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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적인 김선우의 언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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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시인을 보면 정말 예쁘다. 참하다. 그리고 목소리도 여성스럽다. 그렇지만 그 안에 단단하고 깊고 굵은 선이 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천상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예민한 감성으로 퍼올린 그녀의 언어는 쉽게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녀가 보는 사물들은 모두가 물건이 아니라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그 무엇이다. 그것을 함께 따라가며 읽지 못하면 김선우의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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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시인을 보면 정말 예쁘다. 참하다. 그리고 목소리도 여성스럽다. 그렇지만 그 안에 단단하고 깊고 굵은 선이 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천상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예민한 감성으로 퍼올린 그녀의 언어는 쉽게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녀가 보는 사물들은 모두가 물건이 아니라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그 무엇이다. 그것을 함께 따라가며 읽지 못하면 김선우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원초적인 느낌이 살아있기에 그녀의 시어는 관능적이고 원색적이지만 야하지 않다.

 

이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는 그녀의 두번째 시집니다. 이 시집에서도 관능적으로 에로틱한 이미지들은 여전하다. 어쩌면 가장 순수한 눈을 가졌기에 가장 원초적이고 관능적인 언어가 창조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가장 날것으로 본 사물과 감상에 대한 그녀의 언어들이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아이에서 여자가 된 수줍은 여체이다.

 

도화 아래 잠들다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이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리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 pp. 48∼49



YES마니아 : 골드 f****1 2010.11.04. 신고 공감 4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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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으로 길을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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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매스컴에서 떠들어댄 기술 천국의 희망찬 미래상에 취해 세상 사람들이 모두 환호작약하고 있을 무렵, 과감하게 서울 생활을 훨훨 떨쳐버리고 강원도 산골 문막으로 내려간 젊은 시인이 있었다. 이제 막 서른이 된 김선우 시인이었다. 그녀의 두 번째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는 그곳에서 산과 나무와 꽃과 강과 달과 바람과 바다와 벗하며 홀로 지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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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매스컴에서 떠들어댄 기술 천국의 희망찬 미래상에 취해 세상 사람들이 모두 환호작약하고 있을 무렵, 과감하게 서울 생활을 훨훨 떨쳐버리고 강원도 산골 문막으로 내려간 젊은 시인이 있었다. 이제 막 서른이 된 김선우 시인이었다. 그녀의 두 번째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는 그곳에서 산과 나무와 꽃과 강과 달과 바람과 바다와 벗하며 홀로 지낸 삼 년 동안의 삶을 담아내고 있는 시집이다.

 

젊은 여자 혼자서 그것도 외진 산골 마을에서 문명의 이기(利器)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삶이란, 겉으로는 꽤 여유롭고 낭만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몹시도 불편한 것이고 또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내면을 잠식해 들어가는 고적함과 쓸쓸함으로 인해 음울해지기 십상이다. 그런데 정작 시인은, 산골에서의 유폐의 삶이 너무나 행복하고 충일해서 스스로도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지복(至福)을 누리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좀 놀랍다.

 

서울생활을 접고 강원도로 내려온 지 삼 년이 되어간다. 매일 강을 바라보는 일의, 바다의 눈매에 날마다 다르게 접히는 주름을 헤아리는 일의 지복함을 맘껏 누리고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원없이 말하면서 날마다 무릎 꿇고 이 땅에 입맞춘다. 스스로를 가두어놓고 이토록 행복해질 수 있다니, 생애 처음 있는 일이다. (117, 시인의 말)

 

생애 처음으로 느낀 이러한 행복을 가능케 한 것은 다름아닌 시인의 알몸이다. 시인은 강원도 산골로 내려가 살게 되면서, 삼십 년 동안 자신의 몸을 덕지덕지 감싸고 있던헛된 사실들과 헛된 이름들과 헛된 관념들의 천으로 짜여진겹겹의 옷들을 모두 벗어버리고, 비로소 세상에 처음 올 때의 바로 그 알몸으로 자연과 마주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알몸의 경험을 관능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시 「민둥산」으로 이 시집을 열고 있음은, 그러니 너무도 당연한 것이겠다.

