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보다도 이 책의 놀라운점은 이 작은 소설책속에 담여있는 진리에대한 문제이다. 진리를 철학으로서 설명하는것이아니라 소설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입담으로 이끌어내다니.. 작가는 정말로 똑똑하고 총명한 존재가 아닌가 싶다. 포스트모더니즘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은 가히 감격적이라 할만하다. 아마도 시대의 흐름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면밀히 파헤쳐 놓았기에 노벨상의 수상이력이 가능했을 것이다. 세상의 중심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객관적인존재로서 제3자의 입장에서 중심을 논해왔지만 사실 진정한 중심이라는것이 있는가. 중심이있고 주변이 있는것인지 주변이 있기에 중심이 형성되는것인지. 주변이 아닌 그 무엇을 마이너스하다보니 결국 남은 일부분이 중심으로 형성 되는것은 아닌지.. 단하나의 불변의 절대적인 진리라는것은 존재할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달아온것처럼 글쓰는 사람역시 언어가 가지는 절대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름은 늘 타인으로부터 불리어진다. 타인으로부터 불리어지는 이름으로인해 정체성을 갖게되는 주체를 주체라 할수 있을까. 이야기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도 진짜 진실을 이야기를 통해 알수는 없다. 언어라는것은 진실그대로를 전달하는듯 보이지만 사실알고보면 전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역시도 타인을 통해 규정지어진다. 마지막사람이 전하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의 처음 그대로의 실체와는 상관없이 진실화되는것 처럼.. ... 읽다보면 한문장한문장 의미있는 문장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외려 주인공의 입담이 내게는 조금은 구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
| 여성의 시각에서 쓰여졌다는 것은 그만큼 남성중심주의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페미니즘, 여성주의, 여성단체 등의 명사앞에 붙어다니는 "여"라는 어미는 그만큼 남성적 시각을 가진 채 쓰여지고 쓰여진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여성의"라는 단어가 끼여있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야?"라는 다소 비딱한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로빈슨 쿠로소는 어린 시절에 누구나 한 번은 읽어보았던 대표적인 소설이다. 나도 몇 번이나 읽었을 정도로 좋았다. 그러나 읽으면서 떠올랐던 의문점은 그냥 그렇게 잊었는데, 잊었던 문제와 답을 여기서 찾은 것 같다. 왜 두 남성만의 이야기인가? 하긴 톰행크스 주연의 '캐스트 어웨이'는 한 남자와 배구공이야기지만. 로빈슨 쿠로소의 작가 다니엘 디포가 소설로 쓰게된 경위가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여서 소설을 읽는 내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쿠로소의 '부인'인 수전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진실은 정말일까? 편협하고 고집센 늙은 남자와 말못하고 시키는 명령외에는 관심없는 프라이데이. 그리고 표류자 수전. 그녀는 끝임없이 그 섬에 대해,쿠로소에 대해, 프라이데이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말하던지 간에 공허한 외침이 되고 만다. 들어주는 포선생외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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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누구나 한번쯤은 '로빈슨 크루소'를 읽어봤을 것이다. |
