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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위해 일생을 바친"이라는 수식어와 나란히 연결된 일본인의 이름이 영 어색하다고 생각되는 건 비단 나 뿐이려나.. 익숙치 않은 이름이다. 얼마전에 읽었던 책([1910년 그들이 왔다], 이상각, 효형출판)에서 그의 이름을 처음 접했다. 1910년 일본의 조선 강제 병합의 주역들을 소개하고 있는 책이었는데, 그 책의 말미에는 "진정 그들은 한국을 사랑했을까?"라는 주제 아래 후세 다츠지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었다. 강제 병합의 "악랄한" 주역들의 이름들의 나열 뒤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읽게 되어서 그랬던지, 혹은 "진정 그들은 한국을 사랑했을까"라는 소주제의 제목 때문인지, 후세 다츠지에 대한 이미지는 그닥 우호적이지 못했다. 그가 인권변호사였다고 해도, 조선인들을 이위한 변호를 했다고 소개를 해도 "그래봤자 일본인"이라는, 선입견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리라.
이 책은 그런 내 선입견 때문에 선택했던 했던 책이다. "그래봤자 일본인"이라는 내 선입견을 깨트리고, "조선을 위해 일생을 바친"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07년 8월 8일부터 10월 21일까지 <후세 다츠지 - 조선인 민중과 함께 살아간 인권 변호사전>을 개최"(p255)했던 "고려박물관"(일본에 있는 박물관인 듯)에서 행해졌던 두 편의 강연을 발췌한 강연록과 후세 다츠지에 대한 두 편의 "논고"를 싣고 있는 책이다.
사실 이 책은 내 기대에 덜 부합하는 책이었다. 이 책을 펴들기 전에 나는 이 책이 후세 다츠지를 소개하는데 충실한 책이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두 번째 강연록인 "후세 다츠지와 재일 조선인인 나"라는 주제로 소설가이기도 한 "고사명"씨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후세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나"의 전후 경험에 대한 이야기와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아서 다소 지루한 감이 있었다. 후세 다츠지가 "나"에게는 얼마나 감동을 준 인물인가는 잘 드러나긴 한 것 같지만..
이 책에 실린 첫번째 강연록은 후세의 외손자 오오이시 스스무의 "후세 다츠지의 생애와 조선"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과 후세가 조선인 학살을 막으려고 노력했던 일, 식민지 조선의 굵직굵직한 "대역(?)"사건들에 대한 변호 등 후세 다츠지가 조선인들에게 끼친 영향을 살펴볼 수 있어 좋았다.
내가 이 책을 펼쳐들었던 목적 - 후세 다츠지에 대해 알고 싶다는 - 에 가장 부합되는 것은 짧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이형낭의 "후세 다츠지와 재일 조선인", 이규수의 "후세 다츠지의 한국인식"이라는 두 편의 논고였다. 후세 다츠지의 생애와 그가 조선인들을 위해 행했던 노력이 가시적으로 잘 드러나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일제 강정 하의 역사를 다룬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만약 이 시대를 살아야했더라면 나는 "친일"과 "반일" 둘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를 자주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주제, 그러니까 내가 만약 당시의 일본인으로 그 시대를 살아야 했다면 나는, 식민지배를 찬성하는 "평범한 일본인"이 될 것인가, 식민지배를 당하는 그들도 인간이기에 존중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별난 일본인"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앞서의 고민에서 내가 적극적인 독립투사가 되지 못할 거라는 결론을 자주 내리게 되는 것처럼, 두번째 고민에서도 나는 "별난 일본인"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씁쓸한 결론을 내리고 만다.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후세 다츠지의 묘지명이라고 한다. 말이 쉽지 행동은 어렵다. 그 신념을 행동으로 실천했기에 그는 죽어서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새삼스레 해 본다. 기억해둬야겠다. "그래봤자 일본인"이 아니라, 이렇게 다른 일본인도 있었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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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다츠지 (조선을 위해 일생을 바친) - 일본인 중에 이런 사람도 있었다 -
일제 강점기는 우리 국민 모두에게 너무도 아픈 상처를 남겼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고, 그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일본인중에 그들과 다른 목소리를 내고 행동했던 사람이 있었다. '후세다츠지'는 바로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우리 조선백성을 변호하고 독립운동을 지지하던 일본인 변호사이다.
