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교 1학년때 자취방에서 홀로 고독과 싸우며 이 책을 애인 삼아 읽던 것이 기억난다. 이 책과 비슷한 시대를 그린 조정래님의 "아리랑"이 있는데, 감동은 그 이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대는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사랑 그리고 배신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시대를 초월해 있고, 누구나가 눈물을 흘릴 준비를 해야 한다. 이미 드라마로 방영되어서 큰 인기를 누린 적이 있는데, 드라마에서 적나라하게 표현하지 못했던 일제의 만행은 물론이고 사랑 그리고 배신을 책에서 더 감동적이게 접할 수 있다. 매 장마다 매 권마다 스릴과 감동이 넘치므로, 아마도 밤 늦게까지 읽을 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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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드라마를 보았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유명한 장면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여러 군데서 패러디가 되기도 했었고 그 장면을 직접 명장면이라고 꼽는 것도 보았었다. 철조망을 사이에 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안타까운 키스 장면. 최재성이 최대치로 채시라가 윤여옥으로 나왔던 명작인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다. 드라마를 다시 보기는 시간상 어려웠기에 더 이 책이 궁금했는지도 모르겠다. 열 권의 긴 여정을 그렇게 시작해본다.
시작하자마자 사건은 급속도로 전개된다. 뒤에는 무슨 내용이 나오려고 이러나 싶을 정도로 빠른 전개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되고 그로 인해서 더 몰입해서 읽게 된다. 북경대학을 다니던 최대치는 군인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되고 그저 학생이었던 십대 소녀인 여옥은 정신대에 끌려가고 동경대학을 다니던 장하림은 일본 여자와의 사랑에 빠졌다가 군대에 소집되었다. 그렇게 주인공 세 명이 모두 전쟁 속으로 투입되는 결과가 되었다. 만약 전쟁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그들이 만나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그렇게 그들은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운명을 맡겨 버린 것이다.
정신대로 끌려갔던 여옥이 대치를 만나고 사랑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같은 조선 사람이라는 것으로 동질성을 느꼈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어디 사랑이라는 것을 지속하게 해주던가. 부대는 이동을 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그들의 사랑도 여기에서 저무는가 하지만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될 것임을 제삼자인 나의 입장에서는 이미 잘 알고 있다.
한편 일본 여자를 사랑했지만 그로 인해 군대에 끌려가게 된 장하림은 의학을 배웠다는 이유로 세균을 잘 안다는 이유로 세균전을 연구하는 상사와 함께 하게 된다. 버마와 사이판 그렇게 찢어져서 전쟁은 산발적으로 벌어진다. 어딘들 사람이 있는 곳이면 분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전쟁에 대한 위험도 위험이지만 일본인들은 여전히 조선인들을 무시하고 짓밟는다. 아리랑을 읽었을 때의 울분이 다시 한번 기어 오르게 된다. 같은 시대 조선 땅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아리랑에서 그려졌다면 이 이야기 속에서는 전쟁에 참여했던 인물들을 통해서 세계 각지의 그때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읽고 나니 사이판에서 보았던 만세 절벽이나 일본군들이 있었다는 장소 그리고 대포들이 다시 생각났다. 이 책을 다 읽고 사이판을 다시 가게 되면 다른 느낌으로 만나지겠구나 하는 생각이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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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박경리), 삼국지(황석영 편역), 장길산(황석영), 아리랑(조정래), 태백산맥(조정래), 한강(조정래), 김홍신의 대발해(김홍신),객주(김주영) 모두 가벼이 여길 수 없는 한국 문학사에 남을 만한 대하소설들이다. 안타깝게도 혼불과 임꺽정은 절판 되어 보지 못했으나 임꺽정이 다시 발간 된다기에 예약해 놓은 상태이고... 