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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종식 이후,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환상이 있었다고 한다. 인류는 오직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시장, 자본주의라는 토대 위에서만 평화와 번영과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거라는 신념이 환상이었음을 나타내는 두 사건이 2008년 늦여름과 가을에 일어났다고 한다. 세계적인 석학이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저자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2008년의 그 사건이 이 책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말한다. 2008년 늦여름, 러시아-그루지야 전쟁은 러시아의 가까운 외국에서 벌어진 그저 그런 영토전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나토를 동쪽으로 확장하여 러시아를 포위하려는 미국의 노력이 좌절을 겪은 전쟁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이라크 전쟁의 장기적 결과라고 알려진 것, 즉 미국의 이라크 점령으로 미국의 패권이 확인되고 강화되기는커녕 미국의 약점이 더 드러나고, 더 커졌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2008년 가을,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은 세계금융시장을 폭락으로 몰아 넣었고,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은행권의 국유화가 시작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세계경제는 1930년대 이후 최악의 불황으로 빠져 들었다.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는 신자유주의를 그렇게 강요하면서도, 자신들은 곤경에 빠지자 신자유주의를 실천하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신자유주의는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저자는 이번 경제위기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에서 금융이 하는 구실과 금융위기의 동역학을 이해하여야 하며, 금융화라는 말에 숨어있는 몇가지 서로 다른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먼저 금융화라는 말은 은행이 경제를 지배한다는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신자유주의를 금융헤게모니의 복원이라고까지 해석하기도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은행이 상업, 산업자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금융부문의 자율성이 증대되는 것, 다시 말하여 산업자본의 다른 측면으로서 금융자체의 자율성을 나타내기도 한다고 한다. 이것은 산업, 상업기업이 은행을 통하지 않고서도 투자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되자 금융기관들은 영업활동을 전환하여 미국의 빈민들에게도 주택대출을 강요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금융화는 금융시장이라는 경제구조와 금융기관이라는 특수한 경제주체를 구분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한다고 한다. 결국 금융화는 금융부문의 자율성 확대, 금융기관과 금융상품의 증대, 다양한 경제주체의 금융시장 진입을 뜻한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저자는 또한 이번 금융위기를 분석하는 틀로써 케인즈주의 경제학자 민스키의 금융불안정성 이론, 하이에크의 고전적 자유주의 관점, 그리고 하비의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민스키의 저작들은 케인즈주의 관점에서 금융위기를 이해하는데 가장 좋다고 저자는 말한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특징이 자본의 축적이라고 보는 민스키는 자본주의 시장 메커니즘은 물가와 금리안정과 완전고용의 균형을 지속할수 없으며, 심각한 경기 순환들은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금융속성들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민스키의 분석은 오늘날 위기의 원인에 타당성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이라는 문제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에 대해서는 모호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이에크는 투자와 신용의 관계를 고전적 자유주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으며, 신용제도가 불안정한 호황을 낳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케인스주의자 들과는 달리 국가가 신용팽창을 완화 하는 일 말고는 불황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하비는 지금의 경제위기는 단순히 금융시장의 고장이 아니라 자본축적 과정 전체에서 작동하는 심각한 모순 때문 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생산의 동역학과 금융현상의 관계를 더 통합적으로 파악하여야 하며, 이는 세가지 이유 때문 이라고 한다. 하나는 1960년대 이후 장기적인 과잉축적과 수익성위기, 불안정하고 불균형한 세계금융 시스템, 그리고 경제성장의 동력이 된 금융거품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번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각국 정부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 붓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일시적인 회복국면은 형성될지라도 진퇴양난의 딜레마에서 빠져 나오기는 힘들 것으로 저자는 전망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경제위기에 영향을 끼치는 지정학적 요인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2008년의 금융불안정과 그 뒤를 이은 불황이 무서운 속도로 국경을 가로질러 확산된 것은 세계경제가 그만큼 깊이 통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 이라고, 그만큼 더 긴밀한 국제공조가 필요한 것 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세계경제가 더 긴밀히 통합됨에 따라 국민국가가 치명적으로 약해졌다는 세계화 이론의 망상은 이번 경제 금융위기로 확실하게 종식되었다고 한다. 세계경제가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틀 내에서 조직되어 있고, 주권국가들로 이루어진 정치체제의 틀 내에서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세계 정치경제 영역을 지배하는 것은 무정부 상태라고 한다. 지난 20여년 간의 논쟁들 중 대표적인 망상이었던 이것은, 막상 은행시스템이 붕괴하고 세계경제가 침체에 빠져들자 국유화, 구제금융, 경기부양책 등으로 경제구출에 나선 것은 국가들 이었다. 국가의 몰락을 주장하는 이론가들에게 본보기였던 유럽연합이 러시아-그루지아 전쟁과 금융위기 속에서 보인 행태는 가관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들은 지역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으며, 단지 자신들의 국가를 위해선 어떤 일이든지 - 그것이 타국에, 혹은 유럽연합에 해가 되는지를 불문하고 –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냉전 종식 후 신자유주의를 통한 새로운 세계질서로 미국패권주의를 꿈꾸던 그들은 금융위기로 경제력 약화를 맛보았고, 그것을 군사력으로 대체하려던 계획도 파탄이 나고 있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세계는 갈수록 불안정하고 위험한 다극적 체제로 전환되어가고 있으며, 특히 미국과 중국의 복잡하고 긴장된 상호의존과 갈등관계는 지정학적인 불협화음으로 세계가 더 위험해질 가능성도 있음을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번 위기는 권력의 추가 자본에서 국가로 넘어감을 의미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재앙을 몰고 온 금융부문의 과잉팽창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를 괴롭혀 온 뿌리깊고 오래된 위기 즉, 과잉 축적 위기와 이윤율 저하 위기의 다른 형태로 전이된 것,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위기라고 저자는 보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저자는 주요산업의 국유화와 계획경제를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것들이 구 소련의 몰락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안 좋은 기억을 심어주고 있지만, 자본주의를 대체할 지속 가능한 대안이라면 시장이 아닌 민주적 계획에 기초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자원분배가 경제전반의 우선순위에 관한 민주적 의사결정의 결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금융시장을 장악해야 하고, 경제의 핵심부문들을 노동자의 통제아래 국유화하고, 누진세를 통해 확보한 재원으로 사회복지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와 단절하고 자본주의를 뛰어넘으려는 과업은 어마어마하게 힘이 들지만, 2008년의 사건과 그로 인한 위기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운영방식으로서의 신자유주의 모두에 큰 구멍을 뚫어 놓았다고 한다. 이제 시장은 오늘날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으며, 그 결과 인류가 자본주의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저자는 경쟁적 축적의 논리를 타파하는,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풀 뿌리 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권력구조에 맞는 경제구조로의 이행을 제안하고 있다. 이 또한 좌파, 혹은 진보세력이 풀어가야 할 과제중의 하나 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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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레닌과 트로츠키를 잇는 국제사회주의 운동을 대변한다. 그는 구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한다. 1990년대 중반 책갈피에서 그의 책이 처음 번역되어 나왔을 때,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실의에 빠진 한국 좌파들에게 ‘몰락한 건 소련 국가자본주의이지 사회주의운동 그 자체가 아니’라는 위안을 주었다. 