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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값이 좀 비싼 데다 분량도 만만치 않아서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어차피 사야 할 책인 것 같고, 안 사면 후회할 듯해서 구매 버튼을 클릭했고, 중간고사 등 업무 때문에 한 일주일여 먼지 쌓이게 하다가 지난 주말에 책을 펼쳐들었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최소한 내가 살아온 시간 동안, 대한민국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만한 인물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빨갱이니 하는 온갖 거짓된 비난과, 실제로 자신을 죽이려 드는 비열한 정치 공작을 이겨내고, 그리고 정말 대단한 것은 그들을 모두 용서하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이렇게 자신을 던진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4.19니 5.16, 5.18. 6.29, 6.10 등 각종 숫자들로 기억되는 대한민국의 굴곡진 현대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을 향한, 때로는 기대 때로는 질투 등 감당하기 어려운 온갖 일들을 이겨내고 그를 대표하는 말,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말에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1권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탄생과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순간까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사진 자료도 풍부하고 돌아가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별로 어색하지 않게 잘 서술된 1인칭 시점의 문장이 마치 곁에서 자료를 함께 들춰보며 현대사를 공부하는듯한 느낌도 들게 한다. 700페이지 가까운 긴 분량이지만 읽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마침 추석 연휴이고 시간이 되는 만큼, 얼른 2권을 읽고 마저 생각을 정리해야겠다. 작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란히 세상을 등졌을 때를 기억해 본다. 그리고 지금을 생각한다. 우리의 대한민국과 민주주의는 1년의 시간동안 얼마나 발전하였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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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본 불매운동이 한창이다. 내 사무실 한켠에 있는 일본만화 피규어 장식장도 전지를 붙여서 가려버렸다. 일본을 미워하는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무엇보다 과거에 대한 반성이 없고, 반성을 하지 않는 이유가 다음 세대에게 그릇된 역사를 물려주기 위한 의도라고 다들 느끼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한다. 불과 70여 년 전만 해도 식민지 지배국이었던 나라와 대등하게 성장해서 맞서고 있는 우리나라도 참 대단하지만 이 나라가 있기까지 우리 역사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끊임없이 제시하고, 불의와 맞서 자신의 삶으로 신념을 증거해 왔던 김대중의 자서전을 구입한지 10년 만에 읽어냈다. 그분이 돌아가신지 올해로 10주기가 되는 해이기도 해서 의미가 더 깊다. 대한민국사(史)의 질곡에마다 빠지지 않고 자리했던 거인의 삶은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떠나 그 인생 자체만으로도 감동을 준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시기적으로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10주기이기도 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10주기이기도 하면서 즐겨 보는 컨텐츠-웹툰 ‘롱 리브 더 킹’,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에서도 국가를 이끌어가는 리더십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공통적으로 던지고 있어서 이 책, <김대중 자서전>을 읽는 것이 더욱 재미있었다. 여름방학엔 일제 강점기와 김대중 선생의 흔적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목포 일대로 여행을 다녀왔기에 머리로, 가슴으로, 발로 기억하는 책읽기가 되었다.
우리나라 정치인 중 이만큼 평생 핍박받고, 죽을 고비를 많이 넘긴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처럼 심약한 사람은 신념이랄 것도 없이 뜻을 수십 번도 바꾸고 굽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정치인으로서의 신념, 종교인으로서의 양심을 행동의 기준으로 삼았다. 사람은 아무도 보지 않지만 하느님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에 따르는 삶은 얼마나 신산하고 고된가. 총 2권인 자서전 세트에 1권은 700페이지가 조금 넘는다. 물론 글을 직접 쓴 것은 전문 작가겠지만 구술을 최대한 살려 썼는지 문체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선생의 말을 직접 듣는 것처럼 생생하다. 아마도 방송을 통해 고인의 모습을 많이 보았었기 때문인 듯하다.
