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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상실된 사회라고 푸념하고 인간개개인과 집단의 신뢰 회복을 부르짖어도 모자란 형국에‘의심(doubt)’을 옹호하고 찬양한다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하겠다. 여기서 의심은‘단순히 근거없이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보편적 확실성을 지닌 소수의 진리를 제외한 영역에 대한 조심스럽고 신중한 생각이나 비판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궁극적으로 이 저작은 다원화로 인한 이데올로기의 극한적 대립과 갈등을 무마하고 오늘의 인간사회가 지향하여야 할 가치와 도덕성으로서‘중용(中庸)’의 정치를 구현하여야하는 당위성을 말하고자 함이지만, 이의 도달을 위한 과정으로서 우리들이 처해있는 이념과 가치의 실재에 대한 성찰은 결론적 논지(論旨) 못지않게 중대한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서구가 인식하는 세계사회의 다원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로서, 바로 이 다원성으로 인한 숙고하여야 할 영역의 무한한 증가, 그리고 탈제도화로 인한 상대주의와 근본주의의 대두와 대립에 대한 고찰은 일부 편협하거나 왜곡된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 논의는 동일한 사안에 봉착한 우리로서는 중요한 시각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겠다.
이 담론의 출발점은“서로 다른 인간집단이 사회적으로 평화롭게, 서로 원만한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는 상태”라는‘다원성(Plurality)’이다. 다원화라는 다양한 문화와 인간생활의 충돌은 물질적 측면뿐만 아니라 인지와 규범의 차원에서 선택하여야 할 영역을 증가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즉 개인이나 집단에게 선택이 이미 정해진 제도의 많은 것들이 이 다원화로 인하여 선택을 숙고하여야 하는 문제로 전환되거나 새로운 결정의 요구를 양산한다. 예전에는 물론이라고 당연시되던 것들이 더 이상‘물론’이 아닌 의심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다시말해‘상대화’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다른 것을 존중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하거나 또는 무관심으로 수용하기도하며, 방어하기도 한다. 즉 개인이나 집단이 기존에 지니고 있던 시각과 새로운 정보가 모순이 되어 충격을 받고 흔들리게 되면, 그 부조화의 정보를 전달하는 자를 회피하거나, 아예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아버리는 것과 같은 행동방어 또는 인지방어를 시작한다.
특히 종교와 정치권력은 이러한 인지방어 수단의 개발에 탁월하단다. 즉 부조화 전달자를 매장해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죄인이다. 이단자다. 열등인종이다. 무지한 자들이다...”식의 인신공격을 통해 완전 신용 불가능한 범주로 묶어버림으로서 무슨 말이 나오든지 믿지 않도록 하는 것처럼 허무화시키고 물리적 청산을 시켜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우리사회의 오래된‘빨갱이’,‘친북’과 같은 언어로 반국가 사범으로 매도하거나, ‘미네르바’사건처럼 하찮은 부류의 무지한 처사로 치부하여 아예 사회에서 격리시켜버리고 권력의 부도덕성이나 정책의 실패를 은폐하는 것에서 발견 할 수 있다.