내 지식의 부족으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지만, 처음 책에 대한 소개 글을 접하면서 그의 업적과 책 표지의 '조선을 위해 일생을 바친 후세 다츠지' 라는 글 만으로 반드시 알고 싶었던 인물이었다. 우리는 학창시절부터 꾸준히 일제가 우리에게 저질렀던 셀 수 없이 많은 아픈 역사를 알고 있기에, 그로 인해 아직도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기에 일본인에게는 늘 적대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옿1945년 우리가 광복절로 의미를 두고 있는 그 날이 일본인인 '후세 다츠지' 그에게도 자유의 날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그동안 우리민족을 위해 어떤 일을 해왔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이다. 그는 3.1 운동과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해 존경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고,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는 그에게 조선인을 옹호했던 것에 대한 조사와 함께 변호사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자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만행들에 대해 바른 소리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옳고 약한 자를 위해 나를 강하게 만들어라. 나는 양심을 믿는다.” "일본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원조한다고 하면서 어째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원조하지 않는가?"
일본인들은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동요하는 자국국민을 진정시키기 위해 분노하는 그들의 마음을 표출시킬 대상으로 조선인들을 이용했다. 교묘하게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만들어 재일 조선인 6000명 이상을 닥치는대로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그때도 후세는 일본인들이 무슨 이유 때문에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되었는지를 낱낱이 밝히고 언론에 조선인에게 보내는 사죄문을 전달하기도 한다.
그는 일본왕 미수사건, 독립투사 관련사건, 의열단 사건 등 여러가지 사건등 조선인을 자진해서 변호했다. 72세의 나이로 1953년 그가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장례위원으로 참석했으며, 그를 보내는 조선인 장례위원은 조사에서 “우리 조선인에게 있어 정말로 아버지와 형 같은 존재이고, 구조선과 같은 귀중한 존재였다”2004년 10월 우리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일본인이면서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은 '후세 다츠지' 에 대해 알아가면서 진정한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지만, 그의 행적을 알아가면서 더 알고 싶은 마음에 2000년 2월 29일 삼일절 기념으로 MBC PD 에 방영되었다는 ' 일본인 쉰들러- 후세 다츠지'라는 방송을 다시 보기 하려고 했지만, 2002년 방송분 부터 다시 보기가 가능해 많이 아쉬웠다.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 그의 좌우명이자 묘비에 새겨진 문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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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같은 나라도 아니거니와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고 식민지로 지내고 있는 나라를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인물이 있다. 과거를 돌아봤을 때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는 많은 억압과 핍박을 받아야 했고 그에 따른 희생도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는 역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많은 아픔을 보여주는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져 온다. 시대와 상황이 최악이었던 일제 강점기에 일본판 쉰들러라 불리는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역사를 좋아하긴 하지만 식민지였던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을 불사르지 않았던 그는 나에게는 생소하게 다가온 인물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는 알고 있을 것이다. 학교 다닐 때 교과서를 통해서 배우기도 했거니와 역사 관련 책을 접하다 보면 어김없이 언급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독립되기까지는 그들의 희생과 독립에 대한 한(恨)의 결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나마 해보게 된다. 이처럼 과거에 우리가 꿈꾸었던 독립이 이루어졌고 그 덕분에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는 당연히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 희생정신을 아끼지 않고 투쟁을 하였지만 반면에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담보로 민중을 위한 마음과 정신으로 독립운동가를 변호하기란 어렵거니와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변호사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를 변호했다는 그의 이름은 《후세 다츠지》 라는 인물이었다. 역사를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서 그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런 그의 이야기를 담은 「조선을 위해 일생을 바친 후세 다츠지」라는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고 그에 대해서 차근차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후세 다츠지》는 1920년 5월에 ‘전통적인 변호사’에서 ‘민중의 변호사’로 대신하겠다는 『자기 혁명의 고백』을 선언한 후에 양심적인 인권변호사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리고 2004년 10월에 일본인 최초로 우리나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하였으며 1953년 만 7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지만, 그의 장례식에 조선인이 고별식 장례위원으로 참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묘비에 새겨진 