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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남을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우리는 이타주의의 삶보다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에 입각하여 사는 극히 단순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동정을 사랑인양 착각하며 살고, 때로 도덕의 틀 안에서 사는 극히 이성적인 존재임을 강조하기도 한다. 오늘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의 치열한 경쟁이 지속되고 있으며, 그 속에는 우리의 가식과 탐욕 같은 부끄러운 모습의 단면들이 오래전에 그래왔던 것처럼 습관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진행 되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다. 더불어 살기를 말하면서도 함께 어깨동무 하는 것을 꺼려하고, 양보와 배려의 미덕이 우리 인간의 참된 모습이라며 배우고 실천하기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현실에서 왜 우리는 인간이 가진 강한 이성적 판단의 힘을 잃고 마는 것인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은 오늘날 우리의 사회가 뺏고 뺏기는 그리하여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이분법적인 형태로 만들어지는 현실이 과연 바람직 한 것인지,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그 방법은 실마리는 어디서 풀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과 또한 인간의 도덕적 결함에 의한 본능적 문제에서 부터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문제를 독자에게 제시함으로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하지 않았나 싶다. 특히 내용 중 오늘날 종교의 본질을 왜곡하고 일부 문제 있는 교회 내부의 문제를 신랄하게 파헤침과 동시에, 기독교적 교리와 그 실천의 모순에 갈등을 겪는 주인공 정민우의 심리 묘사와 같은 부분은, 마치 우리들의 현재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독자의 입장에서 책을 읽는 그 흥미의 요소로 작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망루라는 책의 제목에서 느껴지듯 최근 재개발 붐에 따른 도시 빈민들의 철거문제와 관련하여 한때 무모하고 강압적인 공권력 행사로 인해 참혹한 결과를 빚었던 용산 참사를 마치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 이 책에 비슷하게 다루어져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그 죽음들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라는 무언의 암시 같은 것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재림 예수의 모습을 표현함에 있어, 한경태란 인물의 설정은 소설이긴 하지만 너무 비약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작가는 말하기를 지금도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본적인 삶의 생존을 위하여 추방의 언덕, 생존의 망루 위로 올라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의 위험만이 도사린 그곳에 그들을 과연 누가 내몰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바로 우리 자신들이 아닐까 싶다. 내가 살기 위해 우리들 중 그 누구를 추방해야만 하고 국가와 사회는 그것이 당연한 것인 양 수수방관하고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을 그 동안 우리는 여러 사실을 통해 우리는 보아왔음직하다. 그저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만 아니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은 아닐진대, 그 누구도 그러한 문제로부터 도피하려고만 했지 관여하려 들지 않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현재 모습인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만든 그러한 비정상적인 인식의 올가미에 얽혀, 내 이웃이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 자신에게로 덮쳐 올지도 모를 일이다. 주인공 민우와 그의 절친한 친구 윤서는 종교를 통해 배워왔던 순수한 사회정의가 어디선가에는 분명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결국 그들의 눈에 비친 현실은 사회 정의를 빙자한 악의들만 가득 했음을, 그리하여 인간들이 만든 위선과 거짓이 어느새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되었음을 목도하고 하고서야 그 동안 자신들이 바보였음을 깨닫는 과정을 보면, 지금 우리가 실제 겪는 여러 가지의 일들이 바로 그와 비슷하게 연상 되는 것 같아 마음 한편 씁쓸한 생각마저 든다.
