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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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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인 하종강 선생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주제는 ‘소외된 사람들’이었는데,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우리나라 자살률이 세계에서 손꼽힌다. 우울증은 결코 사치스러운 병이 아니다. 우리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왜 그 지경에 이르렀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들이 죽음을 택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보살피고, 병에서 벗어나게끔 도와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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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인 하종강 선생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주제는 ‘소외된 사람들’이었는데,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우리나라 자살률이 세계에서 손꼽힌다. 우울증은 결코 사치스러운 병이 아니다. 우리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왜 그 지경에 이르렀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들이 죽음을 택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보살피고, 병에서 벗어나게끔 도와줘야 한다.’ 그 때, 내 가까웠던 한 사람이 떠올라 할 말을 잃어버린 기억이 난다.


죽음이란 보편적인 인간 현상 중 하나다. 그러나 자살은 그렇지 못하다. 똑같이 삶과 상반되는 개념이지만 ‘자기말살’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죽음과 뚜렷이 구별된다. 그것은 터무니없이 미화되기도 하고, 근거 없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선명한 주홍글씨처럼 사람들 가슴에 낙인이 되는가 하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아슬아슬한 금기가 되기도 한다. 왜일까? 왜 자살은 이렇듯 특별 처우를 받아야 할까?


가까운 사람의 자살은 내 상처의 원형이 되었다. 죽음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진 것은 그 이후부터일 것이다. 하나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경험이 기억에 박힌지라 생각을 거듭하면서도 죽음이란 무엇인지 외면화하기가 어려웠다. 내게 그것은 과학적인 문제도, 종교적인 문제도 아니었다.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죽음은 왜 혹은 자살은 왜. 그러다 만난 책이 바로 『어느 쓸쓸한 날의 선택 자살』이다.



자살, 그 달콤한 유혹

제1부는 니체, 생텍쥐페리, 카뮈 등 널리 알려진 세계 지성들의 견해를 다루고 있다. 대체로 자살은 권리이자 가능성이라고 인정하는 견해들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글은 칼 뢰뵈트의 「자살은 인간이 가진 가장 빼어난 가능성」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기독교, 칸트, 헤겔, 흄 등의 의견을 추려 보여준다. 기독교의 경우 자살을 살인이자 신에 대한 모독이라 보았고, 칸트는 그러한 전제 하에 자살이 인간 존재에 대한 배반임을 논증하고자 했다. 헤겔은 상급 권력에 속한 인간의 자살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흄은 기독교적 편견에 반대하여 자살이 인간을 타고난 자유로 환원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저자는 이 모든 의견을 정리함으로써 자살은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자신의 생각에 힘을 실었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이지만, 나는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성서의 경직된 계명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따라서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불가항력의 상급 구조에 속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포기해선 안 된다는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삶과 생명이라는 주체들의 고유함, 치열함에 반하는 강변이 아닐까? 주어진 삶을 끊는 것이 그저 달콤한 유혹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살자들이 죽음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갈구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결국 내 생각은 자살이 일종의 권리이자 가능성이라는 견해에 수렴되는 것이다.


모순에서 피는 꽃

제2부는 자살이 지닌 양면성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모순에 대해 다루고 있다. 먼저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의 글 두 편이 실려 있는데, 앞뒤 글의 연결성이 부족해 설득력이 떨어졌다. 쇼펜하우어는 자살이 죄악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지만, 현존재에 관해 질문을 제기한 뒤 회답을 들을 수 없다는 점에서 다만 외형적인 구원이라고 보았다.


이무라 가즈키요의 「누구에게나 인생은 예술이다」가 인상적이었다. 다른 견해들에 비해 철학적 사유의 정도가 깊지 않은 대신 따뜻한 진심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성심껏 자살자들을 이해하고, 그러면서도 혼자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생이라는 예술을 공유하자고 설득하고 있었다.


때때로 삶이 굴레이듯 죽음 또한 완벽한 자유는 아니다. 죽음으로써 꽃을 피울 수 있다면 삶을 통해서도 꽃은 피어나는 것이다. 누추한 일상이 곧 예술이 되는 것, 그것이 삶임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자살의 방정식

제3부는 보다 분석적으로 자살을 검토하며 그것을 막는 방법에 관해 다루고 있다. 칼 A. 메닝거의 「자살의 해부」 로버트 L. 베닝거의 「자살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구체적인 사례와 자료가 많아 한결 생생하고 흥미로웠다.