한편 이렇듯 다원화로 인한 수용의 태도와 행동은 진리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진리라는 개념자체가 무의미하게 폐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모든 사안에 대해 의심으로 시작하는‘상대주의’와 “진리의 빛이 넘치는 내부세계와 무지의 어둠이 뒤덮고 있는 외부세계”로 엄격하게 이분법적 체제로 구분하여 자신들만이 명백한 진리라고 주장하는‘근본주의’로 나뉜다. 근본주의자들은“믿음의 부족은 죄이며, 신을 배반하는 일”이라고 의심을 받아주지 않으며, 상대주의자들은 무한한 의심으로 개인과 집단 모두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결국 “상대주의가 사회 안정을 저해하는 이유가 의심을 과대화하는 데 있다면, 근본주의의 위협은 의심의 과소화에서 온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의심은 어느 정도까지에서 멈추어야 할 것인가? 과잉도 아니고 과소도 아닌 균형의 어느 지점에서. 여기서‘허버트 미드(Herbert Mead)’의 “타인의 역할-태도를 상호적으로 가정/내면화”하는 상호성 체험으로서 감정이입은 도덕성에 있어서 중요한 판단의 근거를 제공한다. 고문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는데, 누군가 고문희생자의 입장을 상호성을 통해 느낄 수 있다면 폐지를 주장할 것이고, 자신과 상호성의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감정이입을 회피할 수 있다. 즉 홀로코스트 동안의 나치 학살자들의 심리상태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봉쇄와 같이 아예 자신들과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다시말해 가장 악랄한 공격으로 타자의 본성을 부정하거나 억압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내면화한 사회이미지의 수준에 따른 도덕적 범위를 정하여 정의화(正義化)하는 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곤 이렇게 외친다. “우리 주 예수여, 이 심판을 내리소서”,“내가 너의 목을 베는 것이 아니요, 예수께서 하심이라.”라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며, 단지 신의 도구일 따름이다! 라고. 희생자를 만드는 자신들의 책임을 부정한다. 이렇듯‘제한된 책임성’이라는 개념으로 거대한 허위의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사실 의심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확실성’이라는 소수의 명백한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가 않다. 도덕적 판단을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그리 명백하지 않으며, 결국 주저와 의심이 더 많이 장려된다고 할 수 있다.
확신과 의심의 위태로운 경계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로서‘낙태’의 문제를 보면, 태아의 인권을 어느 시점에서부터 인정하여야 하는가에 대해 우린 문제의 답을 모르는 상태에서 도덕적으로 타당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입장에 처한다. “모든 인권을 갖춘 사람은 임신 후 5분 만에 성립한다는 견해와 태어나기 5분전까지도 사람이 아니다”는 견해가 팽팽하게 나뉜다. 과연 존엄성을 가진 인간을 우린 결정할 수 없으며, 알지도 못 한다. 그래서 모르기 때문에 조심스럽고 신중하며 의심을 빼놓지 않는 접근법을 통해 확실성과 의심 사이에 균형을 찾아 중용의 제도로 타협한다. 이는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즉 확실성과 의심의 중간지대를 찾는, 바로 의심을 유지하고 옹호하여야 하는 이유가 된다하겠다.
반대파 목소리를 보장하고, 집권자의 정책 비판역할을 위한 다당제처럼 민주주의는 의심에 기반을 두어 존립하는 체제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헌법국가와 민주적 정치체제가 의심에 사로잡혀있어서는 혼란으로 아무런 일도 취할 수 없게 되며, 바로 이 의심을 유지하려면 국가와 민주적 체제가 의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렇다고 의심을 적대시하면 법률지상주의나 독재정치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처럼 틈만 있으면 확실성으로 억압당할 수 있기에 의심은 취약하고 위태롭다. 그래서 불확실성, 선택의 영역이 증대한 다원화된 오늘의 사회에서 중용의 미덕은 실로 중차대하며, 의심이 옹호되고 찬양되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서로 다른 문화와 인종, 생활관습이 그야말로 첨예하게 충돌하는 다원화시대에서 인간사회가 어떻게 화합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가에 대한 통찰력이 빛나는 도덕철학의 수작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근대성에 대한 서구 일방적인 시각이나, 포스트모던을 급진적 상대주의라고 논의 없이 왜곡하기도 하고,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는 실재의 정의를 위태롭게 한 주범이라는 등의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의 시각은 커다란 흠결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아쉬움을 남기는 중용의 사회학이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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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이란 무엇인가? 근대성의 병폐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런 물음에 대해 종교·도덕·정치적 측면에서 해답을 구한 책이 바로 《의심에 대한 옹호》(산책자, 2010)이다. 이 책은 미국 사회학자 피터 버거가 이끌던 보스턴 대학교 문화종교국제연구소의 연구프로젝트 '상대주의와 근본주의의 중용'에서 비롯된 소박한 결과물이다. 근대성의 원치않던 산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상대주의와 근본주의라는 두 극단론인데 이 두 극단론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비판적 사고의 근간이 되는 '의심하는 믿음'과 더불어 의심·확실성, 진리·광기, 상대주의·근본주의의 중간점에 자리를 잡는 '중용의 정치'를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근대성의 특징으로 다원화와 상대화를 강조한다. 근대성의 첫번째 특징은 '종교의 쇠퇴'라는 세속화가 아니라 다원성에 있다. 과학기술, 관료주의, 생활세계의 다원화는 대표적인 근대적 현상들이다. 여기서 다원성이란 "서로 다른 인간집단이 사회적으로 평화롭게, 서로 원만한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평화와 원만한 관계는 다원성의 근본요소에 해당한다. 근대성의 두번째 특징은 상대화다. 상대화란 "뭔가 절대적이라고 믿던 믿음이 약화되고, 심한 경우에는 소멸되는 과정이다."
