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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에 관한 열두 가지 신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 만연해있는 굶주림이 어디에 그 원인을 두고 있는 것인지, 과연 정말 식량이 부족해서 기아 사태를 해결 못하고 있는 것인지에 관해 많은 보충 자료와 일관된 어조로 설명하고 있지요. '식량이 충분치 않다'라는 아주 일반적인 오해(이 책에서는 신화라고 부릅니다.)에서부터 '그들이 굶주리면 우리가 이득을 본다'라는 뜨끔할 수밖에 없는 주제까지 신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미디어를 통해서였든 스스로 만든 환상 속에서든 보통 사람들이 기아와 식량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오해(신화)를 하나씩 짚어내가면서 굶주림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 중에서도 저한테 아주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식량이 충분치 않다' '자연 탓이다' '인구가 너무 많다' '자유시장이 굶주림을 끝낼 수 있다' 등이었습니다. 이런 신화들은 굶주림이 생기는 근본 원인을 가리고, 인류가 어쩔 수 없는 사태라고 인식하도록 조장하거나 굶주림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스스로에게 책임이 대부분 있는 듯이 보이게 하여 기아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거죠. 책에서 주장하는 굶주림의 근본 원인은 민주주의의 부재에 있습니다. 보통선거권의 보장 같은 형식적 민주주의가 아닌 진정한 민주주의, 다시 말해서 '자기자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결정은 자기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말하지요. 기아로 허덕이는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국가들이나 서남아시아 국가들이 실제로는 농산물 순수출국이라는 사실은 '식량이 부족해서 기아가 생긴다'라는 믿음을 여지없이 부숴버립니다. 소말리아에 큰 가뭄이 생겨 기근이 생겼을 때 그 바로 옆 지방에는 식량이 창고에 가득 쌓여있었다는 증언은 '자연 재해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는 것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해버리죠. 더 높은 인구밀도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보다 인구밀도도 낮고 3모작도 가능한 방글라데시에서 굶주리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은 무엇을 암시할까요.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소수의 사람으로 집중되어 그로부터 나오는 산물(=식량)이 마땅히 돌아가야 할 곳에 돌아가지 않는 것이 바로 지금 전세계에 존재하는 굶주림의 원인입니다. 비단 한 국가 내에서의 민주주의 부재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관계 속에서 경제적 권력의 집중 역시 국가 내 비민주적 관계를 확대하고 유지시키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녹색혁명이 해결책이다'와 '자유무역이 해답이다'라는 장에서 깊게 다루는데요. 세계농업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카길 같은 거대종묘회사들이 녹색혁명을 빙자하여 새로운 종자를 보급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농약을 같이 뿌릴 때에만 생산량이 증가하도록 만들었다거나,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정부들과 결합하여 덤핑으로 농산물을 공급함으로써 가격경쟁력을 잃은 그 나라의 농민들이 절대 빈곤선 밑으로 떨어져 굶주리도록 만들어버리는 일 같은 것들이 그에 해당하지요. 이 역시 국제 관계 속에서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해결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책의 본문에서 한국의 이야기가 꽤 심심찮게 나옵니다. 어쨌건 간에 지난 50년 동안 우리 사회가 굶주림의 비율을 상당히 낮추는 데 성공한 건 사실이니까,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더군요. 이승만 정권 시절의 토지개혁이 부족함이 있긴 했지만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성공적이었다거나, 분배구조의 개선을 통하여 높은 인구밀도에도 불구하고 식량을 고루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또다른 진실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농업 식량 문제를 따로 다룬 책은 아니니까 어쩔 수 없죠. 대신 각 장마다 옮긴이가 직접 덧붙인 1~2장 짜리 짧은 글들을 통해서 그 아쉬움을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의 식량사정이나 한국농업을 지배하는 다국적기업의 실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의 뒷면, 저곡가 정책에 의한 농민의 희생 등등등 많은 좋은 내용이 있는데, 농업과 환경에 관련하여 일을 하고 있는 옮긴이의 정성이 엿보여서 좋았습니다. 번역은 이렇게 해야지요 하핫.. 공동 저자 중 한명인 Peter Rosset이 쓴 한국어판 서문은 재작년 멕시코 칸쿤의 WTO 각료회의에서 몸을 던졌던 고 이경해 열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의 정신은 굶주림을 종식시키려는 전세계의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그의 서문에 코끝이 찡해지더군요... [인상깊은구절]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굶주림의 일소라면, 우리는 그 위에 있는 빈곤, 불평등, 그리고 무력함을 먼저 없애야 한다. |
