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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oryline (Ⅰ~Ⅱ) 시프레트 의사(Dr.Syfret)에게 암 선고를 받은 엘리자베스 커런(Elizabeth Curren)은 골목길 끈에 세워진 종이박스와 비닐 시트로 된 거처에 있던 한 남자[나중에 자신을 Vercueil이라고 말한다]를 만난다. 그녀는 키가 크고, 마르고, 쭈글쭈글한 피부에 충치 먹은 긴 송곳니하며, 헐렁한 회색 옷에 챙이 축 늘어진 모자를 쓴 그를 떨떠름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다른 사람을 고를 수 있었음에도], 고약한 냄새가 나는 떠돌이인 그를 자신의 집 일을 돌보게 하려 한다. 잔디 깎기[몇 야드하고 그만둠], 정원사 일, 고양이 밥 주기, 가끔씩 차 밀어주기, 혹은 심지어 자신의 자살까지도 돕게 하려 한다. 그는 커런 부인의 집안 잡일하는 것을 귀찮아하지만 그녀의 자살은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면도 보인다. 그는 한달만에 돌아온 플로렌스(Florence)에게도 푸대접을 받는다. 결국에는 그녀의 아들 베키(Bekhi)에게 쫓겨나는 지경에 이른다. 그 후 베키와 그의 친구인 쿠굴투레에서 자전거를 타고 온 소년은 경찰 차와 부딪혀 플로렌스의 거부에도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어 진다. 커런 부인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치료받고 있던 베키와 얘기할때 등교거부를 했던 이유를 물어본다. 하지만 베키는 이렇게 묻는다. “무엇이 더 중요하죠? 아파르트헤이트가 붕괴되는 것인가요? 아니면 제가 학교 가는 것인가요?” 그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며 정치적인 동조를 거부한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베키와 그의 친구를 치고 달아났던 경찰밴을 고소하려는 마음 뿐이었다. 후에 흐르어터 스키르 병원에 가서 베키의 친구를 찾으려 한다. 그 애를 찾은 곳은 노인들 병실이었는데 ‘장례식 대기실’에 아이를 놓았다고 플로렌스가 끔찍한 처사라며 불평한다. 그 병실로 찾아간 커런 부인은 그 소년과의 단절을 느끼며 그 소년의 적의를 느끼고 돌아온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었던 가장 적은 형식의 저항으로 ‘고소장’을 접수시키려 한다. 경찰들은 커런 부인이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에 고발할 수 없다고 말하자 경찰에게 ‘수치심’에 대해 언급한다. “어쩌면 수치란 내가 늘 느끼던 것에 붙여진 이름에 불과한지 몰라요.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것에 붙여진 이름인지 몰라요.” 그녀는 오랜 동안 비저항 지식인으로서의 수치, 치욕을 느끼며 그녀 삶 속에서 죽음을 확인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Ⅲ~Ⅳ) 텔레비전에서 매일매일 정치인들이 줄줄 나와도 남아공의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고[왜곡된 방송만 보여주고] 라디오에서도 흑인 항쟁에 관해 언급하는 것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런 커런 부인은 어느 날밤 걸려온 전화로 플로렌스를 쿠굴레트로 데려다 주면서, 그곳에서 플로렌스의 사촌이라는 타바니씨를 만난다. 그는 흑인 지성인을 대변하는 흑인 교사이다. 하지만 그의 안내를 받고 간 곳에는 참화의 현장을 내려다보는 수 백명의 군중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는 경험을 한 커런 부인의 “난 집에 가고 싶어요”라는 발언을 하게 된다. 여기서 타바니는 커런 부인을 다른 무책임하며 (비겁한) 공모자이기까지 한 다른 백인과 똑같다고 치부해버린다. 그녀는 ‘분노와 폭력’이 난무하는 이 장면에서 빠져나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타바니를 포함해 그녀를 둘러싼 모든 흑인들은 그녀를 다 같이 적대시한다. 타바니를 따라가 플로렌스를 찾았다. 그녀는 타버린 건물 안쪽을 바라보며 눈에 초점 없이 커런 부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구에 있는 사람들을 밀치고 나간 타바니씨는 다시 무리에서 나와 커런 부인에게 눈을 뜨고 죽은 베키를 보여준다. 모든 진실이 배제된 매스미디어와 베키의 죽음은 극명한 차이를 이루며 그녀의 사고를 마비시키는 듯 하다. 베키의 죽음을 둘러싸고 그곳에 있던 흑인들과 커런 부인사이의 대립 구도는 커져만 간다. 커런 부인은 자신들을 짐승으로 바꿔놓는 변신의 약초를 찾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도 쓰레기 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흑인들이 백인들에게 쓰레기라도 되는 것처럼 그 사람들에게 총을 쏘지만 결국 살 가치가 없는 것은 백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만난 장교와 군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이 이곳에서 하는 짓보다 더 나쁜 짓은 없을 테니까요. 