그런데 근대성의 두 가지 특징은 각각 심각한 문제를 짊어지고 있다. 다원성의 문제는 "도덕의 근간이 되는 가치의 다원화는 종교적 다원화보다 더 다루기가 어렵다" 는 데에 있다. 즉 도덕적 다원화는 종교적 다원화보다 큰 문제를 불러온다는 점이다. 낙태와 동성결혼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가장 대표적이다. 한편, 상대화의 문제는 두 가지다. 한 가지는 극단적 상대주의는 니힐리즘과 데카당스와 같은 무정부주의적 상황을 초래한다는 점이고, 다른 한 가지는 일정한 조건이 주어지게 되면 상대주의는 재빨리 새로운 절대주의로 탈바꿈한다는 점이다. 억압은 자유를 원하게 하지만 자유는 다시 억압을 갈망하게 만든다는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명제와 마찬가지로 상대주의는 '상대성의 부담'을 야기하고, 사람들은 이런 상대성의 부담과 선택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불합리나 광신에 빠져들게 되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근본주의는 "전통의 당연함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전통의 때 묻지 않은 과거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근본주의는 전통적 가치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나타난다는 점에서 반동적인 현상이고, 상대주의와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에서 매우 현대적인 현상이다. 가령 상대주의의 병폐는 의심의 과대화고 근본주의의 병폐는 의심의 과소화에 있다. 책은 상대주의와 근본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오늘날 사회에서 요구되는 것은 단순한 믿음이나 회의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의심하는 믿음'이라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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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책 제목보다는 부제가 그 책을 더 잘 설명해 준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책 제목인 『의심에 대한 옹호』보다는 '믿음의 폭력성을 치유하기 위한 의심의 계보학'이라는 부제가 책에 관해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잘 모르겠다면 뒤표지를 보면 된다. 뒤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파괴적인 근본주의와 급진적인 상대주의를 넘어, 흔들리는 현대인을 구원할 '21세기 방법서설' 이 문구만 봐서는 굉장히 매력적인 책이다. 책을 보면 알겠지만, 저자가 말하는 급진적인 상대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의심에 대한 옹호』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칼뱅의 신정정치를 다루면서 믿음과 의심이라는 2가지 주제를 논한다. 여기서 잠시, 뒤표지에 적힌 문구로 돌아가자면 '21세기 방법서설'이라는 표현은 누가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잘 뽑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이 말은 철학사에서 꽤 중요하다. 데카르트의 말이 맞았든 틀렸든, (개인적으로는 저 말이 반증 불가능한 명제라 생각한다) 서구 근대철학에 중요한 화두를 던진 건 틀림 없다. 최소한 두 가지 이상으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신을 향한 믿음에서 자아로부터 뻗어가는 사고로 무게축이 옮겨졌다. 둘째, 데카르트의 불완전한 논증 덕택에 (데카르트는 자아의 실재를 증명하기 위해 신을 끌어온다) 철학은 회의주의의 도전에 직면한다. 데카르트 - 흄 - 칸트로 이어지는 동안 근대 철학은 도대체 확실한 인식이 가능하냐는 주제를 놓고 끊임없이 다퉜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와 회의주의(이 책에서는 회의주의보다는 상대주의라는 표현을 많이 쓰긴 하지만)를 다룬 『의심에 대한 옹호』는 21세기판 '방법서설'이라 할 만하다. 정교분리가 원칙이고, 종교의 영향력이 표면적으로 봤을 때는 그렇게 강하지 않은 한국에서는 세속화 테제가 맞아 보인다. 정의하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세속화란 종교의 영향력이 쇠퇴하는 대신 민족국가나 시민사회 등의 역할이 강화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국제정세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한국사회에서는 세속화가 세상 어디에나 적용되리라 생각하지만, 유럽을 제외하면 딱히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는 곳이 없다. 