| <포> 200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남아공 출신 작가 존 쿳시의 86년 작이다. <포>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이 작품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서 포는 영국의 소설가 '다니엘 디 포'를 의미하고, 그는 1719년 발표한 <루빈슨 크루소>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그의 <로빈슨 크루소>는 당대 서구 유럽 (특히 영국)의 세계관이 상징하는 정신세계의 진취성과 문명성 등을 로빈슨 크루소라는 무인도에 표류해 생의 절반 이상을 살아나간 영국인의 생활상을 통해 표현해낸 작품으로 근대소설의 효시 쯤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그러나 작가 존 쿳시는 '다니엘 디포(Defoe)'에서 '디(de)'를 제거하고 '포(foe)'라는 제목을 통해 (그의 원래 이름인지, 아니면 쿳시에 의해 임의적으로 제거된 관사 정도 되는 것인지는 확실히 잘 모르겠으나) 다니엘 디포의 원래의 모습, 소설 속에 가리워진 그의 적나라한 모습을 묘사하여 '텍스트(문학작품)를 만들어내는작가란 무엇인가?'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그치지 않고, '작가가 누구인가, 작가는 작품을 어떻게 탄생시키는 것일까?'라는 아주 구체적인 질문을 던진다. 로빈슨 크루소와 다니엘 디포의 신화적 의미는 이 작품 안에서 모조리 제거되고, 쿳시는 터무니없게도 다니엘 디포가 만든 루빈슨 크루소의 '가상' 속으로 역사적 리얼리티를 지닌 채, 뛰어든다. ('디'는 불어로는 'of' , 영어로는 'not' 의 의미라고 한다. 쿳시가 영어권 작가이기고 하고 해서 여기서는 'not'의 의미를 삭제하여 다니엘 디포의 원래적 의미를 묘사하려 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존에 있던 작품 속으로 뛰들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피상적으로 그것은 리메이크이다. 리메이크의 이유는 두가지로 나뉘어진다. 그것의 뛰어남 때문에, 아니면 그것이 잘못 알려졌기 때문에 이다. 여기서 <포>는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로빈슨 크루소의 신화를 땅으로 끌어내려 재구성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쿳시는 로빈슨 크루소가 상징하는 유럽중심적이고 백인우월적이고 또한 남성우월적인 역사, 그 동안 당연시되고 자명한 진리였던 근대의 승리의 역사를 포스트콜로니얼리즘적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그것의 편향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이러한 기존의 로빈슨 크루소의 편향성은 쿳시에 의한 작품의 변주를 통해서 나타난다. (그의 상상력에 경의를!) 여기서 로빈슨 크루소는 늙고 쇄약하고, 그의 섬에는 '수잔 바턴'이라는 한 여성이 표류해왔었고, 크루소의 하인 '프라이데이'는 혀가 없으며, 프라이데이는 로빈슨 크루소와 끈끈한 주종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기계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섬에 존재한다는 식인종은 단 한번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혹시 식인종의 습격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로빈슨 크루소 자신에게 식인종의 존재를 믿게 한 것이 아닌가 의문점으로 남는다. 또한 크루소의 일과표와 그의 문명적 생활에 관한 기존의 묘사에 대한 반기를 통해 문명이 야기한 독단과 아집을 밝히고 있다. 위와 같은 점들은 작가가 주인공으로 설정한 수잔 바턴이라는 여성을 토대로 루빈슨 크루소의 사실과 다니엘 디포의 픽션 사이에서 묘사되고, 논쟁된다.이렇게 보면 이 작품은 로빈슨 크루소라는 당대의 있음직한 사실에 다니엘 디포라는 작가에 의해 어떻게 픽션화되었는가,를 묘사한 것이다. 영화로 치면 DVD에 서플먼트로 꼭 끼워져나오곤 하는 메이킹 필름 정도 되는 보잘 것 없는 것이 이 작품인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이 의미가 있는가? <포>에는 다니엘 디포라는 루빈슨 크루소의 작가가 등장하지만 작품의 내적 화자는 디포가 아니라 수잔 바턴이다. 이 작품의 의미는 다니엘 디포와 수잔 바턴의 관점의 대비를 통해 소설이 진실을 어떻게 재구성하는가,를 밝혀내는데 있다. 그리고 진실보다 더 진실같은 거짓이 설득력을 지니는 역설을 말하고, 프라이데이라는 소외된 존재, 약자의 침묵이라는 설정을 통해 우리는 그에 관한 진실은 알 수 없으며, 그러한 알 수 없는 것들은 권력에 의해 거짓 구성되어왔음을 일깨운다. (여기서의 권력은 상당히 복합적이다. 일개 작가의 권력 뿐 아니라 헤게모니적 측면, 패러다임적 측면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푸코의 권력 개념이라 여기면 쉬울 것 같다.) 