당신들의 영혼에 그렇다는 말이예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 말의 의미를 알면서도 이 사건을 끝까지 마무리하겠다고 단언한다. 그녀는 그렇게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도 이런 일을 하기에는 모두 너무 어리군요.” 참담한 경험을 한 커런 부인은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겨진 글쓰기를 하면서 베키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녀는 베키의 죽음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깊숙이 성찰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피와 젖 속에서 그녀[커런 부인의 어머니]을 들이마시며 삶 속으로 나왔다. 그런 다음 강탈당했고, 그 이래로 잃어버린 상태다”라고 고백한다. 이런 자신을 인형으로 표현하면서 암[죽음]으로 인한 고통만이 자신에게 존재감[삶]으로 다가온다는 모순적인 상황을 역설하고 있다. [이런 내용은 그녀가 먹는 진통제인 디코날과 보로디노(러시아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전투가 있었던 곳의 지명으로 살육의 들판을 커런 부인에게 연상시키는 전쟁 지옥이미지)가 애너그램[철자바꾸기]로 보는 이유와도 비슷하다. 이 둘 모두 실재하는 아픔을 무덤덤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로렌스의 자매라는 여자가 와서 플로렌스의 짐을 가져가고 난 어느 날 퍼케일은 커런 부인의 분신자살을 부추긴다. 그녀가 자살을 포기하고 난 뒤 베키의 친구가 찾아온다. 그 애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면서 이 아이를 자신이 사랑해야만 영혼구제[밑에 설명됨]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아이에게 그 얘 자신이 삶 가운데 있음을 강조하면서 항쟁에 뛰어들지 말 것을 권고한다. [이 대목은 백인의 침략논리를 인정하는 부분처럼도 보여지지만 글 전체의 맥락상 피를 흘리는 젊은이들을 삶으로 이끌고 싶었던 작가가 목소리를 낸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사실 커런 부인은 역사상의 전투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삶을 강조하는 부분을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다. 스파르타인들의 전투, 투키디데스의 규칙, 보로디노의 전투, 샤카의 전사들등은 그 예라 할 수 있다.] 어쨌든, 그 애가 자신의 집에 있다는 것을 알려 타바니 씨에게도 전화해 아이를 데려가기를 바라지만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경찰들이었다. 커런 부인은 경찰관을 저지하지도 그 아이를 돕지도 못하고 밖으로 실려나간다. [그 중의 한 여자경찰을 묘사할 때 “누군가의 착한 아내가 되도록 길러진 착한 여자”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은 식민자의 공모자인 백인 여성의 위치를 간결하게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 경찰관이 커런 부인 집에서 폭발과 사격이 벌어지자 밖의 앰뷸런스로 그녀를 실어 보내려고 하였지만 이 것을 거부하고 베이튼칸트 스트리트에 있는 고가교 밑에서 몸을 오그리고 있는다. 우연히 잠든 그녀를 아이들이 금니가 있나 확인해 빼려고 나무토막으로 입을 벌리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된다. [전쟁으로 지쳐 궁핍해진 나라답게, 인본이 무너진 장면이 있는 그대로 들어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우연히 만난 퍼케일과 그의 개와 함께 프레데 스트리트를 가로질러 컴컴한 숲으로 들어가 잠을 청한다. 잠이 들기전에 플로렌스와 타바니씨의 생각에 반대하면서 “젊은이들을 볼모로 하는 늙은이들의 전쟁이예요.”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범죄를 방관한 자신을 공모자로 치부하며 자신의 분노와 수치심이 자신을 갉아먹었다는 고백을 한다. 영웅이 필요한 불행한 시대를 한탄하며 그녀는 잠이 든다. 다시 돌아온 집은 경찰의 수색으로 어질러져 있었고 커런 부인은 이런 상황에 자신이 정상일 수 없다고 외치며 (오히려 너무나 정상에 가까운) 경찰에게 따진다. 경찰의 탐문 이후 그녀는 위험을 알리기 위해 타바니씨와 연락을 취하려 하지만 전화번호만을 남겨둘 수 있었다. 한편 딸에게는 요하네스의 마지막 밤을 설명하기 위해 글을 남긴다. 꿈에서 커런 부인은 증오와 분노의 시대에 휘말려 간 플로렌스를 보게 된다. 