 

민둥산

 

세상에서 얻은 우리의 이름이라는 게 헛묘 한채인 줄

진즉에 알아챈 강원도 민둥산에 들어

윗도리를 벗어올렸다 참 바람 맑아서

민둥한 산 정상에 수직은 없고

구릉으로 구릉으로만 번져 있는 억새밭

육탈한 혼처럼 천지사방 나부껴오는 바람 속에

오래도록 알몸의 유목을 꿈꾸던 빗장뼈가 열렸다

환해진 젖꽃판 위로 구름족의 아이들 몇이 내려와

어리고 착한 입술을 내밀었고

인적 드문 초겨울 마른 억새밭

한기 속에 아랫도리마저 벗어던진 채

구름족의 아이들을 양팔로 안고

억새밭 공중정원을 걸었다 몇 번의 생이

무심히 바람을 몰고 지나갔고 가벼워라 마른 억새꽃

반짝이는 실비늘이 첫눈처럼 몸속으로 떨어졌다

바람의 혀가 아찔한 허리 아래를 지나

깊은 계곡을 핥으며 억새풀 홀씨를 물어 올린다 몸속에서

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몸을 눕혀 저마다 다른 체위로 관계하는 겨울풀들

풀뿌리에 매달려 둥지를 튼 벌레집과 햇살과

그 모든 관계하는 것들의 알몸이 바람 속에서 환했다

더러 상처를 모신 바람도 불어왔으므로

햇살의 산통은 천년 전처럼

그늘 쪽으로 다리를 벌린 채였다

세상이 처음 있을 적 신께서 관계하신

알 수 없는 무엇인가도 내 허벅지 위의 햇살처럼

알몸이었음을 알겠다 무성한 억새 줄기를 헤치며

민둥한 등뼈를 따라 알몸의 그대가 나부껴 온다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8~9, 「민둥산」 전문)

 

알몸이 될 때 비로소 우리의 감각은 어디 가려지거나 막힌 곳 하나 없이 온전해진다. 그리고 온전해진 감각은 전혀 뜻밖의 새로운 발견과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심오한 인식으로 우리를 이끈다. , 알몸이 될 때, 우리의 시각과 청각은 보다 날카로워지고 넓어지고 우리의 사고와 판단은 보다 유연해지고 깊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도마 위에 놓인 도토리묵 한 모에서 전에는 듣지 못했던, 그게 만들어지기까지 들려 나오는 온갖 소리들을 들을 수 있게 되고(「단단한 고요」), 해 저무는 석양의 하늘에서 하루가 뒤를 보이고 앉아 시름 없이 일을 보는 금빛 항문을 목격하게도 된다(「어느날 석양이」). 또한, 쉰 살부터 더는 꽃이 비치지 않는 엄마의 월경(月經)을 폐경(閉經)이 아니라 완경(完經)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완경(完經)), 자라면서 내내 창피하게 여겼던 자신의 오줌 누는 소리를 이제는 땅 끝까지 시원하게 번져가는 힘찬 강물 소리로 들으며 자랑스러워 하게 된다(「오동나무의 웃음소리」).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행복이란 바로 이처럼 알몸의 열린 감각을 통해 만난 새로운 발견과 깊어진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겠다.

