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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흔히 다원주의 사회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문화적 다원주의가 아니라 종교적 다원주의이다. 종교적 다원주의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산의 정상은 하나다. 하지만 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은 다양하다". 그래서 다른 종교에서는 기독교가 너무 배타적이다고 비판한다. 상당히 지적인 기독교인들 가운데 많은 수가 지금까지 기독교의 배타적인 신앙을 반성하는 듯하며 공익을 우선시하는 종교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진리를 말하는 것에 있어서 한걸음 물러난 듯한 태도를 보인다.
그들은 '이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가 유일한 진리로서 주장하는 것은 겸손하지 않은 태도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이미 종교다원주의를 인정하는 말이다. 레슬리 뉴비긴이 1974년 인도에서 선교사로서의 사역을 끝내고 고향 영국으로 돌아와서 만나게 된 기독교는 이미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인 상태였음을 보게 된다. 이것이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이다. 그는 인도에서 35년동안 선교사로 있었는데 그곳에서 가장 큰 문제는 종교다원주의적인 배경의 인도사람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이 유일한 진리임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였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복음에 대한 반대보다 더 힘든 복음에 대한 차가운 멸시가 있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이 책을 이교도 사회중에서도 아주 다루기 힘든 형태인 영국의 상황을 토대로 해서 썼다. 이 책은 원래 글래스고우 대학에서 한 일련의 강의 내용이었다. 1장부터 3장까지는 다원주의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뉴비긴은 다원주의의 특징인 아는 것과 믿는 것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사실을 알기 위해선 먼저 믿는 것이 전제되어야 된다고 한다. 그리고 4장과 5장에서는 그 믿음을 가능케 하는 권위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에 대해 말하면서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이 아닌 신의 계시가 필요하다고 한다.
6장에서는 역사속에 나타난 계시를 말하면서 기독교의 역사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7장에서는 가장 큰 논쟁을 일으키는 선택의 교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8장과 9장에서는 기독교의 역사성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성경이 역사의 비밀을 나타내는 수단이라고 말하면서 그 비밀은 바로 역사적인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실마리가 풀려져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0장에서는 저자가 갑자기 선교에 대한 얘기를 꺼낸다. 그 이유는 역사의 비밀이 예수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는 완전히 드러나지 않을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역을 위해 교회를 남겨두셨고 바로 교회가 선교를 통해 그 비밀을 풀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선교의 동기가 영혼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면서 개신교 선교운동의 사고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11장에서는 복음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선교에 대한 각각의 주장들에 대해 비판하면서 선교는 복음을 선포하는 형태를 띠어야 되지만 반드시 행동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나아가 참된 선교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12장에서는 인간중심의 상황화의 오류에 대해 지적하고 있고 13장에서는 종교다원주의가 등장하게 된 배경과 기독교의 유일성에 대해 논증을 한다. 14장과 15장에서는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있는 우리가 다른 종교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지와 다른 문화속에서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16장에서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는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자들에게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것은 복음에 대한 엄청난 반대세력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성경의 예를 통해 설명한다. 17장에서는 우리가 흔히 쓰는 세속 사회라는 개념에 대해 비판하면서 아직 세속 사회의 신화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18장에서 20장까지는 뉴비긴의 선교사역의 방향이기도 했던 믿음을 가진 회중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믿음을 가진 회중은 복음의 해석자다.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목회자 중심의 목회가 아니라 회중 중심의 목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뉴비긴은 다원주의 사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해야 할 태도는 복음에 대한 자신감이라고 말을 한다.
오늘날 개신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신앙을 지키는 면에서는 완강하지만 복음을 이해하는 부분에서는 무지하거나 아주 피상적이며 전도하는 행위자체에 지나치게 강조점을 두어왔다. 또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거나 적대감까지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우리의 무식함과 잘못된 고집으로 인해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많이 잃어버렸고, 매우 독단적이라는 비판까지 듣게 되었다. 이 책은 그런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원주의 사회속에 살고 있는 비그리스도인들이나 비복음주의 그7리스도인들의 말에 귀기울이면서도 복음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가지도록 격려할 것이다. 또한 자유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타협해서는 안되는 복음의 실체에 대해 도전할 것이다.
