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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남의 마음을 사로잡아 호림'이라 풀이돼 있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에 홀리게 되지만,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매혹의 대상은 놀랍게도 신념이다. 18세기말, 자생적으로 서학을 받아들였던 이벽과 그에 의해 서학에 물들여졌던 정약용. 그 두 사람이 신념을 두고 걸었던 길에 대해, 그리고 이벽에 의해 서학을 받아들였던 인물들의 운명을 죽은 이벽과 살아있는 정약용의 시선과 목소리를 통해 들려주고 있다.
'매혹'은 서학에 목숨을 걸었던 이벽과 출사에 대한 미련에 서학을 부정했던 정약용이 각자의 목소리를 통해 교차적으로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순교자와 변절자로서 다른 선택을 해야했던 상황이나 그때 서학을 접했던 인물들이 택해야 했던 배신, 굴복 등 저마다 선택했던 길과 운명을 담고 있다. 정약용은 익히 알고 있어서 그런지, 특히 이벽의 마지막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벽은 서른 한살에 의문의 죽음을 했지만, 그의 글이나 문집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한 문중에 의해 모두 불태워졌다. 그렇기에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매혹'을 읽는 동안 정약용보다는 이벽에게 더 시선을 두고 그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됐던 데에는 그가 미지의 인물이라는 이유가 컸던 것 같다.
이벽은 5대조 선조가 소현세자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따라 들어가 귀국할 때 가져온 서학 서적을 독파하면서 자생적으로 서학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조선땅에서 처음으로 의식화 학습을 주도하고 비밀 모임을 만든 인물이었다.
이벽과 정약용. 이벽이 서학을 학문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이념과 믿음으로 받아들였고,체제 변혁의 도구로 삼았다면, 정약용은 현실의 위협 때문에 서학을 떠났다. 출세의 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목숨을 건 반체제의 길을 택한 이벽과 위태롭게 체제의 공부와 반체제의 공부를 왔다갔다 했던 정약용의 행보가 달라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였다.
정약용은 이벽을 통해 서학과 인연을 맺게 된 인물들의 비극적인 최후를 들려주고 있다. 황사영, 권일신, 이승훈, 이가환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던 그들. 그리고는 정약용은 동부승지로 재임용되자 반대편의 환심을 사기위해 사상전향서라고 할 수 있는 자송문을 올린 것, 자신의 수치스러운 사실도 털어놓고 있다. '내 갈길은 재능과 문장의 길이었지, 저 신념의 길과는 달랐다. 당초에 죽음과 맞바꿀만한 신념으로 살지 않았다'는 정약용. 그는 자신의 선택에 회한에 젖었을까. 아니면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순응했던 것일까.
역병으로 죽었다고 소문이 났지만 실상은 집안에 갇혀 의문사한 이벽. 그는 영혼의 목소리로 이렇게 토로했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는 내 삶의 모든 것이었다.그것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가치는 황홀하고 매혹적이었다" 자신의 최후를 짐작하고 웃음을 머금은 채 기꺼이 죽어가는 이벽의 모습이 머리 속으로 그려졌다.
작가가 오랜 기자 생활을 해서, 그런지 '매혹 '속에서 언급되는 등장인물이나 사건, 사료에 대한 취재가 성실하게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벽과 정약용의 대화나 심리가 전부 사실처럼 여겨질 정도였고, 두 사람의 선택과 심리 모두 이해됐고 공감이 됐다. 그만큼 설득력있게 심리를 그려낸 것이 소설다웠다. 비록 자송문을 썼다고 해도, 정약용을 변절자라고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정약용은 신념을 포기한 댓가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굴욕을 충분히 겪였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을 이렇게 기억하고 싶다. 죽음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신념에 헌신했던 사나이 이벽, 굴곡있게 살았지만 치열하게 뜻을 펼쳤던 사나이 정약용, 한 사나이에게선 죽음의 의미를, 또 한 사나이의 삶을 의미를 새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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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의 <매혹>은 오랫동안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질문을 던집니다. '신념을 위해 목숨을 던질 수 있는가.' 소설의 등장 인물로 말하자면, 이벽은 당당하고 정약용은 비겁했나. 소설은, 이벽은 이벽대로의 가치를, 정약용은 정약용대로의 가치를 지녔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약용에게 서학은 진정한 신념이 아니었을 겁니다. 서학도 좋지만 출세라는 더 좋은 게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삶 또한 그렇습니다. 늘 더 좋은 무언가가 충실한 삶을 방해합니다.
참고로, <매혹>에서는 정약용이 그닥 매혹적인 인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출세를 원했지만 결국 출세하지 못한, 그래서 인생의 실패자인듯 묘사됩니다. 그 분의 학문적 성취가 소설의 초점이 아니다보니 그런 결과가 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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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지배이념이었던 주자학에 맞서 서학(천주학)을 추종한 이벽과 그를 따른 젊은이들의 삶을 다룬 장편소설이다. 소설에는 두 명의 화자가 등장한다. 조선시대 천주교 초기 교도로 활약한 이벽(1754~1786)과 조선 후기 대표 학자겸 문신인 정약용(1762~1836)이다. 두 사람 모두 당시로서는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 급진적 이념이었던 서학에 매혹된 공통점이 있지만 이후의 선택은 너무도 달랐다. 이벽은 끝까지 신념을 고집하다가 결국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당한다. 반면 정약용은 현세와 이념 사이에서 갈등을 거듭한다. 서학에 미혹됐다는 이유로 18년 간 유배를 당하기도 했지만 정약용은 결과적으로 현실을 택했다. 그러나 회갑을 넘기고 나서 자신은 차마 못했던 이벽의 선택을 부러워하는 듯한 모습도 비춰진다.