우리 모두에게는 불행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용산 참사의 일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사회는 언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모를 만큼 무감각해져 가고 있으며, 우리 역시도 간신히 기억에 떠올릴 만큼 아주 희미한 망각의 강으로 그날의 일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 어느 곳에서는 그와 비슷한 일들이 이미 서서히 불거져 있어 폭발의 날짜만을 기다리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면 그때 또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을까. 이 책은 읽는 그 순간부터 무언가 모를 빨려들 것 같은 마치 블랙홀처럼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이 있어 보인다. 따라서 사회 고발성이 짙게 담긴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기를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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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례 문학상을 받은 작가 분이십니다. <열외인종 잔혹사>라는 작품이었죠. 제가 그 작품에서 기억하는 건 그 작품 자체의 완성도보다, 신인 임에도 문장을 구사하는 공력이 남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장문임에도 호흡이 좋았었거든요. 그것은 곧, 어휘의 선택과 문장의 리듬감이 좋다는 얘기이고, 그것은 대단한 노력이 있었거나 혹은 타고난 공력이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이 분은 후자라고 저는 느꼈었습니다. 왜냐하면 문장이 다소 일필휘지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다듬고 다듬고 또 미친듯이 다듬어 정갈한 느낌의 문장은 아니었으니까요. 어쨌거나 리듬감이 좋은 문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그러한 일필휘지의 타고난 재능이 대단한 허점으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여전히 미끄러지듯 리드미컬한 문장 성향이지만 퇴고가 덜된듯한 느낌의 난삽한 장문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두어 번 더 손이 갔으면 좋았을 것 같은 아쉬운 문장이 적지 않았어요. 어휘 선택 또한 여전히 다양하고 풍부했지만 다소 힘이 들어간 느낌도 없지 않았죠. 말하자면 조금 더 어려운 단어를 선택해서 사용했달까요? 어쨌거나 그렇게 문장에 들어간 힘이 전체적으로 잘 다듬어진 정제된 문장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면 세련된 문장이 되었을 법한 점이 없지 않았음에도 이곳의 문장들은 타고난 재주가 다듬어지지 않아 거칠기만 한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내용 또한 목적이 불분명한 이야기였습니다. 교회 권력과 철거민들의 대치 구도를 그려냄으로써 표면적으로 현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고발하고 내면적으로는 탐욕스런 인간의 본성으로 말미암은 부패한 인간사를 지적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는 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의도를 살려내기엔 역부족인 스토리였습니다. 부패한 교회 권력과 그와 연결된 정치, 경제의 세력이 결탁하여 사회 빈민층을 몰아내고 거기에 새왕국을 세운다는 설정이, 설정은 이해하겠으나 상호간의 인과 관계가 명확하지 않았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정치와 경제와 빈민 세력은 그저 이 작품의 들러리 일뿐 실은 부패한 교회 권력을 얘기하고자 한 느낌이 훨씬 강했습니다. 철거민들의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도 아니고, 그들을 몰아내고자 하는 경제, 정치 세력의 구체적인 욕망을 다룬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교회 권력과 다른 세력의 야합의 면밀하게 조명한 것도 아닙니다. 다 조금씩, 수박 겉핥기 식으로 어쨌거나 설정은 이리 된거야, 라고 말하면서 실은 종교에 대해 말하고 있는 느낌인 것인지요.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듯 그 종교에 관한 부분도 뭘 말하고자 하는 지가 분명하지 않네요. 뭔가 들썩이는 느낌의 이야기 전개였지만 막상 알맹이는 없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일단 기독교적 색채가 대단히 강하게 느껴지는 소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어떤 면에서는 제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을는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종교가 없으니까 말이죠. 게다가 저는 대상이 뭐가 됐든 집단으로 힘을 합해 승리를 쟁취하자는 식의 종교적 성향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는 편인지라 편견이 좀 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왠지 모든 일을 전투라고 생각하는지 뭐만 하면 승리하십니다, 하고 구호를 외치던데 본래 그리 공격적인 성향의 종교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좋은 일에서의 경쟁에서 조차 승리하자고 소리 지르며 사람들을 선동하는 모습이 기실 보기 좋을 리 없죠. 더구나 저는 종교적인 문제를 떠나서라도 무리를 지어 약자를 공격하는 행위를 대단히 역겹게 생각하는 편이어서 말이죠. 