김대중의 삶을 읽는 것은 우리 정치사를 읽는 것과도 같다. 근대사를 관통한 수많은 사건들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거니와 정치의 변화를 가장 먼저, 맨 선두에서 이끌어내 왔기 때문이다. 일제 때는 강제 징병의 위기를 겪기도 했고 한국전쟁 때는 목포 형무소에서 총살을 당할 뻔하기도 했다. 이후 평생을 야당에 몸담으며 독재 정권, 군사정권과 싸우며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 암살을 당할 위기에서 미국과 일본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살아돌아온 건 더 유명한 사건이다. 특히 1971년 총선 지원유세를 위해 차량으로 이동하던 도중 대형 트럭에게 부딪혀 죽을 뻔한 사건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했다. 아니, 그 사건 이후 수많은 영화에서 이 사건을 모티프로 차용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다리는 저시는 게 단순하게 고문 후유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그 사고에서 고관절을 크게 다쳤던 것이 원인이 되고 5.18 이후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하면서 악화되어 결국 불구처럼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서도 편한 곳이 아니라 여당의 텃밭인 험지에 출마하거나 구태를 개선하기 위해 그리고 국가의 발전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누구보다 가장 많이 토론하고 공부하며 국회 도서관에 가장 많이 찾아간 국회의원이었다. 하지만 이론과 명분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한일 협정을 진행하면서도 명분도 중요하지만 실리를 분명히 챙겨야 한다고 과감하게 주장할 수 있는 용기와 현실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한 사고는 ‘어느 분야에서나 성공하려면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겸비해야 한다.’는 명언으로 남았다.
그의 통찰은 그 때 뿐만 아니라 지금에도 유효하다. 최근 조국 전 민정수석의 법무장관 임명을 반대하며 자유한국당에서 장외투쟁을 하겠다고 나섰는데(청문회에서 검증하면 될 일이지 웬 장외투쟁?), 선생이 3선개헌 반대를 위해 야당에서 등원 거부 투쟁을 했지만 실패한 것을 두고 “강경한 것이 겉으로는 선명해 보이지만 때로는 한없이 무책임한 것이었다.”(p199)라고 회고했다. 각종 민생 법안이 국회 의결을 기다리고 있는데 명분과 당파 이익에만 집착해 국회가 열리지조차 못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갖다붙여도 될 만한 말이다. 선생은 이 경험을 통해 반대만을 위한 반대는 호응을 얻지 못한다, 구체적인 정책과 비전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연구하고 조사해서 내놓는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라의 발전과 민족의 화합을 위한 청사진만이 아니라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에 대한 연구를 노년까지 직접 제안하고 공부하고 연구했던 모습은 정치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신념을 어떻게 실천하고 삶을 어떻게 보람있게 살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모습이라 하겠다.
또한 독재 정권의 핍박으로 정치 활동이 여의치 않을 때 한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를 순방하며 세계 정세를 냉철히 인식하고, 외국의 민주인사 및 지도자들을 만나 연대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의 현실을 진단하고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교육 분야에 있어서도 한 학교, 어느 지역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교육 전체의 양상과 세계 변화의 조류를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시야를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만 생각해도 한 발을 어느 쪽으로 내딛어야 할지 막막하고 요원한데 국가 전체의 비전을 바라보았던 선생의 시야는 그야말로 거인의 것이라고 하겠다.
사실 학교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사람에 대한 희망을 보는 일보다 지치는 일을 더 많이 겪게 마련이다. 그것이 학생에게든, 동료에게서든, 학부모에게서든 말이다. 하지만 선생은 역사가 반드시 진보하며 정의가 승리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 믿음과 더불어 억울하게 희생된 자는 예수 재림의 그날 구원받을 것이라는 종교적 신념도 함께 했다. 세상의 악과 폭력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완성의 과정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신을 향한 그 많은 고난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사형 선고를 받고 6년을 감옥에 갇혀 하루에 열 시간씩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6년을 책을 읽는다면 그 인간이 몇 단계나 성장할 것인가.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과오를 뒤치다꺼리할 다음 세대의 지도자를 감옥에서 고이 길러온 셈이다. 선생 역시 훗날 그 시절의 독서와 사색들이 국가 경영의 뒷받침이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그 시간 동안 선생이 올린 기도 가운데 가장 와닿는 것은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라는 것이었다. 이 훌륭한 사람도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내가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구나. 수십 년 전 옥중에서 나온 말에도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이 시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그 시간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혼자서 가정과 아이들을 건사하며 민주화와 여성 운동을 이끌고 게다가 매일같이 편지를 써서 서로를 위로했던 이희호 여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내의 옥바라지야말로 그 삶을 견디게 해 준 산소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올해 영면하신 이희호 여사와 편안한 곳에서 부디 편안한 삶을 함께 보내시길 바란다. 그 시간 동안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옥중서신>은 그런 면에서 인간 김대중의 성장 기록이면서 위대한 사랑의 기록이기도 하다. 말년의 취미가 되었던 꽃 가꾸기에 대한 묘사도 인상적이다. 꽃과 자식은 가꿀수록 아름다워진다고 하며, ‘나는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음을 탄했지만 꽃들은 내 작은 뜰을 한세상으로 여기며 웃었다. 꽃은 내 속으로 들어와 가만가만 시름을 닦아 주었다.(p505)’