그의 저서들 중 비교적 초기에 번역된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은 대학가에서 새로운 필독서로 부상했다. 이 책은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시작된 경제 위기의 원인과 세계 경제 전망에 관해 밝힌 책이다. 물론 고전 맑시스트의 명성에 걸맞게 경제 위기를 맑시즘의 관점에 서서 근본부터 파고든다. 이번 경제 위기에 많은 사람들이 moral hazard라는 잣대를 들이댄다. 그러나 미국 금융 위기가 moral hazard 탓이라는 주장은 기실 ‘구조’의 문제를 ‘개인’에게 돌리는 우파적 관점이다. 즉 moral hazard를 말하는 자들의 논점은, 금융위기가 자본주의 체제가 가진 구조적 모순이 아니라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의 부도덕함 탓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캘리니코스는 미국 및 전세계 경제 위기를 둘러싼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을 맑시즘의 시각에서 분석한다(저자가 맑스주의 경제학의 개념을 별다른 설명 없이 사용하기 때문에, 여기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다소 어려운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많은 이론가와 정책가들이 등장한다. 저자는 그들의 의견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매우 시사적인 현상들에 관한 상충하는 의견들과 그 이론적 배경을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전반부는 미국 금융위기를 미시적으로 다루고, 후반부는 좀 더 거시적이고 세계적이고 이론적인 차원에서 자본주의의 문제를 지적한다. 책의 내용이 다소 산만하고, 강조점이 명확하게 부각되지 못했지만 이 책을 통해 주장하는 캘리니코스의 핵심은 이번 위기가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주요 주장과 흥미로운 부분을 요약, 재구성하고 거기에 내 의견를 덧붙여 정리하는 것으로 리뷰를 대신하고자 한다. 1부에서는 미국 금융위기를 다룬다. 무분별한 ‘파생상품’ 판매가 금융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일지언정 그 근저에는 이러한 위기까지 이끈 자본의 과잉 축적과 이윤율 저하의 문제가 깔려 있다는 것이 캘리니코스의 기본 입장이다. 흔히 힐퍼딩의 금융자본론은 1980, 90년대 대학가 좌파 운동권 사이에서 종종 읽혔던 책인데, 자본주의 후기에 이르러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지배하게 된다는 금융자본론의 입장과는 반대로 미국에서는 1945년 이후 그러한 경향이 오히려 줄어들었고 최근에는 채권과 양도성예금증서 발행 따위의 방식으로 산업자본이 스스로 자본을 조달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미국 금융자본은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서 가난한 가계에 모기지 대출을 남발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결국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이어졌다. 그러고보면 ‘신용’이라는 것이 신용카드나 모기지 같은 형태로 개별 소비자들까지 주어지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다. 말이 좋아 ‘신용사회’지 그 내막을 보면 이렇듯 불안정하고 불순한(?)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자본주의 하에서는 각종 신용 상품들, 혹은 신용 파생상품들의 이름을 걸고 A의 신용위험을 분산해서 a1, a2라는 상품으로 B와 C에게 팔고 이들은 똑같은 방식으로 D, E, F, G에게 팔고… 하는 방식을 통해 위험을 완벽하게 분산시켰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을 단순히 분산시킨 것이 아니라 동일한 정도의 위험을 더욱 많은 경제주체들이 떠안는 것을 의미했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위험의 정도가 더욱 커진 것을 의미했다. 파생상품의 핵심적, 보편적 특징은 모든 자산을 ‘해체’하고 ‘분해’해서 그 구성 요소들로 쪼개고, 자산 자체를 거래하지 않으면서도 그 구성 요소를 거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생상품은 다양한 종류의 ‘특수한’ 자본을 결합하고 혼합하는 독특한 구실을 하는 메타 자본의 성격 때문에 1971년 미국이 금환본위제를 포기한 이후 국제통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고정 장치 구실을 할 수 있었다. 파생상품은 개별 자본들이 마치 안정돼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 금융 시스템 속에서 활동할 수 있게 해준다. 하비의 표현을 빌리면 파생상품은 “교환을 매끄럽게 하고 비용도 들지 않고 즉시 조정할 수 있는 화폐”의 구실을 했다. 2008년 중반 장외 거래 파생상품 미결제 계약의 개념적 가치 총액은 683조 7,000억 달러로 세계 총생산보다 11배 많았다. (pp. 57, p. 58 & p. 77) (헤지펀드, 사모펀드, 구조화투자회사 같은) 그림자 금융 시스템이 오랫동안 숨어서 전혀 규제 받지 않은 채 마술처럼 신비하게 서브프라임 대출을 해준 다음 그 대출들을 묶어서 월스트리트의 마법사들만이 설명할 수 있는 세 글자짜리 온갖 전달 상품으로 만들어서 판매했다. (pp. 51-52) 그러나 캘리니코스는 세계 경제위기의 원인이 금융권에서 시작되었을지언정 금융권만이 원인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최근의 위기가 자본축적 과정 전체에서 작동하는 심각한 모순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위기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 세 가지 차원을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1) 장기적인 과잉 축적과 수익성의 위기, (2) 만성적으로 불안정하고 구조적으로 불균형한 세계 금융 시스템, (3)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한 신용 거품 의존 증대. (1) 미국에서는 수익성(이윤율) 위기를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산업 재편, 노동운동 탄압, 노동자에 대한 착취 증가를 통해 극복하려 했다. 노동생산성이 증가된 것에 비해 실질임금이 동결되어 노동력의 가치는 꾸준히 떨어졌고, 생산성 증가의 결과물은 자본에게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 미국 자본의 이윤율은 오늘날까지 꾸준한 하락세를 보였다. (2) 미국은 금 태환이 되지 않는 달러를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이용해서 만성적 국제수지 적자를 메울 수 있었다. 미국은 꽤 낮은 금리로 얼마든지 자국 통화를 빌릴 수 있었다. 연방준비위원회는 세계 전역의 잉여 저축과 잉여 재화 및 서비스를 일정한 실질 환율로 흡수해서 미국 경제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세계 경제의 균형도 유지하는 정책을 자유롭게 추진했다. 그러나 심지어 세계 최빈국에 속하는 나라에서 유입되는 자금에 의존해야 하는 미국의 헤게모니는 사실 취약한 것이었다. (3) 1998년 러시아의 디폴트 선언 이후 미국의 주요 헤지펀드인 Long Term Capital Management(LTCM)가 파산하자 그린스펀은 구제금융과 금리 인하를 통해서 지속적인 주가 상승을 유도함으로써 국내 소비와 투자를 계속 부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IT 산업에 대한 과잉 투자를 불러왔고 2000년 닷컴 거품이 꺼지면서 다시 불황이 닥쳤다. 이에 그린스펀은 강조점을 바꾸어 모기지 금리를 낮추고 주택 가격을 올리면서 가계 차입과 소비 지출을 늘리는 길로 나아갔다. 그러나 주택 가격이 56% 상승한 5년이 지난 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발하자 이러한 조처도 효과가 다했다. 별로 안전하지 않은 채무자들에게 내준 대출, 예컨대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특히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위험도가 높을수록 이자와 수수료도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용평가기관들은 자신들에게 수수료를 지급하는 은행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으므로 많은 CDO를 트리플A, 즉 디폴트 위험이 거의 없는 안전한 투자 등급으로 분류하고 보증해 줬다. (p. 107) 그러나 2006-2007년에 모기지 디폴트가 급증하자 은행들과 그림자 금융권의 은행 파트너들이 세운 투기성 사상누각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금융 시스템은 한쪽 끝만 잡아당기면 전체가 줄줄 풀리고 마는 뜨개질한 목도리 같은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p. 116) 최근의 경제위기는 무엇보다 금융위기와 연결된 불황이며 전세계적인 불황이다. 이 점이 이번 경제위기의 회복을 더디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다. 엄청난 손실에 직면한 금융기관이 대출을 줄이고, 대출이 어려워진 기업은 생산을 줄이고 가계는 저축을 늘린다. 이것은 다시 금융권을 압박하고 금융기관은 대출을 더욱 줄이게 된다. 이른바 디레버리징(Deleveraging)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오늘날의 경제 및 금융위기가 훨씬 더 깊고 장기적인 과잉 축적과 수익성 위기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노동 착취율을 높이고 자본의 가치를 크게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그다지 큰 효과가 없었고, 후자는 국가의 구제금융 때문에 실현이 저해되었다. 구제금융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최악의 조합, 즉 손실은 사회화하고 이득은 사유화하자는 것이었다. 수익성 없는 기업들이 파산하도록 내버려 두면 자본의 가치가 크게 떨어질 것이고 그러면 이윤율이 다시 충분히 상승해서 새로운 축적이 시작될 수 있겠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1930년대 대공황만큼이나 장기적이고 심각한 불황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구조적 딜레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주요 국가들이 시장에서 비효율적인 자본들이 일소되도록 자유방임한다면 그 결과는 장기 불황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나서서 자본의 대대적 가치 저하를 막는다면 과잉 축적과 수익성의 장기적 위기가 지속될 것이다. 이것은 세계 자본주의가 수십 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근본적 모순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이다. (pp. 128-132) 2부에서는 흥미로운 이론화가 눈에 띤다. 세계화 이후에 약화된 것으로 믿어 왔던 국민국가의 재등장, 경제 통합을 가로막는 지역경제들간의 갈등, 그리고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는 미국 헤게모니 등을 다룬다. 우선 미국 바깥으로 눈을 돌려보면 국민국가의 재강화를 목도하게 된다. 즉 세계화된 경제는 있어도 세계 정부는 존재하지 않으며 2008년 경제 위기를 즈음하여 오히려 각 국가 수준에서 경제에 개입하려는 시도는 더욱 강화되었다. 오랫동안 경제연합을 추진해 온 유럽에서조차 그렇다. 