전자의 경우 정신분석학을 통해 자살의 동기와 행위 자체를 분석했다.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자살의 동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원초적 공격성에서 시발한 살의, 양심에서 출발한 피살의, 색욕적인 요소와 결합한 자기파괴 의지 등이 그것이다. 그 중 가장 공감했던 것은 ‘양심이 지나치게 자라나 이상 발달된 상태에 이르러 나타나는 반응’이라는 설명이었다. 우리는 늘 일해야 하고 참아야 하며 희생해야 한다는 양심의 명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대다수 사람들이 한번쯤 죽음을 소원하는 것이 아닐까?


후자의 경우 자살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주는 조언, 사랑하는 사람을 돕는 방법, 뒤에 처진 사람들에게 주는 충고로 이루어져 있다. 골자는 관심, 사랑, 부드러움이 자살을 막는다는 것인데 그리 참신한 내용은 아니었다. 인상적인 것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건네는 충고였다. 가족이든 친구든 남겨진 사람들은 자살에 대해 죄의식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나 저자는 당신의 잘못 때문이 아님을 인식하라고 말한다. 서로 사랑했던 시간을 재확인하고, 단지 인생의 한 기간을 통해서만 죽은 자를 평가하지 말라고 타이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취한 길을 인정하는 일, 그것은 내게도 절실한 부분이었다.



진정 삶과 죽음은 상반되는 개념일까? 죽음은 생명과 완전한 단절을 의미할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흔히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앞뒷면 같다는 말을 한다.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의 한 페이지를 정리한 지금 기꺼이 그 말에 동의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언제 찾아올지 모를 우리 자신의 죽음을 비롯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무수한 타인들의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자살이 죄악인지 아닌지 혹은 자유로운 행위인지 비겁한 행위인지를 가리는 것은 덜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손이 닿는 곳에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있다면 그이의 병을 헤아리고 치료하는 일이 먼저여야 한다. 앞서 다룬 자살에 대한 모든 관점은 차치하고라도, 가까운 사람을 잃는 것은 곧 내 일부를 상실하는 것 혹은 세상을 이루는 연결고리 하나를 상실하는 것이기에. 조금만 도의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자살이라는 문제를 생각한다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는 것이 마냥 힘든 일은 아닐 테다.


책의 표지에는 ‘세계 지성들이 쓴 삶과 죽음에 관한 명쾌한 진단’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하나 다 읽고 난 머릿속이 완전히 개운하지는 않다. 이 책을 선택할 다른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삶과 죽음을 알아가는 것은 인간의 일생에 걸쳐 행해야 할 몫이기 때문이다.