저는 연대의 힘이란 개개인으로서는 상대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조직과 맞설 때나 필요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근 집단적으로 무엇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보면 단순히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변 사람들을 선동하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자신의 처치와 별다를 바 없는 상대를 대상으로 위협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말이죠.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 상대를 눌러보겠다는 심사가 더 큰 집단의 그것과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거나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연대라고 할 수도 없죠. 책임은 없고 위협만 존재할 뿐이니까 그냥 집단 폭력이랄까, 그걸 무슨 정의의 실천인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있던데 그건 그냥 비겁한 행동일 뿐이라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막상 개개인의 책임을 묻고자 하면 모두 어디론가 다 숨어버리고 말잖아요. 묘하게도 그것이 특정 종교 성향과 대단히 유사하다는 편견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얘기가 좀 돌아갔는데 어쨌거나 이 소설은 교회 권력을 자아 비판하는 분위기로 스토리가 진행되는 것 같지만서도, 잘 보면 결국 그 종교를 옹호하고자 하는 근본이 너무 짙게 느껴지는 바람에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 작품이었습니다. 빛 좋은 개살구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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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이 싫은데 왜 싫은지 그 이유를 말하라고 하면은 꼭 집어서 말이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왜 기독교인들이 싫어했는지 조금은 말 할 수 있겠다. 세속적인 교회가 되는 한국의 기독교. 정말 쇄신이 안 되는 것일까. 엄마에 의해 교회를 다니게 되는 것 바람직 하지 않다. 그렇게 길들여진 민우, 친구의 죽음으로 세속적인 교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태 신앙부터 길들여진 사람들에 의해 사회는 병들어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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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루. 전쟁터를 연상하지 않는다면 굳이 사용할 일이 없는 단어다. 망루라는 말은 초소, 봉화 같은 단어와 이미지를 공유한다. 전쟁터라고 해도 현대전에 걸맞는 이미지는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현대 서울의 한 가운데를 배경으로 삼은 이 소설. 작가는 일종의 은유나 상징으로 제목을 지은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통해 실존하는 우리들을 울리려 했던 것일까. 2009년 1월, 용산이 없었다면 그런 상상은 아무래도 합리적이었을지 모른다.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듯 현대 서울의, 한 가운데, 망루는 모두에게 목격된 실체였다. 우리는 위태롭게 건재하던 망루와 화염에 휩싸인 망루, 그러니까 망루의 생사를 목격했다. 미디어가 무한 반복했던 그 영상에서는 용역깡패와 경찰특공대가 동원된 '싸움'도 보였고, 활활 타오르는 '화마'도 보였다. 안락한 소파에 기대어 TV리모콘을 만지작거리던 우리들에게 그건 '목격'이라기 보다는 사실 '구경'이었는데, 세간의 말과는 달리 싸움구경, 불구경은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결탁된 사회, 배제된 자들의 처우
재개발이 이뤄지면서 이주비만 받고 떠나야 하는 세입자. 하지만 이주비만으론 어디에서도 거처를 구할 형편이 안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철거가 진행중인 동네에 그대로 남을 수 밖에 없다. 담장은 무너져 내리고, 전기는 끊어지고, 철거용역업체 직원들의 욕설과 야구방망이에 하늘마저 움츠러든 동네. 재개발사업의 속행을 바라는 조합원들은 이들을 이기주의자로 몰아붙이고, 행정당국은 이들을 합법적인 '강제퇴거대상'으로 분류하고, 경찰은 용역업체의 폭력을 묵인한다. 교회마저 재개발 사업에 다리를 걸친 채 '신'의 이름으로 재개발을 축복하는 곳에서 이들의 존재는 윤리적으로도, 법적으로, 국가적으로도, '신의 피조물'로서도 부당하다. 부당한 존재는 '정당한 사회'에서는 설 곳이 없는 법. 이들은 소탕당할 운명을 지녔다.
누군가는 이 얘기를 '과장'이나 상황을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소설적 허구'라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철거촌을 보지 못한 이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섭섭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철거촌'이라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월곡동, 두산 위브, 용역 깡패, 야구 방망이, 용역에게 무전기를 넘겨주던 경찰, 기자들의 접근을 막는 전경, 고립된 봉고차, 스물 한 살의 나. 얼마든지 이미지를, 생생한 공포를 떠올릴 수 있다.
누군가 철거민들을 '이기적'이라 몰아붙인다면, 나는 당신이 아무리 이기적이어도 그 곳에서 버틸 순 없을 것이라 답할 것이다. 그곳은 이기적인 사람이 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이들만 남을 수 있는 곳이다. 생명과 자존심이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지는 공포와 치욕의 현장이다. 세상이 모두 결탁하고 이들에게 온갖 모욕을 주더라도, 그냥 동네를 떠나 버리는 선택조차 할 수도 없는 이들이 모인 곳. 철거촌은 그런 곳이다. 떠날 수 없는 이들에게 '추방'만을 명하는 곳.
세상이 흔들리면, 사람도 흔들린다.