또한 석유와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러시아와 걸프 국가들이 막대한 수입을 올렸고, 아시아 지역은 제조업과 일부 서비스업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이는 세계 경제의 경제력이 이동했고 서방 자유 자본주의가 세계로 확산되는 데 제동이 걸린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중국, 러시아, 걸프 국가 등 신흥 경제들은 자유 자본주의가 아닌 국가자본주의 모델을 따른다. 방대한 에너지원을 보유한 중동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시도는 현지 민중의 저항에 직면하여 지지부진해졌고, 이라크 전쟁에 대한 유럽의 협력은 석유와 가스 공급을 쥐고 있는 러시아의 방해로 약화되었다. 미국은 자국 경제를 살리려는 노력 속에 대외 채무가 늘었는데 특히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채무가 늘었다. 그 중에서도 중국은 2008년에 중국 GDP의 10%가 넘는 4,000억 달러 이상을 미국에 빌려 주었다. 그러나 미국은 달러 평가절하를 통해 부채 부담을 덜려고 했고, 이는 채권국들과의 갈등을 낳았다. 이에 미국 국가정보위원회에서 나온 보고서조차 미국의 세계 지배력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즉 신흥 강대국들의 부상, 세계화하는 경제, 서쪽에서 동쪽으로 상대적 부와 경제력의 이동, 비국가 행위자들의 영향력 증대 때문에 2025년쯤이면 세계 체제는 다극 체제로 바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동안에 어떠한 갈등과 대결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다극 체제라고 해서 미국이 여러 다극 중 하나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세계 경제에서 미국을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은 수출의존도가 지나치게 높고 내수시장이 너무 작다. 생산성 향상보다는 저임금에 기초하여 수출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산시설에 대한 과잉투자로 유휴설비가 크게 늘기 시작했다.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경제들 대부분이 저축은 높은 반면 소비가 적다는 불만이 이번 경제 위기를 계기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다른 신흥 경제의 부상은 그들 사이에서 갈등과 긴장을 낳게 될 것이고, 미국이 이것을 이용해서 이른바 분할 지배 전략을 구사하기가 수월해질 것이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에 경제는 국민국가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고, 때문에 처음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을 낳았지만 종전 이후에는 ‘착근된(embedded: 배태된)’ 자유주의라는 형태의 타협을 이루었다. 즉 국제 수준에서는 자유화를 보장하지만 국민국가 수준에서는 국가의 개입을 강화(공공부문 확대, 복지 확대, 케인스주의 수요관리 정책으로의 전환)하는 형태가 결합된 것이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경제는 다시 1930년대 이전처럼 사회에서 분리된 형태로 돌아갔지만,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다시 ‘착근된’ 자유주의로의 복귀가 점쳐지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오늘날이 달라진 것이 있다. 경제의 세계화가 많이 진전된 탓에 국민국가가 경제를 규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제적 규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련의 위기와 변환은 특정 정책 레짐(regime)과 특정 자본주의 형태가 실패해서 다른 형태들로 진화되는 과정인가? 캘리니코스는 이것이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를 괴롭혀 온 훨씬 더 뿌리 깊고 오래된 위기, 즉 과잉 축적 위기와 이윤율 저하 위기가 다른 형태로 전이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번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위기를 보여준다. 대안은? 결론에서 캘리니코스가 주장하는 내용은 그가 기본적으로 항상 품고 있는 생각이겠지만, 본론에서 나온 미국과 세계 경제 위기와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민주적 계획경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볼리비아의 가스, 석유산업 국유화는 고무적이기는 하지만 한계가 있다. 경제적 우선순위들이 경쟁이 아닌 민주적으로 결정되는 경제질서를 향한 결정적 한걸음을 내디뎌야 할 것이다. 그 과정의 하나로 ‘전국민 기본소득제’를 주장한다(이 부분은 글의 전개상 꼭 필요하지는 않았겠지만 저자가 한 번은 언급하고 싶었나 보다). 모든 국민이 기본소득을 보장 받으면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노동을 팔아야 할 이유가 없어지므로 노자관계가 역전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가능한가? 국내 반대세력이 가만히 있을까? 국제적인 반대 세력들은? 그리고 볼리비아처럼 이미 한 발을 내디딘 국가 말고 아직 시작도 못한 국가들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이쯤 읽다 보면 캘리니코스가 혁명론자가 아닌 개혁주의자였나 하는 착각마저 든다. 그러나 결론의 후반부로 가면 자본에 맞서는 세계적 수준에서 벌어지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의 필요성과 가능성이 언급된다(그런데 이러한 결론은 1, 2부의 주장을 통해 논리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통일성을 저해한다. 그저 그의 평소의 자기 주장을 다시 한 번 반복하고 따름이다). 자본의 세계화는 저항의 세계화를 낳았다는 논지인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본문과 비교해 볼 때 결론이 너무 거창한 듯하다. [덧붙임] 다음 오타들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간혹 두 칸씩 띄어쓴 곳도 수정해야 한다. 균형를 -> 균형을 (p. 67), 다름과 같이 -> 다음과 같이 (p. 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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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위기다!” 이 급진적인 선언은 2008년 9월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을 시작으로 세계의 경제를 위기로 전락시킨 미국 발(發) 금융 붕괴가 의미하는 세계경제에 대한 저자의 분석 결과이다. 그래서 1930년대 대공황 이래 최대 규모의 금융폭락으로 지구경제를 오랜 침체로 몰아넣은 이 사건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본질 자체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단순한 경기순환의 일부일 뿐이며, 일부 부패한 거대 금융기업 탓이기만 한 것인지를 추적한다. 또한 시대의 획을 긋는 사건으로 2008년 8월 그루지야와 러시아의 짧은 전쟁이 미국 헤게모니의 최종위기와 세계체제의 전반적 재편의 서막(序幕)을 알린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었음을 지적하며, 미국주도의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리더십 약화와 다극화하는 세계의 경제체제를 성찰하고 있다. 사실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사적 소유권과 계급의 관계성이나, 이윤의 원천이 되는 잉여가치율, 현대 경제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산임금노동자를 양산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존재조건 등에서 자본주의가 내재적으로 자체 붕괴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진부하기조차 하지만, 이 저술이 바로 오늘의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적 불안정성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 시사하는 바를 결코 낡은 가치라 외면하기만은 힘들게 한다. 특히 이번 금융붕괴가 가져온 파장은 단지 금융부문뿐만 아니라 산업일반을 포함한 국가경제 전체의 혼란과 침체를 야기했다는 점에서 이것이 자본주의의 구조나 경향과 얼마나 관계가 깊은지를 이해하는 것은 중대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결국 회오리처럼 경제전반을 빨아들인 금융의 오늘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인데, ‘신용’의 대두와 이에 기반한 금융파생상품은 물론 개인의 신용카드까지 모든 금융주체를 금융의 그물망 속으로 엮어 넣은 오늘의 경제사회의 모습을 보면 굳이 부가설명이 필요치 않음을 이해할 것이다. 더구나 신용의 문제는 부풀려진 자본의 증식으로 인해 생산자들에게 잘못된 가격신호를 보내고 이는 불균형과 과잉축적의 경향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여기에 논의의 타당성과 검증 가능성을 부여하기 위해 저작의 많은 부분을 시장자유주의자들과 케인주의자 및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바탕으로 한 경제정책의 이견을 담아내어 실증적인 규명을 하여 이해를 제고시키고 있다. 예로써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외치는 신자유주의의 주요 목표는 국가의 징세 및 지출 능력의 제한과 억제, 규제완화와 사유화 등의 작은 정부와 경제 불간섭과 같은 방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금융시장이 붕괴하자 세계의 여타 국가들에 규제완화와 공기업화, 재정지출의 삭감을 압박하고 강요하던 신자유주의 선봉장인 미국과 영국은 어떤 행동을 했을까? 정작 자신들이 궁지에 빠지자 미국은 프레디맥, 페니메이, AIG등 금융기업을 인수하여 국유화하였으며, 영국은 스코틀랜드왕립은행과 로이드뱅킹의 최대주주가 됨으로써 재국유화하는 등 저네들이 먼저 신자유주의의 실천을 배척하였다. 결국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서 비로소 위기를 모면하였다는 의미로, 이는 시장의 자동조종기능을 외쳐대던 자유주의자들의 소리가 얼마나 허망한 위선인지를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자본주의체제에서 노동생산성보다 낮은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생산성의 성과를 자본이 가져가는‘노동착취’와 ‘자본의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서만 이윤율을 높일 수 있음은 대개의 사람들이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이윤율 증대 방법이 세계경제 순환의 강력한 축이 되어 작동하고 있음을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극단의 경제를 통해 목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 온다. 일종의 ‘국가자본주의’를 구사하는 중국의 경우 막대한 자본축적은 물론 국민총생산규모에서 일본을 제치고 미국 다음인 세계2위에 올라섰다. 