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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들이 떠나간 그곳에는 그들의 이름만이 남아있다. 여느 때보다도 혼란스러운 시대에 태어났지만 열정과 낭만에 대해 알고 있었던 그들의 모습을 카트린 클레망은 복원해냈다. 표지를 처음 보았을 땐 두 남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거라고 생각을 했다. 다만 두 주인공이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것이 조금은 특별나게 보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자의 초점은 그 둘을 빗겨가고 있었다. 마르틴과 한나라는 제목을 택했지만 결국 이 책은 엘프리데와 한나여야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책을 읽는 내내 했다. 실제로 마르틴의 존재는 소설의 배경에 깔려있을 뿐, 어느 부분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마르틴은 이 소설을 가능케 하는 존재이지만 소설의 어느 부분에도 깊숙이 개입하지 않는 방관자적인 형태로 묘사되고 있다.
마르틴은 어느 누구도 침범해서는 안 되는 혼자만의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엘프리데는 마르틴과 가정을 꾸렸지만 그 가정은 마르틴의 연구, 학문적 생활을 위한 희생의 장이었다. 그 점에서 엘프리데는 마르틴과 함께일 수 없었다. 이는 한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마르틴을 사랑했지만 결코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마르틴과 함께함을 결정할 수 있는 어떠한 권한도 주어지지 않았다. 엘프리데와 한나, 그 둘은 마르틴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였지만 동시에 마르틴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입는 동일한 구조 속에 속한 인물이기도 했다. 티격거리는 그들의 모습은 한 남자를 두고 벌이는 여성들의 질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치즘이라는 거대한 화두를 두고 벌이는 한편의 전쟁이기도 했다. 민족의 부흥을 꿈꾸었을 뿐, 나치의 어떠한 말살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고 이야기하는 엘프리데의 모습은 시온주의자인 한나에게 모순 그 자체였다. 하지만 한나는 시대가 만들어낸 악독한 이들의 내면에 숨쉬고 있는 인간성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스라엘을 꿈꾸었지만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강성화를 이야기하는 속에서 또 다른 이름의 나치즘을 엿보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전범 아이히만에 대해 관대(?)할 수 있었다.
그런 둘의 만남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것은 한나가 죽기 불과 네 달 전에 이루어졌다. 이제는 너무 늙어 자신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힘겨워하는 마르틴을 가운데 두고 벌이는 신경전. 하지만 그것은 전쟁이면서도 동시에 화해였다. 서로 맞지 않는 부분으로 인해 언성을 높이고, 때로는 격한 목소리로 서로를 대하는 두 인물은 결국 여성이라는 공통분모로 인해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재잘대던 아이들을 숨죽이게 만들고, 자기 자신 역시 살얼음판을 걸어야만 했던 엘프리데의 지난 날을 한나는 이해했다. 그리고 엘프리데 역시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낸 한나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면서 이야기는 잔잔한 반전을 그리고 있었다. 한나 아렌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마르틴 아닌 엘프리데가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해지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한나를 떠올리며 촛불 하나를 켜진 않았을지…
카트린 클레망의 글은 항상 무언가 내게 어려움으로 다가오곤 했었는데 너무 쉽게 읽히는 이 글 앞에서 나는 저자에 대해 다시금 관심을 가져보게 된다. 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미시적인 부분을 넘어서 세계대전과 1968년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한나 아렌트와 마르틴 하이데거에 대해 그녀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를 생각하면서 검은 밤을 하얗게 밝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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