<김대중 자서전> 1권은 드디어 1997년 12월 18일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장면에서 끝난다. 이미 그 시절을 지나왔으니 그 시절 나라가 망했다며 온 국민이 힘겨워했던 IMF라는 시대적 위기와 신자유주의의 물결 그리고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2002년 월드컵, 그리고 남북 정상회담에 이은 노벨평화상 수상 등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대통령으로서의 이야기가 2권에 이어질 것이다. 1학기 동안 1권을 읽었으니 2학기 동안에 2권을 천천히 읽어볼 생각이다. 이 시간과 책읽기가 다하고 나면 나는 또 어떤 생각의 가지를 더 뻗게 될까.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는 것은 이렇듯 언제나 즐겁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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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김대중 대통령은 1924년 1월 6일에 하의도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해 김 씨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 사이에서 3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를 위해서 4학년 때 하의도에서의 안정적 기반을 포기하고 아무런 기반이 없는 목포로 이사를 하셨다. 일곱 살 때부터는 초암 김연 문하에서 한문학을 배우다가 보통학교에 다녔다. 어렸을 때부터 매일신보를 보면서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나중에 임금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보통학교 5학년 때에 조행이 '을'이어서 수석졸업을 하고도 2등상을 받게한 담임 선생님은 그가 사업을 하고 있을 때, 그에게 어려운 부탁을 했다. 그는 사람의 관계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하지 않는 인간관계를 맺자고 명심했다. 목포상업학교 3학년 담임 선생은 삶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방법에서의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고 하셨다.
해방공간에서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이 오직 희망과 열정만으로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였다. 이른바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해를 따져서 세력을 형성하는 것을 보고 슬프고 화가 났다. 김구의 암살과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으로 현대사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김구 선생이 총선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정말로 아쉬웠다. 정치인은 현실을 살펴 미래를 향한 진리를 구하는 것이지 진리만 붙들고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은 안된다. 한국전쟁 중에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6,25는 평생 민족의 화해와 전쟁이 없는 세상을 꿈꾸게 했다. 1952년 정치파동에서는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독재정권을 연장하는 친일파와 그 동조세력의 야욕을 똑똑히 지켜봤다. 지도자가 깨긋하지 못하면 사회가 혼탁하고, 국민을 기만하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것을 느끼고 보았다.
1954년 목포에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패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장면을 모시고, 토마스 모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958년에 인제에서 출마하려 했으나 자유당의 농간으로 후보 중복 추천이 문제되어 후보등록이 무효가 되었다. 다시 출마한 보궐선거에서는 공산당이라는 흑색선전으로 낙선하였다. 그리고 아내가 세상을 떴다. 정말로 잔인한 세월이었다.
제2부 6,25 당시의 무책임한 처신으로 축출되었어야할 이승만은 오히려 독재기반을 강화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이승만의 주위에는 친일파 간신배가 우글거렸다. 이승만은 고집은 있었지만 철학은 없었다.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의거는 어떤 폭력이나 전투적인 슬로건도 없는 성숙한 시위로 중산층의 지지를 받고 성공적인 혁명이 되었다. 정치권은 혁명의 주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장면 내각은 출범부터 흔들렸다. 신민당(윤보선의 민주당 구파), 언론, 혁신계, 신풍회의 협공이 있었고 국회 밖에서는 억압된 욕구가 분출된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1961년 봄이 되자 만사가 잘 풀려 나갔고, 그는 인제 보궐선거에서 네 번의 패배 만에 처음 승리의 맛을 보았다. 그런데 장면정권을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명목으로 5,16 군사 쿠테타가 발생했다. 대운을 타고난 박정희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쿠테타를 성공하였고, 대한민국의 역사는 30년이나 후퇴하였다.
