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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형태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아니 연인들의 사랑에는 어떤 형태가 있을까?
열두 살 소년 프란츠와 스무 살의 클라라가 보여주는 사랑은 서로를 채워주는 사랑이다.
클라라 뉴먼
그리고 그런 그녀 앞에 갑자기 나타난 소년 프란츠. 클라라는 자기만의 시간과 장소에 느닷없이 끼어든 이 침입자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지만, 아이와 어른의 모호한 경계선에 서있는 듯한 신비스럼움에 이내 호감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헤어진다. 그리고 십년 후 보스톤에서 재회한다. 클라라는 자신을 찾아온 프란츠를 첫눈에 알아본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녀는 자신의 연주를 듣기위해 프란츠가 공연장에 와 있음을 공기의 파동으로 느낀다. 다시만난 그들은 서로의 감정이 순간이 아니었음을...연인이자 늘 목말라 했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관계였음을 비로서 깨닫는다. 이야기는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단지 '사랑이라는 감정'이 서로를 어떻게 위로하고 채워주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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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이었다. 하지만 강렬했다. 소설은 사랑의 순간을, 그 떨림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아울러 사랑의 두려움을, 그럼에도 그리워하고 계속 기다리는 그 아찔한 감정을 붓 터치 하듯 멋지게 묘사하고 있다. 소설이 말하는 것들은 소설 속이 것들이지만, 여러 가지로 공감이 됐다.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려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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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어린 왕자'와 '노인과 바다'처럼 짧지만 강한 여운을 주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1936년 프랑스 출생으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1960년 알제리 전쟁에 참여했으며, 그 때 얻은 우울증으로 고생하다 회복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방송 진행자, 방송국 사장을 거쳐, 영화 감독, 작가 혹은 작사가로 여러 방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여러 유명 지성인 혹은 예술인들과 교류하였다. 미국 유학생 경험을 녹아낸 소설 <외국인>으로 앵테랄리에 상을 탄 그는 처음부터 계속 자전적 경향의 소설들을 써왔다가 바이올리니스트 르네 카푸숑과의 만남으로 이 소설의 영감을 받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경향의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소설은 20세의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단원과 12세의 지능이 높은 조숙한 소년의 사랑으로 시작한다. 그들의 갭은 나이차가 아니다. 그들에게 차이를 만든 것은 오히려 누구는 먼저 알았으나 다른 누구는 나중에 알게 된 그것으로, 아이로니컬하게도 그건 나이순과 반대방향으로 진행된다. 사랑 그 자체에 대해서 사실 알지 못하는 그들을 사랑이 주는 느낌으로 결합시킨 그것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과거의 경험이다. 그 과거의 경험은 '無'의 경험, 자신의 존재를 규정짓는 바로 그 '무'의 느낌이다. 사춘기로 접어들기 전 한순간 인생의 통찰과 무한에 대한 감지력을 갖게 된다는 시기에 있는 소년 프란츠가 먼저 그 '무'에 대해 언급했을 때,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그녀는 당시엔 그 '무'를 이질적으로 느꼈지만, 사실 그녀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서 삶에 치이면서 잊고 있었다가 나중에서야 그 '무'를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프란츠와의 만남으로. 바로 사랑(有)이 그 반대편에 있는 '無'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無와 반대편에 있는 사랑은 '있음', '존재감'이다.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존재한다. 적어도 그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스스로 몸으로 정신으로 인식한다.
결과적으로 바로 그 '무', 부모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공통분모로 그들이 평생 품고 살게 된 그 느낌이 그들을 이어준 것 같다. 그것은 먼저 지능이 뛰어난, 그리고 그 시기의 뛰어난 통찰과 어린이의 직관을 가지고 있는 프란츠에 의해 언어로 먼저 인식된다. 순수한 감수성과 그 특유의 직설적이고 솔직한 태도 덕분이다. 그러나 그에 비해 클라라는 이미 닳아 있다. 그녀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충격받아 비르투오소로 성장하고자 하는 꿈을 잃은 후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면서 외로움과 자기 비하 속에 고통받으면서 순간의 위로를 찾기 위해 점심시간 마다 루체른 호수로 찾아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프란츠가 그녀에게 감추어진 바로 그 공통적 '무'의 느낌를 먼저 발견하고 그녀에게 접근한다.
