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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포스트모던이라는 영미학자들의 한가한 이야기가 먹고 살기에 바쁜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실제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은 영어권과 독일에서 불붙은 쟁점이었지, 프랑스나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아시아 지역 전반에서는 그리 솔깃한 논쟁거리가 아니었다. 또한 50여년의 역사를 지닌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비판적 지식인은 드문 편이다. 가령 포스트모더니즘 철학과 사상은 사회변혁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무기력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고 심지어 전지구적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공모자라는 시각도 제기되었다. 일부는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대립을 19세기 합리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의 복사본으로 폄하하곤 한다.
50여년의 역사를 지닌 모던/포스트모던 논쟁이 21세기에 와서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면 믿겠는가? 이상의 소설 <날개>와 시 <오감도>를 읽을 때 우리는 바로 그 생뚱맞다고 했던 쟁론의 한가운데에 있게 된다. 백화점 세일기간 때 몰려오는 무수한 익명의 개인들을 바라볼 때 그 논쟁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다. 깨어있는 시민의 참여을 독려하고 정치가 우리의 희망이라 생각할 때 우리는 바로 모더니즘의 정상에 서 있는 것이다.
페터 지마는 근대, 모더니즘(후기근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지식사회학적 인식도를 그려보인다. 지마는 종적인 역사성과 횡적인 문제상황이라는 두 축으로 삼자관계를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지마에게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연대기적 범주이면서 동시에 질적 범주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이행기를 2차대전 이후로 본다. 무엇보다도 지마는 근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단순히 특정한 세계관, 이데올로기, 가치체계, 양식, 미학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문제상황'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 문제상황이라는 구도에서 본다면, 근대적 문제상황은 애매성이고, 모더니즘적 문제상황은 양가성이며, 포스트모더니즘적 문제상황은 무차별성이다. 여기서 중요한 기준점을 제공하는 것은 모더니즘의 양가성인데, 무차별성이 양가성의 극단적 형식이고, 애매성은 양가성의 약화된 축소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지마는 이런 문제상황의 정경적 배경으로 자본주의와 후기자본주의사회의 중요한 발전단계를 배치한다. 참고로 근대 이전의 중세 시대는 흑백과 선악이 확연하게 나뉘는 상호 대립적인 이원성을 특징으로 한다.
근대적 문제상황은 애매성인데 이에 대해 지마는 그리 상세한 설명을 풀어놓지 않는다. 모더니즘적 문제상황은 양가성, 우연성, 아이러니, 특수화 경향, 주체의 위기 등으로 변별된다. 여기서 양가성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 심리학에서 말하는 '상반된 욕망의 동시적 공존'이다. 가령 누군가를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하는 것이다. 둘째, 니체가 말한 '모든 가치의 전도'다. 예컨대 선/악이 뒤바뀌고, 진리/미신이 뒤바뀌고, 정통/이단이 뒤바뀌고, 해방/예속이 뒤바뀌는 등 대립자의 일치 상태를 의미한다. 셋째, 해답에 이미 문제의 씨앗이 깃들어 있다는 식의 중의적 논리다. 가령 시장법칙, 기술적-과학적 진보, 합리화가 민주주의의 발전, 복지, 개인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위협한다는 논리가 그러하다. 한편, 포스트모더니즘의 무차별성은 선과 악, 진리와 허위, 사랑과 증오 등이 구별되지 않는 모든 가치들의 교환 가능성 혹은 모든 사물들의 등가성의 시대를 말한다. 이러한 무차별성은 무관심과 테러, 급진적 다원주의와 극단적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위태한 줄타기를 보여준다.
이 책의 커다란 매력 가운데 하나는 료타르, 보드리야르, 푸코, 들뢰즈, 로티 등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이다. 지마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인식이론, 윤리학, 사회철학, 미학, 문예학이라는 다양한 층위에서 입체적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비록 포스트모던한 사상가들이 각자 독특한 개념적 틀을 가지고 있지만 플라톤주의, 합리주의, 객관주의에 대한 단호한 거부로 나타나는 다원주의적이고 특수주의적인 경향과 더불어 철학의 심미화와 문학화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성향이 해방적 실천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키는 단점을 지닌다고 지적한다. 결국 지마의 궁극적인 이론적 지향점은 모던/포스트모던 논쟁을 초월하는 대화이론을 구축하는 일이다. 바흐친의 간담론성과 대화이론에 기반하여 특수자와 보편자, 료타르식 이의와 하버마스식 합의를 변증법적으로 결합하려는 학술적 열정을 내비친다. 문예론에 치우친 바흐친의 대화이론에 비하여, 지마의 대화이론은 정치적인 동시에 윤리적인 타자성과 대화의 이론을 사회제도적 층위에 투사하는 비판이론적 측면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