1962년에 5월의 신부를 맞이했다. 군사정권은 민주당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베꼈으나 농촌에 대한 배려는 없고 대기업과 도시 우선 정책을 밀어 붙였고, 4대 의혹사건이 터졌다. 한일회담에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는 피할 수 없으나 협상에서 불이익은 없어야 된다는 조건부 반대를 주장했으나 협정결과는 분노를 넘어 수치스러웠다. 야당 강경 투쟁은 미국과 박정권이 밀착하게 만들었고 박정권의 독재화 빌미를 제공하였다. 의사진행 발언을 5시간 19분 동안 했다. 1967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여당은 그를 낙선시키려고 모든 권력을 동원으나, 그의 승리를 막지 못했다. 김신조 사건은 삼선 개헌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제3부 1970년에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다. 드디어 그의 최대 정적 박정희와 외나무 다리에서 만났다. 그는 정부의 실정이나 비리에 공격만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책이나 비전을 제시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연구하고 수없이 다듬없다. 경제정책의 핵심으로 대중경제론을 내걸었다. 이는 경제성장과 소득의 공정 분배, 물가안정을 합리적 조정으로 경제 민주화를 이루려는 구상이다. 부정선거가 치밀하게 계획되고 진행되었다. 그가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에 집 마당에 폭발물이 터졌으나,경찰은 오히려 증거를 조작하고 고문으로 자작극으로 몰아갔다. 1971년 4월 장충단공원 유세에는 정부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100만의 청중이 모였다. 정부 여당은 그를 빨갱이로 몰아가고 일부 신문들은 이승만 정권 때는 없었던 지역감정을 조장했다. 부정선거는 투표용지 분실, 중복 투표, 대리투표와 개표 부정이 잇달았다. 그는 선거에서 이겼으나 투개표에서 졌다.
1971년 5월의 국회의원 선거 지원유세에 나선다. 그는 진주, 부산에서도 인기가 대단했다. 투표 전날 목포와 광주간 국도에서 8톤이 넘는 덤프트럭에 받히는 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의 후휴증으로 고관절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중앙정보부는 야당의 총재 경선에 조직적으로 개입했다. 두 번 다시 박정희의 경쟁자로 나서지 못하게 정치적 불구로 만들려고 했다. 세계는 데당트 시대로 접어들었으나 박 정권은 영구집권을 위한 수단으로 북한을 이용하였다. 그는 통일에 대한 비전으로 평화 공존, 평화적 교류 확대,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는 3단계 통일론을 주장하였다. 한 민족 두 개의 정부 체제로 나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1972년 10월에 유신헌법이 공포되었다. 그는 망명을 결심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한민통을 세워서 반정부활동을 벌였다.
제4부 1973년 8월 8일 도쿄 힐튼호텔에서 그는 자칭 구국동맹행동대에게 납치당했다. 그들은 현장 살해를 계획했지만 목격자의 출현으로 납치 후 살해로 바꾸었다. 납치 엿새째 날에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납치는 박정희의 지시와 중앙정보부장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그런데 사건의 실체가 밝혀졌는데도 한국과 일본의 정치인들은 진실을 은폐하려고 했다. 국내언론은 침묵하였고 여당은 자작극으로 몰았다. 심지어는 미국과 일본에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보도되었다. 그와 그의 가족들에 대한 가택연금이 시작되었다.
군부독재와 맞서 싸울 세력은 학생들뿐이었다.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으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서울에서 가장 먼 진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감방에서 세상과의 유일한 소통 수단은 편지였고 돈독한 신앙과 독서를 통한 지식과 지혜를 얻었다. 1977년 12월에 서울대 병원으로 이감되었지만, 이는 국내외의 석방 압력을 피하려는 술책이었다. 그들은 운동은커녕 편지도 못하게 했다. 1978년 12월에 특별사면되었으나 연금은 계속되었다.
박정희의 군사쿠테타는 명분이 없었다. 그들이 마련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장면정권이 만들어 놓은 것을 베꼈다. 이를 시행하면서는 뒤틀어서, 대기업 육성과 도시개발만을 추구했고 특혜를 받은 대기업은 정권에 특혜의 일부를 받쳤다.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은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꾼 것 외에는 변한 것이 없고 골병만 들었다. 박정희는 전라도에 문화적 차별, 지역 차별, 인재 등용 차별을 했다. 국정 전반은 일본식을 따라 했다. 민주주의는 쿠테타나 암사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진정한 민주주의이다. 1979년의 12.26사태로 서울의 봄이 왔으나 최규하 대통령의 우유부단한 처신과 정치권의 낙관적인 태도는 새로운 불행을 가져왔다.
제5부 전두환의 5.17 군사쿠테타 세력은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을 조작하고 광주를 희생물로 삼았다. 1980년 9월에 반국가 단체 수괴 혐으로 재판관의 입이 찢어졌다. 사형이 선고된 것이었다. 그에게는 정신적 위기의 사건이었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글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풀어 주지 못했다. 오직 신앙의 결단만이 위안이 되었다.그는 세계의 정치 지도자들의 도움이 있었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감옥에서의 낙은 독서, 가족과의 면회와 편지를 받기, 화단 돌보기였다. 1982년 12월 23일에 형집행 정지와 함께 미국으로 강제 출국되었다. '행동하는 양심'을 발행하였다. 국내에서는 정보기관이 뜬소문을 흘리며 인격에 대한 비열한 테러를 가하였다. 그는 1985년 2월에 귀국하였으나 6월 항쟁과 6.29선언으로 사면, 복권될 때까지 55차례의 가택연금을 당했다.