내가 철거촌에서 목도했던 것은 일종의 '진실'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경제력도 중요하고 외모도 중요하지만, 결혼할 땐 경제력을 선택한다는 사람들처럼. 재산권도 중요하고 인권도 중요하지만, 그 둘이 부딪힐 땐 재산권을 선택하는 사회를 보았던 것이다. 사회문제란 시스템의 '안타까운 실수'이며, 누군가의 고의와는 무관하다는 나의 순진함은 그렇게 떠나갔다. 사회는 실수로 사람을 버리지 않았고, 명확한 우선순위 속에서 누군가를 버리는 선택을 했다. 그래서 모든 철거촌은 동일한 종말을 맞는다. "사회란 개개인을 위해 존재한다." 나를 떠받치고 있던 세상은 그렇게 흔들렸고, 나는 그 위에서 허둥거렸다. 세상을 신뢰할 수 없었고, 세상에 흡수되는 것이 두려웠다.
교회가 세습을 하고 재개발 이권 사업에 적극 뛰어들면서, 신과 교회를 세상으로 여겼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신과 교회의 신 사이에 간극을 느낀다. 그리고 그 간극 사이에서 어디로도 향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서희는 교회를 떠나 스스로를 방탕한 삶으로 내몰고, 윤서는 거짓 신과 맞서기로 결심하며 자신이 믿는 신을 찾아 헤맨다. 민우는 얼마 남지 않은 목사 안수에 매여 교회에 남지만 회의를 거두어 내지 못한다. 누군가는 방황하고, 누군가는 돌아서고, 누군가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남았다. 자신이 알던 세상이 흔들릴 때, 사람도 흔들렸다. 그리고 흔들림은 제 각각의 삶에 고유한 무늬를 새겨 넣었다.
휴머니즘이라는 방패, 허용되지 않는 저항
그 시절. 내가 내린 결론은 윤서와 유사한 것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에 명확히 등을 돌리고, 세상을 허물어야 했다. 그건 곧 세상의 건설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길은 생각만큼 어렵긴 했지만, 생각만큼 명확하지는 않았다. 세상은 '民主主義'를 얘기하며 '民'을 팽개치는 모순덩어리였지만, 아주 세련된 방패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고심 끝에 저항을 선택했더라도, 흔들리지 않기는 쉽지 않았다. 세상은 나의 결론을 자주 흔들어댔다.
'모든 사람은 소중하다'는 휴머니즘(보편적 인권)의 가르침은 우리의 무기이면서, 저들의 방패가 되었다. 철거민들이 재개발 조합원보다 명확히 어려운 상황에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조합원이 피해를 입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전투경찰이 국가의 폭력기구이긴 하지만, 우리를 지키는 와중에 저들이 다치는 것도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저마다 소중한 삶이었고, 저마다의 사연이 있었다. 이 쪽이든, 저 쪽이든 모두 '사람'이었고, 그래서 소중했다. 절박함과 이해관계의 경중은 분명했으나, 가벼운 것도 누군가에겐 무거운 것이란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비명을 지르는 것도, 비명을 가로막는 것도 사람이라 곤란했다.
나는 위축되고, 자주 망설였다. 그러나 세상은 망설일 시간을 주지 않았다. 철거민 편에 설 지, 시공사-조합원-국가 편에 설 지 둘 중 하나일 뿐이었다. 망설인다는 건 강한 자의 손을 들어줄 뿐. 나는 이 두 길 사이에서 갈팡질팡했고, 아직도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사람을 고려하느라 누군가의 추방 앞에 망설이느냐(휴머니즘) VS 가장 낮은 곳으로 쫓겨난 이들을 위해 누군가의 피해를 감수하느냐(민주주의의 계급적 해석). 지금은 단지 입장만 가질 뿐, 구체적인 행동이 없으니 이같은 선택의 기로에 설 일조차 없다. 나는 언제쯤 함께 망루 위로 오를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신을 찌르다, 신을 살리다
이 소설은 두 갈래의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된다. 로마에 점령당한 시대, 유대땅의 열심당원 벤 야살이 메시아(재림 예수)를 기다리고, 발견하고, 기대가 절망으로 옮아가는 이야기. 국가-자본-교회에 점령될 철거촌에 남아 그가 믿는 신(재림 예수)를 찾고, 기대하고, 분노하는 윤서의 이야기. 벤 야살이든, 윤서든 그들은 자신들이 찾던 재림 예수를 발견해 놓고도 실망한다. 재림 예수는 위엄있는 신의 광채를 두르지도, 용맹한 투사이지도, 카리스마 있는 리더이지도 않다. 그들은 그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하나 하나 어루만질 뿐이다. 막강한 적과 마주한 벤 야살과 윤서에겐 선/악이 명징하건만, 그들의 메시아는 선/악에 대해 공평하다.