이러한 낫낫의 과정을 보여줌을 통해 작가는 어쩌면 우리의 진실의 일정 부분은 거짓에 매몰되어 버린 것은 아닌 지를 의문시하고 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말할수 없는 것에 관하여 침묵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이러한 맥락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또는 거시적으로 볼 때 역사는) 자신이 잘 알지도 모르는 존재에 관하여 너무 쉽게 얘기해왔다. <포>는 로빈슨 크루소라는작품이 지닌 역사의 편향성- 유럽 문명과 계몽적 측면-을 지적하면서 지금도 역시 모든 개인 또는 민족 또는 국가 안에 존재하는 자기 중심적인 시각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침묵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 '프라이데이'의 상징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시각을 돌이켜봐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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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언제나가 우리가 구출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겪은 것들이 기억에서사라지지않게 하는 표류의 기록이 하나도없다면 후회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만약 우리가 구출 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 죽어간다면, 어떤 기록물이 남아 그누가 되었든 여기에 표류해올 다음 항해자들이 우리에 대해 읽고 울음을 쏟게 될 기록을 하나라도 남겨야 하지않겠어요? 분명 날이 갈수록 우리의 기억은 점점 더 희미해질 거예요. 종이와 잉크를 마들어 이러한 기억의 남은 흔적들을 적어, 이들이 당신보다 더 오래 살게 할 수없을까요?
"아무 것도 잊혀지지 않아. 내가 잊어버린 것은 어떤 것도 기억할 가치가없어. - 본문 중에서
*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들 그 흔적인 기록들. 내 생각은 내가 죽으면 나와 함께 사라진다. 하긴 죽기 이전에 이미 기억 속에서 흩어져버린다. 그러나 기록은 남는다. 우리가 무언가를 기록하고 남기려 하는 것은 왜인가? 우리가 사라진 후에 우리는 우리가 남긴 기록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표류되어서 단 한 줄의 기록도 하지 않는 크루소. 그는 기록으로 남아 해석되어지길 기억되기를 거부한 것일까? 그의 말처럼 우리가 잊어버린 것들은 기억할 가치가 없는 그런 것이었을까?
이 소설은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 혹은 해체하기 다시 재해석하기 등의 부제를 붙일만한 이야기다. 주인공인 수전 바턴은 배에서 쫓겨나 노를 젓다가 늙은이가 된 크루소와 혀가 잘린 프라이데이가 살고 있는 섬에 표류하게 된다. 소설 속에는 갖가지 해석 장치가 숨어 있다.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 모험가 여행가로서의 로빈슨 크루소라는 인물을 고집쟁이 늙은이로 뒤집고 있고, 프라이데이와 로빈슨의 관계 역시 원작이 보여주는 바와 매우 다르다. 그리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로빈슨은 죽고 수잔은 말못하는 혹은 말을 잃은 프라이데이와 둘이 남게 된다. 수잔 바턴은 소설을 쓰는 다니엘 디포에게 찾아가 자신들의 여행기를 써달라는 요청아닌 요청을 하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로빈슨 크루소가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수잔 바턴이라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경험하기와 말하기, 그리고 그것을 다시 이야기로 남기는 일에 대해서도 갖가지 스팩트럼과 해석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늘 다양하게 읽히고 다양한 생각거리를 던지는 그리고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크루소 이야기의 꼬리를 무는 또하나의 이야기인것이다. 그러나 그런 다양한 꺼리들을 생각하면서 읽어나간다면 조금 머리가 아플수도 있고, 로빈슨 크루소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면 좀 헷갈릴 수도 있을 것이고, 꽤 짧은데 그냥 후루룩 읽으면 그냥 그렇게 지루하게 읽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이다. 좀 더 획기적으로 쓰던가 아니면 좀 더 진지하게 쓰던가 아니면 더 스릴있게 쓰던가 하는, 책 보단 광고와 포장이 더 멋졌던 그랬던 이야기였다. - 허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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