유교의 영향이 강한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가능한가에 대하여 자주 질문을 받았다. 단군신화를 비롯한 건국신화의 근본정신은 홍익인간, 사인여천 등의 민본정신이다. 최근 100년의 역사는 권위주의와 투쟁의 역사이다. 유교의 근본정신은 민본주의이다. 우리의 역사 속에는 민주주의의 원리가 존재한다. 민주주의는 교육수준이 높은 나라에서 창출될 수 있는데,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교육 수준이 세계 정상급이다. 이 땅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제6부 9차개헌으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산 시와 후보 단일화는 정국의 최대 현안이었다. YS와 언론은 4.13 호헌조치로 무효가 된 불출마 선언을 유효한 약속으로 왜곡보도하였다. 심지어 독재자들의 음해 논리를 그대로 들이댔다. 그는 선거 기간 내내 이념 공세에 시달렸다. 결국 그는 투표함 바꿔치기의 부정선거로 또 한번의 고배를 마셨다. 그는 단일화 실패에 군부정권이 연장되는 것에 통탄을 하며, 자기라도 양보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단일화했으면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노태우 정부의 출범으로 5공청산 작업이 시작되었다. 6월 항쟁이 국민의 힘으로 완성되지 못하고 6.29선언과 모호한 타협을 한 결과 민정당, 통일민주당, 공화당 간의 야합이 이루어지고 민주 투사 YS는 사라졌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기득원의 언론은 독재의 나팔수 역할을 했으나 국민에게 사죄하는 최소한의 양심도 없이 계속하여 일부 기득권층을 위한 이익 매몰주의의 행태를 보였으나, 그 누구도 이를 응징하지 못하는 현실은 매우 유감스러웠다. 이런 와중에 치러진 1992년 대선에서의 쓰라림은 그가 정계은퇴를 선언하게 하였다.
수단과 바업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고야마는 김영삼 씨가 부럽지는 않지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슬픔은 낙선보다는 지역감정과 용공 조작에 좌우되는 국민, 미래를 위한 변화보다는 이기적인 안전에 집착하는 국민에 대한 실망이었다. 캠브리지에서 스티븐 호킹, 앤서니 기든스, 존 던 등의 세계적인 석학들과 교우한다. 흡수 통일된 독일의 현실은 그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그는 귀국하여 민주주의 국가 완성과 민족 통일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정계에 복귀한다. 세상을 바구어 보고 싶었다. 드디어 1997년 12월 대선에서 승리를 한다. 지난 겨울이 혹독했던 만큼 내일의 봄날은 아름다워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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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지 2주년이 되는 날이다. 사실 이 자서전은 작년 이맘때쯤에 읽었는데, 오늘에서야 정리하는 기분으로 서평을 쓰게 되었다. 게다가 난 연대기 순으로 나눠진 두 권의 자서전 중 2권부터 읽었는데, 2권과 1권은 매우 다른 느낌이 들었다. 2권은 대통령 취임부터 퇴임 후 생활에 이르기까지가 서술되어 있는데 매우 사료적이고 공식적인 느낌이 든 반면, 1권은 출생부터 대통령 선거 전까지의 일대기를 다루면서 매우 격정적이며 감동적인 느낌이 들었다. 바로 인간 김대중을 몸소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자서전 1권 서문에서 저자 스스로의 일생을 돌아보며 서술한 내용들은 바로 자신의 인생관을 정확히 나타내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스스로 일생이 고난에 찼지만 결코 불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무엇을 성취해서가 아니라 바르게 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간혹 왜 정치를 시작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는데, 그것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한국전쟁 중 피난지 부산에서 일어난 정치 파동을 보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 스스로는 정치를 증오하거나 정치인을 폄훼하지 않았다면서, 정치인은 현실의 장에서 국민과 힘을 합쳐 국민을 괴롭히는 구조적인 악을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치를 심산유곡에 핀 순결한 백합화가 아니라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 같은 것이라 여겼다면서, 본인이 훌륭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정치인으로 살아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늘 길 위에 있었기에 고단했지만 자신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았고 게으름을 경계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스스로 돌이켜보면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고 술회한다.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사당에 앉는 데까지 9년, 1970년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무려 27년이 걸렸다는 역사가 그렇다. 게다가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고, 6년간 감옥에 있었으며, 수십 년 동안 망명과 연금 생활을 했다는 것, 이른바 사형수와 대통령이란 이미지, 그것이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상징인 것이다. 이 책은 첫 장부터 감춰져 왔던 가족사를 언급한다. 