 

이렇듯 김선우 시인이 알몸을 통해 만나는—그녀의 어법으로는 관계하는—세계의 범위와 양상은 매우 광범위하고 본질적이다. 음식물과 과일, 자연 풍경, 동물과 곤충, 나무와 꽃 등 강원도 산골 생활에서 마주친 거의 모든 대상들을 망라하고 있는 이 만남의 순간에, 시인은 일상적인 마주침을 넘어서는 예리하고 깊은 시선으로 그들을 응시한다. 사물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이러한 시인의 시선 속에서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온갖 자연물들의 몸이(또는 육체성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드러난 그들의 몸이 또한 나의 알몸과 다르지 않다는 것,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육체도 결국 그러한 우주적 몸의 순환 속에서 자리 잡고 있는 한 순간의 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간 육체에 깃들어 있는 이 덧없는 유한성, 즉 죽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그것을 전혀 슬퍼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내 몸을 빌려 줌으로써 다른 몸의 탄생에 기여하게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리라. 아래 시는 시인이 채마밭 한 구석에서 배추를 키우면서 비로소 깨닫게 된 이 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시다.

 

빌려줄 몸 한채

 

속이 꽉 찬 배추가 본디 속부터

단단하게 옹이지며 자라는 줄 알았는데

겉잎 속잎이랄 것 없이

저 벌어지고 싶은 마음대로 벌어져 자라다가

그 중 땅에 가까운 잎 몇장이 스스로 겉잎 되어

나비에게도 몸을 주고 벌레에게도 몸을 주고

즐거이 자기 몸을 빌려주는 사이

결구(結球)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라

알불을 달듯 속이 차오는 거라

마음이 이미 길 떠나 있어

몸도 곧 길 위에 있게 될 늦은 계절에

채마밭 조금 빌려 무심코 배추 모종 심어본 후에

알게 된 것이다

빌려줄 몸 없이는 저녁이 없다는 걸

내 몸으로 짓는 공양간 없이는

등불 하나 오지 않는다는 걸

처음 자리에 길은 없는 거였다 (16, 「빌려줄 몸 한채」 전문)

 

시인은 죽음과 탄생이 맞물려 있는 이 사태를 직면하고서야, 우리의 삶이란 처음부터 길이 있어 그 길을 따라 몸이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길이란 몸이 기꺼이 자기 몸을 빌려주는 헌신과 투신을 통해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스스로 택한 유폐의 삶, 즉 막다른 길에서 깨달은 이 몸의 철학—죽음을 넘어서는 순환하는 몸의 우주적 생명력—이 시인을 다시 길의 몸’, 즉 들끓는 소음들과 고통들로 가득한 현실세계로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시인은 말한다.

 

그러면서 문득 길의 몸을 본 것 같다. 더듬거리며 그 몸을 찾아나설 때가 다시 오고 있음을 안다. 더 멀리 가야 한다. 더 큰 고통과 축복의 몸들에게로. 여전히 내 언어는 불화의 쪽에 있지만, 내 속에서 오래도록 나를 불러 온 허방으로 두려움 없이 가야겠다. 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다. (117~118, ‘시인의 말’)

 

시인의 이러한 직접적인 고백은 이 시집의 표제시에서 보다 치열한 다짐으로, 그리고 보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나타나 있다. 강원도의 산골, 자연 속에서 홀로 지낸 3년 간의 유폐와 은둔 생활을 통해서 깨달은 몸의 길, 들끓는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길의 몸으로 이어나가며 제대로 살아낼 수 있을 지가, 이제 김선우 시인에게 남겨진 과제가 될 것이다. 삶의 경험이 부족하고 생에 대한 철학도 모자란 많은 젊은 시인들에게 있어, 이건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다. 하지만 적어도 김선우 시인만큼은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녀가 쓴 아래 시를 읽어본 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 나도 흡혈하듯 그대의 책을 탐해야겠네.