문장은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 문장만 보아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으로 태어나 우리나라 민중을 위한 인권변호사로 살아온 그의 생애는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못지않은 활약과 민중을 위한 그의 마음을 책을 읽으면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도 아니거니와 그렇다고 어떠한 이익이라는 대가도 없는 한국의 인권변호사의 삶을 살아온 그의 삶은 본받아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하는 이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도 일제 강점기 시대에 희생한 인물이 많지만, 자신의 나라를 위한 희생보다는 다른 나라를 위한 희생과 그에 따른 정신은 본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통해서 민중을 위한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며 우리나라를 위해 변호사 자격을 세 번이나 박탈당하면서까지 활약했던 그의 업적이나 생애를 엿보았을 때 식민지로 살았던 우리나라의 조선인을 변호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제목처럼 ‘조선을 위해 일생을 바친’ 그는 약자의 편에 서서 헌신한 그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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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한일병합 100년이 되는 해라고 합니다. 때문에 요즘 구한말의 치욕적인 역사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일본 그리고 일본인에 대해 느끼는 정서도 예전과는 많이 변화고 앞으로도 긍정적으로 변화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사건이 워낙 우리에게 치욕적인 역사이고 그로부터 40년 가까운 세월을 일본의 식민지로서, 그리고 식민지 국민으로서 살아왔기 때문인지 몰라도 일본인에 대해 좋지 않은 시각을 가진 사람이 아직까지도 적지 않을 것 또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 <조선을 위해 일생을 바친 후세 다츠지>르 읽고 나서 이러한 우리의 생각에 전환점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식민지 시절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에 건너와 살았을 것입니다. 그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코 한국인에게 우호적이거나 한국인을 위해 살다간 사람들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 후세 다츠지는 자신의 고국인 일본의 부조리를 직시하고 고결한 지조와 양심에 따라 평생을 한국인을 위해 살다간 인물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큰 귀감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고 후세 다츠지라는 인물이 새삼 궁금해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지난 2004년 10월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우리나라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1953년 일생을 마칠 때가지 일본과 재일조선인과 관련된 많은 사건을 담당하면서 참혹했던 식민지 시절의 참상을 직시하고 오로지 양심에 따라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던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습니다. 책에는 그런 그의 다양한 모습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식민지 조선인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휠씬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법정에서 뿐만 아니라 무료법률 상담과 강연회 등 각종 사회활동에도 매진하여 당시 핍박받던 조선인들에 분명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시절에 그런 일본인이 있었다는 것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습니다. 일본인으로서 식민지 조선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후세 다츠지에게 큰 존경을 표하면서, 앞으로도 한일 관계를 좀 더 건강한 방향으로 이끌 많은 지식인들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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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위해 일생을 바친 후세 다츠지.. 2010년은 1910년 강제로 한일합병이 된지 100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일본인 인권 변호사 '후세 다츠지'씨가 더 위대해 보인다. 그 어느 나라도 아닌 일본인 이기에...
후세 다츠지는 1890년에 태어나 1903년 4월 우츠노미야 지방 재판소에 사법관 시보로 부임 한다. 양심과 사상이 어긋나는 법관의 자리에 회의를 느끼고 사법관 시보에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20년 5월 <자기혁명의 고백>을 선언한 후 가난한 사람들과 일본 내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무료 법률 상담과 강연회를 열면서 사회운동에 더욱 매진하였다. 특히, 조선의 독립운동가와 농민들을 위해 헌신하기도 했다. 그가 핍박받는 민족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헌신했음을 그 의 묘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그 가 어떤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 한 마디를 통해 모든 걸 알 수 있을 것 같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변호사가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변호했다?! 솔직히 믿기 힘든 사실이다. 다른 어떤 나라도 아닌, 일본인이... 일본을 비판하며 독립을 외치던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를 위해 변호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를 잘 알지 못했다. 2004년 우리나라 정부로부터 항일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로가 인정돼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그 이름이 조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2007년 가을, 도쿄의 고려박물관에서는 [후세 다츠지전]이 개최되기도 했다. 이 책은 [후세 다츠지전]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던, 강연회의 강연록과 후세 다츠지의 행보와 사상에 대한 논고 두 편을 엮어서 만든 책이다.