이 자서전이 출간된 시점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머니가 둘째 부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어머니는 큰집에 들어가지 않고 따로 살았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 본인은 오랫동안 정치를 하면서 자신의 출생과 어머니에 관해서 일체 말하지 않았다면서, 그것은 평생 작은댁으로 사신 어머니의 명예를 지켜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추억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이 이어진다. 소를 몰고 야산에 올라가는 일상의 일이라든지, 초여름에 보리서리, 가을에는 콩서리를 하고 다녔다는 전형적인 시골 아이의 순진무구한 삶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청년 시절의 해방 정국 속에서 자신은 건국준비위원회 목포 지부에 가담했다는 것, 그리고 목포 지부가 공산주의자들이 다수가 될 때 공산당에 특별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는 사실도 언급하고 있다. 해방정국과 대한민국 수립의 혼란 속에서 김구 선생에 대한 저자의 평이 인상적이다. 김구 선생을 감히 평한다면 길이 빛날 독립투사였으며 절세의 애국자였지만 정치인으로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고 말한다. 좌우 합작 논의가 있을 때 선생은 그 속으로 뛰어들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분단을 막아야 한다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탁통치를 무조건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시한부 신탁통치를 받아들여 3년이나 5년 후에 독립을 모색했어야 했다는 말이다. 때를 놓쳐 남쪽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한다고 결정되었다면 총선에 참여했어야 옳다고 말한다. 김구 선생이 전면에 나서 총선에 참여했다면 소속 정당은 과반 의석을 확보했을 것이라고 점치고 있다. 결국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그것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의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이승만 정권에서 친일파들이 득세했고, 그 친일파의 후손들은 좋은 환경에서 성장하고 많이 배워서 대대로 영화를 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치인은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선택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상황이 나쁘면 최악을 피하고 차악을 택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란 말이다. 정치인이란 현실을 살펴 미래를 향한 진리를 구하는 것이지 진리만 붙들고 현실을 도외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의 생각이라 피력하고 있다. 김구 선생은 자신과 우리 민족이 존경하는 분인데 정치적 행적에는 이렇듯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한다. 이어 한국전쟁이 터진 날 저자는 목포에서 출장을 와 서울에 있었다고 한다. 전쟁이 시작된 지 사흘째 되는 날, 숙소에서 다른 손님들과 함께 숨죽이며 이승만 대통령의 서울 사수 방송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날 날이 밝아 나가 보니 인민군이 광화문에 들어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도 남쪽으로 피난을 갔는데, 천안, 당진, 보령, 홍성, 김제 등을 거쳐 서울을 탈출한지 20일 만에 목포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런데 목포도 이미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고, 게다가 집에 들어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우익 반동분자로 찍혀서 집 안에 있는 가재도구도 모조리 빼앗기고, 동생도 한국군 군속이었다는 이유로 잡혀갔으며, 차남 홍업을 집도 병원도 갈 수 없어 방공호에서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도 며칠 뒤 잡혀 목포형무소에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본인의 청년 시절 이야기가 계속 된다. 민우회에서 향후 부인이 될 이희호 여사를 만난 이야기도 나온다. 서로 처음부터 이야기가 잘 통했고, 시국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저자는 월간 잡지 신세계의 주간도 역임했고, 동양웅변전문학원도 운영했다고 한다. 뒤이어 저자가 정치에 입문하기 시작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특히 진보 정치인 조봉암 선생을 만난 이야기가 나오는데, 정치 현안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어서 만났다고 한다. 저자가 조봉암 선생에게 공산당도 겪어 보고 다시 민주 진영에서 일하고 있는데, 국민에게 왜 공산당이 나쁜지 공정한 입장에서 알리면 좋을듯하다는 이야기를 했더니만, 조 선생의 답변이 맞긴 한데 그럴 경우 지지층이 이탈할 수도 있다는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 대답에 실망했다고 한다. 지도자라면 국민을 위해 결단할 때 결단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저자 본인이 아는 조봉암 선생은 인간미가 넘치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면서, 단지 난국을 돌파하는 요령이 부족했다고 평한다. 정치에 처음으로 뛰어들어 강원도 인제에 출마할 당시 후보 등록 방해 사건에 대한 서술도 자세히 나와 있다. 선거판에 뛰어든 지 7년 만에 당선 확정된 감격 역시 잘 서술되어 있다. 이 당시의 정치인들에 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가가 인상적이다. 