 

도화 아래 잠들다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48~49, 「도화 아래 잠들다」 전문)



c*****t 2011.02.15. 신고 공감 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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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성의 새로운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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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시적 행로는 혁명적이다. 섹스이 자유로운 담론을 벗어나 여성의 몸에 대한 궁극적인 세계는 그녀의 능수능란한 묘사에 투사되어 신선하게 빛이 난다. 여성작가들의 여성성으로 시작된 새로운 문학적 해석에서 한층 더 깊어진 성숙함이 옅보인다. 작가는 여성성에서 비가시적인 우주에 까지 이르는 원초적인 시어들을 사용하며 독자들을 몽환의 공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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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시적 행로는 혁명적이다. 섹스이 자유로운 담론을 벗어나 여성의 몸에 대한 궁극적인 세계는 그녀의 능수능란한 묘사에 투사되어 신선하게 빛이 난다. 여성작가들의 여성성으로 시작된 새로운 문학적 해석에서 한층 더 깊어진 성숙함이 옅보인다. 작가는 여성성에서 비가시적인 우주에 까지 이르는 원초적인 시어들을 사용하며 독자들을 몽환의 공간으로 이끈다. 물론 강원도에 은거중인 이유에서인지 자연에 대한 시적관찰력도 돋보인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남여를 불문하고 모두 여성성의 소유자이다. 여성성 남성성 이 두 이분법적인 사고가 위험하긴 하지만. 우선은 기존의 것을 뒤집기엔 충분히 효과있는 사고라는 것에는 틀림없다. 시인들은 자신 안의 여성성을 십분 발휘하며 그 시의 경지가 높아지는 것이라 생각된다.
g******g 2003.12.19.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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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오동나무의 웃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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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님들이 이루는 아름다운 세상       서른 해 넘도록 연인들과 노닐 때마다 내가 조금쯤 부끄러웠던 순간은 오줌 눌 때였는데 문 밖까지 소리 들리면 어쩌나 힘주어 졸졸 개울물 만들거나 성급하게 변기물을 폭포수로 내리며 일 보던 것인데   마흔 넘은 여자들과 시골 산보를 하다가 오동나무 아래에서 오줌을 누게 된 것이었다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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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님들이 이루는 아름다운 세상

 

 

 

서른 해 넘도록 연인들과 노닐 때마다 내가 조금쯤 부끄러웠던 순간은 오줌 눌 때였는데 문 밖까지 소리 들리면 어쩌나 힘주어 졸졸 개울물 만들거나 성급하게 변기물을 폭포수로 내리며 일 보던 것인데

 

마흔 넘은 여자들과 시골 산보를 하다가 오동나무 아래에서 오줌을 누게 된 것이었다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 여자들 사이, 나도 편안히 바지를 벗어내린 것인데

 

소리 한번 좋구나! 그중 맏언니가 운을 뗀 것이었다 젊었을 땐 왜 그 소릴 부끄러워했나 몰라, 나이 드니 졸졸 개울물 소리 되려 창피해지더라고 내 오줌 누는 소리 시원타고 좋아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딸애들은 누구 오줌발이 더 힘이 좋은지, 더 넓게, 더 따뜻하게 번지는지 그런 놀이는 왜 못하고 자라는지 몰라, 궁금해 하며 여자들 깔깔거리는 사이

 

문 밖까지 땅 끝까지 강물소리 자분자분 번져가고 푸른 잎새 축축 휘늘어지도록 열매 주렁주렁 매단 오동나무가 흐뭇하게 따님들을 굽어보시는 것이었다

- 김선우, 오동나무의 웃음소리

 

 

말이 많은 사회다. 텔레비전만 켜도 이내 자신의 일상을 쉴 새 없이 떠벌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비슷한 이야기들이 비슷한 서술 방식으로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에게 쏟아져 나온다. 이야기하기 위해 이야기를 하는 이 말 많은사회에, 그러나 정작 제대로 된 말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침묵해야 할 때는 침묵해야 하는데, 침묵해야 할 때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말을 한다. 수다스럽다. 별 생각 없이 수다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수다는 과연 침묵의 반대편에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수다스럽다의 일반적인 어감처럼, 수다는 쓸데없이 말을 늘어놓는 것에 불과한 뿐일까?