r***3 2007.01.2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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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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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나와 무척 가까웠던 누군가의 자살을 목격하고서, 비로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슬픈 공포를 처음으로 체험했었다. 그 후로,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나, 자살을 하게 되는 배경과 원인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는 의문과 걱정이 증폭되었다. 우리는 왜 죽고 싶은 것인가? 자살은 명백한 살인 행위인가? 우리는 육체가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정신이 육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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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나와 무척 가까웠던 누군가의 자살을 목격하고서, 비로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슬픈 공포를 처음으로 체험했었다. 그 후로,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나, 자살을 하게 되는 배경과 원인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는 의문과 걱정이 증폭되었다. 우리는 왜 죽고 싶은 것인가? 자살은 명백한 살인 행위인가? 우리는 육체가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정신이 육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인가? 만일 정신이 육체를 소유하고 있다면, 정신에 의해 일어나는 육체의 말살이 엄연한 살인일 것이고, 만일 육체가 정신을 소유하고 있다면, 육체에 의해 일어나는 자기 포기의 관점은 정신까지 포함되는 육체 자신에게 위배 될 것이다. 자살의 이유와 철학적인 견해가 궁금해서 「어느 쓸쓸한 날의 선택, 자살」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200P 의 얇은 책 한권을 읽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만큼 생각할 시간이 많이 필요했던 책인 것 같다. 쇼펜하우어, 니체, 미우라 아야코, 생텍쥐페리, 알베르 카뮈, 장 그르니에, 뢰뵈트 등의 철학자, 소설가와 저명한 정신과 의사들의 에세이나 수필집에서 자살에 대한 부분만 발췌한 책이다. 니체는 그의 저서,「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정신과 의사들의 논문에서도 분명 발췌가 되었다. 1부의 철학적인 논의들에 대한 분량은 상당히 짧기 때문에, 약간은 실망을 했고,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3부 ‘자살의 방정식’ 의 ‘칼, A, 메닝거’ 자살의 해부 론이다. 좀 더 사실적인 측면에서 자살에 대한 통계와 상세한 분석을 볼 수 있었는데, 분량 자체로 책의 절반 가까이 된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간다. 사람에 따라 그 끝이 언제인가에 대한 차이는 있겠지만, 죽음 앞에 누구나 동등한 입장이라는 사실이 불변의 진리다. 누구나 인생의 마지막 종착점인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지만, 그 직립의 길을 역행하는 자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한 해 평균 백만 명에 육박한다고 하는 ‘자살자’들이 바로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는 신의 반역자이다. 스스로를 살인함으로써, 주어진 삶에 허락되지 않았던 마침표를 긋는 행위. 나는 무신론자이기에 기독교 신앙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어떠한 종교에서도 자살을 찬미하는 신은 없을 것이다. 신에 대한 배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이웃들, 관계 된 모든 이들을 배반하는 행위, 자살. 과연 사람은 무엇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인가? 정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본인의 육체와 결부해 많은 문제점들이 지적되기 마련이지만, 정신과 육체라는 분배의 의미가 과연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의문점이 생긴다. 육체는 어디에서 왔는가? 혹은 정신은 어디에서 왔는가? 자아라는 개념이 신에 존속되기 이전에, 육체의 소유권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은 분명한 사실은 좀 더 확고하게 만들어 줄 테지만, 아마도 정확한 결론의 정의는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죽음의 종류가 존재한다. 그 수많은 죽음의 종류 중, 유일하게 미화될 수 있는 죽음이 바로 자살이다. 죽음에의 동경, 유희가 혼합되어 죽음에 대한 완벽한 자유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자살을 꿈꾸었던 사람들에게서 느꼈던 보편적인 감정의 느낌은, 죽음 자체를 동경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현재 상황에 있어 변화를 얻는 것이지 목숨을 끊는 게 아니다.’ 라는 양면의 견해도 찾아볼 수 있다. 한번도 자살을 꿈꾸어 봤다는 사람이 없다면 아마도 거짓말일 것이다. 나 역시, 적어도 몇 번의 힘든 시기를 겪는 도중, 죽고 싶다는 생각이 했었다. 그러나 죽음으로 나를 파괴하기 보다는, 현재의 상황에서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삶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바람이 극단적인 표현의 방식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실제로도 자살을 목격한 경우를 보았지만, 그들 대다수는 삶에 대한 불만이 가장 끔찍한 형태로 터져 나왔던 것일 뿐, 진심으로 원했던 것은 삶에 대한 변화였을 것이다. 흔히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약한 사람들의 구차한 변명이나, 정신병적인 질환을 앓고 있다거나, 세상을 살아갈 힘이 없는 한심한 겁쟁이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절대로 적절한 견해가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 없듯이, 코앞에 나타난 죽음의 사신 앞에서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으며, 최대한의 용기를 쥐어짜서 실행에 옮겼을 것인가. ‘죽을 용기로, 살아라.’ 라는 말이 있듯이, 삶에 대한 회의감을 보다 타당하게 변화시키다 보면 자연히 삶에 대한 욕구가 솟을 것이다. 누군가를 향한 분노의 표출, 타인과 자신을 둘러싼 맹목적인 열등감의 잘못된 인식으로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는 노력으로 얼마든지 개선시킬 수 있다. 엄마 뱃속에서 태아로 있던 최초의 시간으로 돌아가려는 욕구의 자살로 볼 수 있는 물에 뛰어드는 행위처럼, 사랑이 우선적으로 내제되어 있어야 하겠다. 주변인의 도움을 먼저 찾고, 주변인 역시 잠재되어 있는 자살자들의 곁을 지켜준다면 끔찍한 자살의 숫자는 현저하게 줄어들게 될 것이다. 매일 밤, 뉴스를 장식하던 수많은 자살 보도들. 가령 카드 빚을 이유로 4인 가족이 동반자살을 한 경우나, 인기 배우나 가수들의 자살 사건,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의 총수의 자살 사건 등을 접할 때 마다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는 무관한 사람들의 자살이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지만, 가까이서 자살을 접한 사람으로서, 자살자의 주변인의 심정 고충과 충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득 자살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유혹과 충동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면, 자기 파괴의 다른 돌파구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모른 척하고 홀로 떠나는 것만큼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인상깊은구절]
산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실패이다. 한 마리의 독충이 그들의 심장을 파먹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 사람에게는 죽음이 훨씬 더 성공적인 삶임을 알게 하라. - 13p
m*****5 2006.11.0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