악을 징벌하지 않는 신. 로마의 대군이 성을 파쇄하려는 순간, 경찰 특공대가 철거민들의 망루를 전소시키려는 순간. 그 순간마저 악은 징벌되지 않는다. 오히려 다친 적을 치료한다. 신에 대한 기대는 회수되어도 좋을 순간이다. 벤 야살과 윤서가 아니라면 신의 휴머니즘에 감동하여도 좋을 순간이다. 하지만 그때 절규하던 벤 야살에게 재림 예수가 나지막히 말한다.
"날 찌르시오"
"당신은 내내 보았고 알고 있소. 내가 이 땅에 나타난 신의 아들임을. 그럼에도 당신은 절망하고 있소. 심판의 칼을 빼앗겨 버린 신의 아들의 이 무력함에 치를 떨고 있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난 저들을 심판할 수 없소."
"저들도 역시 내가 창조해 낸 피조물들이기 때문이오. 저들의 욕망, 저들의 쾌락, 저들의 욕구, 저들의 야만, 저들의 타락, 저들의 비열함, 저들의 마성 모두 나의 창조의 터전 안에 있는 것들이오. 그렇기 때문에 난 저들을 심판할 수 없소. 심판할 권리가 없는 것이오.
"이제 나를 찌르시오. 당신의 사명을 감당하시오. 폐허와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 나를 발견해 낸 당신이여, 망설이지 말고 이 취약하고 무력한 신을 심판하시오. 당신이 나를 찌름으로써만 비로소 이 저주와 비극의 구조가 붕괴할 것이오. 당신의 정의와 모두의 정의,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의로움의 회복이 당신의 사명 완수로 인해 새롭게 시작될 것이오."
순간 벤 야살의 단검이 재림 예수의 심장을 파고 들었다.
이들도, 저들도 모두 신을 받드는 시대. 신은 심판의 대상(신의 외부-타자)를 상실한다. 신은 무력한 절대자다. 그런 신을 살해하고, 더 이상 신이 대표하지 못하는 의로움을 높이 세우라는 재림 예수의 메세지. 윤서는 벤 야살의 이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었다. 화염에 휩싸인 망루에서 부상특공대를 치료하는 재림 예수를 보면서 윤서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들도, 저들도 모두 인권과 민주주의를 떠든다. 인권과 민주주의는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단검이 되었다. 人이 아니며, 民이 아닌 사람이 어디 존재한단 말인가. 철거민들의 주거권은 조합원들의 재산권과 맞부딪히고, 철거민들의 의견수렴이 조합원들의 의견수렴으로 상쇄되고. 모든 선/악은 흐려지고, 결국엔 버틸 여력이 없는 이들이 추방당한다. 벤 야살의 이 얘기를 접한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무력한 '인권'과 '민주주의'(휴머니즘)을 살해하고, 보다 의로운 인권과 민주주의를 세워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신은 죽어야 한다. 다만.
나는 벤 야살이나 윤서처럼, 혹은 작가처럼 선뜻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나는 여전히 휴머니즘과 '의로운 민주주의' 사이에서 고뇌한다. 나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을 사회에 대입하지 않는다. 나는 우파가 왜 필요한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사회는 '민주주의의 계급적 해석'과 '휴머니즘'의 날개로 날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철저한 민주주의적 원칙을 시행하되, 그 속에서 피해를 입을 이들에 대한 휴머니즘적 배려를 해야한다고 본다. 그것이 의로운 민주주의이리라 여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계급과 휴머니즘 사이에서 방황할 것 같고, 망설일 것 같다.