이 책은 학문적인 목적으로 쓴 책이 아니라고 뉴비긴으로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은 대단히 논리적이면서 지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신학적인 바탕이 너무나 빈약한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원주의 사회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입장과 방향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통찰력을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책을 통해서 순례공동체로서의 교회와 그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이 오시는 그날 모든 것이 분명하게 밝혀질 것임을 믿고 기다리며 행함있는 믿음을 보이기를 소망한다. [인상깊은구절] 사람들의 생각과 상상력을 장악하는 현대 미디어의 힘은 굉장한 것이다. 확실히 깨어 있는 비판 세력들조차도 심지어 쉽사리 제압당하곤 한다. 그리스도인의 회중은 인간의 본질과 운명에 관한 진실한 이야기를 계속적으로 기억하고 반복적으로 시행함으로써 건전한 회의를 할 수 있는 태도를 견지해 나갈 수 있는 공동체이다. 이런 회의를 통해서 우리는 사회 생활에 참여하면서도 사회 자체의 믿음 체계에 마음을 빼앗겨서 미혹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회중이 진리의 공동체로서 기능을 효과적으로 발휘하게 된다 하더라도 진리를 말하는 태도는 현대의 선전 기법에 맞추어져서 안 되며, 반드시 예수님의 제자에게 합당한 겸양과 깨어 있는 태도 그리고 현실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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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비긴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저자 중 한 명이다. 그의 글은 결코 쉽지 않지만 언제나 진보적이며, 깊은 사색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본 책은 20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다원주의적이다. "다원주의적이다" 라는 말은 다음과 의미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다양한 문화와 종교 그리고 다양한 삶의 양식에 의해서 사실상 다원적(plural)일뿐 아니라, 이런 다원성(plurality)이 사람들에 의해 인정되고 신봉되는 것들로 반겨진다는 의미에서 다원주의적(pluralist)이다.(p.15)". 이와 같은 사회가 기독교인들에게 왜 문제가 되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을 읽어가면서 그것이 왜 문제인지를 알게 될 것이며, 그런 문제 속에서 복음을 복음답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우리는 다원주의 사회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같이 다원주의 사회는 곧 개인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사회이다. 이와 같은 사회에서는 개인적인 선택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기독교와 같은 종교를 절대화 시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선택을 방해하는 악한 것이며, 독선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면서 각자가 독립적인 것, 얼핏보기엔 평등하면서 독립적인 사회상으로 보인다. 그런 사회에서 기독교만이 절대 진리라고 주장한다면 다른 비기독교인들이 보기에 그것은 참 독선적이며, 배타적인 종교적 행태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잘못된 것인가? 또 우리는 그러한 다원주의 사회를 원했는가?
그것은 우리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이미 도래했다. 이제 우리가 접하게 되는 현실은 "하나의 진리가 아닌 여러 진리들 속에 살아가면서 오히려 진정한 진리를 찾기 어려운 시대에 살게 되는 불행"이 가득한 현실이다.우리 기독교인들은 다원주의적인가? 부분적으로는 그렇고 부분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다원주의의 기본적인 의미에 대해 살펴본다면 이 대답은 명확해진다. 기독교인들은 유별난 사람들이 아니다. 비기독교인들은 모든 이들이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모두 거부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비기독교인들이 보기에 우리가 그런 이상한 사람들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가치와 사실의 혼동으로 인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가치'라고 부르는 세계와 '사실'이라고 부르는 세계를 뚜렷하게 구분하는 것은 우리 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고, 앞으로 우리가 상당히 깊이 검토해야 할 특성이다. 전자의 세계에서 우리는 다원주의자들이다. 왜냐하면 가치는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후자에서 우리는 다원주의자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좋든 싫든 사실이기 때문이다.(p.25)" 우리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만약 선택의 문제였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던져 우리의 이웃을 향하여 나갈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선택을 우리의 뜻에 따라 강요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선택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비기독교인들과 생각이 다른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와 같은 생각의 차이들을 만드는 기본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파악해야만 한다. 그와 같은 파악을 위해 뉴비긴은 마이클 폴라니의 철학을 기초로 사용하고 있다.