이제 커런 부인은 왜곡의 도구이자 편파보도를 일삼는 텔레비전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백인의 애국가를 지옥에서도 들을까 무섭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시프레트 의사에게 전화해서 디코날 이외의 약을 처방해줄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의사는 2주간의 새로운 약을 처방해준다. 퍼케일과 커런 부인은 예전 보다 훨씬 많은 말을 나누며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 자신들의 예전 직업에 대해, 가족들에 대해, 커런 부인 사후의 퍼케일 삶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는 자신의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퍼케일이 더 충실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자신의 딸과 그를 좋아하게 된 이후로 텅 빈 가슴에 남은 공간이 거의 없어졌다고 고백한다. 어느 날 추위를 느낀 그녀는 “시간이 됐나요?”라는 퍼케일의 질문을 받고는 그의 포옹을 받으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생각해보기) 1) 커런 부인이 암에 걸리지 않은 평범한 죽음을 맞이한 노부인이었다면? 2) 커런 부인이 아닌 (젊거나 늙거나 건강한) 백인 남성의 글이었다면? 3) 만약 타바니나 플로렌스가 주인공이었다면? ◈ Five Steps to take death 1) Denial [꿈과 현실 사이] 망각 속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무엇인가가, 두려움이라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어렴풋이 나타나며 나를 끌어낸다. 나는 그것으로부터 풀려나려고 몸부림을 친다. 2) Anger 내 목소리에는 새로운 광기의 각이 서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의기양양해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할 만큼 했다. 고양이들에게도 할 만큼 했다! 3) Bargaining 추한 상태에서 죽고 싶지 않다. 나는 구원받고 싶다.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가? 하고 싶지 않은 걸 함으로써, 그게 첫 번째 단계이다. 나는 그걸 안다. 우선, 사랑스럽지 않은 것을 사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 아이[베키를 찾아 와 경찰차에 같이 다친 친구, 자칭 존이라 함, 후에 본명이 경찰관에 의해 요하네스라 밝혀짐.]를 사랑해야 한다. […] 너를 더 사랑하면 할수록, 나는 그 애를 더 사랑해야 한다. 그 애를 덜 사랑하면 할수록, 어쩌면 나는 너를 덜 사랑한다. 4) Depression (1) 나는 운전대 위에 몸을 구부리고, 처음에는 조용하고 점잖게 흐느끼다가, 나중에는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큰 소리로 울며 허파를 비워내고 심장을 비워냈다. (2) 울음의 단계를 넘어선 슬픔. 나는 속이 텅 빈 존재다. 나는 껍데기다. 5) Acceptance (1) 자손이 없이 죽는다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지 못하다[삶의 연속에 대한 열망을 드러냄].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영혼의 평화를 위하여, 우리는 누가 우리 다음에 올 것인지, 우리가 한 때 편안하게 살았던 방들을 누가 차지하게 될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2) 침착해졌다. 그러나 내가 침착해진 것은 더 이상 내 목숨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 Key Symbols (1) 엘리자베스 커런 : 커런 부인은 자신의 딸이 있는 미국으로 가서 딸 곁에서 임종을 할 수 있었지만 끝까지 남아공에 남으려 한다. 왜 그런가? 그녀는 자신의 죄의식, 즉 그 시대의 지성인으로서, 식민자의 아내로서 흑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뒤곁에 선 채 방관자의 역할을 했다는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인으로 태어난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 가지고 태어나야 했던 원죄만큼이나 식민자의 혈통이라는 죄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그녀가 자신에게 주어진 죄로 인해 자기가 시대에 느끼는 수치심은 너무나 뚜렷한 stigma였다. 그런 그녀에겐 그 수치심으로 얻은 죽음이 마지막 남은 진실이었다. 앞에 나서지 못했던 지식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녀는 초라한 죽음을 원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마지막 내기는 퍼케일에 관한 것인데 그것은 믿음에 관한 내기라고 딸에게 쓰고 있다. 