이란의 사례에서나, 신정국가로 조롱받는 미국, 여전히 힌두교의 영향력이 강한 인도 등등. 게다가 니니안 스마트가 제안한 대로 마르스크주의 등의 세계관을 세속 종교로 이해한다면 세속화 이론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한국사회도 성장, 반공이라는 신앙에 가까운 강박관념이 있는 바, 계몽은 개뿔. 근본주의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흔했다. 정작 근본주의자를 설득하지는 못했지만. 『의심에 대한 옹호』에서 주목할 점은, 제목과는 달리 근본주의를 비판하는 것보다는 상대주의를 좀 더 위험하게 본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상대주의란 거슬러 올라가면 헤로도토스와 이븐 할둔에서도 찾을 수 있다며 근대적인 현상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근대적인 의미에서 상대주의는 다음 3가지 특징을 가지는데, 아래와 같다. ㄴ. 지식은 없어도 담론은 존재한다. ㄷ. 어느 서사가 옮은지 따질 필요는 없으며, 그보다는 모든 서사를 해체하여 그것이 어던 권력 이익에 기초하고 있는지 밝혀야 한다. 책의 저자는 상대주의자 중 한 명으로 푸코를 지목하는데, 위 3가지 입장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푸코 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책은 명시적으로 밝히진 않았으나 'ㄴ'을 가장 위험하게 생각하며 난징대학살, 아우슈비츠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도 무의미한가를 되묻는다. 그러므로, 상대주의는 인류가 택해서는 안 될 선택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주체는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먹고 자고 돈을 벌고 소비하는 '나'는 누구인가?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렇게 단순한 논의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포스트모더니즘이 그리는 세상과 주체는 일상을 설명하기에 부적절한 면이 많기는 하다. 일상생활의 자명한 경험과 모순되는 이론이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론은 경험을 정리해서 설명하는 것이지, 부정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104쪽) 그렇다고 저자들이 근본주의를 선택하자는 쪽도 아니다. 이들은 근본주의를 정의하는 대목에서부터 근본주의가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답이 아니라고 말한다. 전통주의는 전통을 당연시 하는 태도이며, 근본주의는 그런 당연함이 흔들리거나 상실되었을 때, 전통의 당연함을 회복하려는 시도라고 밝힌다. 이미 흔들린 정당성을 되찾으려는 시도이기에, 잘 되더라도 절반의 성공 이상은 힘들다. 무엇보다 근본주의의 문제는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의심이 없는 한 민주주의도 없다. (중략) 제도적 저항, 다당제, 대안세력, 민주정치 체제의 핵심에 의심이 없다면 무엇이 있겠나. (170쪽) 결론 부분은 다소 맥빠지는데, 딱히 뾰족한 해법이 없다. 건전한 의심을 계속 유지할 것, 회의주의에 빠지지 말 것을 주문한다. 하긴, 저자라고 별 수 있겠는가. 답 없는 문제인데...... --- 메모 --- 근대성은 배경을 크게 축소시키며 전경을 크게 확대시킨다. = 겔렌의 주어화 (34쪽) 근대화는 다원성을 창출한다. 그리고 다원성은 개인이 여러 세계고나 안에서, 그리고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잇는 여지를 넓혀준다. 세속화 이론이 틀린 부분은 그런 선택의 대상을 '세속적'인 것으로만 예측했던 부분이다. 실제로는 종교도 곧잘 선택된다. (36쪽) 처음에는 거대한 해방으로 경험된 상대화가 이제는 거대한 구속이 되어버리는 것. 이제 개인은 과거의 잃어버린 절대성을 향수 어린 눈길로 돌아본다. 아니면 새로운 절대성을 찾아 나선다. 이제 모색되는 해방은 상대성의 부담으로부터의 해방이며, 현대적 삶이 제시하는 수많은 선택으로부터의 해방이다 (73쪽) 집단보다는 개인 차원에서 도덕을 고려하게 하는 상대주의는 니힐리즘으로 통하는 지름길이다. 또한 그것은 데카당스로도 볼 수 있다. 사회를 지탱하던 규범이 유명무실화되고 허울뿐이거나 숫제 조롱의 대상이 되며, 누구나 남들도 그런 규범에 따라 행동하리라 믿지 않게 되는 (이점이 가장 중요하다) 퇴폐적인 사회상, 그것이 데카당스인 것이다. (106쪽) 상대주의가 사회 안정을 저해하는 이유가 의심을 과대화하는 데 있다면, 근본주의의 위협은 의심의 과소화에서 온다. 극단적인 불확실성도, 극단적인 확실성도 위험하다. (132쪽) 늘 의심과 씨름하는 사람들에 비해, 진실한 신자들은 상당히 유리하다. 의심자들은 주저하고, 너무 깊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진실한 신자들은 그대로 행동할 뿐이다. 그들은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자신감이 넘친다. (215쪽) 권력은 부패하며, 그것이 형편없는 인격의 소유자들이 정부 수반이 되는 이유다. 