후세 다츠지는 특히, 조선의 독립운동가와 농민 들을 위해 헌신했다.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에 대한 사죄와 책임을 통감한다는 내용의 사죄문을 언론사에 전달하기도 했으며 조선인 지원활동으로 변호사 자격을 세 번이나 박탈당하고 두 차례나 투옥되기도 했다. 그의 생애는 한국과 일본은 물론 더 나아가 전 세계가 나아가야 할 화합의 길을 제시해준다 하겠다.
후세 다츠지는 1953년 만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당연한 일이 겠지만 많은 조선인들이 고별식 장례위원으로 참석했다. 조선인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던 그는 식민지 민중의 '벗'으로 때로는 '동지'로 영원히 우리들에게 기억 될 것이다. 그 의 위대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 지는 것도 자연스런 일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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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 다츠지>는 일본의 제국주의 밑에서 우리나라가 억압받고 있을 때, 자신의 사상적 토대와 양심의 잣대에 어긋나는 법관의 자리에 회의를 느끼고 전도유망한 사법관 시보의 자리를 떠나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는 ‘전통적인 변호사’에서 ‘민중의 변호사’로 변신한다는 장문의 <자기혁명의 고백>을 선언한 후, 가난한 민중들과 일본 내 핍박받는 민족을 위해 사회운동에 더욱 매진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변호사가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위해 변호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나라를 수탈한 일본의 국민이, 일본을 비판하며 독립을 절규하던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를 위해 변호한 것이다. 2004년 우리나라 정부로부터 항일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로가 인정돼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했다.
후세가 조선인과 관계를 맺은 것은 조선 유학생들과 긴밀한 유대를 갖게 된 메이지 법률학교 재학 시절이었다. 조선인 사건으로 처음 변호석에 섰던 것은 1919년 ‘2·8 독립선언’ 으로 검거된 최팔용, 백관수 등의 출판법 위반 사건의 2심 법정이었다. 당시 법정에서 후세는 일본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옹호한다는 명목으로 시베리아에 출병한 사실을 지적하며, “일본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원조한다고 하면서 어째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원조하지 않는가?” 하고 검사에게 질문해서 법정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을 폭로하는 동시에 조선 침략의 부당성과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했던 것이다.
2007년 가을, 도쿄의 고려박물관에서는 [후세 다츠지전]이 개최되기도 했다. 이 책은 [후세 다츠지전]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던, 강연회의 강연록과 후세 다츠지의 행보와 사상에 대한 논고 두 편을 엮어서 만든 책이다.
강연록 1에서는 ‘후세의 생애와 조선’에서는 후세의 손자인 오오이시 스스무가 2차 세계대전 이전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후세의 인품과 그의 에피소드들로 그의 조선인을 위한 활동상을 보여준다.
후세는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조선을 방문했다. 첫 번째 목적은 경성 지방법원에서 김시현을 필두로 한 의열단원들을 변호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목적은 경상남도 김해에서 열린 형평사 창립기념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다. 세 번째 목적은 조선인 유학생 사상단체인 북성회가 조선에서 개최한 하계 순회강연의 변사를 맡기 위해서였다.
강연록 2에서는 ‘후세와 재일 조선인인 나’에서 작가인 고사명이 후세를 만남으로 자신의 삶이 변화된 이야기와 2차 대전의 전과 후를 조명하면서 일본의 패망을 경고한다. 또 두 사람의 강연 외에 ‘후세 다츠지와 재일 조선인’에 이형낭의 논고와 ‘후세 다츠지의 한국 인식’에 대한 이규수의 논고를 함께 실었다.
