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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가진 모든 생물체는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게 됩니다. 얼마 전에 본 드라마 <소나기>에서 주인공 소녀가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서 과연 몇 살이 되면 죽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죽어야 할 운명임을 알면서도 죽음을 피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존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죽음은 철학의 중요한 논제가 되어 왔습니다. 철학에서 다루고 있는 죽음은 아무래도 현학적일 수밖에 없어 범인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토머스 캐스카트와 대니얼 클라인이 함께 지은 <시끌벅적한 철학자들 죽음을 요리하다>는 아무래도 무거운 주제인 죽음을 현대인의 취향에 맞게(?) 가볍게 바꾸어 이해하기 쉽게 하고 있습니다. 서문을 읽기도 전에 “지금 살아있는 사람만 펼쳐 볼 것!”이라고 표시해둔 것만 보아도 저자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옮긴이의 설명을 인용하면 “저자들은 우선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명철함을 무기로 다양한 이론들을 펼쳤던 사유의 전문가들인 철학자들을 시작으로 종교, 예술, 심리학, 과학, 테크놀로지 등 다양한 방면에서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설명을 되짚어 본다.”고 했습니다. 철학자들을 인용하면서 마치 친구를 대하듯이 줄인 이름을 부르고 있고, 그들의 주장에 대한 저자들의 장난스러운 생각을 덧붙이고 있는데, 편집인 역시 이를 필기체로 부기하듯이 적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코미디 소재로 다루고 있는 죽음에 대한 짧은 이야기들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읽는 호흡을 쉽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지나치게 희화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
“우리는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알고 있지만, 이 엄청난 진실을 회피하기 위해 온갖 획책을 다한다.”라는 인류학자 어네스트 베커의 말처럼 우리가 죽음을 입에 올리기조차 싫어하는 이유는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품어 안는 것이 바로 종교의 역할인 것입니다. 종교에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펼쳐 보여 인간이 죽음을 뛰어 넘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죽음 이후의 세계에 다녀온 사람이 없으니 역시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무려 81%의 응답자들은 어떤 종류든 사후 세계를 믿으며, 단지 약간 적은 수-79%-의 사람들만이 ‘신앙인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은 영생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라는 말에 동의했다고 하며, 76%가 천국을 믿는다고 답했으며 71%는 지옥도 믿는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꼭 종교가 아니더라도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하이데거는 어느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내가 죽음을 내 삶 속으로 들이고, 인정하고, 그리고 정면으로 맞받는다면, 나는 죽음의 불안과 삶의 하찮음에서 나를 해방시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로지 그렇게 됐을 때에만 자유롭게 내 자신이 될 것이다.(68쪽)” 판타지 소설 <해리포터>에서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악의 무리를 이끄는 볼더모트의 이름을 입에도 올리지 못하고 “그 사람” 등으로 에둘러서 부르는 이유는 공포의 대명사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포터는 그의 이름을 불러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데, 포터에게 그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국인들의 상당수가 천국의 존재를 믿는다고 앞서 이야기했습니다만, 이에 대한 저자들의 견해는 어떨까요? 저자들은 천국의 개념이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도 조사해놓고 있습니다. 천국을 비롯한 내세를 논하는 대부분의 종교에서도 천국에서의 삶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과거로 올라갈수록 내세에 대한 기록이 충실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기독교에서 천국에 대한 이미지는 중세와 르네상스시대에 회화에서 연원한다고 합니다.
