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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관한 거대 담론의 부재를 아쉬워하며 역사라는 거대한 물줄기는 우리 인류의 삶과 함께 지금껏 이어져왔다. 우리의 삶과 따로 떨어트려 생각할 수 없는, 아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공간의 찰나 그대로가 곧 역사라는 인식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큰 물줄기속에는 그 공간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수많은 미세생물들이 존재한다. 근래에 역사라는 큰 흐름 그 자체보다 그 속에서 삶을 영위 하고 있는 미시적 생물의 일상사를 조명하는 흐름이 출판계의 유행인 듯하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미시사 류의 역사교양서들의 범람을 보며 과거와는 다른 역사관의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물론 거대담론이 주를 이루었던 과거 역사저술은<예를 들면 E. Kha 의 [역사란 무엇인가], 혹은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흥망사], A.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등과 같은 류의 책을 말한다.> 분명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자들에게 상식수준 이상의 교양을 요구했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시장에 범람하는 미시사에 관한 역사 교양서들이 어렵게만 느껴졌던 ‘역사’라는 학문 자체의 오만함을 깨고 일반대중들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가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긍정적 측면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미사사가 곧 역사라고 인식되는 요즘 세태에 뭔가 아쉬움이 남는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다. 평범한 사람들의 하루하루의 삶의 궤적을 돌아보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역사라는 명제를 다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미 현대는 역사를 하나의 정보 더미로 보고 있다. 역사는 사실의 집합이고, 그것은 단지 과거의 것일 뿐 우리의 현재의 삶을 비추어주는 적절한 지표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판단이 지배적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판단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최근에 쏟아져 나온 수많은 역사책들이 많은 기여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최근 실로 많은 역사책들이 우리 앞에 등장하였다. 특히 미시사, 생활사에 관한 한 우리는 많은 정보를 가지게 되었다.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등과 같은, 역사라는 이름 아래 거대한 담론과 웅장한 비전을 보여주던 책들은 이제 멀리 제쳐지고 있다. 반면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많은 사실들이 밝혀지고, 다양한 이름의 역사 기행 등이 이와 어우러져 마침내 역사의 대중화라는 흐름까지 만들어 내었다. 일면 긍정적인 점이 없지 않으나 다른 면으로 보면 이는 역사를 호기심 충족의 대상으로 국한시켰고, 더 나아가 취미 생활의 한 부분으로 머물게 하였다. 그것이 역사의 전부는 아니라는 항변은 과연 고루한 것일까? 우리는 역사를 그렇게 보기만 해도 괜찮은 걸까? 이러한 의문들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시선을 역사철학으로 향하게 한다. P8-9 ‘서문’ 中 다시 철학을 바탕으로 역사를 보다 : 역사철학 [서양문명의 기반] 이라는 이 책은 ‘철학적 탐구’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보통 서양사를 일별할 때 문명형성과 붕괴과정을 경계삼아 원시-고대문명-그리스.로마의 고전문명-중세-르네상스-근대-현대로 그 흐름을 따라가는 형식은 무척 낯익은 저술형태이지만 그 문명을,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 문명을 형성하고 떠받치고 있는 하부구조<이 책에서의 개념으로는 물질적 토대>를 철학적으로 탐구한다는 거창한 울림은 샛노란 책의 표지와 함께 이 책을 처음 손에 잡는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가지게 한다. 문명 형성의 주체는 역시 인간이다. 인간은 삶 그 자체로서 정형화된 생활양식을 만들어내고 삶을 영위하는 행위 그 자체가 곧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가 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파헤치는 것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물질적 토대. 즉,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자연환경, 기후, 지형, 생산과 분배양식, 사상 등>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다. <서문>,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역사연구의 방법>이라는 이 책에 대한 소개와 당위성을 강조하는 시작부분의 세 꼭지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짧은 분량이지만 꼭 읽고 넘어가야 할 무게 있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어 눈여겨 볼만하다. 이후 고대문명-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문명의 순으로 문명의 토대를 살펴보고 있고, 고대와 고전문명을 정리하는 ‘알렉산드로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꼭지를 통해 두 영웅의 행위를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에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이어지는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문명으로 그 분석의 대상을 옮겨가는데 특이할만한 점은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서술이 아니라 문명이 형성과 그 문명의 성격을 규정짓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철학적 접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 삶의 가장 최근 토대라 할 수 있는 근대에 많은 부분을 활용하여 언급하고 있는 점은 이 책을 선택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으며 현대<이 책에서는 20세기로 한정하고 있다>우리 인간의 삶에 대한 논의 또한 세 개의 꼭지를 할애하여 살펴보고 있는 점도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욱 크게 해 주었다. <메커니즘>, <니힐리즘>, <대중> 이라는 세 가지 원리로 20세기를 규정하려 시도한 점, 지금 이 순간까지도 변형된 형태로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파시즘>에 대한 논의도 주목할 만하다.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역사란? 저자 스스로 철학을 전공한 자의 처절한 밥벌이를 자조 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실용적 학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현대사회의 무한경쟁에서 도퇴 되어 버린 듯 폄하하는 철학이 이 시대에 소금과 같은 것이라 조근 조근 말해주는 이 책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작가는 잠시나마 길 위에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이 걷고 있는 길과 그 길을 걷는 행위자체를 의심하고 ‘왜?’라고 세상에 물음을 던지라는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건네주고 있다. 철학의 시작은 의문을 가지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인데 너무나 급격한 변화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걷고 있는, 아니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도록 뛰고 있는 이 길 위에서 멈춰서기를 무엇보다 두려워하고 있다.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갖추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요소는 무엇일까? 이는 바로 기억이다. 기억의 원천적인 뜻은 바깥에 있는 사태를 내 안으로 집어넣는 것이다. 이를 철학적 개념으로 내화(內化)혹은 내재화(內在化)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집어넣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정신없이 빨리 지나가게 되면 안으로 집어넣을 수 있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정체성 문제가 사회적 차원으로 가면 사회적 정체성이 된다. 인간의 자아는 사회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기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것이 기억이듯이 사회적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집단의 공동 기억 즉 역사일 것이다. 역사가 없다면 사회적 정체성이 유지될 수 없다. P174 '근대인의 자기 정체성 문제‘ 中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을 잃어버리고 그에 따라 자기 정체성과 사회적 정체성까지도 잃어버리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기억과 역사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비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는 ‘시공간의 압축’이다. 시공간이 극도로 압축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쫓기는 인간들에게는 자연히 참을성이 사라지며 자기 반성적 시간 또한 고갈되기 때문이다. P175 '근대인의 자기 정체성 문제‘ 中 그러나 저자가 지적하듯 이제는 이 끊임없이 순환되는 시간의 고리를 잠시 끊고 조용히 생각에 잠겨 보아야 한다. 이 책은 그 찰나의 순간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귀중한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