 

시를 침묵의 양식이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시어의 함축성을 중시하는 시가 침묵의 양식이란 건 당연한 듯 보이지만, 2000년대 중반의 미래파시인들의 경우와 같이, 무슨 뜻인지도 모를 말을 끝없이 중얼대는 시의 양태를 침묵의 양식으로 포섭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시 양식에 한정해서 본다면, 수다와 침묵은 그 의미 맥락을 정확히 가를 수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수다 속에 침묵이 있고, 침묵 속에 수다가 있다는 역설로 이러한 특성을 표현하면 어떨까? 요컨대 시는 침묵과 수다의 사이에 있다. 절제된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시가 수다를 거부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돌려 말하면 침묵의 언어가 내포된 수다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수다의 의미와는 분명히 다른 맥락을 내포하고 있다. 김선우의 오동나무의 웃음소리를 보며 수다의 시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말이 많은 게 수다가 아니라는 점을 위 시는 에둘러 드러내고 있다. 이 시의 화자(이후에는 시인이라고 하자)는 서른 살이 넘도록 오줌 누는 소리가 문밖까지 새어나갈까 조바심친다. 부끄럽기 때문이다. 무엇이 부끄러운 걸까? 오줌 싸는 거야 생리 현상이니, 그 일 자체가 부끄러울 리는 없다. 곧 오줌 싸는 부끄러운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힘주어 개울물 만들거나 성급하게 변기 물을 폭포수로 내리며 일을 본다. 그런데 마흔이 넘은 여자들과 시골 산보를 하다가 시인은 도시의 삶 속에서는 누릴 수 없었던 어떤 환희의 체험을 하게 된다. 오동나무 아래에서 시원하게오줌을 싸는 경험이 그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런 경험이 만들어지게 된 시적 정황에 있다.

 

그녀는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 여자들 사이에서 편안히 바지를 벗어 내린다. 도시의 변기통 앞에서는 막힐 수밖에 없는 소리가 터지는 찰라, “소리 한번 좋구나!”라는 맏언니의 감탄 섞인 한 마디가 불쑥 튀어나온다. 젊었을 땐 부끄럽기만 했던 오줌 누는 소리가 나이 드는 졸졸 개울물 소리 되려 창피해지더라는 맏언니의 말을 들으며 시인은 시원하게 오줌을 내갈긴다. “누구 오줌발이 더 힘이 좋은지, 더 넓게, 더 따뜻하게 번지는지 그런 놀이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자라는 딸애들을 생각하며 마흔이 넘은 여자들은 깔깔깔, 웃음을 터뜨린다.

 

시인은 오줌 소리라는 아주 일상적인 소재 하나만으로 수많은 말들을 뱉어낸다. ‘오줌 누기라는 사건으로 똘똘 뭉친 여자들은 사십 년 넘게 살아오면서 느꼈던 애환을 오줌을 누는 한순간에 표출한다. 위 시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여자들이 내뱉었을 그 숱한 이야기, 곧 수다가 결국은 한 편의 시를 잉태하는 단서가 되었다. 누구나 오줌 소리에 얽힌 추억이 있다. ‘오줌 소리라는 사회적 금기(?)를 말로 표현함으로써 시인은 금기와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우리네의 삶을 에둘러 드러낸다. 저마다의 여자들이 펼쳐내는 오줌 소리 이야기는 그네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더불어 한 편의 시 속에 아름드리 자리 잡는다.

 