| IMF 로부터의 탈출, GNP 2만불 시대를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귀 따갑게 들린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냉소적인 반응만을 보일 뿐이다. 점점 살기가 나아지고 있다는 목소리는 어디서도 들어볼 수 없다. 아, 있긴 있다. 아주 극소수의 부유층들이 지난 날 했던 이야기를 난 아직 기억한다. 영원히 IMF 였으면 좋겠다던 그 목소리를. 이는 우리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는 점점 이상해지고 있는 것 같다. 자본은 국경 따위에 연연해 하지 않은지 오래다. 서로 다른 자연 환경과 문화, 기술을 가진 국가들은 각자 가장 많은 이익을 발생시킬 수 있는 물건을 생산해 해외로 수출하고 그 외의 것들은 수입하면 된단다. 과거와 같은 보호무역은 떨쳐버리고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들다 보면 모든 국가가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할 거라나. 물론 인류는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부모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마치 아주 오래된 고전 동화책에나 나올법하게 들리는 것을 보면 분명 우리의 삶은 과거보다 나아졌다. 하지만 그 나아짐은 어딘가 모르게 미심쩍다. 왜 같이 발전하는데 이 세상엔 여전히 잘 사는 국가와 못 사는 국가가 존재하는 걸까? 그것도 나날이 벌어지는 경제 격차를 보이면서? 몇몇 국가들에서는 사람들이 남아도는 식량을 주체치 못하고 비만과 혈관계 질환을 두려워하는 반면, 다른 몇몇 국가들에서는 사람들이 기본적인 위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체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연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분명 이 세상에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인 비단 머나먼 땅 아프리카 몇몇 국가들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겐 지금까지 잘못된 믿음들이 많았다. 그런 믿음들은 가난한 국가의 사람들이 게으르고 나태하기 때문에 경제 발전을 이룩하지 못했다는 식의 사고를 정당화시켜주었다. 문화적으로 미개하고 제도적으로 덜 갖추어진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경제 성장은 있을 수 없다는 식의 사고, 그러한 방식의 사고는 어쩌면 문화적, 인종적 우월 주의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것을 심어주기에 급급했다. 지금은 비록 최빈국일지라도 보다 서양적인 것, 미국적인 것이 뿌리내리면 그들도 우리와 같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일방적인 문화 이식은 아무런 기적도 양산해내지 못했다. 정작 가난과 빈곤의 원인은 전혀 다 른 곳에 있었음을 우리는 몰랐다. 아니, 알고 있었지만 외면해 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소위 가진 자의 거만함이었고, 아무런 문제 제기도 이루어지지 않는 속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사고의 획일화였다. 식량은 충분치 않은데다 자연 환경이 불충분한 식량 생산을 끌어올릴 수 있는 여건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끊임없이 증가한다는, 굳이 멜서스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아도 이는 가난한 국가들을 통틀어 가리킬 때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일종의 강요를 해왔다. 보다 높은 효율을 가진 작물을 도입하고 자연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녹색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그네들이 가지고 있던 환경에 적합한 토종 기술을 무시했고, 그네들이 소유해온 문화를 파괴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가르쳐준 것들은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땐 생산력이 향상 되었다는 식의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향상된 생산력은 결코 그네들의 것이 아니었다. 소수의 부농들에게 집중된 경제적 풍요. 한 쪽에선 남아도는 식량을 처치 못해 안달인데 다른 한 쪽에선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놓여있는. 이것은 우리가 주장해온 것들 때문이 아니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 그것은 모두 신화에 불과하며 이 모든 문제는 경제적 민주주의의 부재가 빚어낸 것이라고 말이다. 