국내소비는 GDP의 절반도 안 되고 빈민이 8억 명에 이르는 후진국인 중국이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자본축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중국 노동자들의 낮은 소비, 즉 노동 착취기반에 서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반면 미국이란 나라가 부채경제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이젠 삼척동자도 아는 얘기다. 동아시아국가들이 착취경제로 쌓아 축적한 자본은 미국의 싸구려 자산과 국채를 사도록 종용되고 또한 달러가치의 하락을 방조함으로써 자신들의 채무를 줄이고 유입된 자본을 마구 써대는 파렴치한 구조이다. 결국 이러한 상시적인 불안정과 불균형의 동반관계와 자본주의의 자기 파괴적 속성은 지속 가능한 체제가 되기에는 본질적인 문제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금융붕괴로 인한 은행 및 기업의 구제금융은 현대 자본주의가 직면한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망하는 기업은 파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국가가 나서서 재정을 투입하여 회생시키는 것이 바른 것인가? 아마 이번과 같은 글로벌화 되어있는 거대금융기업들의 연쇄 적 도산을 그냥 방치했다면 자본가치의 한없는 추락으로 오랜 기간의 심각한 불황을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대대적인 재정투자로 자본가치의 폭락을 막는 조치는 과잉축적으로 인한 수익성의 위기가 해소되지 않고 위기가 장기화된다는 문제를 갖는다. 이러나 저러나 딜레마를 해소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자본주의가 수십 년간 해결하지 못하고 낑낑대던 근본적 모순”을 드러낸 것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처럼 2008년 금융붕괴가 표상한 세계경제의 혼란은 자본주의가 지닌 구조적 불안정성과 한계라고 지적하면서 자본이 가졌던 권력이 국가로 이동하였다고 주장하며, 현재는 자유시장과 상품화 증대에 따른 고통이 너무 커져 반작용으로 규제강화와 탈상품화 움직임이 출현하는, 아직은 이름이 없는 그 무엇인‘착근된 자유주의’라 명명하면서 시장경제가 헤게모니를 누리던 시대는 끝나고 있다고 단언한다. 그렇다고 딱히 시장경제를 대신할 만한 믿을만한 대안 체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자본주의의 대안 모색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로서 국유화, 소유관계의 완전 폐지, 자본주의 분업의 전면 타파, 협동적 생산형태와 같은 아주 급진적인 체제의 혁신을 내놓는데, 다분히 마르크스 공산주의의 이상과 결부되어 논의의 실효성에 의문을 낳게 한다. 다만, 경쟁논리가 지배하는 시장경제의 대체안으로서 ‘앨버트’의‘파레콘(참여경제)모델’이나, ‘팻 드바인’의‘협상에 의한 조정’모델의 아이디어를 토대로 한 자원배분의 민주적 발상 등은 미래 인류사회를 위한 중요한 참조가 되기도 한다. 수출주도형 경제가 초래하는‘바닥을 향한 경주’를 막기 위해 수요를 키우려면 소득분배의 형평성 실현 노력이 필요한 것이 당연하며, 따라서 최저임금, 노동조합, 기타 사회보장제도의 확대는 중차대한 요소가 될 것이다. 또한 외국자본의 급격한 유출입으로 막대한 고통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강력한 자본통제 시스템의 구축 또한 시급한 것이다. 각국의 자본주의는 더 이상 획일적이지 않다. 네거티브한 러시아나 중국과 같은‘국가자본주의’에서부터 남미 국가들의‘사회주의적 시장경제체제’, 그리고 여러 변형된 자본주의가 공존하고 있다. 국제수준의 자유주의와 국가개입 강화가 결합된 오늘의 착근된 자유주의 체제에서 이미 종주국들도 지키지 않는 신자유주의를 고집하는 우리의 경제체제는 숙고할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폐해와 불평등과 불안정에서 인류 사회를 해방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탁월한 담론인 이 저작은 세계체제의 폭넓은 분석의 틀을 제공하여 자기반성과 미래에 대한 귀중한 숙고의 시간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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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는 GDP로 국가력을 운운하는 경제지표들을 보면 답도 없는 질문들을 계속한다. 왜 우리는 저 GDP만큼의 동산,부동산을 갖고 있지 않은가. 저만큼의 GDP인데 왜 극빈곤층은 여전한가. 국가의 경제력을 판단하는 데 있어, 경제계급에 따라 GDP를 분류조사하고 그 차이의 편차에 따라 각 국가의 경제적 성숙도를 따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기업에 경제적 위기가 오면 왜 기업은 구조조정을 하고 회사재정에 따라 임금을 삭감하여 나누질 않나. 경제위기 이후에 꼭 나오는 일자리정책으로 조정된 직원 대신 소수의 계약직을 모집할 거면서 말이다. 결론적으로 일자리는 줄여지고 비율적으로 계약직은 늘려가는 시스템은 의도적인 것인가. 그렇다면 정경제의 유착된, 그래서 이미 예견되어 그들만이 알고 있는, 혹은 계획된 경제랠리가 아닌가.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시장이 회복되고 개인의 경제가 실제로 회생하리라고 믿는 것은 사이비종교나 상상임신과 같은 상상회복 쯤으로 느껴진다. 가난은 돈을 줌으로써 극복되리라는 것은 임기응변에 불가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지속적으로 경제적 계급이 세습된다면 지속적으로 국가는 국민 혹은 극빈국가에 현금을 지급할 수 있는가.(그나마 지급한다면 말이다) 국가간의 경제적 경계를 허무는 것은 정계가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운동이었고 현금을 지급하든 말라리아사망을 줄이기 위해 모기장과 예방주사를 지급하든 이 또한 시민운동이 앞장선다. 과연 국가라는 경계는 서로의 서열가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을 그 안의 시민들이 동의한 것인가. 과연 우리는 국가라는 경계 안에서 안정감과 소속감을 얻기 때문에 국가라는 개념이 희박해지면 불안해지고 우리의 안전이 늘 불안해질까. 미국 은행권의 파산 등으로 인한 경제위기는, 세계경제가 아니라 중 강대국가들의 자본주의 위기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항상 가난해서 생명의 위협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빈부의 격차가 있을 뿐 자본의 유통이 적었으니 위기라고 표현하기도 모호하다. 이렇게 보면 결코 정치와 경제가 떨어질 수 없고 국가경제성장에 초점을 맞춘 정책과 자본주의는 위기의 랠리를 되풀이하고 국가간의 경제적 격차를 키울 뿐이라는 생각에 다다른다. 신자유주의 부흥과 붕괴의 랠리를 보면, 자본으로 다시금 거품금융으로 그리고 위기로, 그리고 다시 신자유주의 자본국가로서의 제로상태(이건 과연 긍정적일지 의문이다)로 복귀시키려는 국가 자본 유입의 반복이다. 거품으로 인한 성장이라는 그럴싸한 단계가 달콤하지만 결국에는 붕괴와 위기를 겪고 다시 국가의 은행으로의 자본지원을 반복할 여지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반복을 그저 겪어야만 하는 것일까. 이쯤되면 신자유주의의 정상상태로 복귀하거나 더 나은 자본주의를 기대하기보다는 캘리니코스의 말대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생각해봐야 할 때가 아닐까. 캘리니코스의 자본주의에서의 경기회복의 딜레마 편을 보면 자본과잉과 정부개입, 그리고 자본주의 내에서의 정상상태 회복의 랠리는 더디고 더딘 느린 랠리이다. 이 랠리에서는 안정까지 쉽지도 않고 자본과잉으로 가는 경제회복(이라고 느낌을 주는) 상태까지가 느리고 또한 반복으로 가는 길일 뿐이기 때문에 앞으로의 자본주의내의 거의 모든 세대가 한번씩은 겪어야 할 랠리로 보인다. 우리는 이 또한 세습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선거철마다 보아야 하는 정치인들의 연설 내용에는 경제회복과 관련된 정책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경험에서 우리는 캘리니코스가 말하는 국가의 개념과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의 어쩔 수 없는 정경유착에 대해 공감하게 된다. 캘리니코스는 ‘국가관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내의 자본축적을 고무할 강력한 동기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국가가 자본주의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관료들이 ‘자본의 이익에 봉사해야 한다는 강한 압력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짧은 임기 안의 관료들, 그것도 자본주의 안에서의 관료에게서는 이 랠리만 거듭될 뿐인 자본주의 경제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않을까. 캘리니코스의 경제대안이론은 내가 본 경제이론가들의 의견 중 가장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생각된다. 전 국민 기본소득제를 도입하자는 저자의 의견에서 공간되는 부분은 현재의 자금투여라는 정책이 아니라 분배를 택한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물론 그의 말대로 반자본주의의 정치적 입지가 매우 취약하다는 점에서 굉장히 어렵고 지지부진한 과정을 거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지금의 자본주의가 무조건적 반공의식 때문에 정책적 딜레마에 빠져 있다면 마르크스주의적 경제대안은 현대에, 가장 많은 시민들을 위한 적절한 대안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는 반자본주의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의미에서 현 정책전문가들의 담론이 크게 형성되어야 할 것이며 어쩌면 세계에서 특정 국가의 헤게모니를 무너뜨리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속한 국가의 경제적 입지는 나의 경제적 입지와 동일하게 느껴지는가. 이는 실제로 경제적 이권을 가진 1%에게 실감을 줄 것이며, 오직 경제랠리의 하강선과 최하점에서 그 피해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그 이하의 시민들이다. 경기회복은 결국엔 다음 하강을 위한 상상회복을 주입시키는 것이다. 대다수의 시민에게 국가의 경제적 위치의 중요성을 주입시키고 국가 경제 성장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은 정치경제계의 헤게모니를 유지를 위한 언론 플레이의 결과이며 이는 지금의 출산장려 정책들의 모습에게서도 발견된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무너지는 환상’을 읽는 것은 현 경제에 대한 실시간담론을 살펴보는 데 가장 큰 의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와 더불어 중도적인 대안보다는 자본주의에 대한 체제비판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제시하는 대안경제연구라는 데에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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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는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라고 말한다. “오늘날의 경제위기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의 주된 과제는 금융폭락의 책임을 세계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일탈, 즉 느슨한 규제와 거대 금융기관들의 부패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따라서 정말 위험한 때는 금융폭락을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견해가 우리를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계속 꿈을 꾸게 만드는 경우다.” 