김선우는 여자들의 오줌 소리에서 오동나무의 웃음소리를 발견한다. 오줌과 웃음의 사이에 수다와 침묵의 경계가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오줌을 누는 따님들을 오동나무는 흐뭇하게 굽어본다. 시에서 말하는 침묵의 자리이다. 오동나무 아래에서 환한엉덩이를 내놓은 따님들은 시원하게 오줌을 내갈기며 깔깔거린다. 시에서 말하는 수다의 자리이다. 침묵의 자리가 오동나무의 웃음을 향하고 있다면, 수다의 자리는 따님들이 내뱉는 걸죽한 입담들을 향하고 있다. 어찌 보면 다른 이 두 자리가 어떻게 한 편의 시에서 화해롭게 만날 수 있었을까?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진한 삶의 흔적들이 거기에는 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말들의 잔치가 수다라는 이름으로 펼쳐지는 우리 사회에서 김선우의 시는 수다라는 말에 새겨진 삶-감각의 흔적들을 절절하게 내보인다. 수다의 이면에는 침묵이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다. 당신은 오동나무 아래에서 시원하게 오줌을 누며 이런 수다를 떨어본 일이 있느냐고, 시인이 묻는 듯싶다. 고개가 쉽게 끄덕여지지 않는 건 글쓰는 이만의 상황은 아니니라. 따님들의 수다가,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침묵의 소리가 한없이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o*****s 2018.04.2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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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 아래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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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 아래 잠들다(김선우)>를 읽었다. 폐경이 아니라 완경, 냉이가 아니라 나생이, 지나가는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깊은 혜윰(생각)을 툭 던지듯 쉽게 시를 썼다. 나는 쉽게 읽고 깊이 빠졌다.   어려운 말을 초등학생도 쉽게 알아먹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의 말을 어른이 알아먹지 못한다. 그 어른은 왜 못 알아먹는 걸까? 자기의 한뉘(세상)에 박혀있고, 그 울타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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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 아래 잠들다(김선우)>를 읽었다. 폐경이 아니라 완경, 냉이가 아니라 나생이, 지나가는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깊은 혜윰(생각)을 툭 던지듯 쉽게 시를 썼다. 나는 쉽게 읽고 깊이 빠졌다.

 

어려운 말을 초등학생도 쉽게 알아먹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의 말을 어른이 알아먹지 못한다. 그 어른은 왜 못 알아먹는 걸까? 자기의 한뉘(세상)에 박혀있고,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어른은 스스로 가장 뛰어나다고 느낀다. 물론 말로는 겸손의 지름길만 찾아 걷는다. 그러니 사람들이 속을 수밖에.

 

초등학생도 알아먹는 말을 못 알아먹을 때는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내 한뉘(세상)에 취해 있다는 말이고, 내가 똑똑하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새로운 일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다하는 일이고, 누군가에게 내 방식을 강요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멋진 말로 꾸미려는 시가 있는데 엄청 어색하다. 앎을 드러내려고 어려운 말을 모른 척 얹히는 시가 있는데 자기만족이다. 남을 가르치려고(계몽하려고) 몸부림치는 시가 있는데 그냥 시인의 마음만 부리는 시다.

 

김선우 시는 이야기하듯 감정을 슬쩍 던진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이어서 읽게 만든다. 읽고 돌아섰는데 그의 시에 머물게 한다. 삶을 한층 뿌듯하게 올려놓는다.

 

 

g*****l 2020.04.2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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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아름다운 시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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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시인은 참 예쁘다. 천상 시인이라고 할 정도로 정말 곱다.. 그리고 목소리도 여성스럽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강인함을 느낄수 있다.. 그녀의 외모와 목소리 만큼이나 그의 시어들도 이쁘다.. 사물에 대한 따뜻한 시선.. 인생에 대한 낙관적 태도.. 자신에 대한 긍정적 시각..   이러한 것들이 그녀의 시어들을 따뜻하고 감성이 살아있게 한다. 이 시집 <도화 아래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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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시인은 참 예쁘다. 천상 시인이라고 할 정도로 정말 곱다..

그리고 목소리도 여성스럽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강인함을 느낄수 있다..

그녀의 외모와 목소리 만큼이나 그의 시어들도 이쁘다..

사물에 대한 따뜻한 시선.. 인생에 대한 낙관적 태도..

자신에 대한 긍정적 시각..

 

이러한 것들이 그녀의 시어들을 따뜻하고 감성이 살아있게 한다.