하지만 이 소설이 무게의 추를 조금 더 휴머니즘->계급적 민주주의로 기울게 한 것은 명확하다. 넓디 넓은 세상에서 좁아터진 망루 하나 진지로 삼고 전쟁을 벌이는 이들. '인권'이나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로도 이들이 머물 근거 하나 내어줄 수 없는 현실. 이들의 진지는 물리적으로도, 이데올로기적으로도 너무나 협소하다. 그러므로 사회의 가장 아랫부분을 대표하지 못하는 "신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은 의롭게 부활해야 한다. 다만 누구도 해를 입지 않길 바랄 뿐이다. 내가 관념론자가 되는 순간이다. |
![]() 민우는 세명교회의 목사인 조정인의 설교를 대필해주는 전도사로 있다. 세명교회 목사인 조정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청춘시절을 미국에서 보내면서 방탕한 생활을 했던 이로 신학을 공부하지도 않았으며, 그다지 종교적인 사람이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세명교회를 지었던 조창석 목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교회를 세습받는데 성공했고,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요즘인 것이다. 하지만 신학 공부를 했던 것이 아니니 설교를 작성할 여력은 없는 것이었고, 해서 전도사이면서 자신의 여동생의 약혼자가 되는 민우에게 설교 대필을 부탁하고 있다.
목사를 꿈꾸는 민우는 정인의 설교 대필자로 한때는 미래시장촌에서 엄마와 단 둘이 살았었다. 미래시장촌이란 이 책의 중심에 서 있는 중요한 장소이다. 원래 가난한 영세 상인들이 주 거주민이었던 미래시장촌은 도강동의 개발 붐과 함께 재개발 열풍 속에 휩싸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세명교회의 목사인 정인은 교회를 복합 레저 타운으로 조성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세명 교회는 철거를 눈 앞에 둔 미래시장 구역에 바로 그 레저 쇼핑몰을 세우려 하는 것이다. 아직 그곳을 떠나지 못한 철거민들이 있지만 인정사정 없이 그들을 몰아내려고 하는 정인인 것이다.
한때는 민우와 함께 세명교회를 다녔던 윤서는 이제 한철연이 되어 미래시장촌의 철거민들 편에 서서 세명교회에 대항하고 있다. 그리고는 그는 지금 재림 예수를 보았다며 민우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가 보았다는 재림 예수는 진정 있는 것일까. 윤서의 믿음은 확고했다. 한씨의 치유 기적을 보면서 그가 재림 예수라고 생각하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재림 예수는 심판의 칼을 들고 이 땅에 나타나신 것이다. 윤서는 그렇게 재림 예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미래시장촌의 철거민들은 세명교회 측이 보내는 용역 직원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화염병을 맞기도 하지만 경찰에 신고해봐도 경찰에서는 미온적인 모습만을 보일 뿐이다. 세상은 그렇게 약한 자의 편이 아닌 강한 자의 편이기만 한 타락한 곳, 윤서는 신의 심판을 기다린다.
윤서가 보았다는 한씨는 진정 재림 예수인 것일까. 그래서 재림 예수의 심판은 성경처럼 이루어질까. 민우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민우는 어떤 선택을 하게될까. 사회문제를 담아내고 있는 이 책은 미래시장촌을 떠나면 세상 천지에 제 몸 뉘일 곳이 없어지는 암담한 미래만을 가지게 되는 철거민들의 무거운 삶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품어야 할 세명교회는 오히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철거민들을 몰아내는데 폭력을 일삼으며 앞장서고 있고, 그런 일에 조용히 동조하고 있는 정치권력과 경제권력들 사이에서 힘없고 무력하기만 한 철거민들의 몸부림은 부질없는 아우성으로만 치부되고 만다. 하지만 세상이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다시는 망루의 비극이 반복되는 일이 없도록....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우리들이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것들도 많다. 세상은 이익의 논리가 아니라 사랑의 논리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곳이였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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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루의 정확한 뜻이 무엇일까 ?
잘 보이도록 높은 장소에 또는 건물을 높게 하고 사방에 벽을 설치하지 않은 건물 또는 그와 같은 장소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흔히 쉽게 알아먹자면 농촌에서 농작물의 피해를 막기위해서 지어놓은 원두막 이라고 설명하면 귀에 쏙 들어 올것이다. 그럼 작가는 왜 그런단어를 책의 제목을 선택했을까 ?