장수와 삶의 질에 관심이 많은 저로서는 저자들이 인용하고 있는 세네카가 논한 삶의 질에 관한 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그가 살 수 있는 한 오래가 아니라 살아야 할 정도로만 오래 살 것이다. (…) 그는 항상 자신의 삶의 질에 관해 생각하지, 그 길이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마음의 평온을 해하는 많은 일들이 생기면, 그는 곧 자신을 놓아 버린다.(197쪽)” 하지만 세네카의 말이 곧 삶의 끝을 스스로가 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케보르키안 박사는 확신하고 있다. 나는 그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자살은 우리가 신에게 ‘당신이 날 내쫓을 수는 없어. 내가 떠나’라고 말하는 방식인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철학자 빌 마허는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세네카의 철학을 확대해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케보키언박사에 관한 뉴스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만, 의사조력자살을 주도했던 그의 행적 가운데 모호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는 병리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찾아온 환자를 평가하여 생명을 끊을 수 있는 기계를 건네주고 자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그가 과연 환자의 질병상태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손튼 와일더의 <우리읍내>는 대학에 다닐 때 참여했던 대학연극반에서 올렸던 작품으로 죽음에 대한 무거운 분위기에 모든 관객들이 숙연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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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시끌벅적한 철학자들 죽음을 요리하다>는 프로이드, 융, 하이데거, 소크라테스, 데카르트등 철학에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은 일반인들도 그 이름은 충분히 들어봤을 유명한 철학자들의 죽음에 관한 말들이 가득 나온 책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적으로 심각한 책이 아니라는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참 별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심지어 죽음에 관한 농담들도 가득 들어찬 이중적인 느낌의 책이기도 한데, 그런 느낌들은 책의 저자인 토머스 캐스카트와 대니얼 클라인이 하버드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여러 분야의 이력을 거쳐 방송계에서 코미디 작가로 일했다는 것을 알고나면 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죽음의 철학과 코미디라니 평소의 생각으로 보면 절대 어울리지 않는 조합임에도 책을 썼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지만, 섹스와 죽음에 관한 농담이 많은 이유가 촌철살인의 농담 한 마디가 정곡을 찌르기도 하고 동시에 불안을 완화시키기도 한다는 글을 보면 전혀 불가능한 조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전체적인 내용은 아무래도 서구의 농담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약간 겉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개인적인 느낌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부분부분나오는 많은 철학자들의 죽음에 관해 한 말들을 읽으면서 그에 감동도 받고 그에 관한 생각을 하게 하여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전체적으로 죽음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에서부터 천국에 관한 내용들과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들까지 죽음에 관한 전반적인 이야기들이 다 담겨져 있어 여러모로 좋았던 것 같다. 특히나 영생에 관한 내용은 SF를 읽는 것같은 생각이 들만큼 생생한 느낌이었고, 영생이 그리 좋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또한 평소 생명을 가진 인간는 결국 누구나 죽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나는 전혀 죽지 않을 것처럼 나의 죽음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깨닫게 되기도 하였다. 책 속에서 다루고 있는 죽음의 형태은 서양의 작가들이다보니 아무래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죽음에 관한 내용들이 많은데, 그것에 관해서는 별다르게 이야기할 것 없이 그저 그 사람들의 생각은 그러하고, 나의 생각은 이러하다 정도로 정리한다면 좀더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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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와 대릴의 대화형식이다.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만났을 때 시끌벅적한 철학자들이 과거 우리가 현대과 근대에 만날 수 있는 철학자들이 논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다 읽고 보니 이 책이 얘기한 ‘시끌벅적한 과학자들’은 이 책의 저자인 토머스와 대니얼을 말하는 구나 라는 깨달음이 왔다. 이 두 사람은 하버드에서 철학을 전공한 학자이며 시끌벅적한 노인네들이었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고 없는 부분도 있었다. 사실 없는 부분이 더 많았다. 철학적 계보와 배경에 기본 지식이 없어서 일수도 있고 저자가 독자들을 너무 높게 평가한 탓일 수도 있다. 하나는 나의 문제고 하나는 저자의 문제다. 모름지기 학자라면 모르는 사람을 위해 친절하게 설명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본다. 프로이드, 쇼펜하우어, 하이데거, 사르트르, 비트겐슈타인, 데카르트 서양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들의 여러 죽음과 존재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읽다보면 자기계발서 같다. 일테면, 마하트마 간디가 한 말 “내일 죽을 것처럼 사십시오.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십시오.” 라든지 제임스 딘의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라. 내일 죽을 것처럼 살라” 이런 말들을 붙인다. 