"모든 체계적인 사상은 어떤 출발점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 일관성 있는 사상도 어떤 것들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용인하지 않으면 성립이 불가능하다. ... 어떤 일관성 있는 사상도 전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정직한 사고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이런 전제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가능한 한 아주 명확히 해두는 일이다.(p.25)" 모든 사상은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마 이 말을 들은 무신론자는 우리가 무식하다고 불만을 토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직한 사고를 위해서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이 선행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떠한 사실도 판단할 수 없다. 이 주장은 우리에게 설득력있게 들린다.
만약 이 주장이 맞다면 우리는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어떤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것이 가치이며, 또한 어떤 것들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만약 사람들의 선택을 좌우하는 것이 믿음이라면 또한 그 믿음은 어떻게 선택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뉴비긴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모든 사회는 그 사회를 결집시키기 위해서 피터 버거가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s)'라고 명명한 일련의 구조에 의존한다. 이 구조는 어떤 특정한 사회 안에서 수용되는 믿음과 관행의 유형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어떤 믿음이 그 사회 구성원들에게 타당하며 어떤 믿음이 그렇지 않은가를 결정한다.(p.26)" 우리가 살고 있는 다원주의적 사회에서는 궁극적인 믿음을 자신감 있게 진술하는 것, 즉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그분의 목적에 관한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는 주장은 무식하고 교만하며 독선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이러한 비난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 비난 자체도 철저한 비판에 개방되어야 하는 가정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비판받지 않는 것은 단지 그것들이 현재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p.28)" [인상깊은구절] 우리가 ''가치''라고 부르는 세계와 ''사실''이라고 부르는 세계를 뚜렷하게 구분하는 것은 우리 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고, 앞으로 우리가 상당히 깊이 검토해야 할 특성이다. 전자의 세계에서 우리는 다원주의자들이다. 왜냐하면 가치는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후자에서 우리는 다원주의자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좋든 싫든 사실이기 때문이다. |
| 새정부가 들어서면서 대통령이 제일 먼저 보여준 것은 토론하는 모습이 아닌가 한다. 무슨 일이든지 갈등의 조짐이 나타나면 마음을 털어놓고 서로의 생각들을 나누는 것이다. 그 토론의 결말을 둘째치고라도 새대통령은 자신의 약속중의 하나를 벌써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화하는 문화를 만들어가겠다는 공약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오해중에 가장 큰 것이 있다면 독단과 독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진리는 오직 자신들이 믿는 신앙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뿐아니라 그들은 하나님 이외의 참신은 없으며 오직 그들의 신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교과과정에 실려 학생들에게 가르쳐지고 있지만, 창조론은 공개적으로 가르쳐지는 것이 금지되었다. 학문의 세계에서 창조론에 기반한 학문적 성과를 말하는 것은 공공연하게 금지되어 있다. 물론 신학교를 제외하고 말이다. 저자는 이러한 다원주의적 사회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우리가 믿는 믿음의 내용으로 세상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차분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는 먼저 '가치'와 '사실'의 분리로부터 이러한 의사소통의 장애가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생각하기에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고, 사실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의 것만이 진실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 큰 오해가 있다고 한다.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이 죽은 후에 심판이 있고, 그 심판을 통해 영원한 지옥과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그 사실에 따른 어떤 대안들을 찾고자 노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다양한 가치와 철학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칸트가 형이상학적인 영역을 학문의 분야에서 잘라내버림으로써 우리는 더이상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신앙을 말할 수 없게 되었고, 데카르트의 방법적인 회의론에 따른 분석적 사고 방법으로 인해 영적인 것을 사고하는 방법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칸트와 데카르트의 철학이 가지고 있는 논점들에 대해 차분하게 반론을 전개하고 있다. 저자의 방대한 학문적인 식견에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이 결코 비이성적이거나 세상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님을 확신시킨다는 점에서 논리적인 힘을 느낄 수가 있다. 우리는 누구든지 세상에 태어나 어떤 형태로든지 외부로부터 지식을 받아들이게 되고, 이러한 일방적인 지식의 수용없이 어떠한 비판이나 논리가 출발될 수 없음을 그는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적인 내용의 준거로 활용하는 성경의 내용과 교리들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될 것이 아니다. 교리나 성경의 내용을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손해나는 것이나 비이성적인 것이 아님을 여기서 곧바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가지로 세상과 의사소통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의 내용이 세상과의 단절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더 풍성하게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과 공유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