민주주의는 그 사실을 바꾸지는 않지만, 그 형편없는 인격자가 주기적으로 실각할 수 있도록 하며, 따라서 그들이 집권하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에 한계를 둔다. (225쪽) --- 문제 있는 서술 --- 하지만 경험에서 볼 때, 한 마디를 덧붙일 수 있다. "오직 서양 문명에서만 인간에 대한 이런 감각이 정치와 법률에 제도화됐다." (22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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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이 많은 사람을 싫어하고 의심에 대해 의혹을 갖는다. 잘 믿어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뭔가 의심스러운 눈치를 보이면 기피하려 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의심에 대해 의심스러운 사람에 대해 우리는 경계를 하지만 믿음을 강조하고 믿어주는 사람에게 쉽게 믿음을 갖는다.
그러나 세계적인 사회학자인 피터 버거와 안톤 지더벨트는 이 책에서 맹목적인 믿음의 폭력성과 위험을 지적하고 있다. 무수한 선택이 끝도 없이 늘어진 오늘날의 사회에서 이제 중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의심'이라고 말한다. 믿음이 상실된 사회라고 푸념하고 인간 개개인과 집단의 신뢰 회복을 부르짖어도 모자란 형국에 ‘의심’을 옹호한다니 이 무슨 어이없는 소린가 할 수 있겠지만 피터 버거와 안톤 지더벨트가 말하는 의심은 결단을 내리기 전에 한번 더 고민하고 숙고하는 신중함, 즉 진리를 찾기 위해 선행되는 지적인 활동임을 역설하고 있다. 특히 종교에서의 경우 의심은 죄가 되어 믿음의 부족은 중죄가 되고 신을 배반하는 일이 된다. 따라서 종교에서는 흔히 ‘의심하지 말라’며 이해되지 않는 교리에 대해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진리의 목소리는 의심 섞인 낮은 목소리’라는 파스칼을 말을 인용하면서 ‘진리란 허위 위에 서 있다.’고 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의심과 불확실성은 지식과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임을 역설하며 의심은 믿음의 준비단계라고 주장한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은 의심받아야 마땅하다.’라고 외쳤으며 소크라테스는 학생들과의 논쟁에서 질문을 통해 선입견과 유행을 따르는 믿음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의 목표는 어떤 신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신념과 선입견, 편견을 지워 없애서 정신을 깨끗이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진지하고 일관성 있는 의심을 통해 우상을 버리고 진정한 배움을 얻을 수 있고 우리의 정신을 채우고 있는 오류를 제거하고 현실을 똑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심이 섣부른 결정과 편견의 완충 역할을 하지만 지나친 의심으로 결정과 행동을 대책없이 미루다 보면 커다란 재앙을 빚을 수 있음을 또한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서 의심은 그것을 적정수준으로 묶어둘 제대로 된 합리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그 대안을 작가는 중도의 가치를 역설한다. 이 책에서 결론으로 의심과 믿음의 양 극단의 해결책으로 언급되는 중도를 읽다보면 우리 동양인에게는 붓다와 공자를 통해 너무도 익숙한 것으로 그 내용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동양에서는 이미 일반인들에게 조차 익숙한 중도의 개념을 통해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외의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어째든 종교와 정치 심지어 과학에서 조차 극단적으로 대립하며 저마다의 진리로 믿음을 강조하는 이 어지러운 오늘, 과연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지 혼란해 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믿음이 아니라 의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관념과 전통,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 잡혀 있는 우리들에게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나침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작성 / 김도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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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생각이 살아있는 활동이라고 한다면 생각하는 나가 존재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말을 충분히 의심해보면 그가 말한 생각은 진리(眞理)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진리만큼 탐구하고 싶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만한 것이 있으면 모두 제거하고 출발할 것이다. 