그 당시 군정 경무부장으로서 조병옥 박사의 행적은 높이 평가하고 싶지 않다면서, 하지만 정치인으로 변신한 뒤로는 줄기차게 독재에 맞서 싸웠다는 점을 높이 샀다. 조 박사가 없는 야당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지도력은 탁월했고, 거기에 아량까지 지녔다고 언급하고 있다. 장면 총리의 경우는 유약해 보였고, 어떤 때는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멀리 내다보는 눈을 지니고 있었다면서, 장 총리는 인간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대차지 못했다고 평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굳건한 신념은 흔들림이 없었지만, 그런 점이 혼란기의 지도자로서는 흠이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군사정권 시절의 투쟁의 기나긴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5.16 군사혁명 때문에 금배지 한번 달아보지 못했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이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활약상이 소개되고 있다. 특히 1964년 한일회담 관련해 조건부 반대 입장을 펼쳐서 그게 자신의 정치 인생에 정말 괴로운 시기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사쿠라라고 손가락질 하면서 악성 소문들이 바다 건너 자신의 고향인 하의도까지 전해져 아버지가 직접 편지해서 그러지 말라고까지 했다고 한다.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제 7개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맞대결에 48표 차이로 역전승한 유명한 일화와 유신시대를 미리 예견해 총통시대가 온다고 선언한 이야기 등은 익히 우리 현대사에 잘 알려진 사실들이다. 그 총통제와 영구집권 음모를 만천하에 발표한 그 날이 바로 1971년 4월 18일 장충단공원 유세라고 한다. 100만 명의 청중들이 몰려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그 때 정부에서 방해공작으로 그 날 고궁을 무료로 개방하고, 일요일인데도 향토예비군을 비상 소집했으며, 서울시내 모든 극장을 무료 입장시켰다고 한다. 이어 1971년 대통령 선거의 개표부정과 투표 부정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다. 저자 자신의 부부의 표도 무효처리 되었다는데, 선관위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대통령 후보의 표가 무효로 처리되는 세태였으니, 스스로 선거에서 이기고 투개표에서 졌다고 언급하고 있다. 뒤이어 유명한 김대중 납치음모 사건 전말과 생환에 대한 이야기도 전개되고 있다. 또한 그 당시 신민당 당수였던 유진오 총재에 대해서는 정치적 안목과 지도력에 문제가 있었다고 평한다. 뒤이어 유신시절과 서울의 봄 시절 가택연금, 사형선고, 수감생활의 파란만장한 이력들이 전개되고 있다. 또한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실기한 이야기도 나온다. 그 때는 어찌됐든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기 때문에 진심으로 미안했다고 언급한다. 자신이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고 말한다. 지난 일이지만 너무도 후회스럽다면서 다시 한 번 국민들에게 분열된 모습을 보인 것은 분명 잘못됐다고 자평하고 있다. 그 밖에 이 책이 나올 때 화제가 되었던 이야기인 박근혜 씨에 대한 일화가 언급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25년 만에 김대중 도서관에서 박근혜, 그 당시 한나라당 대표를 만났다고 한다. 그 때 박 대표는 뜻밖에 아버지 일에 대해서 사과를 했다고 한다.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 말씀드린다고 말이다. 저자 본인은 그 말이 참으로 고마웠다고 술회한다. 박정희가 환생하여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는 것이다. 사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자신이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몇몇 주변 사람들의 평을 담고 있는데, 문익환 목사의 경우 참으로 순진무구한 분으로 용기가 있고 어떤 경우라도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서, 하지만 이상만을 쫒다가 가끔씩 현실을 못 볼 때가 있었다고 술회한다. 현대의 정주영 씨는 정치에 입문하지 말아야 했다면서, 정치를 너무 쉽게 보는 듯 했다고 말한다. 전반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그동안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역사속의 일들에 대해 본인의 입으로 생생하게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정치 드라마나 이전에 출간했었던 저서들을 통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그의 일생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하게 된다.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모두 그랬지만, 일제 강점기, 해방, 군정, 전쟁, 분단, 경제성장, 민주화를 모두 체험하며 살아온 그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세대와 호흡을 같이 하며 그들의 등불이 되어준 지도자로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애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혼란스럽고 험한 시대를 살아온 탓이리라. 본인도 이 책에서 사형수가 대통령이 된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고 자평한다. 그 기적은 본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국민들이 일궈 낸 현대사의 기적일 것이라는 대목에서 그와 함께 성장해온 국민과 민주화의 열기를 새삼 되새길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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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양심 김대중 온 생애를 기록한 '정본 자서전'