그녀는 그를 통해서 자기를 발견하고, (잃어버렸던) 꿈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한 동력을 얻는다. 그녀는 루체른을 떠난다. 그녀는 프란츠가 도움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만, 만나는 사람이나 사건들 모두 잠시 머물러 있다 지나가는 것이라고 초연하게 인식하는 '어른이었으므로' 프란츠를 떠나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다. 그녀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살았던 루체른 측에서는 그녀가 솔로이스트로 다시 교습받으려는 것에 단원이 솔로이스트로 성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현실 인식을 시키지만, 그녀가 다시 돌아간 고향(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비르투오소로 성장하기 위해 매진했던) 런던에서는 그녀가 다시 비르투오소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며 그녀가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10년 후.
12살의 프란츠는 22살의 하버드 대학생이 되어 있다. 그들은 클라라가 현악4중주단 제1바이올리니스트로 있는 보스턴 연주회에서 재회한다. 그러나 프란츠는 그녀를 한순간도 잊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는 처음부터 그녀에게만 편안함과 자유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건 곧 클라라에게도 어떤 사실로 감지된다.
그 이유는, 프란츠에게 털어놓았던 클라라의 과거와, 클라라가 우연히 알게 된 프란츠의 과거에서 드러나 듯, 프란츠와 클라라가 자연스레 각자 상실한 어떤 소중한 이의 부재를 서로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무가 유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바로 이걸 말하는 것 같다. 그들은 사랑을 접한 느낌이 없거나 너무 어린 시절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말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어쩌다가 이렇게 줄거리를 얘기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가 이렇게 이해(주관적 이해?)되는 것은 이 글 아래로부터 펼쳐지는 이야기 시리즈들 때문이다.
이 소설은 현재 소설로선 보기드물게 묘사가 섬세하며 출중하고, 자연 묘사와 감정과 감정이 스쳐지나가는 찰나의 묘사만큼은 마치 프랑스 고전소설의 묘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아름다움'의 느낌을 표현하는 데에서 말이다. 소설에선 아예 드러내놓고 그것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바로 거기서 아름다움의 강렬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이 소설을 프랑스어로 읽으면 얼마나 감미로울까 생각했다. 한국어가 줄 수 없는 미묘한 차이가 있을 것 같다. 프란츠가 존칭(상대와 거리를 둘 때 쓰는 것, 꼭 존대말은 아님)과 반말(친근한 사이에서 쓰는 것)을 번갈아 쓰며 솔직하면서도 능숙하게 그녀와의 거리를 조절하는 것이 불어 글에선 그대로 느껴지겠지. 12살 소년과 20살 여인의 사랑, 12살 짜리 소년이 22살까지 계속 그 첫사랑을 그리고 기다린다는 파격적 설정만큼이나 루체른은 독어를 쓰는 스위스 도시이고, 프란츠가 뮌헨 출신인데 두 사람이 불어를 쓰는다는 설정도... 이질적이다. 아마 언어가 주는 느낌때문에 작가가 과감히 독어에서 불어로 설정했을 것 같다. 그 상황에 적용되는 단어가 주는 음운적 느낌을 생각해서 때아닌 불어로 설정했으리라고 생각했다. - 단, 작가가 프랑스인인 걸 감안하지 않으면 ^^
이 책은 영화 클라라를 보고 나서 클라라를 검색하다가, 네이버에서 검색된 '프란츠와 클라라' 리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소설이 짧게 끝나는 만큼 리뷰도 정말 짧게 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쓸데없이 길어졌다. 리뷰는 딱 이 말 하나 적고 싶었다. 인생과 인간, 음악과 사랑을 다룬다는 그 이야기는 책 소개 평에서 볼 수 있을 테니 그건 생략하고,
에필로그의 마지막 두 줄을 본 순간 가슴이 턱 막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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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목을 보고, 표지는 보고 착각을 하여 집어들었던 책. 여하튼 음악이 관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서로 다른 두 외로운 사람이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기까지의 과정을 아주 담백하고 정적으로 풀어내었다. 그런 이유로 아주 획기적이라던가 충격을 주는 내용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휴식과도 같은 책이지만, 대신 어떤 자극도 받을 수 없었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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