그럼 누군가 이 책을 감동 깊게 읽은 당신이 나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중간중간 에피소드처럼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재밌지 않으셨나요? 라고..., “그래... 재밌긴 하더라. 그런데 난 유머감각이 거기까지 닿지 않아서 그런지 철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게 더 궁금해서 많이 웃지 못했고.. 읽다보니 그 얘기가 그 얘기라 나중엔 흥미가 떨어지더라.” 이렇게 밖에 얘기해 주질 못하겠으니 좀 아쉽다. 그러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제가 더 아쉽군요. 중간중간 나오는 이야기들의 진한 철학적 사유를 이해하지 못하다니요” 라고. 나는 겸손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말하겠지. 그것이 저자가 말하던 <오늘 진정하게 와 닿는 그의 날카로운 현상학적 분석>인가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적 이성에서부터 프로이드의 무의식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가 사실은 부처의 생각에 동조한 사상이라는 것. 하이데거의 존재론, 이런 것들 보다 삶의 유머는 우리와 더 가깝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모두가 철학적이라는데 동의한다. 다만, 그 인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하고 지식을 바탕으로 한 체계를 세운다면 훨씬 분석적이고 명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많은 것들을 역사적 철학에서 찾는다면 우리는 훨씬 생각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런 면에서 효율적독서는 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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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음을 자각하게 된 시기는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 때부터다. 물론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도 죽음을 본 적은 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모셨던 국장님께서 퇴직 후 갑자기 암으로 돌아가셔서 많이 울었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음이란 건 나와 우리 가족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만 겪는 ‘슬픈 일’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우리 가족은 영원히 이대로 행복하게 살아가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외할머니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그리고 덜컥 겁이 났다. 외할머니께서 나를 두고 멀리 떠나셨듯이 부모님 그리고 다른 가족들도 언젠가는 모두 떠나버리고 나만 홀로 남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럼 난 어떻게 살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탄생과 죽음을 비교할 때 밝고 긍정적 이미지인 탄생과 달리 죽음은 어둡고 부정적이다. 인간이 죽음에서 느끼는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여기 죽음이란 무거운 주제를 두고서 유쾌한 수다를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다. 《시끌벅적한 철학자들 죽음을 요리하다(2010.8.9. 함께읽는책)》의 저자 토머스와 대니얼이다. 위에서 나는 수다라는 표현을 썼지만 토머스와 대니얼의 대화를 모두 이해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수다란 모름지기 가볍고 편한 주제를 앞에 놓고 영양가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게 제 맛인데, 토머스와 대니얼의 대화 주제는 무겁기로 치면 세상에서 따라올 게 없는 『죽음』이니 말이다. 술렁술렁 책장은 잘도 넘어가지만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역시 『죽음』이란 놈은 어렵다. 하지만 외계인이나 알아들을 수 있는 암호로 쓰여 진 책은 아니니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대화는 아니다. 《시끌벅적한 철학자들 죽음을 요리하다》는 키르케고르, 하이데거, 쇼펜하우어, 니체, 카뮈,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를 등장시켜 삶과 죽음 그리고 사후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철학자들에게도 『죽음』은 어려운 주제였나 보다. 그들이 머리를 감싸 안으며 고민한 흔적을 이 책에서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인 두 저자의 특징으로 시종일관 밝고 유쾌한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앞으로 닥칠 죽을 운명이란 것이 두렵거나 당혹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신없이 왁자지껄한 잔치처럼 느껴지는 내가 나도 이상할 정도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게 당연한 이치인데 이를 두고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고, 당혹스러워한다는 자체가 어찌 보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죽음이란 것 때문에 현재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다짐한다. 죽음이 두려운가. 《시끌벅적한 철학자들 죽음을 요리하다》를 읽으면 생각이 변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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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끌벅적한 철학자들 죽음을 요리하다
" 자신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경험하면서 미치지 않기란 쉽지 않다"
역시 첫 문장부터 실망시키지 않았다. 왠지 웃음부터 났다. 헌데 문제는 그리 쉽지만은 않은 책이었다는거다.ㅡㅡ 아마 우리도 사람이고 나이를 먹어가는 인간이기에 누구나 결국에는 죽는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고 싶지 않으며 오히려 잊어버리고 신경쓰지 않고 산다. 솔직히 그게 맘 편하다. 죽는다는걸 인정하면 열심히 살지어도 1분 1초가 절대 편하지 않을테니까... 이 책은 굉장히 재미있다. 평소에 하고 싶었던 질문들을 시원하게 해준다. 예를 들자면 버트런드 러셀은 이런 말을 했다. 가능한 필요성과 필요한 가능성을 혼동하고 있나..라고.. 그 밑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 당최 뭐라는 거야? " 후후후 너무 마음에 드는 책이다.