그렇게 했음에도 만약 나에게 남은 게 있다면 그것은 진리일 것이다”고 말했다. 이렇듯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의심하는 과정이 ‘방법적 회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의심이 악용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믿음은 얼마든지 의심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의심을 연거푸 의심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심과 믿음의 문제에 대해 피터 버거와 안톤 지더벨트는『의심에 대한 옹호』에서 탁월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는 ‘믿음의 폭력성을 치유하기 위한 의심의 계보학(系譜學)’이다. 저자들이 데카르트의 철학을 주목하는 이유는 근대성이라는 획기적인 사고(思考)의 전환에 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근대성의 특징을 두 가지 측면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하나는 다원화(多元化)이며 나머지 하나는 상대화(相對化)이다. 다원화는 계몽주의의 전통인 세속화의 반대다. 쉽게 말하자면 다원화는 선택이며 세속화는 운명이다. 아르놀트 겔렌에 따르면 선택은 전경(foreground)과 배경(background)로 나뉜다. 전경이 선택이 가능한 삶의 영역인 반면에 배경은 선택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경에서 배경으로 된다면 ‘제도화’라고 하며 그 반대 현상이 ‘탈제도화’가 된다. 따라서 근대성은 탈제도화를 촉진시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상대화는 절대화의 반대다. 알프레트 슈츠는 절대화를 ‘당연시 되는 세계’이며 이는 ‘내적 제도화의 결과’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며 타인과 상호작용을 했을 때 상대화는 관용을 촉진시킨다. 한편 상대화는 ‘설득력 구조’를 가변적으로 만든다. 뿐만 아니라 상대화가 변증법으로 진행되면서 오히려 수많은 선택의 자유에서 도피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사르트르는 ‘자기기만’을 지적하고 있다. 즉 “내가 진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진리가 나를 선택했다. 그것이 나를 이끌었으며,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고 자신의 선택을 위장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들은 근대성을 두루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근대성을 ‘주관성의 귀환’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화가 심화될수록 우려할 만한 상황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을 니체는 “불신의 기술”이라고 불렀다. 세상에는 사실이 있고 확실은 사실을 찾아낸다면 객관성이 가능해진다. 그것은 곧 ‘2차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실에 대해 의심하고, 의심에 대해 또 의심한다면 객관적인 사실은 불가능해진다. 상대주의자들에 따르면 ‘서로 다른 서술이 있고, 그런 서술은 모두 옳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밀 뒤르켐이 “사회적 사실(thing)은 사물로 보라”는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상대주의의 인식론적 결합에 때문에 근본주의가 복원되고 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근본주의는 ‘반동적인 현상’이며 ‘현대적 현상’이다. 보수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근본주의는 전통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전통주의가 전통을 당연시하는 태도이며 근본주의는 그런 당연함이 흔들리거나 상실할 때 출현한다. 근본주의는 ‘재정복 모델’과 ‘하위문화 모델’ 방식으로 상대주의에 대응한다. 재정복이란 스페인이 이슬람 지배에서 벗어나 다시 기독교 국가로 돌아갈 때 쓰여던 용어였다. 그리고 하위문화는 ‘미시 전체주의’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상대주의가 ‘의심을 과대화’는 것이라면 근본주의는 ‘의심의 과소화’에 있다.