그녀는 영혼이 받지 못하는 시대에 영혼을 살아 있게 하기 위해 노력하기 위한 시도로서 퍼케일을 택했다. 그가 용서도, 자비도 없는 빈 껍데기의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커런 부인의 전령사 역할을 수행하게 하면서 커런 부인 자신의 삶을 그에게 맡기려고 한다. (2) 퍼케일 : 그는 도덕적이지도 않고 꿈이 있는 사람도 아닌 부랑자이다. 벡키의 친구인 소년이 그에게 물을 갖다 주는 대신 다음과 같이 버럭 소리지른다. “그 자들은 당신을 개로 만들고 있어요! 당신은 개가 되고 싶은가요?” 그가 그 소년에게 “지옥으로 꺼져라!”라고 욕설을 붓자, 그 소년은 “개 같은 인간! 주정뱅이 같으니라고!”라고 대꾸한다. 이 간단한 대화에서 퍼케일의 존재가 이 소설에서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주체성을 상실한 흑인. 백인에게 돈을 구걸하거나 백인을 위해 바닥까지 하인 근성으로 사는 자아가 없는 흑인. 그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부랑아로 사랑조차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른다. 그런 그가 커런 부인 옆에서 그녀의 죽음을 외로운 죽음, 그리고 초라한 죽음이 아니게 만들어주는 장본인이 되는 것이다. 그는 손가락을 잃은 불구이고 꿈을 잃어버린 정신적으로 빈곤한 자이다. 하지만 커런 부인은 그의 인본을 믿는다. 사실 이 글도 그가 커런 부인의 딸에게 그녀의 글을 전했으리라는 가정하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을 가만 한다면 이것 또한 작가 쿳시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인간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내가 기대는 약한 갈대이기 때문이다” 퍼케일에 관한 또 한가지 가능한 해석은 “이것이 내가 남아프리카를 향해,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것의 나쁜 냄새에 익숙해진 남아프리카를 향해 느끼는 감정일까?”라는 커런 부인의 언급에서처럼 백인의 통치하의 폭력과 억압에 만신창이가 된 아프리카를 추상적으로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3) 커런 부인의 꿈 (Ⅳ장) : 가슴을 드러내고 바람을 가르며 그녀 꿈속에 나타난 여신은 아프로디테이다. 하지만 쾌락적으로 보이거나 매력적으로도 보이지 않은 채 등장한다. 그 여신은 순각적으로 나타나 지나쳐버리는 피와 대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꿈속에선 플로렌스와 그 아이들은 그 여신을 따라가지만 그녀는 그들이 지나간 텅빈 자국만을 보고 있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왜 그런 모습으로 꿈에 등장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폐지를 둘러싼 흑인들의 항쟁으로 인본이 사라져버린 남아공의 시대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꿈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아프로디테의 임무는 사랑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잃어버린 그녀는 황폐해진 대지와도 같으며 파괴력을 지닌 것처럼 보여진다. 이런 부분은 커런 부인이 불결하고 냄새나는 퍼케일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며 자신의 구원을 얻으려는 이유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을 보인다. (4) 종양 : 자신의 병을 cold하다거나 icy하다는 표현 등으로 차가운 금속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이미지는 철의 시대에 가질 수 밖에 없는 차가움의 이미지를 상기시켜준다. 커런 부인이 자신을 태워 자살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이런 이미지를 없애고 싶었던 까닭이 아닐까? 그리고 그 분신 후 결과 생긴 잿더미로부터 무엇인가 자라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 이런 점은 피닉스의 부활의 이미지와 유사성을 보이기도 한다. (5) 플로렌스 :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를 둘러싼 구굴레투, 랑가, 냥가에서 학교가 폐쇄되고 항쟁이 거세지면서 아들을 잃는 어머니로 나온다. 그녀는 커런 부인을 자신에게 급여를 주는 사람 정도로만 인식할 뿐 그녀의 무저항적•방관적 태도에는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커런 부인은 그녀에게는 착취자이며 식민자의 계급의 한 사람인 듯 하다. ◈ In Views of mourning 1. 