철학자들의 말은 가끔 엄청난 공감과 머릿속에 번개를 치게 하지만, 가끔은 혼돈 속에 빠트리기도 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말들도 한다. 그리고 전혀 도움되지 않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는 것도 어찌보면 철학자들이다. 이 책에는 정말 많은 철학자들의 각가지 문장들이 나타난다. 처음들어본 철학자들부터 유명한 철학자들까지, 삶을 살면서의 예도 많이 나오고, 거북이와 토끼이야기도 나온다. 이 부분은 알았던 우화라그런지 기억이 단번에 난다. 그리고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책의 재밌는 시니컬한 농담은 기억에 많이 남는데 말이다;;
저자들은 우리에게 물어본다. 정말 사람은 모두 죽는다고, 당신도 결국에는 죽을 거라고, 그 사실을 정말 알고있냐고 솔직히 무어라 대답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여러 철학자들의 생각에 나 자신을 대입해본다. 그러다가 나도 이 책 안에 동화되어가는 기분이다. 여기서는 영원이란 것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불안이 없으면 우리는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반면에 쇼펜하우어는 죽음은 우리의 무관심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 다르다. 아마 나도 나만의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죽음은 고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에게는 그 단어가 주는 위압감은 결코 적지 않다. 마주치기 싫어하는 것... 그런 암울하고 무거운 주제를 특이하게 유쾌하고 시니컬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운 책이라 할 수 있다. 큰 점수를 주고 싶은 책이다. 죽음이란 어두운 주제로 밝게 시끌벅적하게 엮어내서 그런지 읽고 나서도 정신이 하나도 없다. 도대체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어떤 사람의말이 옳은지 모르겠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좋은 말을 읽고 이해하든, 아무리 나쁜 말을 읽고 고민해도, 결국에는 자신의 신념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거라고..결국에는 그러는 거라고.. 저자도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냥 잊고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 버리는 것은 아니니까, 그저 마음 깊숙한 곳에 잠시 가두어놓는 것 뿐이니까, 왜냐면 우리의 인생은 앞으로도 밝고 재미있을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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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가 할머니에게 묻는다. "할머니, 왜 살아요?' "아니 이 녀석이, 그럼 죽으란 말이냐!"
꼬마는 생각한다. 왜 사는지 묻는 것이 잘못된 건가?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데 그럼 산다는 건 죽지 못해서 혹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사는 건가? 아, 모르겠다. 그냥 살아 있으니까 사는 건가보다.
어린 시절에 엉뚱한 질문을 했다가 야단만 맞은 적이 있다. 연로하신 할머니께 뜬끔없이 왜 사느냐, 언제 죽느냐라는 질문은 굉장히 무례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그 당시에는 몰랐다. 아마도 그 뒤론 그런 질문은 안 했던 것 같다. 굳이 질문할 필요를 못 느꼈던 것 같다. 사느냐, 죽느냐는 햄릿이 고민하면 되고 왜 사느냐, 왜 죽느냐는 철학자나 신학자들에게 맡기면 되니까. 그런데 우리 애가 묻는다. "사람은 왜 죽어요? 죽으면 어떻게 되요?" "음, 사람이 왜 죽느냐 하면......." 사실은 잘 모르겠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설명하다보니 모르겠다. 정말 '죽음'이란 뭘까?