우리는 상대주의와 근본주의의 입장을 살피면서 의심과 확실성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로베르트 무질이 “진리의 목소리는 의심 섞인 낮은 톤이다”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객관적으로 삶은 삼단논법으로 합리적이다. 그러나 삶에서 낮은 톤을 없애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그만큼 삶은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며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의심과 불확실성은 의심할 수 있는 진리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는데 있다. 카스텔리오는 성서의「전도서」 3장 2절을 패러디하면서 “의심할 때가 있고 믿을 때가 있다. 알 때가 있고 모를 때가 있다”고 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모름을 앎의 피할 수 없는 준비단계로 보았다. 그리고 의심도 믿음의 준비단계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의심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면서 우리의 의심을 한층 증폭시킨다. 이러한 주된 이유는 인지적으로는 불확실성한데 도덕적으로는 상당한 확실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의심은 판단을 유보한다. 섣부른 결정이나 사전 결정에 대한 완충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의심이 의심받아야 할 때가 된다고 저자들은 충고했다. 만약 이 시점에서 무한한 의심을 하게 된다면 ‘뷔리당의 당나귀’가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의심에 대한 의심은 절망으로 빠져들기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의심의 나쁜 영향으로 절망하는 우리를 구원하는 데 있어 도덕적 확실성이 일정 역할을 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우리가 도덕적 존재라는 것이다. 도덕적 존재를 다루는 분야를 ‘철학적 인류학’이라고 부른다. 철학적 인류학은 인간 조건의 구성 요소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먼저 ‘제도의 필수성’을 말하고 있다. 가령, 교통 신호를 준수하는 것은 생물학적 행동이 아니다. 그 보다는 학습된 행동이며 제도적 행동이다. 또 하나는 인간은 말하고 소통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이 ‘중용의 힘’을 역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대주의든 근본주의든 어느 것 하나만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상대주의는 ‘공연한 의심’을 근본주의는 ‘맹목적인 믿음’을 남용하게 된다. 그러나 중용의 힘은 탁월하다. 지나친 믿음이나 의심으로 빠지지 않도록 조절해준다. 그래서 일까? 괴테는 “의심하지 않는다면, 어찌 확신을 얻을 때의 기쁨이 있으랴?”고 말했는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부조리한 진리나 현실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다면 불행 그 자체다. 거꾸로 의심에 대한 옹호는 자유정신, 비판적인 지성을 모색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책에서 말하는 ‘건전한 의심’이라는 것이다. 건전한 의심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며 보편성을 추구한다. 다시 말하면 건전한 의심은 휴머니즘에 근거한다고 저저들은 주장하고 있다. 또한 휴머니즘을 근거로 하여 ‘핵심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을 구별하라고 했다. 즉 핵심적인 것은 양보하지 않고 부수적인 것의 의견 충돌은 열린 태도로 접근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건전한 의심은 ‘의심과 믿음 사이의 중용을 위한 행동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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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폭력성을 치유하기 위한 '의심의 계보학'』 근대성의 여러 신들, 상대화의 동학, 상대주의, 근본주의, 확실성과 의심, 의심의 한계 그리고 중용의 정치까지... 전체 7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고.. 제목만 봐도 머리가 지끈하다. 먼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은 내가 다 자랑스럽다.--;; 따로 인트로는 없고 시작을 다음과 같이 한다. "의심하지 않는다면, 어찌 확신을 얻을 때의 기쁨이 있으랴?" - 괴테
그렇다. 이 책의 제목은 '의심에 대한 옹호' 이다. 저자는 왜 의심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알리려 하는 것이다. 그 도구로 ( 내가 느끼기에.. ) 종교와 여러 이데올로기들.. 을 사용한 것이다. 아무래도 인문학적 기본 지식이 워낙 부족하다 보니 책이 정말 안넘어 갔다. 집중이 안될 때 늘 그랬던 것 처럼 읽고 읽어도 머리속엔 없고 텍스트가 지나간 흔적만.. 사실 이해가 너무 달리다 보니 읽고 난 지금도 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바를 대부분 기억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책을 덮는 순간 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남아있을 여운이 있다면.. '절대 맹신하지 말 것이며 사소한 것도 의심(?)을 통해 스스로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겠다' 라는 것이다. 중간중간 '아!' 하고 감탄하게.. 그리고 잠시 빠져들게 만드는 글들이 있어 즐거웠다.