이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는 김선우 시인의 두번째 시집니다.

그녀의 시어들은 관능적이고 에로틱한 이미지들과 가득하다.

사물들에게서 어린 여성의 몸이나 여성들의 몸의 이미지로

추상적인 시적 변용을 거쳐 관능적이고 풍성한 시어들로 바꾼다.

 

"..오래도록 알몸의 유목을 꿈꾸던 빗장뼈가 열 렸다/환해진 젖꽃판 위로 구름족의 아이들 몇이 내려와..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몸을 눕혀 저마다 다른 체위로 관계하는 겨울풀들.."("민둥산 " 중)

 

도회지를 떠나 강원도에 살고 있는 시인은 바로 그곳에서 감성을 끌어올려

자연과 여성의 시어로 창조해 낸다.

 

평론가 김수이씨는 "김선우의 시에 그려진 원초적인 몸들은 아름다움과 추함, 깨끗함과 더러움, 신성함과 비천함의 구분 이전에 있다"며 "이 몸들은 자궁을 통해 계속 다른 몸으로 변신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시어들을 읽고 있노라면 원초적인 관능의 소리를 듣고

어미 자궁의 원초적 자리도 돌아갈수 있다.

t******d 2010.09.0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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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설단비 이 한편만 읽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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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들 플라워]를 읽다가 김선우 그녀의 시 한편이 떠올랐다. 도화 아래 잠들다에 실린 입설단비, 캔들 플라워의 생명과 생태에 관한 이미지와는 약간 거리가 있지만 그녀의 내면, 문학성의 깊이를 가늠하는 데는 딱인 게 바로 입설단비일 것이다. 우선 옮겨 보면   입설단비(立雪斷臂)  2조(二祖) 혜가는 눈 속에서 자기 팔뚝을 잘라 바치며 달마에게 도(道) 공부 하기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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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들 플라워]를 읽다가 김선우 그녀의 시 한편이 떠올랐다. 도화 아래 잠들다에 실린 입설단비, 캔들 플라워의 생명과 생태에 관한 이미지와는 약간 거리가 있지만 그녀의 내면, 문학성의 깊이를 가늠하는 데는 딱인 게 바로 입설단비일 것이다. 우선 옮겨 보면

 

입설단비(立雪斷臂) 


2조(二祖) 혜가는 눈 속에서 자기 팔뚝을 잘라 바치며

달마에게 도(道) 공부 하기를 청했다는데

나는 무슨 그리 독한 비원도 이미 없고

단지 조금 고적한 아침의 그림자를 원할 뿐

아름다운 것의 슬픔을 아는 사람을 만나

밤 깊도록 겨울 숲 작은 움막에서

생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저 묵묵히 서로의 술잔을 채우거나 비우며


다음날 아침이면 자기 팔뚝을 잘라 들고 선

정한 눈빛의 나무 하나 찾아서

그가 흘린 피로 따뜻하게 녹아 있는

동그라한 아침의 그림자 속으로 지빠귀 한 마리

종종 걸어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싶을 뿐

작은 새의 부리가 붉게 물들어

아름다운 손가락 하나 물고 날아가는 것을

고적하게 바라보고 싶을 뿐


그리하여 어쩌면 나도 꼭 저 나무처럼

파묻힐 듯 어느 흰눈 오시는 날

마다 않고 흰눈을 맞이하여 그득그득 견디어주다가

드디어는 팔뚝 하나를 잘라 들고

다만 고요히 서 있어 보고 싶은 것이다


작은 새의 부리에 손마디 하나쯤 물려주고 싶은 것이다

 

 

어쩜 그녀는 입설단비를 이미 해버린 것 같다. 잘라 바친 상대가 달마가 아니고 자연, 생태에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캔들 플라워와 입설단비의 거리가 먼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여러 모로 매력적인 글을 쓰는 김선우의 세계가 어디까지 가 닫는 지 궁금해진다.



a*****7 2010.07.2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