<시끌벅적한 철학자들 죽음을 요리하다>는 '죽음'에 관한 유쾌한 고찰이다. 토머스 캐스카트와 대니얼 클라인은 진지하고 고리타분한 철학을 적절한 농담과 유머로 희석시킨다. 어쩌면 '삶과 죽음'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유머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위대한 사상가들이 말하는 '죽음'에 기죽었던 사람들이라면 이 책으로 기운을 차리자.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면, 우리가 존재하고 있으면 죽음이 오지 않은 것이고, 죽음이 오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으니" -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죽음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죽음이란, 죽는 당사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만은 없다. 죽음은 삶과의 이별이며 살아있는 사람들과의 이별이니까. 그러니까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아무것도 아닌'이란 죽음에 연연하여 현재의 삶을 망치지 말라는 충고가 아닐까. 철학은 삶을, 종교는 죽음을 우리에게 이야기하지만 그 무엇도 정답은 없다. 이 책은 정말 시끌벅적한 수다 같다. 진지하고 심각한 분위기는 쫙 빼낸 저칼로리 죽음 요리를 맛 본 것 같다. 이제 '죽음'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얘들아, 세상에 태어난 순간이 기억나니? 기억 안 난다고? 그래, 죽음도 마찬가지야. 수많은 사람들이 짐작만 할 뿐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지. 그래도 잘 살고 있잖아. 삶과 죽음이란 자연스러운 거야. 있는 그대로 이 순간을 살다보면 알게 되는 거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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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생각을 엿보기. 어떤가? 그것도 우리와 다른, 어쩜 더 독특하고 대단한 사람들의 생각을 엿 보는 시간. 누구라도 한번쯤 아니 그 이상, 어쩜 매 순간 생각하면서 살고 있을지 모를 죽음에 대한 철학자들의 생각을 엿보는 시간이, 이 책을 접하는 순간이다. 죽음. 이런 저런 일들로 힘든 일이 많은 시기에 수도 없이 생각해봤던 주제였다. 자살도 많고, 살인사건도, 사고로 인한 죽음 등 우리의 곁에 쉽게 접할 수 있고, 그 누구에게든 언제라도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책에서도 나오듯 남의 일처럼 먼 일처럼, 혹은 회피하고 싶어서 나에겐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는 그것, 죽음. 그 먼 옛날의 철학자들도 우리와 같은 생각들을 하면서 죽음을 풀어주는 책. 대학시절 노인학이란 수업을 들으면서 죽음에 대해서 처음 깊이 있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장을 간단히 배우면서 노인의 질병이나 노인이 차차 받아들이게 되는 주변인들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까지. 그 수업을 통해 학자들이 바라본 죽음을 간단하게 배운 적이 있었다.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간다, 한 인생은 늙어가는 과정이다. 등등 참 다양한 학자들의 죽음, 혹은 인생에 대한 생각을 들었었다. 그때 본 일반 학자들의 의견과 죽음에 대한 철학자들의 유쾌한 얘기들을 보면서 우리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누구에게나 언제라도 올 수 있는 죽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 할 것인가?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어 한다. 어쩜 그래서 종교라는 걸 통해 죽음 후의 세상을 보장 받고 싶어 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교에서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는 일. 이 책에서처럼 유쾌하게 받아들이자. 죽음도 우리의 일생중의 일부이고 모든 생명체의 한 과정, 마지막 순간인 만큼 우리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면서 인정하는 만큼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 하는 게 최상의 선택이 아닐까? 요즘같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데 힘들어 하면서 어려워하면서 살 필요가 있을까? 철학자들의 생각이라 어렵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많은 일화나 예시, 그림삽화들을 통해서 이해를 도와주고 흥미가 유지되게 하는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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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그것이 나에게 닥친다면.... 피해갈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던지는 명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삶이란 우리에게 무슨 의미일까? 죽음을 의식하는 것이 우리 삶의 방식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천국은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는 곳일까? 아니, 천국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이처럼 죽음과 관련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들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죽음에 관한 모든 것... 정말 죽음과 관련된 모든 것을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철학자들이 시끌벅적지근하게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들이 무덤속에서 우리에게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이 사실 좀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 그 철학자들은 우리들이 많이 들어본 쇼펜하우어, 프로이트, 융, 키르게고르, 하이데거, 니체, 카뮈, 사르트르 등등등... 