산출되는 부로부터 소외되는 대다수의 사람들, 자국의 국민 아닌 세계 자본주의 질서를 위한 정책들의 남발, 그 속에서 (경제적) 민주주의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국민이 굶어 죽고 있는 그 순간에 어떻게 타국에 식량을 수출할 수 있는 것인지 사람들은 묻는데 인색하다. 오히려 사람들은 시장가격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에 익숙한 나머지 시장의 기능이 잘 작동하도록 돕는 모든 행위마저도 방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유주의의 탈을 쓴 권위주의적 태도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 복잡한 문제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듯 하다. 물론 당장 식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있진 않지만, 지금과 같이 자본주의 질서를 맹렬히 따르는 속에서는 머지 않은 훗날 굶주림이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좀더 값싼 가격으로 농산물을 접할 수 있고, 우리의 공산품을 더 많이 수출할 수 있으니 좋은 것이다’라는 논리 속에선 농민들의 삶에 대한 어떠한 고충도 엿볼 수 없으며, 100% 식량을 해외에 의존하게 되었을 때 도래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한 의구심도 존재치 않는다. 하지만 이런 무사 안일한 태도 속에서 우리는 소수의 풍성함을 위해 굶주리는 세계가 될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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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캘리포니아에 설립된 '식량과발전정책연구소(aka Food First)' 의 연구원들이 써서 1998년에 나온 책이며 한국에는 2003년 초판이 나와 7쇄까지 찍었다. 때문에 본문이나 편집과정에서 추가한 한국 사례에서 다소 뒤처진 이슈를 언급할 수 밖에 없음이 아쉽다. 그러나 이 분야의 고전답게 식량문제와 연관된 거의 모든 사례를 다뤘다. 식량 생산이 생태 친화적이고 지속가능하며 대다수 인민의 기본적인 필요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하는데 주요한 걸림돌이 되고 있는 잘못된 이데올로기 열두 가지를 골라 반박하고 있다. 민중 교육을 목적으로 한 연구소에서 펴낸 책답게, 논의의 수준은 평이하고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어떤 의미로나 식량문제에 접근하고자 할 때 교과서로 삼을만한 책이다. 식량문제에 관한 두세권을 책을 연달아 보면서 농업을 이해하는 한국 사회 주류(특히 정부)의 수준이 너무도 뒤처져 있다는게 느껴졌다. 거의 십년 이상은 뒤처져 있다는 느낌이다. 뒤처진 까닭은 두물머리 사태처럼 딱히 반동적인 정책을 일삼아서만은 아니다. 한국 사회의 주요 이슈를 생산하는 도시생활자들의 식량 및 농업 문제에 대한 지배적인 무관심, 무지도 반동적인 농업정책만큼이나 파괴적이다. 하루에 세번 입에 밥을 넣는게 당연한 일이라면 밥에 대해 생각하고 밥에 대해 발언하는 것도 당연해야 하지 않나? 그걸 꼭 죽기 직전에 내몰린 농민들의 비명으로만 대신해야 하나? 오늘자 경향 1면에 식량파동 기획이 실린걸 보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대신, 드디어 중앙 언론(경향 정도면 중앙이라고 봐야지... 지역 신문도 아닌데)이 움직일만큼 상황이 심각해졌구나 싶었다. 파국은 너무도 가까이 왔는데 우리는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는 것일까. 요새 정치경제학을 읽건 현대문명비판을 읽건 이상하게 농업으로 돌아온다. 변화는 쟁기날 끝에서 오는 것일까. *** 신화 하나, 식량이 충분치 않다. 제대로 나누어지지 않을 뿐이다. 신화 둘, 자연 탓이다. 주로 이윤을 위한 인간의 무분별한 행동이 불필요한 생태 파괴를 가속화한다. 아프리카 지역의 사막화는 농업의 대규모화, 산업화로 인해 빈농들이 한계토지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산불에 있어 주요한 책임자는 가난한 화전민이 아니라 벌목 기업 따위였다. 신화 셋, 인구가 너무 많아서 굶주림은 불가피하다. 인구 밀도 혹은 1인당 경지 면적은 굶주림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오히려 굶주림을 부추기는 사회 구조가 빈민들로 하여금 절망적으로 다산하게 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경제적 안정이 보장되면 사람들은 낳고 싶을 때만 낳을 것이다. 신화 넷, 식량과 환경 보호 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 산업화된 농업은 투입된 에너지가 산출된 에너지보다 크다는 면에서 명백히 자원 비효율적이며, 환경을 해치고 있다. 전통 농업은 빈농에게 적합할 뿐더러 자연의 농자원을 보호하여 농업을 지속가능하게 한다. 신화 다섯, 녹색혁명이 해결책이다. 녹색혁명은 경제적 권리가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빈민의 굶주림 해결을 거의 해결하지 못한다. 석유 에너지와 석유 제품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녹색혁명은 생태적으로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신화 여섯, 사회 정의와 효율적인 식량 생산 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 대토지를 경작하는 부농들은 대다수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한 식량 작물보다는 수출 작물을 재배한다. 대토지 경작은 소농보다 산출 효율성이 떨어지며 생태적으로도 무책임하다. 