탐욕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는 그런 탐욕이 가능했던 시스템이 문제였다는 말이다. 이야기는 금융화에서부터 시작된다. “고완은 경제위기의 책임을 그가 ‘새로운 월스트리트 체제’라 부른 것 즉 지난 25년 동안 성장했고 투자은행들과 헤지펀드나 사모펀드 같은 ‘그림자 금융’이 지배하는 체제 탓으로 돌렸다.” 새로운 월스트리트 체제란 금융화란 말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의 성장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금융화라는 훨씬 더 광범위한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이 금융화라는 생각은 지난 몇십년 동안 급진좌파에게 널리 받아들여졌고 지금은 주류경제학계로 번지고 있다. 그러나 금융화란 무엇인가?” 저자는 금융화의 뜻을 세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금융자본이 경제를 지배하는 것이다. 19세기 영국이 그랬고 미국에서 J P 모건이 그랬듯이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의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다. 힐퍼딩의 금융자본론이 고전적인 논의인데 경제사에선 그런 금융자본을High finanace라 부른다. 고등금융의 시대는 대공황과 함께 끝났다. 그러나 ‘자본의 역습’에서 뒤메닐과 레비는 “신자유주의를 ‘금융 헤게모니의 복원’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금융경제학에서 지적하듯이 60년대 이후 기업자금수요의 탈중개화는 은행을 무력화시켰다. 새로운 월스트리트 시스템이라 부를 실체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19세기와 같은 형태는 아니다. 저자는 다른 정의가 보완되어야 말한다. 둘째는 “금융 자체의 자율성이다. 요컨데 금융화는 은행이 산업,상업자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금융부문의 자율성이 증대되는 것이다. 산업자본과 상업자본은 공개금융시장에서 차입할 수 있게 되고 그 과정에서 금융거래에 더 깊숙이 관여하게 된다. 한편 금융기관들은 수익성의 새로운 원천을 개인소득과 금융시장 중개에서 찾았다.” 탈중개화의 정의와 상당부분 겹친다. 기업이 직접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고 주식을 팔며 자동차산업처럼 할부회사를 운영하고 은행이 아닌 AMEX가 카드사업을 통해 은행처럼 영업하는 것, 그리고 기업고객을 잃은 은행이 소비자금융에 뛰어든 것 등등 금융시장의 범위와 규모가 확대되었고 양적팽창은 질적변화를 가져와 금융시장 자체의 동학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이번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보았던 파생상품의 경우가 그런 예이다. 여기서 세번째 의미가 파생된다. 셋째는 “더 다양한 주체들이 금융시장에 통합되는 과정”이다. “진짜 은행뿐 아니라 그림자 금융이라는 지하세계의 주민들, 산업,상업자본가들 그리고 노동계급 가정들도 통합되는 과정말이다. 다시 말해 금융시장이라는 경제구조와 금융기관이라는 특수한 경제주체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 자본주의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산업기업과 상업기업이 금융시장에서 예컨대 채권과 CD를 발행해 직접 자금을 조달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모기지, 신용카드 등을 통해 개별 소비자들에게 신용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금융은 모든 경제주체를 금융의 그물망 속으로 엮어 넣는다.” 저자가 말하는 금융화는 그러므로 “금융부문의 자율성 확대, 금융기관과 금융상품의 증대, 다양한 경제주체의 금융시장 진입을 뜻한다.” 저자는 파생상품이 금융화의 성격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준다고 말한다. “딕 브라이언과 마이클 래퍼티는 이렇게 썼다. ‘파생상품의 핵심적, 보편적 특징은 모든 자산을 ‘해체’하고 ‘분해’해서 그 구성요소들로 쪼개고 자산 자체를 거해하지 않으면서도 그 구성요소를 거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파생상품은 자본의 한 형태를 다른 형태로 전환해 만든 패키지 상품이다. 이 모든 상품들을 다 합치면 전환상품들의 복합체가 형성된다. 그러면 어느 곳에 있는 어느 시간대의 어떤 자본 ‘조각’도 다른 자본 조각과 비교, 평가할 수 있게 된다.’ 메타자본의 성격 때문에 파생상품은 1971년 미국이 금환본위제를 포기한 이후 국제통화제도에 존재하지 않았던 고정장치 구실을 할 수 있었다. ‘파생상품은 모든 형태의 자본(화폐와 상품)을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서로 비교할 수 있게 해주고 그래서 서로 다른 화폐 형태의 차이나 상품과 화폐의 차이를 없애 버린다.’ 금융시장 자체의 작동으로 생겨난 파생상품은 ‘고정장치의 네트웤’을 제공해 ‘개벌자본들이 금융불안정에 노출되는 위험을 관리하고 마치 안정돼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금융시스템 속에서 활동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는 그 시스템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금융시스템의 불안정성은 어디서 오는가이다. 케인즈와 민스키는 자본주의 자체의 불안정성 때문이라 말한다. “케인스의 야성적 충동은 자본주의에 내재된 불안정성을 설명하는 고전파 경제학과는 다른 시각의 핵심용어이다. 케인스는 대부부의 경제활동이 합리적 경제적 동기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야성적 충동’의 영향을 상당히 받는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케인스의 시각에 따르면 이 야성적 충동은 경기 순환과 비자발적 실업의 주된 요인이다.” (조지 애커로프, 로버트 쉴러) 저자는 야성적 충동을 케인스가 자본축적 자체에 대해 말한 것으로 해석한다. “케인스와 민스키도 자본축적이 현대자본주의 경제의 핵심특징이라 봤다. 축적이라는 것은 상당한 생산적 자원을 수익성 있는 듯한 사업에 비교적 오랫동안 묻어둔다는 뜻이다. 이것은 미래를 놓고 내기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주류경제학이 말하듯이 그것은 합리적인 동기가 아니라 야성적 충동이라 봐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리스크가 아니라 불확실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투자란 근본적으로 계산할 수 없다. 민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불확실성은 미래를 오늘 다룰 때 나타나는 문제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경제단위들은 과거에 내린 결정의 흔히 뜻밖의 결과에 그럭저럭 대처하고 대응한다. 불확실성의 구체적 표현 하나는 물려받은 자본자산, 금융자산, 새로 형성된 자본자산에 대한 차입투자의행, 즉 빚을 내서라도 투자하겠다는 태도다.” “민스키가 보기에 불확실성으로 말미암은 ‘불안정성은 자본주의의 고유하고 불가피한 결함’이고 자본주의의 불확실성은 핵심적으로 기업이 투자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취약해지는데서 비롯한다.” 민스키는 그 취약성에 따라 자금조달형태를 헤지금융, 투기적금융, 폰지금융으로 나누고 경기순환을 투자의 자신감의 수준이 세가지를 따라 오르내리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민스키는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이라는 문제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모호하다. 이점이 민스키와 케인스의 공통점이다.” 저자는 맑스의 위기론으로 넘어간다. 맑스의 위기론은 이윤율 저하경향이다. “맑스는 이윤율 저하가 경향일 뿐이라고 장조했다. 맑스가 보기에 경제위기는 자본주의의 최종붕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체제에 유용한 에피소드라는 것이다. 실업이 늘면 착취율을 높이기가 쉬워지고 파산으로 자본이 파괴되면 살아남는 기업들은 수익성 있는 사업 기회를 얻을 수 잇다. 따라서 경제위기는 이윤율이 다시 높아지고 경제성장이 재개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서 다시 저자는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설명하기 위해 데이비드 하비로 넘어간다. “그는 자본론을 비판적으로 독해해서 생산의 동역학과 금융현상의 관계를 더 통합적으로 파악하는 위기론 ‘버전2’를 발전시키려 한다. ‘언뜻 보면 신용제도는 적어도 생산과 소비,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 현재의 사용과 미래의 노동, 생산과 분배 사이의 적대관계를 연결해주는 잠재력이 있다. 또 자본가의 개인적 이해관계와 계급적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그래서 위기의 요인들을 억제하는 수단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용의 사용은 흔히 장기적으로는 사태를 더 악화하는데 교환에서 일어나는 문제들만 대처할 수 있을 뿐 생산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용이 생산자들에게 잘못된 가격신호를 보내 불균형과 과잉축적경향을 악화할 수 있는 온작 상황이 존재한다.’” 하비가 여기서 염두에 두는 것은 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비는 금융은 생산의 문제를 증폭할 뿐이라는 관점이다. 그러면 생산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문제는 이윤율저하경향이다. “1949~1973년의 시기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예외적인 시기이다. 심각한 불황이 이 성장국면을 중단시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결정적 요인은 마이크 키드런이 상시군비경제라고 부른 것이다. 즉 1950년대와 1960년대 냉전의 절정기에 미국과 소련이 모두 매우 높은 수준의 군비지출을 유지한 것 때문에 자본의 유기적 구성상승 경향이 상쇄됐고 그래서 1960년대말 닉슨 정부가 군비지출을 삭감할 때까지 이윤율이 높게 유지됐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1973년 이후 세계경제의 혼돈은 단순한 경기순환의 부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목격한 것은 자본이 과잉축적과 수익성의 근본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음을 반영하는 경제적, 금융적 불안정성의 고질적 패턴이아. 그런 위기를 해결하려면 착취율도 높여야 하고(노동자들이 임금삭감, 노동시간 연장, 노동조건 악화를 받아들이게 만들어서) 굳이 자본을 물리적으로 파괴하지 않더라도 그 화폐가치를 저하시켜 수익성이 낮은 자본을 제거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과정의 결과로 이윤의 양은 늘어나고 자본의 양은 감소해 결국 이윤율이 높아질 것이다. 