그리고 생존 듣도 못한 철학자들까지. 그 철학자들의 이름은 열거하기도 버거워서 생략하려고 한다. 솔직히 너무 많은 철학자 이름들과 그들의 죽음에 관한 사유들이 나오기에. 그러니, 이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철학적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 그렇다면, 이 책은 참 무미건조하고 지루하고 읽기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견이 들텐데, 이것을 보완해 주는 것이 있으니, 책속에 나오는 촌철살인의 농담들이다. 다양한 에피소드(농담)들이 나오고 앞에서 진지하게 설명하던 철학자들의 사유를 한꺼번에 이들 농담이 뒤집어 버린다. '철학자님들. 지금까지 무슨 말씀을 하셨어요? '비웃기나 하듯이.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과 함께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삽화들이 등장하고 그 삽화들은 단 몇 줄의 문장으로 어이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책 속의 농담들이나, 삽화들은 재치있고, 위트 넘치는 이야기들이며, '피식' 웃어넘기다 보면, 그 속에 너무도 깊은 패러독스가 숨겨 있음을 재빨리 눈치챌 수 있게 된다. 간단히 간추리자면, '현학적 철학자들의 사유에 관한 인용문, 그리고 시니컬한 농담, 그에 걸맞는 삽화, 이 세가지가 어우러져서 한 권의 책이 되는 것이다. 깊이있는 진리만을 사유하는 철학자들의 논리를 한방에 무너트리는 맛이라니. 그 것이 이 책을 읽는 묘미가 아닐까 한다. ![]() 어쩌면, 누구나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죽음'이라는 명제를 심각하게 다룬다면, 얼마나 우울해질까. 우리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을 누구나 가지고 있기에. 그런데, 철학자들의 사유적 논리에서부터 과학적, 의학적 분야까지 죽음,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에 관한 인간의 다양한 견해를 다채로운 방법으로 풀어나가는 것이다. ![]() 우리들이 그토록 사후세계에 가고자하는 천국은 어떤 모습일까. 여기에 관한 견해만해도 '할리우드가 들려주는 마시멜로같은 천국', '성경이 들려주는 전용 리조트같은 천국', '웹사이트가 제공하는 연회비 40달러짜리 천국', '예술가가 보여주는 파스텔톤 천국', '만화가 그린 천국'....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일례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죽음'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이 책이 그런 모든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다만,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는 그리 쉽지 않다는 것도 덧붙여서 이야기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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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요리할 수 있는 기발한 발상을 떠올리며 이 책을 펼쳐보았을 때 난 과연 죽음을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본적이 있는지 물어본다. 분명 언젠가는 찾아올 운명의 존재, 하지만 내게는 왠지 그리 쉽게 다가오지 않을 거 같은, 부정하고 싶은 운명의 사슬처럼 여기고 있지는 않나 의문만 떠오르고 만다.
과연 자신에게 죽음이란 어떤 의미의 존재인지 곰곰히 생각하고 내가 살고 있는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지 영원한 영생을 꿈꾸는 믿음을 지닌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다양한 물음을 또 던지게 된다. 삶과 죽음의 경계속에 또 다른 차원의 시간이 존재할 수 있는지, 기도하며 꿈꾸는 천국이란 곳의 풍경은 어떤 모습일지 그 언제 나도 그 곳에 발을 내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그 기분은 우리에게 무엇을 안겨줄지 계속 궁금증에 빠지게 한다.
철학과 함께 하면서 죽음이란 존재를 마주했을 때 느낀 건 역시 자신에게 찾아오는 검은 그림자의 운명은 늘 죽음에 대안 불안속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늘 가볍게 나에게 그런 불운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며 진지하게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모습 또한 낯설지가 않다.
존재와 비존재는 어떤 차이에 놓여 있는 세계인지, 영원한 영혼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될지 아니면 영원한 벌을 받으며 내세에 모든 고통을 안고 가야할지 쉽게 내다볼 수 없는 운명의 다리를 우리는 어떻게 건너갈 수 있을까 상상도 해보고 말이다.
이 책을 통해서 죽음을 향한 다양한 고찰과 서로 다른 상반된 철학자들의 생각과 말을 들어보면서 무엇하나 냉철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죽음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것은 영원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아니면 당연한 인간의 마지막 운명의 모습으로 남을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막연한 환상속에 살아가지 않기 위해 죽음에 대한 불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하이데거를 볼때면 그로 인해 현실적인 삶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쉬운 결정은 또 아니었다. 인간의 마음이란게 그렇게 냉정하게 진정시키면서 철학적 사색속에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기 때문에 더 그런거 같다.
사후 세계는 생각해볼 수 있지만 종교적인 믿음의 선은 성급히 그을 수가 없게되버린다. 눈에 보이는 확신이 선명하지 않고 그저 작은 일말의 현실적이고 가능한 선택의 순간을 더 먼저 떠올리기 때문에 그런거 같다. 20c 문화 인류학자 어네스트 베거의 책에서 인용된 말처럼 우리는 언젠가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알고 있지만, 이 엄청한 진실을 회피하기 위해 온갖 획책을 다한다는 사실에 그 누구하나 쉽게 고개를 젓지 못할 거 같다.