역사적으로도, 대다수 소농에게 유리한 토지개혁이 이루어질때 식량 생산은 증대되어왔다. 신화 일곱, 자유시장이 굶주림을 끝낼 수 있다. 구매력이 불균등하게 나누어진 사회에서 시장은 사람의 필요가 아닌 돈에 반응한다. 식량 생산도 부자의 기호에 맞춰 변화할 것이며, 시장에 식량이 풀린다 해도 빈민을 배제한다. 신화 여덟, 자유무역이 해답이다. 국제시장에 통합되기 위해 경지에서 식량 작물을 내쫓고 선진국 소비자를 먹이기 위한 수출 작물을 들인다면 이득을 보는 주체는 선진국의 거대 농기업들과 수출 인프라에 접근권을 가진 제 3세계 엘리트 뿐이다. 그들이 벌어들인 돈은 저임금에 시달리는 대다수 농업 노동자들에게 떨어지지 않고, 엘리트가 수입 사치품을 사들이는데 쓰인다. 신화 아홉, 빈민은 너무 무력해 현실을 타개할 힘도 의지도 없다. 편향된 주류 언론은 빈민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변화의 동력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다. 신화 열, 미국의 원조가 굶주림 해결에 도움이 된다. 미국의 원조정책은 외교정책에 종속되어 있다. 미국의 원조는 조건부로 이루어져 해당 지역의 불평등을 심화하는 여러가지 잘못된 정책을 도입하게 만든다. 여태까지의 식량 원조는 해당 지역을 미국 농산물에 의존적으로 만들어 결과적으로 미국 거대 농기업의 판로를 열어줄 뿐이었다. 신화 열하나, 가난한 나라가 있어야 우리가 현재의 편리를 누릴 수 있다. 자본에는 국경이 없다. 국가 간의 불평등과 일국 내의 불평등은 결국 단일한 자본권력에 의해 추동된다.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 가난해지도록 내버려두는 한에는 우리도 언젠가 같은 신세가 될 수 밖에 없다. 신화 열둘, (굶주림을 면하게 하는)평등은 자유와 양립할 수 없다. 자유에는 몇가지 종류가 있다. 무제한의 부를 축적할 자유만이 평등과 양립할 수 없다. 시민적 자유는 평등과 완벽히 상호 보완한다. 생존에 필요한 기본 자원에 접근할 권리는 인간의 기본권이다. 그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는 한에는 진정한 민주 시민이라고도 할 수 없다. |
| 왜 한쪽에서는 음식쓰레기로 골치가 아프고 지구저편에는 굶주림으로 생사의 기로에 서있는것일까? 왜 하루종일 일을해도 타이커우즈는 생산과는 상관없는 골프채 한번 휘둘려서 수억을 버는걸까? 가난한자들이 일도 안하고 무지하고 의지력이 없어서일까? 식량이 인구증가를 못따라가서일까? 세계경제는 항상 성장한다고 하는데 어른들은 예전보다 살기가 더 힘들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항상 궁금했는데 이책은 나의 궁금증을 많이 해소했다. 식량이 부족해서 세계가 굶주리는게 아니라 식량에 대한 접근성이 용이하지 않다는 사실 즉, 식량생산기구의 소유의 불평등에서 오는 식량부족 현실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언론에서 환경파괴와 인구증가, 가축과의 식량 경쟁으로 야기한다는 진실을 오도하는 보도 방식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고 있는듯하다. 다국적기업은 전세계의 문호개방에 압력을 넣어 가장 싼 임금과,원자재로 생산하여 가장 비싸게 팔수있는 곳으로 상품을 옮겨놓는다. 좀 잘 사는 국가 국민들은 이것이 언뜻 자신에게 풍요로운 삶을 주는듯하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선진국도 이러 초국가적인 기업의 자신만의 이윤 달성에 피해를 입게 된다. 선진국의 일자리는 임금이 싼 제3세계로 옮겨갈것일고 부의 양극화는 심화 될것이다. 세계경제 대국이라는 미국 역시 많은 국민들이 굶주림에 노출되어있다는 사실을 이를 반증하다. 각지역의 고유 농산물들이 초국적인 메이저들의 단일품종으로 재배되어 해충에 더 취약하게 되고 농약을 다량으로 사용하게하여 토지의 자생력을 회복 불능의 상태로 만든다. 그러면 다시 이런 메이저들은 다시 다른 나라로 옮기게 된다. 그러면서 세계의 굶주림과 임금하락, 환경파괴, 일자리 감소에 따른 빈부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승자는 오직 극소수의 엘리뜨집단일 뿐이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정보들은 이런 힘있는자들의 정보들뿐이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세계에 문호를 활짝열게 되었다. 어느때보다 세계경제 흐름에 더 영향을 받게 될것이다. 자유란 여러 상품들에대한 선택의 자유도, 소수 부자들의 자유가 아니라, 재산권이 고루고루 분산되어 많은 이들이 식량의 접근성을 용이하게 하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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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구의 절반은 굶주리고 있는 반면, 나머지 절반은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
농장규모와 생산성은 반비례한다. 면적당 이윤율이 낮아지므로, 더 많은 이윤을 확보하려면 더 넓은 면적을 경작해야만 하고, 이에 따라 대농장 중심의 농업체계가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생산 증대만으로는 굶주림을 해결할 수 없다. 한 사회의 농업체계가 아무리 생산성이 높다고 해도 그 속의 사람들이 굶주린다면, 국민들이 먹을 수 있을 만큼 생산하지만 그 대부분을 선진국으로 수출해야 하는 실정이라면 생산이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라 의사결정의 구조이다. 식량, 노동, 교육 등 자원에 대한 접근성과 구매력에 관한 집중구조, 즉 경제권력의 구조를 바꿔야만 굶주림은 해결될 수 있다. 문제는 민주주의의 부족이다.