후세는 자신의 좌우명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를 실천하면서 살다가 1953년, 만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고별식 장례위원으로 참석했다. 조선인에게 있어 아버지와 형 같은 존재였던 그는 식민지 민중의 ‘벗’으로 때로는 ‘동지’로 영원히 각인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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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쉰들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을 이용해 큰돈을 번 독일의 사업가였다. 그는 독일이 침공한 폴란드로 가서 폴란드계 유대인이 운영하던 그릇 공장을 인수해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임금이 낮은 유대인을 공장의 일꾼으로 썼다. 그러던 중 그는 유대인 학살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쉰들러는 자신이 가진 재산을 활용해서 유대인들을 구해 내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재산을 털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들을 공장에서 일을 시키겠다는 이유로 한 명씩 사들였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그가 유대인들을 데리고 간 공장은 제대로 가동된 적이 없다고 한다. 유대인을 일꾼으로 쓰겠다는 것은 그들을 구할 명분일 뿐이었던 것이다.
당시 폴란드에 살고 있던 유대인은 약 6,000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중 절반 이상이 나치에 의해 잔인하게 학살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1999년에 발견된 명단에 있는 사람이 1,200명이었으니 결국 쉰들러는 살아남은 폴란드계 유대인의 절반가량을 구해 낸 것이었다.
<후세 다츠지>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제국주의 밑에서 억압받고 있을 때, “옳고 약한 자를 위해 나를 강하게 만들어라. 나는 양심을 믿는다.”라는 말과 함께 수많은 독립투사를 위해 기꺼이 변호를 맡고, 그들의 생명을 구한 변호사였다.
조선 독립운동사에서 빠짐없이 등장한 후세 변호사는 한국과 대만 등 피압박민족의 인권문제에 앞장서 온 양심적 지식인이지만, 그동안 국내학계에서는 그의 좌파성향 때문에 집중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일본에서는 ‘일본 변호사 100인’에 꼽힐만큼 활발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지난 2004년 10월 일본인 최초로 우리나라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후세 다츠지>는 2007년 가을, 일본과 조선. 한국의 교류사를 연구하는 고려박물관에서 ‘후세 다츠지전’을 개최하고 그때의 강연록을 간행한 책이다. 강연록1의 ‘후세의 생애와 조선’에서는 후세의 손자인 오오이시 스스무가 2차 세계대전 이전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후세의 인품과 그의 에피소드들로 그의 활동상을 보여준다. 강연록2의 ‘후세와 재일 조선인인 나’에서는 작가인 고사명이 어린 시절 탕자와 같던 자신의 삶이 후세로 인해 구원된 이야기와 2차 대전의 전과 후를 조명하면서 일본 근현대사의 어둠을 경고한다. 두사람의 강연 외에 ‘후세 다츠지와 재일 조선인 - 해방 후를 중심으로’ 에 이형낭의 논고, ‘후세 다츠지의 한국 인식’에 대한 이규수의 논고를 실었다.
후세는 자신의 좌우명인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를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실천한 사람이다. 후세는 1953년, 만 72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장례식 때 재일 조선인이 낭독한 조사에는 후세는 “우리 조선인에게 있어 정말로 아버지와 형 같은 존재이고, 구조선(救助船)과 같은 귀중한 존재였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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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조선을 위해 일생을 바친 후세 다츠지 저자 : 오오이시 스스무 고사명 이형낭 이규수 역자 : 임희경 출판 : 지식여행 금액 : 15,000 원
다들, 보지는 못했을지라도 이름은 들어본적이 있을법한 영화 < 쉰들러 리스트 > 2차세계대전당시 나찌 당원이 되어 공장을 차지하고 유대인을 부리며 돈을 벌기위해 열중하던 독일인 쉰들러가 회계사였던 유대인 스턴과 가까워지고 인간생명의 존엄을 느끼면서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고, 그 노력의 일환으로 1,000명이 넘는 유대인을 살린 전쟁속의 실화
소설도 유명하지만,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로써 대다수 사람들이 그 이름은 한번쯤 들어봣음직한 이야기다.
