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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무개 지음
262쪽. 샨티 출판사
건축물이 공간의 미학이라면 무의 미학, 상상의 미학은 글일 것이다. 구체적인 질량감을 가지고 시선을 압도하거나 정돈된 미적 느낌으로 엄청난 느낌을 주는 것이 건축물이라면 부피없이 존재감없이 인간의 심금을 울리거나 눈을 트이게 하는 것이 글이 아닐까. 그 글 중에서도 깊은 내면을 찾아드는 것, 허공 중의 허공을 추구하는 것이 도 혹은 진리라고 해도 옳을 것이다. 물론 도 혹은 진리는 어떤 특정한 매개체를 꼬집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와 모든 학문을 아울러 하는 말이다.
우리가 도 혹은 진리라고 느끼는 것은 어떤 대상, 지금 내 앞에 있는 글이나 말이 혹은 행동이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의식을 건드리고 있다고 여길 때의 대상을 이름이다. 실상 건드린다 함은 옳지 않다. 제대로, 또는 옳게 표현하거나 답을 주고 있다고 느낄 때라고 표현해야 한다. 허나 끝없는 의문을 느끼는 것도 나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는 것도 나다. 내 안에서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루, 마스터, 스승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그 답으로 가는 길을 일러주거나 그 답을 촉발시키는 힌트를 던져주거나 하는 이들이다.
<지금도 쓸쓸하냐="">제목을 보았을 때 허를 찔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요즘 읽고 있는 책에서 나온 표현을 빌린다면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 한 마디, 이 단순한 한 마디, 누군가는 그저 헛소리라고 치부할 이 한 마디가 왜 그리 깊이 와 닿았을까.
쓸쓸함에 관해 생각해보지 않은 이는 없다. 아니 쓸쓸하다고 느껴보지 않은 이는 없다. 쓸쓸함은 보편적인 감정이요 우주적인 형용사이며 근원적인 아픔이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 태어나고 혼자 가므로라는 말이 그 쓸쓸함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다. 이 단어, 쓸쓸함이라는 단어 하나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가슴찔려 울었을까.
지은이는 구도자가 되고 선생이 되고 혼자가 되어 도를, 진리를 추구하는 질문을 하고 답을 내놓는다. 언제나 선승처럼. 선생은 많다. 선생은 많으나 내 삶에 서 있는 이는 없다. 내 삶은 온전히 나 혼자만의 것이므로 그 삶에 대한 해답을 내어놓는 자는 나요 나 자신이다. 내 눈에 따라 내 그릇에 따라 내가 추구하는 바에 따라 해답은 달라지고 세상도 달라진다.
허공을 채우는 것이 건축물이라면 그 건축물을 지어올리는 것이 벽돌과 철골과 돌이라면 인간의 허공을 채우는 것은 근원적인 감정과 그 감정을 생각한 사고와 거기서 발전시킨 진리다. 인간은 허공 중의 허공, 보이지 않는 존재의 으뜸인 신을 섬기기 위해 보이는 것의 으뜸인 건축물을 지어 바쳤다. 지금도 쓸쓸함을 잊기 위해서 였을까. 잊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허공을 엮어낸 <지금도 쓸쓸하냐="">를 읽어가면서 드는 생각이다.지금도>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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