑에 깊이 감사하고 그 마음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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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았던 헐버트(Homer B. Hulbert)란 인물에 대해서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다. 책을 읽는 내내 전율이 일었고 안타까웠고, 경악을 금할수가 없었다. 그가 남긴 사진 속에서 우리나라의 옛모습과 생활상을 보고, 그가 남긴 글에서 당시 역사적인 상황 들을 들여다보게 되다니. 어떻게 외국인임에도 한국인 못지않게 이렇게 한국의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었을까. 구한말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에서 역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문명화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미국인 헐버트의 일생을 다룬 일대기를 통해서 그 당시 긴박했던 우리의 역사와 여러가지 사건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매우 세세하게 우리나라 풍속과 생생한 삶의 모습을 담았다. 더불어 많은 유적과 우리 선조의 생활상에 대한 사진도 수록하여 구한말의 시대 상황을 매우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느낌을 갖게 한다.-169
헐버트는 운명처럼 코리아란 나라를 알게 되었고, 결국 우리나라에 왔으며, 평생을 우리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그는 교육만이 나라를 지키고 문명사회를 만들 수 있다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국제적인 신문 및 학술지에 한글의 우수성을 소개하였고, '사민필지'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 교과서를 저술하여 육영공원에서 교재로 썼으며,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우리나라 최초로 채보하여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또한 고종을 지키기위해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서기도 했고, 박해받는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본에 대항하였으며, 고종 황제는 을사늑약을 저지코자,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자신의 친서를 전달하는 특사로 헐버트를 임명하였다. 일본의 박해로 어쩔수 없이 한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하고서도 국제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 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적으로 이어나갔다. 또 고종 황제가 헐버트에게 내탕금을 찾아 오라고 위임하였고, 국보인 경천사 10층 석탑을 고종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탈취해가자 헐버트는 국제적 신문에 고발하며 석탑 반환을 촉구하여, 돌려받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토록 일일이 열거하기에 끝이 없을만큼 열정적이었고 끈기를 보여준 헐버트의 활약에 감동했고 감사한 마음뿐이다.
한국과의 운명적인 만남, 고종 황제와 특별한 인연을 가졌던 헐버트는 20여 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교육자, 한글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선교사, 독립운동가로서 우리나라에 크게 헌신하였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 사건 이후 일제의 박해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헐버트는 미국에서 서재필, 이승만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리고 1949년 광복절을 맞아서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한국을 떠난지 40년 만에 환국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얼마 후, 병원에서 영면에 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문화, 언어를 지키기 위해, 독립을 위해 노력하고 몸을 아끼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 속에 파란 눈의 헐버트가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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