엘리자베스 커런의 애도[방관자였던 시대 지성인의 애도] 시대의 지성인으로서, 식민자의 아내로서 앞장 서서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를 하지 않았던 방관자의 애도로 보여진다. 정상적인 자아는 수치감과 분노라는 감정이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본래 self와 대치되어 상실감에 빠진 자신을 애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 플로렌스의 애도[비극적인 시대를 사는 비운의 어머니로서의 애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지는 애도로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잃고 잠적해버린다. 그녀의 애도는 아파르트헤이트 폐지가 이루어져도 계속되리라 짐작된다. 아파르트헤이트 폐지가 부재하든 실재하든 그 이름 하에 그녀의 아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 Think of key passages 1. 이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가라앉는 배에 타고 있는 것과 흡사하기 때문에 2. 자비도 없고 한계도 없는 전쟁, 보이지 않는 게 상책인 전쟁. […] 보모의 시대가 끝나버렸다고 배운 아이들은 나중에 어떤 부모가 될까? 부모에 대한 생각이 우리 안에서 파괴되고 나면, 부모라는 것이 다시 창조될 수 있는 걸까? […] 자네는 그들[백인에 의해 만들어진 (오직 잔인함만 남은 흑인들의) 자식들]을 모두 백인 탓으로 돌리고 그들에게서 등을 돌림 셈인가 3. 철의 아이들. […] 플로렌스 자신도 철과 다르지 않다. 철의 시대. 그 다음은 청동의 시대. 그러한 순환주기에서, 찰흙의 시대 흙의 시대 같은 더 부드러운 시대가 돌아올 때까지 얼마나 오래, 얼마나 오래 걸릴까 4. 불에 타 없어지고, 제거되어, 세상을 깨끗하게 남겨두는 것. … 이 나라도 마찬가지. 불을 위한 시간, 종말을 위한 시간, 잿더미에서 무엇인가가 자라야 할 시간. 5. 나는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방향을 찾는다. 게[cancer-라틴어로 게를 의미]의 걸음 -> 자신의 병, 암을 암시 6. 지옥에 가서도 영원히 디 스템(백인들의 애국가)을 들어야 한다는 게 두려워요 7. 혹은, 삶이란 물에 빠지는 것이다. 물을 통해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이다. ◈ Furthermore 1. 야스퍼스의 “형이상학적 죄의식”로 『독일인의 죄』에 언급됨 : 인간에게는 인간이기 때문에 세계 내에서 자행되는 온갖 부덕과 소치에 대해 각 자가 책임져야 할 몫의 연대감이 존재한다. 특별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결코 모른 척할 수 없는 죄악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예컨대 내가 나의 단순가담을 통해서 쉽 게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사건현장을 방조했다 치자. 나는 그 사건의 공범자가 되는 것이 다. 또한 내가 충분히 예방 가능한 어떤 살인 사건을 방치하거나 혹은 그 사건의 발발을 막기 위해서 생명의 위험을 불사하지 않고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자. 그러면 나는 정상적인 형태의 법적•정치적•ㅗ덕적 관점으로는 결코 이해 불가능한 어떤 묘한 형태의 죄의식에 빠지게 된다[…] 그런 사건을 겪고 난 이후에도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쉽 게 해소되지 않는 죄의식의 부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의 한가운데에는 어떤 한 절대명령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범법행위의 현장이나 생명을 위협하는 어떤 상황하에서 그것은 모두를 위한 삶을 선택하게 하거나 혹은 그 삶을 거부하게 만든다. 2.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의 결론 흑과 백. 양자는 모두 그들이 각각 숭배하는 조상들의 비인간적 목소리를 등지고 진정한 대화를 시도해야만 한다. 대화를 통해 하나의 객관적인 목소리를 수렴해야만 한다. 그 전에 소외를 극복하려는 자유로운 시도를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인생의 노정을 새롭게 출발하는 자에겐 언제나 덜컹거림이 있게 마련이다. 우연이라는 바다에서 익사하기 십상이다. 인간의 비극은 한때 그가 어린아이였다는 데 있다. 자아를 재포착하려는 시도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 자아를 음미하려는 시도를 통해서만 또한 자유의 지속적인 긴장을 통해서만 인간은 인간 세계를 위한 이상적인 존재 조건을 창출해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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