이 모든 것이 돈 때문이다.
터미네이터(terminator) : 종자를 사서 파종한 그 해에만 수확할 수 있고 다음 해에는 종자가 싹트지 않게 유전자를 조작하는 기술. 트레이터(traitor) : 자사의 특정 농약이 살포되어야만 싹이 트고 성장하도록 유전자를 조작하는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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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식량에 관한 열두 가지 신화'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굶주림의 문제는 바로 자원의 비민주적 배분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소수의 거대자본이 식량을 독점하고 통제하는 한, 아무리 과학적 진보가 일어난다고 해도 빈민들은 계속 굶주릴 수밖에 없다. 식량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문제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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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 때문에 고통스러운 사람은 없어야 한다. 그것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이런저런 보도를 보면, 특히 북한 지역을 몇년째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기아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위해 약간의 돈을 내는 것을 망설인다. 혹시 군대에 가는 거 아냐? 이거 줘 봐야 밑빠진 독에 물붓기 아냐? 우리나라에도 결식 아동이 얼마나 많은데 웬 북한? 하는 식으로... 북한 말고도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 특히 아이들이 굶고 있다는 것은 이제 더이상 새로운 정보가 아니다. 기아를 없애기 위해,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을 제시하고, 그 생각들이 맞지 않음을, 그리고 조금만 정의로와지고 조금만 힘을 쓰면 얼마든지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다른 책들과 달리 부드러운 재질의 종이로 만들어져 좀 더 따뜻한 느낌이고, 세계 여러 나라의 다양한 예들이 글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인구가 너무 많아서, 자유무역을 통해, 그들의 굶주림을 통해 우리가 이득을 얻는다는 식의 기아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들이 여러 자료들을 통해 부정되고, 다함께 하는 세상을 향해 노력하자는 메시지는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그러나...
일단 외래어 표기를 지적해야겠다. 마침 어제 읽은 창비의 다른 책 은희경의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서도 그렇더니, 여기서도 어색한 외래어 표기가 거슬린다. '꾸바', '엘리뜨' 등 거센소리로 적어야 할 말들이 된소리로 많이 표기되어 있는데, 이러한 표기는 출판사 측의 편집 실수는 아니고, 창비측의 원칙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표기가 원칙이라면 적어도 책의 앞이나 뒤에 그것에 대한 설명이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책 내용에서 '한국'의 사례가 군데군데 등장하는데,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이 여럿 있었고,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일본, 타이완, 한국은 식량 수입과 외국인 직접투자 금지, 진정한 토지 재분배, 대규모 정부 보조, 자국 생산자들에 대한 관세 보호 등의 정책들 때문에 전후 주목할 만한 성장과 생활수준 개선을 이루어냈다." 광복 이후, 그리고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의 경제 정책, 그리고 박정희 군사 정권의 여러 정책들이 가져온 농촌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알면 이런 문장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세계 여러 곳에서 나오는 각종 데이터들에 대해 일일이 검증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설령 영문판에서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한국어판에서는 주석이라도 달아야 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출판사가 다른 데도 아니고 '창비'라면... 정의로운 내용이었고, 공감이 가는 면이 많았지만, 군데군데 아쉬운 책이었다. 기회가 되면 적절한 부분을 인용해 아이들 시험문제 만들 때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내용이 적합한지 많이 신경써야겠다. 그나저나 책의 내용이 좋고 말고를 떠나, 진심으로, 적어도 '기아'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없으면 좋겠다. 아이를 둘 키우고 있다 보니, 이 녀석들이 굶으면,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하는게 제대로 실감난다. 우리에게도 지난 100년간 끔찍한 기아의 역사가 존재한다. 다시는 그것이 반복되지 않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