이것은 자본의 상당한 구조조정과 재편을 함의한다. 신자유주의가 그런 구조조정이 일어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틀이다. 그러나 이윤율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여기서 저자는 뒤메닐과 레비에게 반대한다. 그 이유는 과잉축적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화는 과잉축적을 해결하려는 방편이었다. “하비는 이 문제를 위기론 버전3에서 다루는데 어떻게 자본이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서 공간적 조정으로 위기를 극복하려하는지”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임시방편일뿐이다.” 공간적 조정은 결국 자본의 총량을 늘려 과잉축적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1997년은 세계경제의 전환점이었다. 미국의 수익성 회복은 절정에 달했다가 그 후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미국의 산업, 상업기업들이 느낀 압력을 더 세게 만든 것은 1995년 이후 다른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상승이었다. 이 때문에 외국 경쟁업체들보다 미국기업들의 경쟁력이 약해졌다. 미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이런 하향압력은 미래의 성장을 제약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특히 미국자본주의를 관리하는 자들은 이윤율이 오르고 있던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말까지의 시기보다 더 취약한 토대 위에서 경제가 계속 성장하도록 애를 써야 햇다. 신자유주의 정책레짐은 국가가 거시경제관리를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 대책을 브레너는 ‘주식시장 케인즈주의’라 부른다. “미국경제와 세계경제를 심각한 불황의 늪에서 건져내기 위해 연준은 지속적 주가상승을 통해 미국국내소비와 투자의 증가를 가속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닷컴버블이 터졌을 때 연준은 그 거품을 주식시장에서 주택시장으로 옮겨놓았다. “신용거품은 미국경제(그리고 미국경제가 세계수요을 유지하는데 핵심구실을 햇으므로 세계경제도) 계속 성장하게 하려는 노력이엇다 비록 19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수익성과 과잉축적의 만성적 위기를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다시 거품은 공공부문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해결되지 않는다. “시장에서 비효율적인 자본들이 일소되도록 자유방임한다면 그 결과는 장기불황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나서서 자본의 대대적 가치저하를 막는다면 과잉축적과 수익성의 장기적 위기가 지속될 것이다. 2000년대 말의 경제,금융위기는 통제를 벗어난 금융시스템의 돌발사고도 아니고 우연한 결과도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자본주의가 수십년동안 해결하지 못하고 낑낑댄 근본적 모순이 여지없이 드러난 순간이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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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대로 이 노려한 맑시스트는 08년 경제 위기의 근원으로 신자유주의를
대상으로 삼아서 집중 포격을 시작한다. 경제위기는 경제 우선주의에 대한 정치 우위의 회복으로 해석한다. [그 과정에서 경제 관계는 다시 탈자연화했다. 자동조종장치는 꺼졌고, 정치가 세계경제를 조종했다.] 이제 기존의 모순 관계를 축적하여
폭발한 세계 경제에 대한 분석 방법으로 마르크스 정치 경제학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의 가장 중요한 통찰은
그 자신이 말했듯이 자본을 사회적 관계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더 정식화해서 말하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적대적 사회관계 두가지, 즉 자본과 임금 노동의
관계와 자본들 간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전자는 착취 관계다. 노동은
새로운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가치를 새로 창출하고, 따라서 이윤의 원천이다. 자본은 생산과정을 통제하는 덕분에 이 잉여가치를 전유할 수 있다. 이
모순은 자본으로 하여금 잉여노동 전유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두가지 모순 중에 더 근본적이지만,
두번째 모순이 없다면 이 모순은 불완전하다. 두번째 모순이 없는 자본은 추상일뿐이다. 즉, 실제로 존재하는 자본은 서로 경쟁하는 개별 자본들이다. 그래서 각각의 자본은 그들이 함께 노동자들에게서 뽑아낸 잉여가치중에서 더 많은 몫을 차지하려고 서로 경쟁한다. 이런 경쟁 압력 때문에 자본들은 일정한 수준의 착취를 할 수밖에 없고, 또
잉여가치를 축적하고 생산설비를 확장 개선하는 데 재투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쟁적
축적 과정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경제 위기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이것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고유한 경향이고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제한적 일시적 체제일 뿐임을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증거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의 속성은 과거 다른 체제가 가졌던 한계의 일부를 개선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인간 체제의 성향 – 어느 한 계층의 성장을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해야 하는 구조-을
극복하지 못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그 대안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일단 이 책에서 언급하는 2008년 경제 위기 상황을 반영해서 앞서 언급한 문제를 살펴
보면, 전 세계 금융화의 과정에서 금융은 스스로의 금융화를 하면서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저소득층에 신용을
상품화하고 과대 등급을 부여하여 그들의 능력 이상의 대출을 별다른 규제 없이 제공했고 그것을 통해서 상당한 수익을 봤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운영방식은 파국이 올 수 밖에 없는 뻔한 드라마지만, 그
드라마 작가, 연출자 심지어 거기 출연한 엑스트라마저도 그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와중에 (불교식으로 말하면) 무한
지옥은 더 확장했고, 서로가 거기에 빠지지 않으려 주변 사람을 잡고 같이 죽자는 식의 아귀 다툼이 국가단위에서
전세계로 확장되었다. [금융은 모든 경제 주체를 금융의 그물망 속으로 엮어 놓는다] 그 신용확대의 기폭재는 파생상품으로 알려진 금융상품이다. 파생상품은
현물 뿐 아니라 미래의 선물에 대해서, 상품 전체가 아닌 해체된 일부 부분에 대해서도 자본주의하에서
상품화되어 거래되는 전형적인 상품으로 등장하였다. [다양한 종류의 특수한 자본을 결합하고 혼합하는 독특한
구실을 하는 메타 자본의 성격 때문에 파생 상품은 1971년 미국이 금환본위제를 포기한 이후 국제 통화제도에
존재하지 않았던 고정 장치 구실을 할 수 있었다. 파생상품은 모든 형태의 자본을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서로 비교할 수 있게 해주고, 그래서 서로 다른 화폐 형태의 차이나 상품과 화폐의 차이를 사실상
없애 버린다. 금융 시장 자체의 작동으로 생겨난 파생상품은 고정 장치의 네트워크를 제공해서 개별 자본들이
금융 불안정에 노출되는 위험을 관리하고 마치 안정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 금융 시스템속에서 활동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파생 상품을 사소한 현상으로 치부해서는 안된다…그러나 파생상품의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세계 금융 시스템은 안정적이지 않았다.] 흔히 이윤율 저하라 표현되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시각은 현재의 금융 시장 불안정과 결합하여 분석될 수
있다. [마르크스는 가치를 근본적으로 화폐 관계로 보았다 화폐는 보편적 등가물, 즉 모든 상품의 가치를 표시하는 기능을 하고 그래서 서로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상품이다. 이 덕분에 화폐는 다른 기능들, 예컨대 가치척도, 교환 수단. 지급 수단의 기능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은 화폐 형태, 즉 이자 낳는 자본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에 이른다. 생산이라는 매개가 없는 자본 증식 드라이브 자체로 보이기 때문이다.] 금융의
발전이 자본축적 과정에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 역할은 잠정적일 뿐 오히려 더 빨리 악화시키는 촉매 역할을 한다[자본주의적 생산의 대립적 성격에 바탕을 둔 자본의 가치 증식은 현실적인 자유로운 발전을 오직 일정한 지점까지만
허용하고 그래서 사실상 생산의 내재적 속박과 한계로 작용하는데, 이 속박과 한계는 끊임없이 신용 제도에
의해 파괴된다. 따라서 신용 제도는 생산력의 물질적 발전과…세계시장의
창출을…촉진한다, 그와 동시에 신용은 이 모순의 격렬한 폭발, 즉 공황을 촉진하는 데, 그럼으로써 낡은 생산양식을 해체하는 요소들을
촉진한다.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가장 큰 특징은 가치의 근원이 노동력에 근거하므로 화폐나 금융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생산하는
능력을 갖지 못하고 오로지 노동력을 자본과 교환하는 거래 기능만을 제공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결국 화폐는
교환기능만을 할 뿐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신용 창출 기능은 무의미해진다. [신용의 사용은 흔히 장기적으로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데, 교환에서 일어나는 문제들만 대처할 수 있을 뿐 생산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결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용이 생산자들에게 잘못된 가격 신호를 보내서 불균형과 과잉 축적
경향을 악화시킬 수 있는 온갖 상황이 존재한다.] [신용창조를 통해 축적을 지속할 필요와 화폐의 특성을
보존할 필요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한다. 전자가 방해받으면 결국 상품의 과잉 축적과 가치 저하가 일어날
것이다. 화폐의 특성이 훼손되도록 방치하면 전반적 가치 저하가 일어날 것이다. 여기서 현대 사회의 딜레마가 여실히 드러난다.]