전에 읽었던 '두근두근 내인생' 에서 주인공 아이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런것들이 쌓이면 언젠가 한꺼번에 "아!" 하고 다가오지 않겠어요?' 라고..였던가..; 나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며 책을 읽곤 하는데.. 정말 그 순간이 올까? 의심된다.--;; '의심에 대한 옹호' 전에 '한글의 탄생'을 잠깐 손에 잡았었는데.. 정말 텍스트 조차 들어오지 않아 어쩔수 없이 잠시 손에서 내려놓았다... 머리가 벌써부터 인문쪽으로는 잘 안받아 들이려 하는 것 같아 겁이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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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버거, 안톤 지더벨트 지음 | 함규진 옮김 | 출판사 산책자 | 2010.07.29 |
의심이 많은 사람을 싫어하고 의심에 대해 의혹을 갖는다. 잘 믿어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뭔가 의심스러운 눈치를 보이면 기피하려 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의심에 대해 의심스러운 사람에 대해 우리는 경계를 하지만 믿음을 강조하고 믿어주는 사람에게 쉽게 믿음을 갖는다.
그러나 세계적인 사회학자인 피터 버거와 안톤 지더벨트는 이 책에서 맹목적인 믿음의 폭력성과 위험을 지적하고 있다. 무수한 선택이 끝도 없이 늘어진 오늘날의 사회에서 이제 중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의심'이라고 말한다. 믿음이 상실된 사회라고 푸념하고 인간 개개인과 집단의 신뢰 회복을 부르짖어도 모자란 형국에 ‘의심’을 옹호한다니 이 무슨 어이없는 소린가 할 수 있겠지만 피터 버거와 안톤 지더벨트가 말하는 의심은 결단을 내리기 전에 한번 더 고민하고 숙고하는 신중함, 즉 진리를 찾기 위해 선행되는 지적인 활동임을 역설하고 있다. 특히 종교에서의 경우 의심은 죄가 되어 믿음의 부족은 중죄가 되고 신을 배반하는 일이 된다. 따라서 종교에서는 흔히 ‘의심하지 말라’며 이해되지 않는 교리에 대해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진리의 목소리는 의심 섞인 낮은 목소리’라는 파스칼을 말을 인용하면서 ‘진리란 허위 위에 서 있다.’고 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의심과 불확실성은 지식과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임을 역설하며 의심은 믿음의 준비단계라고 주장한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은 의심받아야 마땅하다.’라고 외쳤으며 소크라테스는 학생들과의 논쟁에서 질문을 통해 선입견과 유행을 따르는 믿음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의 목표는 어떤 신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신념과 선입견, 편견을 지워 없애서 정신을 깨끗이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진지하고 일관성 있는 의심을 통해 우상을 버리고 진정한 배움을 얻을 수 있고 우리의 정신을 채우고 있는 오류를 제거하고 현실을 똑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심이 섣부른 결정과 편견의 완충 역할을 하지만 지나친 의심으로 결정과 행동을 대책없이 미루다 보면 커다란 재앙을 빚을 수 있음을 또한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서 의심은 그것을 적정수준으로 묶어둘 제대로 된 합리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그 대안을 작가는 중도의 가치를 역설한다. 이 책에서 결론으로 의심과 믿음의 양 극단의 해결책으로 언급되는 중도를 읽다보면 우리 동양인에게는 붓다와 공자를 통해 너무도 익숙한 것으로 그 내용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동양에서는 이미 일반인들에게 조차 익숙한 중도의 개념을 통해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외의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어째든 종교와 정치 심지어 과학에서 조차 극단적으로 대립하며 저마다의 진리로 믿음을 강조하는 이 어지러운 오늘, 과연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지 혼란해 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믿음이 아니라 의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관념과 전통,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 잡혀 있는 우리들에게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나침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