어떤책을 살까 골라보던중에 문득 " 일본판 쉰들러 " 라는 이름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내용을 조금 보니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고 한국인 노동자를 감싸주었던 일본인 변호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인 최초로 우리나라의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한 일본인
여태 몰랐던 새로운 사실인지라 망설임없이 이 책을 구매했다.
후세 다츠지
일본인으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상을 수상한 인물 여태껏 왜 이런인물에 대해서 전혀몰랐을까 라는 의구심을 가지면서 책장을 넘겨보았다.
양장본인지라 겉지를 벗겨내자 심플한 속지가 나온다.
일본식 용이 중앙에 조그맣게 그려진 멋스러운 표지가 썩 마음에 든다.
후세다츠지는 처음부터 조선에 대한 관심이 컸던 것은 아니다.
한 귀환병사가 동학농민군을 무참히 학살했다는 자랑을 얼핏 듣게된 후로 그는 조선강점에 대한 반대의견을 표출하였으며, "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 "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한다.
그후 그는 일본내 불평등한 조선인에 대한 변호와 심지어 독립운동을 하다 기소된 조선인에 대한 변호를 도맡아 하게된다.
" 일본과 한국의 합병은 어떤 미사여구로 치장하더라도 실제로 그 이면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이 침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일제의 한국강점 조약이지만, 일본내에서는 한일합방이고 정확하게는 한국 병탄이라는 말이 맞을듯하다.
돌이켜보면 만주를 넘어 대륙의 일부까지 그 영향력을 과시했던 광개토대왕의 일화가 우리에겐 자랑스러운 일이겠지만, 중국내에서는 수치스러운 일이고, 또 치욕의 역사일것이다.
거의 모든 일본인이 자국의 한국병탄을 환영하고 있을때 이렇게 양심적인 생각을 할수있는 사람이 과연 일본내에 몇명이나 있을수 있을까 그리고 그말을 스스럼 없이 뱉어내고,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보여줄수 있는 이가 그 몇이나 될까..
또한 그는 일본이 패망한 직후에도 조선인에 대한 변호활동을 그치지 않는다.
당시 일본의 패망직후에도 일본내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은 부지기수였고, 제대로 살 자리가 없었던 그들은 탁주를 불법으로 만들어 살며 생을 연명할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주던건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 뿐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은 교육적으로는 훌륭하고, 우리가 몰랐던 인물에 대해서 깨닫게 해준것 이외에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기는 힘든책이다.
책의 공동저자인 위의 네사람이 일본의 고려박물관에서 열린 < 후세다츠지 전 > 을 기념한여 강연한것을 엮은것이 바로 이 책인데, 너무 재미없고, 딱딱하며, 후세 다츠지와 관련되지 않은 이야기로 줄줄 이야기를 늘어놓는 경향도 제법 된다.
일본판 쉰들러라도고 불리우는 < 후세다츠지 > 에 대해서 알고싶은 이가 있다면 이 책을 읽어도 좋겠지만, 굳이 이 책 자체는 추천을 하고싶지는 않다.
또 제목에 적힌 < 조선을 위해 일생을 바친... > 이라고 적힌 내용은 조금 민망한 감이 없지 않아있다. 그가 다른 이보다 조선의 독립에 대한 정당성을 언급하고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조선인에 대한 사건을 많이 변호한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을 위한 변호사라기 보다 민중변호사 라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4차례나 방문하며 한국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것도 사실이고, 일본판 쉰들러라는 호칭도 적절한듯하나 한국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것은 너무 과한 일인듯하다.
후세는 굉장히 양심적인 변호사이자 지식인이었으며, 일본의 한국강점 조약에 대한 그의 시각은 부당한 일을 대한 그의 양심이 움직인것이지 특별히 한국에 대한 애달픔이 있어서 그런것은 아닌듯하다.