나는 솔직히 이런 무거운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치에 관한 이야기나, 권력,그리고 실제로도이런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인지 되도록이면 읽지 않으려고 했다.막상 책을 받고서도 선뜻 책장을 넘기기가 웬지 모르게 싫었다. 헌데 한번 책장을 넘겼다면,마지막장을 넘기고서야 책을 덮을수가 있다. 그만큼 책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엄청나다.
세명교회의 담임목사 조창석의 아들 조정인이 목회자의 신분으로 교회에 들어와, 아버지후임으로 담임목사가 되어 난 이후의 이야기이다. 그의 아들이 애초부터 신학의 길로 들어섰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반대하지는 않았을텐데. 그는 신학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미국에서 그동안청춘의 소비하면서 살고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여자와 결혼하기도 했었지만, 펀드 매니저로재직시절 공금횡령으로 미국 교도서에 살다가 나왔을때 부인과 헤어지고 그 사건을 웬만히 합의하기위해서 교회의 막대한 재정이 지출되었다. 그런그였기에 교회로 돌와왔을때 사람들의 시선또한 그리 좋지만은 않았지만 아버지가 막강한 파워와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어느누구도 나서지 한쪽에서는 당연히 승계할꺼라고 믿었고, 또다른 쪽에서는 그의 아들의 자질을두고 말이 많았다. 조정인은 이를두고 생각하다가 "정민우"라는 전도사를 찾았다. 그는 이미 아버지의 강권에 의해 동생과 약혼한 상태였고 어머니와 지금까지 맹목에 가까운 신앙을 가지고 세명교회안에서 생활하고 있었기에 그가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협박에 가깝게 애기하여 지금까지 그는 정민우가쓴 설교문을 가지고 강단앞에서 설교를 했다.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있을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불법시위,세명교회에 대해 안좋게 애기하면서 물러서라니 그런시위를, 그리고 거기가 윤서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서서히 세명교회의 또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인정사정 없이 몰아부치는 그런모습,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그런 모습을 볼때마다 참, 가슴이 아프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죽음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고나니, 가슴 답답하고 무거워진다.현실에서도 이런 일들이 종종 이러나고 있는데. 책속에서만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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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사람들은 추방의 언덕, 생존의 망루 위로 오르고 또 오릅니다. 수원, 성남, 서울 곳곳에서 도시의 이름, 인간의 이름으로 어떤 이들은 살아 남거나 또 어떤 이들은 짓밟히는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승자와 패자, 가진자와 잃은 자. 여전히 우리는 이와 같은 도시적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누가 승자일까요. 이런 구별을 책동하는 이들이 승자일까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승자가 존재할 수 있는 건지....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지금도 여전히 찾고 있습니다.
재개발을 둘러싸고 생존의 끝자락까지 몰린 이들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함과 성장이라는 욕망으로 뒤틀린 기독교에 대한 묘한 대치를 보여주고 있는 소설... 망루... 화려하지 않지만 독특한 시각과 당대 현실의 가장 예민하고 핵심적인 문제를 꿰뚫는 망루의 출판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여러가지 이유로 마음이 불편했다. 또한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 소설에 대한 리뷰를 작성하기엔 나의 실력이 정말로 부족하다고 느낀것이 사실이다.
익숙하지 않은 소설의 소재도 그렇거니와 재림예수에 대한 부분이 단순한 허구라고 치부하기엔 끊임없는 의문을 남겼기 때문이다. 책을 자세히 읽었음에도 뭔가 시원하지 않고 갈증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처음 책을 읽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 의문에 대한 답을 지금도 여전히 찾고 있습니다" 라는 작가의 말이, 책을 덮으면서 어느정도 이해가 되는 듯 하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여러가지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테니 말이다. 아... 이 소설... 정말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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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내가 제일먼저 하는일은 주요뉴스를 찾아보는 일이다. 용산참사가 엊그제 일같은데 아직은 뇌리에 깊숙이 박혀있다. 과연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 잘 살고 있는 주민들을 내쫓고 보다 더 놓이 보다 더 화려하게 치장한 건물은 돈있는 자들의 놀이문화에 불과하다. 없는자와 있는자의 차이를 더 내세울뿐이다. 망루라는 단어를 볼때마다 가족의 생존권을 찾기 위해 마지막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긴박한 상황을 지금 도 잊을수 없다. 지금도 어디선가에서는 생태계 파괴를 두고 볼수 없어 자신을 내던지고 외치고 있다. 하지 만 누가 그들의 외침을 들을수 있을까. 평등한 법이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법은 더 가혹한 형벌일 수밖에 없 다.