눈 앞에 다가온 죽음이란 손길이 보인다면 어떤 몸부림을 쳐서라도 그 암흑속에서 빠져나오고 싶을 것이고 끔찍하기 때문이다. 극도의 불안과 고통은 늘 나를 피해가길 바라는 심정은 가슴 한 구석을 자리잡고있지만 그래도 그 언젠가는 조용히 운명을 받아들이며 짤음 순간에라도 삶의 발자국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또 내가느낀 부분이다.
삶과 죽음을 다루었던 사유의 전문가들인 이 책의 철학자들은 다양한 죽음에 마주하는 방식과 대응법을 알려주었다. 그렇다고 결코 하나를 선택해 자신의 삶에 입힐필요는 없었지만 적어도 삶과 사후의 세계를 미리 오고 가볼 수 잇는 이 책의 이야기들은 한결 죽음에 대한 좀 더 의연하고 나만의 시선을 지니도록 도와주고 있다. 유일무이의 존재로 살아있는 생명이란 존재에 한 번 더 감사해보는 마음을 가져볼 수도 있었고 나의 자아속엔 무엇을 보는 삶이 들어있는지도 생각해 볼 수 있어 유익했다.
그 정점은 결국 우리는 자기 앞에 놓여진 삶을 나의 것으로 잘 가꾸어나가고 죽음에 대한 불안을 넘어서서 인생에 중요한 삶을 이루어 나가는 길을 걸어가야하는 것이 우리가 진정 원하는 이상적인 얼굴이 아닐까?
삶을 살아가는 자체가 특전이라는 하나뿐인 인생과 함께하는 죽음에 대한 나만의 철학은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자신있게 꺼내볼 수 있어야 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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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인간과 삶, 세상에 대한 원리와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란 생각에 다른 분야와는 다르게 철학사에 관한 책을 읽기 전에는 언제나 긴장감을 감출수가 없다.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가 철학이라 생각했지만 시끌벅적한 철학자들 죽음을 요리하다란 조금은 가벼운 느낌의 제목이 이 책을 더욱 궁금하게 했다. 무엇보다 두 저자가 철학과 신학, 심리학을 넘나들며 죽음이란 실체에 대해, 그리고 사후 세계까지도 섭렵하며 벌이는 수다판이 호기심을 자극했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쇼펜하우어, 니체, 카뮈, 사르트르 등 유명한 철학자들도 고심하게 했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누구나 삶을 마치고 죽음을 맞이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삶의 의미와 미래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현실이 너무 벅차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만큼 인간의 삶에 있어서 불변하는 사실도 없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크게 의식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죽음을 의식하는 일이었다. 그 어느때보다도 죽음의 본질에 대해 심오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수많은 인문서들이 출간되고 있다. 나 역시 그 가운데서 이 책을 읽기에 앞서 몇 편의 책들을 읽을 수 있었는데 각각의 책마다 죽음을 재해석하고 있었지만 다양한 책들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단 한 가지 결론은 죽음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실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죽음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가슴 아프고 그저 슬픈 일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책에서는 19세기 북유럽의 철학자들과 20세기 실존주의자들로부터 죽음에 대한 고찰을 얻고 있는데 정신분석의 아버지이자 무의식의 어머니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을 몰아대는 가장 큰 원인중 하나가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 말하고 있고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삶이 곧 죽어가는 과정이라 단언하고 있다. 또한 현대 철학에서 죽음을 다룰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20세기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는 죽음의 부정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사는 것이 아니다란 말이 기억에 남는다.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개념은 생각했던 것 만큼이나 어렵고 무거운 내용의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저자들의 대화로 엮어지는 스토리가 어렵고 무거운 주제를 조금은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소재로 바꿔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철학자들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읽어가다보면 결국 개인 스스로가 느낄 수 있었던 죽음에 대한 직감이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철학과 만나 새로운 이론과 사상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아니었나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죽음에 대한 사상가들의 평가를 통해 인간만이 자신이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 수 있는 존재란 사실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고 죽음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은 자신의 앞에 펼쳐질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채울 수 있을 때만이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었다. 누구나 죽음을 의식하며 죽음 자체에 대해 공감하며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끌벅적한 철학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보면 어느새 죽음에 대한 다양한 이론을 깨우치게 되고 삶과 죽음, 영혼과 세상에 대해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질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