물론, 책의 내용이 부실하다보니 그럴수도 있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은 제대로된 < 후세 다츠지 천기 > 나와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하나같이 비열하고 잔악무도한 무리로만 인식되어온 일제강점기 시대의 일본인중에서도 이렇게 남의 아픔을 보고 자신의 양심이 움직이는데로 움직인 인물이 있었다는것만으로도 일본에 대한 내 인식이 달라지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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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 다츠지 처음 들어 본 이름이었다. 하지만 책을 좀 읽어 보다가 오래전 M방송의 시사프로그램에서 한국인을 변호하던 일본 변호사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참 별일이다 하고 생각했던 일이 떠오른다. 바로 그 사람이었다. 자세한 기억은 없었지만 일본에도 참 양심적인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던 기억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았다. 그럼 후세 다츠지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우리나라에서 훈장까지 받았을까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겠다. 나는 오늘까지 스스로 믿는 바에 비교적 충실한 변호사로서의 성실함을 세상으로부터도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비교적 충실한 생활을 소극적으로 지켜 얻은 것으로, 스스로 믿는 바에 충실하고 용감한 생활을 적극적으로 해서 얻은 바에는 이르지 않는다. -page 21 그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믿는 바를 실천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믿음은 어떤 것이기에 자신의 나라가 벌이고 있는 일에 반대가 되는 일을 하면서까지 우리의 기억에 남아 다른 나라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가 믿는 것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움직인 것이다. 세상이 변해도 자신이 믿는 신념 사람이 가져야 할 보편적인 양심을 말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든 조선인은 일찍이 그의 조국이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유랑민이 되었다. 게다가 강제 연행 등으로 일본으로 건너와 오늘날에 이르렀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조선이 해방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생활로는 밀항선을 탈 돈도 없고, 없는 돈으로 암거래 생활을 하며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가운데 ‘탁주’로 활로를 찾은 것이다. - Page 79 아키타 탁주 밀조 사건 변론의 서두이다. 그는 조선인들이 탁주 밀조 사건으로 연루되자 변호를 시작한다. 이 서두의 이야기만 보더라도 보편 타당성을 들어 재판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분명한 이유와 결과가 따른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은 금방 잊어버리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의 사람에게 잘못을 던져 버리려는 순수하지 못한 일본 사회에 그는 일갈을 던지며 이 변론을 시작을 한다. 이 사건 이외에도 많은 사건들의 변론과 한국인과의 인연 그리고 대만에서의 활동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의열단 김지섭의 나주바시 폭탄 투척 사건,( 사실 이 이야기는 나도 잘 모르는 근대사 이야기이다. 내가 기억하는 의열단 사건이 이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역사적 지식이 짧은 것에 대한 한숨이 나온다.)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 재판, 유종환. 유여종 형제 경찰관 치사사건 등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일본 점령기의 사건들을 변호하고 인권을 지키기 위한 활동을 하였다. 많은 사건과 그와의 인연 그리고 그의 행적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첫 장에서 그의 손자가 그와의 기억을 더듬어 하는 강연회 형식의 그의 행적을 이야기 하고 있다. 두 번째 장에서는 제일동포와 그와의 삶 속에서 그의 행적을 더듬는 강연회 형식을 , 세 번째 장에서는 그의 행적을 위주로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그의 행적과 기록을 근거로 그의 사상과 생각을 더듬어 보는 내용을 취하고 있다. 책장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나의 근현대사 지식의 부족함 그리고 조선을 위해 아니 한국을 위해 일 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신념대로 움직이는 양심으로 행동하였던 후세 다츠지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 스스로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기에 전시 상황이었던 일본에서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인데 그의 행동하나에 어쩌면 우리 조상들이 힘을 받았을 것이고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을 지도 모른다. 올해가 경술 국치 100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한일 합병이라는 말은 일본이 만들어낸 신조어라고 한다. 한일 병탄이라고 해야 한다고 한다. 강압적으로 나라를 빼앗는 행위를 말할 때는 병탄이라고 한다. 지나간 역사라 해서 잊지 말아야 하며, 어느 시대건 올바른 양심은 존재한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었던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