망루의 모티브는 용산참사의 철거민을 모티브로 한 소설같다. 법을 내세워 예수재림의 기회라는 목적으로 미래시장을 계발하려는 정인과 이를 저지하려는 민우의 두 인물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된다. 내가 생각했던 내용과는 다소 틀린점이 있었지만 종교와 계발이라는 두가지가 공통점은 없지만 이 또한 가난한 이들에게 생존을 위험하는 목적으로 다가온다는 점이 특색있다. 세명교회의 창업자인자 주인인격인 조창석은 자신의 아들을 목사로 초대하게 된다. 결국 정인이 목사로 취임하게 되고 그뒤로 주춧돌이 되어 교회주변으로 재계 발을 추진하게 된다. 반면 민우라는 인물은 악이었으니 나중에는 선으로 등장한다. 왜 민우가 그런 행동을 했을까.
인간은 후회를 하는 유일한 생명체일지도 모른다. 이 한권의 책으로 그 긴 이야기를 다 담을수 없지만 조금 이나마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뇌리를 스치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이다. 돈있는 자들은 투기의 목적으로 계 발을 원하고 없는자들은 있는자리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연실히 드러내는 점 이 무척 반가운 소설이다. 다만 왜 교회와 접목을 시켰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점점 커지는 교회집단의 부패가 사회문제로 집중된적이 기억난다. 하느님을 믿고 봉사하면서 살아간다는 그들이 돈앞에서는 그저 평범한 한인간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인지 교회를 믿는 나로서는 좀 경악스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소설 을 소설일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읽었다.
앞으로 우리사회가 어떻게 변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런 참사가 꾸준히 일어날것이고 지구가 멸망하지 않 는이상 없는자와 있는자의 전쟁은 계속 될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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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망루가 무슨 뜻인지조차도 모르고 봐서 그런지, 보도자료를 보기 전에는 어떤 내용이 어떻게 펼쳐질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책 전체를 모두 보고 난 후 지금은 띠지를 벗겨낸 이 책의 표지만 보아도 거대하게 솟아있는 이 빨간 망루가 어쩐지 서민들을 압박하고 감시하던 거대권력으로 . . . 아니면 힘들게 삶의 터전에서 투쟁해야 했던 이들의 붉은 피로 암시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짠해진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사회적인 이슈 두 가지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 우선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우리 사회에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던 모 거대교회의 세습 등으로 인한 부의 착취(라는 표현이 맞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칠거나 부정적으로 쉽게 말하기 꺼려지는 것은 아마도. 으음)사건과 2009년 초에 일어났던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된다. 종교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그리고 정치적인 것들이 형체를 감춘 채 한 곳에 뒤섞여 있는 이 아수라장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용산참사 당시에 한창 그 비슷한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어서 그런지 미디어 리서치를 할 일이 있어서 면면이 파악할 수 있었는데, 정말 웃기지도 않는. (하긴, 웃기기는 커녕 눈물 펑펑 쏟아도 모자랄) 비참한 상황들이 상황 상황마다 숨어 있었다. 여기에서 더 주목할 점은, 그 참사로 인한 뒷이야기이긴 하지만 . . .)
이 책은 일종의 액자형식으로 두 가지 라인으로 전개가 된다. 2천년 전의 로마 제국 부패 양상은 우리 현실 속 재개발 지역 철거민들의 생존 투쟁과 맞물려 있고, 이는 거대교회의 세력을 확장시키려고 하는 욕구와 대비시켜 보여주고 있다. 세명교회의 담임목사는 교회의 확장과 함께 하나님의 왕국을 만들어보이겠다는 명목으로 시의 각종 행사들과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미래시장촌을 철거시키고 복합 레저타운 및 대형 쇼핑몰을 건설하려 하는 내용이 책의 주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인 전도사 정민우를 기점으로 교회와 미래시장촌, 그리고 그 갈등의 정점에서는 재림 예수의 등장이 있다.
그저 비판적이고 차갑게만 느껴지리라 생각되었던 사회소설은, 결국 왠지모를 가슴의 먹먹함과 함께 이렇게 찌든 사회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과 씁쓸함을 남기고야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