김대중의 삶은 곡 20세기 한반도의 역사라고 이야기 한다. 그만큼 김대중은 현대사의 한복판에서 사업가로,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15대 대통령으로 그의 삶을 살았다. 대한민국의 몇명 안되는 대통령 중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대통령, 그렇기에 이 자서전이 의미를 갖는 것이며, 나 또한 절판되기 전에 서둘러 책을 구매하였다. 이 책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전 영부인의 글로 시작하여 전쟁속에서의 어린시절의 삶과 도전, 그리고 좌절, 다시 도전하는 삶을, 김대중 대통령을 존경하였던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해 노력했고 그 한가운데서 열심히 도전하고 민주주의의 꽃인 대통령을 한 사람 그의 인생에서 우리의 삶의 도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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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이 태어나서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담겨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김대중 대통령이 살아온 생애가 우리나라의 역사이며, 우리나라의 정치사임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와, 태평양 전쟁에 나갈뻔한 이야기, 해방 이후의 혼란스러웠던 사회, 625 한국전쟁에서의 생사를 오가는 위험했던 순간, 이승만 독재 정치에 대항하는 정치 신인, 장면 총리의 사랑스러운 대변인, 516 군사 쿠테타로부터 시작되는 정치적인 시련, 김영삼과의 승부를 통해 대통령 후보가 되는 사건, 그리고 박정희와 한판의 승부와 패배, 유신정권에서의 어려움, 짧은 서울의 봄과 긴 군사독재 기간, 629와 육 공화국 출범, 두 번의 실패와 마지막 승리. 적고 보아도 길다. 이 책은 한국의 현대 역사를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통해 쭉 지나쳐오는 과정이다. 개인의 자서전이라서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어나, 극도로 제한되어 있고, 정치사적 흐름만 있다. 굉장히 조심해서 쓴 느낌이고, 그 만큼 특별한 사건을 언급하거나(우리가 일반적으로 다 알고 있는 사건) 개인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자서전의 특성상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정적인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다 전직 대통이다.)에게는 좀 차가운 느낌이다. 자서전임을 감안하고 읽을 만하다.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김대중이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첫째 똑똑한 사람이라는 느낌이다. 그가 대변인으로 정치를 시작하였으며, 정책 수립과 결정 등에 밝았던 것 같다. 둘째 승부수와 의지가 강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정치를 시작하고 4번의 낙선 후에 한번의 승리를 하게 된다. 옛날 정치가 돈이 많이 들었을 것이고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끝에는 성공을 한다. 셋째 진보적인 사람이다. 반면에 이 책을 통해서는 인간관계를 거의 알 수가 없다. 그의 정치적 동지 몇 명이 언급되긴 하지만, 동지들과의 관계에서 인간미를 표현하는 부분이 약하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제일 궁금했던 것이 6월 항쟁 이후의 야권에 분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냐였다. 나의 정치적 첫번째 패배였고, 그 패배가 양김의 분열에서 있다고 보았기에, 양김중 한 분인 김대중 대통령은 어떤 생각을 가졌고, 또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냐였다. 글을 읽으면서 정치가가 어느 정도 자기애가 있어야 하지만, 역시 자기중심적이다는 생각이었다. 실망했다. 하지만 5년 뒤에 (조금 다른 식이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되고, 다시 뒤를 이어 김대중 대통령이 되니, 길게 보면 크게 다르지는 않게 된 것 같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룩한 정책 중에 큰 것이, 여권향상을 위한 가족법 개정이었다. 이 부분 (자서전만 보면) 그 분의 정치력으로 이룬 것 같다. 또한 지방자치제에 대해서도 대통령의 공이 크다. 그리고 이 분이 지역감정에 가장 큰 희생자임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래서 지역감정만 없었으면, 아니 호남 출신만 아니었으면 쉽게 대통령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역감정을 없애는 방법이 뒤에 나오겠지만 옳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한국 정치의 굴곡과 김대중 대통령의 개인적인 불행에 대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또한 한국정치사에서 일어났던 불행들 (4월혁명,516,한일협정,3선개헌,유신,광주항쟁)에 대해서 읽으면서 가슴이 짠했다. 대통령이 훌륭하신 것은 당신의 별명 행동하는 양심이고, 군사독재에 대해서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항거한 것이다. 인동초이고 행동하는 양심이다. 위대한 정치가이고 위대한 스승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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