저자에 따르면 2008년의 금융 위기는 단순히 금융시장이라는 특정
영역의 기능 이상이 아니라 자본주의하에서 자본 축적 과정에서의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전제를 하고 있다.[현재의 위기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려면 다음과 같은 차원을 구분해야 한다. (1) 장기적인 과잉 축적과 수익성의 위기 (2) 만성적으로 불안정하고
구조적으로 불균형한 세계 금융 시스템 (3) 경제 성장을 지속하기 위한 신용 거품 의존 증대 자본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이윤을 증대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의기원도 여기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위기를 해결하려면 착취율도 높여야 하고, 굳이 자본을 물리적으로 파괴하지 않더라도 그 화폐가치를 저하시켜서 수익성이 낮은 자본을 제거하기도 해야 한다. 이런 과정의 결과로 이윤의 양은 늘어나고 자본의 양은 감소해서 이윤율이 높아질 것이다. 이것은 자본의 상당한 구조조정과 재편을 함의한다. 대체로 신자유주의가
그런 구조조정이 일어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틀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금융위기에 대한 저자의 시각도 앞서 논의의 연장선상이다.
[1995년에 클린턴정부가 다른 주요 통화 대비 달러화 평가 절상을 용인하기로 한 결정의 원래 의도는 엔화 환율 하락을 촉진해서 일본의
수출을 부양하고 그래서 일본 경제를 되살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달러화 대비 엔화 환율 하락으로 동아시아의
더 작은 나라 경제들이 희생되었는데, 이 나라들은 자국 통화를 달러화에 고정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값싼
일본산 수출품과 가격경쟁에서 밀렸던 것이다. 이것이 1997~98년
동아시아 경제위기의 근저에 깔린 결정적 원인이었다. 이 나라들의 경제 상황 악화를 감지한 투자자들이
대거 자본을 철수한 것이 경제 위기를 재촉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동아시아 국가들은 환율
관리에 치중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동아시아 국가)은 미국 달러화 대비 자국 환율이 급상승하지 않게 해서 자국 수출품의 가격을 낮게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환율 관리 정책을 추진했다. 이 정책의 한가지 결과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자국 환율 인상을 막으려고 외환을
사들여서, 새천년이 시작된 이후 막대한 외환 보유고를 쌓았다는 것이다…아시아
전체의 외환 보유고는 3조 3천억 달러로, 세계 전체의 5분의 3에
달했다. 이 돈은 대부분 다시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를 매우는데 쓰였다…개도국들은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의 통화에 자국 통화를 고정 시켜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고, 그렇게 번 달러를 다시
미국에 빌려 줘서 미국이 개발도상국들의 수출품을 계속 구매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얻은 이득은 훨씬 더 컸다…따라서 외국인 소유의 주목할만한 특징은 수익률이 낮은 자산에 투자된
비중이 높다는 것이다.] 좀더 연장해서 보면 다음과 같다.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가 무한정
지속될 수 있다는 주장의 가장 강력한 논거는 미국인들이 순진한 사람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요령있는 투자자들이라는 것이다. 사실, 미국은 거대한 헤지펀드나 다름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미국은 계속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었다] 결국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현재 지구를 운영하는 방식이라고 하지만 사실 자본주의의 위에 미국이 군림하는 입장에서 자본주의 게임의 법칙은 시장에서 나오기보다는
미국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극단적 결론도 낼 수 있는 상황 분석이다. 하지만 그 헤게모니가 영구적일까? 누군가는 그러기를 바라지만 권불십년이라는 말처럼, 그리고 시드니
셀던의 책 제목처럼, 영원한 것은 없다. [미국이 금 태환이
되지 않는 달러를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이용해서 만성적 국제수지 적자를 메우는 상황은 비트겐슈타인이 오리-토끼라고
부른 것과 비슷하다. 어찌 보면, 미국의 헤게모니가 지속되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 같고, 또 어찌 보면 이 헤게모니가 이제는 얼마나 위태로워졌는지를 보여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영국이 19세기 말 자본 유출을 통해 유럽과
일본 자본주의를 재건할 재원을 마련한 것과 달리 오늘날 미국은 세계 최빈국 축에 드는 나라에서 유입되는 자금에 의존해야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한 세대 동안 달러-월스트리트 체제는 잘 돌아갔다. 적어도 그 체제를 구축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는 그랬다. 그 체제는 세계화한 금융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틀을 제공했다. 미국
자체의 새로운 경제성장 패턴은 1980년대 초 불황에서 회복되던 시기에 형성되었다. 이를 촉진한 것은 구니 지출의 대폭 중가와 산업 상업 자본의 광범한 구조조정,
주가 폭등, 인수 합병열풍이었다. 당시 개발된
많은 기법은 2000년대 신용 호황기에 훨씬 더 대규모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인수 합병 대상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거액을 빌려서 그 기업 사냥에 나서는 차입
매수는 근본적으로 도박이나 다름없는데, 인수한 기업을 분해해서 일부 자산을 매각하고 나머지 자산을 가차없이
쥐어짜서 뽑아낸 많은 이윤으로 처음에 빌린 돈을 갚고 투자자들에게 수익도 돌려주는 수법이다.] 금융화는 자본에서 자기의 지위를 강화하는데 유효하고 강력한 무기이다. [확실히
금융화 과정은 노동에서 자본으로 소득이 이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래서 브라이언과 래퍼티는 금융
파생상품이 모든 형태의 자본을 서로 비교할 수 있게 만들어서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강도 강화를 촉진했다고 주장한다. 세계 수준에서 자본을 서로 비교할 수 있으려면 각국의 노동이 경쟁력있는 임금률과 생산성으로 자본에게 국제경쟁력있는
수익률을 보장해 줘야 한다. 노동을 가차없이 압박하는 다양한 방식이 조세 복지 제도 변화와 맞물려서,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부와 소득이 가난한 사람한들테서 부자에게로 크게 이전되는 재분배 효과가 나타났다. 이런 재분배의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계급 구조의 상층에 있는 자들이 가져가는 소득의 일부가 자산 수익 형태가
아니라 고위 임원직 봉급 형태였다는 것이다. 모훈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생산적 노동에서 뽑아내는 잉여가치가 늘어난 것은 1979년 이후
미국 경제의 뚜렷한 특징이었는데, 그 잉여가치는 기업 이윤으로 전유되지 않고 주로 관리직 노동자들의
노동 소득으로 전유됐다.] 신자유주의는 과거 시장 중심의 고전주의를 승계한 면도 있지만 100% 같은 DNA를 갖는 유전적 동일 구조의 적자는 아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레짐은 단지 고전적 자유주의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거시경제 관리의 목표, 수단, 주요 집행기관은 모두 바뀌었다. 수단은 금리규제와 신용 창조에 의존하는 통화정책이었다.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이 이끄는 신노동당은 적극적 재정정책을 거부하는 정책전환의 상징이었다.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집행하는 핵심 기관은 중앙은행이었다. 그래서 중앙은행의 금리 결정권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와
공고해졌다. 이런 제도적 변화 그리고 중앙은행이 관리해야 할 물가 상승률 목표치를 정부가 정해 주는
경향은 어느 정도는 통화주의적 영웅적 시기였던 1980년대에 제도적으로 통화 공급을 조절하는 데 실패한
결과였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러트워크가 중앙은행주의라고 부른 것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딱
맞아 떨어졌고, 특히 유권자 대중에게 책임지는 정치인들한테 경제 관리를 맡겨 두면 인플레이션과 지속
불가능한 정책은 필연적이라는 생각과 딱 맞아 떨어졌다. 제도적으로 자본주의적 미누주주의의 정상적 압력을