마지막에 저자는 대부분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썼다면서도 굳이 소설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 왜곡이나 허구 여부를 떠나 이 소설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누군가는 소설 속의 서학을 80년대 운동권이 추구했던 사회주의에 비유하기도 했지만 꼭 그렇게 국한 할 것만은 아니다. 이벽과 정약용의 고민은 지금도 유효하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은 신념과 현세적 삶을 놓고 갈등한다. 그 신념이란 특정 이념이 될 수도 있고, 종교 또는 삶의 방식일 수도 있다. 저자는 묻는 듯하다. 목숨을 걸고 신념을 지킨 적이 있는가? 그 정도로 이념과 존재, 죽음을 고민한 적이 있는가? 최소한 나에겐 뼈 속까지 와닿는 질문이었다.
이 소설의 또다른 매력을 꼽자면 간결하고 힘이 넘치는 문장이다. 신문기자 출신답다. 문장 하나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매혹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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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시대 서학의 영향을 받았던, 두 명의 당대의 지식인의 삶을 대비해서 그린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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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ory님의 리뷰를 읽고 이벽과 정약용의 이야기라는 걸 알고 책을 들었다. 책은 누군지 밝히지않고 이벽과 정약용의 시점에서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누구의 이야기인가 잘 가늠하지못해서 자꾸 앞부분으로 돌아가 확인하기도 했다. 소설기법이었겠지만 자꾸 맥이 끊겨서 못마땅했다. 그러나 저자가 힘주어 얘기하듯이 이것은 소설이고 이런 소설은 꽤나 매력적이다. 어떤면에서 그런고하니 역사책에 서술되어있는 숫자와 설명만으로는 그 상황이 잘 안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소설은 각각의 인물들을 살아 숨쉬게 만들어준다. 특히나 내가 전혀 상상도 못해보고있었던 다른 인물들, 권철신, 이가환 등이 내가 만난 적있는 사람인양 내 머릿속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 점 하나만으로 별 네개를 준 것이다. 솔직히 정약용은 너무 박하게 표현한 것 아닌가싶게 매력없는 인물이 되었다. 전에 본 다른 이의 책들에서 그려보게 되었던 이미지하고는 영 딴판이 되었다. 게다가 마지막까지 배교했던 마음을 돌이키는 내용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다. 마치 일부러 그런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저자는 정약용을 안좋아하나보다(완전히 나 혼자만의 객적은 생각이다). 그러나 이벽에 대해서는 무척 후하다. 물론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바꿔놓기는 했지만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인물이 되고말았다. 난 그동안 이벽의 모습을 수염이 더부룩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그랬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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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좋아 손에 들었던 작품이었는데 역시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중반부를 넘어가면서부터는 문장이 작품의 지루함을 이겨내 못하더군요. 이야기가 전혀 뒷받침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의 문장이 대단히 훌륭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묘사라든가, 표현이 좋은 문장은 아니었지만 입에 붙는 문장 리듬감이 괜찮아 호기심이 가는 정도였달까요? 오히려 소설을 쓴 경험이 부족하신 듯 시제의 마무리나 일인칭 소설임에도 빈번한 작가 개입이 일어나는 등, 소소한 면에서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편이었습니다. 여튼 작품의 완성도가 높았다면 그런 것 또한 작가의 독특한 개성으로 평가할 수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문장의 좋은 리듬감을 제외하고는 특별하달게 없는 소설로 느껴졌기 때문에 그 역시 경험 미숙으로 벌어진 기술적 결함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작품의 배경은 정조 시대이고요, 다산 정약용 선생과 이벽이라는- 저는 잘 몰랐던- 두 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주제는 천주학입니다. 당시 시대상으로 천주학을 공부하는, 지금으로 치자면 천주교 신도라는 신분이 범죄가 되던 그 시절에 천주학을 믿었던 지식인들에 관한 이야기에요. 그것을 정약용 선생과 이 벽 두 분을 중심으로 챕터를 번갈아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각각을 일인칭으로 해서 말이죠. 처음에는 이야기의 전개도 그렇고 내용이 전하고자 하는 무게감도 가볍지 않은 듯 하여 조금 집중력 있게 읽어 나갔더랬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이제 어느 정도 무언가 진행되는 사항이 있어야 할 부분에서도 전개가 일어나지 않았고 점차 얘기하고자 하는 주제 또한 투미해지고 말더군요. 명확한 소설의 초점이 없이 중구난방 이야기가 흩어지더니 종국에는 전개와 절정이 구성되어야 할 부분에 이르러서도 그다지 필요해 보이지 않은 이야기를 다시 펼칠 뿐, 야무진 이야기의 구성이 없었던, 전반적으로 미숙한 소설이었습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천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끌어가면서 독자에게 전하고자 메시지 또한 과연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았고요. 그냥 저냥 목적 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당나귀 같았달까요?
주인공들이 천주학을 무리하게 믿으면서 선택하야 하는 갈등의 내용들 또한 제게는 그리 인상 깊게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그 부분에 중점을 두어 한 인간이 겪어야 하는 신념에 관한 감동을 일으키려고 노력하든가, 그게 아니면 전체적인 시대상을 조밀하게 그려 천주학을 지지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관계를 극적으로 그려내어 소설적인 재미를 부각시키든가, 그도 저도 아니면 고명하신 정약용 선생을 등장시킨만큼 이제껏 우리가 알지 못했던 정약용 선생의 완전한 새로운 모습을 새로운 각도에서 흥미롭게 조명하든지, 한마디로 뭔가 하나의 분명한 목표를 가졌어야 할 작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불행히도 그게 없었던 탓에 좋은 문장임에도 말만 번드르르한 빛좋은 개살구 같은 소설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셋을 줄 정도였던 것은 역시 그만큼 괜찮았던 문장 리듬, 오로지 하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