받지 않는 중앙은행이 재량껏 정책 기술들을 동원해서 물가 상승률을 낮게 유지하고 경제가 올바른 길로 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축적된 이익이 투자되지 않고 기업내에 유보가 지속되는 현상은 이미 선진국에서는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저축 과잉의 핵심적 차원 하나는 선진 경제의 자본가들잉 2000년대에 임금 억제로 이윤을 늘렸지만 이 이윤을 생산 확장에 투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버냉키와 울프가 강조한 저축과 투자의 간극은 주로 세계경제의 지역별 차이에서 비롯한 것으로 봐서는 안되고, 지역과 국경을 뛰어넘는 적대적 계급 이익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자료들을
보면 자본가들은 잉여가치율, 즉 임금 대비 이윤의 양을 늘리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대규모로 투자할 확신이 드는 수준까지 이윤율 즉 총투자 대비 이윤의 양을 늘리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이런 설명이 옳다면 우리는 신용 거품을 미국 경제가 계속 성장하게 하려는 노력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1960년대까지 거슬로 올라가는
수익성과 과잉축적의 만성적 위기를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이런 근저의 약점에 비춰보면 세계 경제
금융 위기는 언젠가는 일어날 사고였던 셈이다. 그 사고를 재촉한 것은
2004년 6월 연준이 경제를 약간 진정시키려는 의도에서 시작한 일련의 금리 인상 조치였다. 그 결과 서브프라임 차입자들이 압박을 받게 되었고, 2006년 봄부터
주택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헤게모니 유지를 위한 미국의 나토 영역 확대는 시기적으로는 패착이었던 듯 싶다.
[어떤 경우라도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로 나토 영역을 확대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미국과 러시아 간의 상대적 힘의 균형이 달라진 2008년에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루지야와의 한판 승부에서 러시아는 세가지 결정적 이점에 기댈
수 있었다. 첫째, 러시아는 해당 지역에서 압도적 군사력
우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둘째, 미국이 어떤 식으로든 군사적
대응을 했다가는 전면전이 벌어졌을 텐데, 부시와 그의 호전적 부통령인 딕 체니조차 그루지야 때문에 러시아와
핵전쟁을 불사할 마음은 없었을 것어다…셋째, 푸틴과 메드베데프는
럼즈펠드가 낡은 유럽과 새로운 유럽 운운하기 오래 전부터 미국이 서유럽과 아시아에서 능수능란하게 구사해 온 분열 지배 전략을 똑같이 구사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에 대해 폴라니는 어떤 주기성으로 이에 대한 언급을 했다.
[폴라니에 따르면, 고전적 자유주의 시장 경제는 경제 관계를 사회적 맥락에서 강제로 분리함으로써
등장하는데, 이렇게 경제와 사회가 분리된 상테는 장기적으로 지속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나게 되고, 그 결과 사회보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반작용이 일어난다고 한다. 존
러기도 마찬가지로 제2차세계대전 직후에 서구의 정책 입안자들이 착근된 자유주의 절충을 제도화했다고 주장한다. 이때의 절충된 자유주의는 1930년대의 경제적 민족주의와 달리 다자주의
성격을 띠며, 이때의 다자주의는 금본위제와 자유무역으로 표현했던 자유주의에서와 달리 국내에서의 개입주의를
전제로 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보면 신자유주의는 시장을 사회관계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한 고전적 자유주의로
회귀하는 운동이었고, 그것이 지금은 다시 반작용을 불러일으켜서 착근된 자유주의로 회귀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국가 자체가 자본주의 경제 관계에 착근되었다는 전제는 무엇일까? [오늘날의 국가가 자본주의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국가 관료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내의 자본축적을 고무할 강력한 동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 도피라는 형태로 보복을
당할 공산이 크며, 그렇게 되면 환율과 경제 성장에도 악영향을 받게 된다. 즉, 국가 관료들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자신들이 처한 상황
때문에 자본의 이익에 봉사해야 한다는 강한 압력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의
위기를 방지할 방법을 논하고자 한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훨씬 더 많이 해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논리 자체를 각별히 노골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형태로 드러내 보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달리
말해,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단지 특정한 정책 레짐의 실패나 그것이 지향했던 특정 형태의 자본주의의
실패가 아니다…2007~09년에 재앙을 몰고 오나 금융 부문의 과잉 팽창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를 괴롭혀
온 훨씬 더 뿌리 깊고 오래된 우기, 즉 과잉축적 위기와 이윤율 저하위기가 다른 형태로 전이된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번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위기다.] 돌아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말한다면, 시장의 비민주성이다. [시장경제는 결코 민주적으로 조직될 수 없다. 우선 시장경제의 정의상 경제 전체 수준에서 민주적으로 조직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시장 경제에서는 민주적으로든 아니든 간에 자원 배분이 집단적으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별
기업들이 내부의 민주주의를 유지하기도 어렵다…앨버트는 노동자들이 통제하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기업의 ㅈ
ㅔ품이 잘 팔리지 않을 경우를 상상해보라고 한다. 이럴때 노동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안의 하나는,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책에서 설명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대안은 바로 민주주의 성격이다. [자본주의를
대체할 진정 지속 가능한 대안이라면 시장이 아닌 민주적 계획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적으로 계획되는
경제에서는 경제 전반의 우선순위에 관한 민주적 의사 결정의 결과로 자원 분배가 이뤄질 것이다. 이 시스템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할지에 관해서는 몇가지 모델이 있다. 그중 하나는 앨버트의 파레콘(참여 경제) 모델이다. 파레콘에서는
개인들과 기업들이 노동자 소비자 평의회에서 각자 일정량의 자원을 자기몫으로 주장한다. 그러면 이들 사이에서
점진적 타협과 조정이 일어난다. 그러는 동안 기술 전문가들은 모든 이들에게 돌아갈 몫을 최대한 키울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한다] 그리고 기본소득제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한나라의
모든 주민에게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잇는 비교적 적지만 충분한 소득을 권리로서 보장하는 것이다.] [더
넓게 보면 권력의 문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내가 지금껏 제시한 비전과 관련해서 한가지 문제는 자본주의
이 후의 사회가 민주적 계획경제로 발전하기 보다 시장 자본주의로 회귀하거나 소련에서 등장했던 것과 같은 국가자본주의로 전락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확실한 방법은 노동자들과 빈민들이 스스로 정치권력을
쥐고 있는 것뿐이다. 국가가 현재의 형태를 띠고 있는 한 어떠한 사회진보도 일시적이고 위태로울 것이다…우리가 민주적 계획경제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현존하는 국가와 정면 대결해서 그것을 파괴해야만 한다.] 자본을 타도하는 것 자체도 하나의 과정이다. 앨버트가 상상한, 시장경제에서 노동자 협동조합이 직면하게 될 딜레마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의 성과를 후퇴시키고 결국 파멸시킨 것도 그러한 딜레마였다.
한 곳에서 열린 돌파구는 전 세계로 확산되지 않으면, 그래서 세계적 수준에서 자본의 논리를
전복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자본의 세계화는 저항의 세계화도 낳았다. 세계 각지의 투쟁은 서로 저항의 바이러스를 전파한다. 치아파스 봉기와
시애틀 시위는 전 세계에 공명을 일으켰다…물론 우리는 아직 단 한나라에서도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못했고
거기까지 도달하려면 갈 길이 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