이렇게 주절주절 여러 작품들을 늘어놓는 까닭은, 이 작품 여명의 눈동자가 어쩔 수 없이 이들과 비교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최소한 소설적 재미에 있어서는 앞서 열거한 어느 작품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는 글 읽는 재미는 객주를, 종합점수에 있어서는 아리랑을 꼽았었는데, 이제 소설적 재미라는 분류를 하나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객주는 그 독특한 맛이 다르고 종합점수 면에서는 아리랑을 2등으로 내리기에는 미련이 남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내내 조정래의 아리랑과 특히, 태백산맥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작가 조정래와 김성종을 비교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두 작가 모두 민족의 아픔을 끌어안으려는 모습이긴 하지만, 그 아픈 역사를 바라보는 입장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4.3과 한국전쟁을 통과하는 이야기 전개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나는 여기서 두 작품이 발표된 시점을 고려할 수 밖에 없었다. 박정희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기에 발표된 여명의 눈동자와 전,노로 대변되는 신군부의 폭정이 마무리 되던 시기에 발표된 태백산맥의 차이라고나 할까? 또한 나는 TV로 방영된 드라마를 보지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드라마를 먼저 보았더라면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드라마의 장면이 계속 떠올랐을 것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토지를 읽을때 경험한 것으로 호흡이 긴 소설을 읽을 때 상당한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에 잠시 추리소설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어서 김성종 이라는 작가는 친숙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이작품을 읽으면서 오히려 과거에 내가 알고 있던 김성종이라는 작가에 대하여 얼마나 잘 못 알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더이상 지극히 통속적인 소설을 다량으로 양산하는 그저 그런 작가가 아니다(최소한 내게 있어서) 지금 나는 고은이 한국문학의 최고봉이라 칭한 홍명희의 임꺽정 재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여학생과의 미팅을 앞둔 까까머리 시절의 설레임을 다시 맛보고 있다. 기나긴 이야기를 지어내느라 자신의 인생을 소진하는 작가들에게 감사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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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는 90년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숱한 화제를 만들어 내었던 <여명의 눈동자>와 여러모로 닮아 있다. 윤여옥(채시라분)을 중심으로 얽히고설킨 운명의 두 주인공 장하림(박상원분)과 최대치(최재성분)의 갈등과 대립, 연민의 파노라마는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철조망을 사이에 둔 채 대치와 여옥이 키스하는 장면에서는 그 안타까운 사랑에 죽을 만큼 아팠고, 대치가 인도차이나의 정글에서 산 뱀을 물어뜯는 장면에서는 아연실색하면서도 그토록 강한 삶의 의지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림과 여옥, 여옥과 대치, 대치와 하림에게 씌워진 운명의 굴레와 <서울 1945>의 주인공들인 동우와 운혁, 석경과 해경(개희)의 엇갈린 사랑과 어긋난 운명은 다르지 않다. 서로를 연민하고 누구보다 더 사랑하면서도 함께 할 수 없도록 운명 지어진 그들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들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일까. 여명의 눈동자의 마지막 장면에서 하림은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그 해 겨울, 지리산 이름 모를 골짜기에 내가 사랑했던 여인과 내가 결코 미워할 수 없었던 친구를 묻었다. 그들은 가고 나는 남았다. 남은 자에게는 남겨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18회가 방영된 <서울 1945>의 첫 회에서 남측의 동우는 북측의 운혁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다. 하지만 동우의 약혼자인 해경은 "이 사람이 죽으면 나도 살 수 없다"며 애원한다. 끝내 해경과 운혁의 도주를 묵인하는 동우와 <여명의 눈동자>의 하림은 같은 별을 타고난 인물이다. 대치를 위해 스파이 노릇을 감수했던 여옥이나 어린 시절부터 운혁을 사모했기에 동우를 배신해야 하는 해경은 운명의 자매들이다. 가슴을 갈래갈래 찢어놓는 사랑의 아픔과 풀어버릴 수 없는 사슬로 그들을 옭아맨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해방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굴곡진 현대사의 격랑을 일으킨 것은 바로 분단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 구석구석에 분단의 그림자는 짙게 드리워져 있고 지금까지도 걷히지 않고 있다. 분단이란 괴물의 마수는 우리의 정신과 이성을 반신불수로 만들며 그로 인한 골병은 늘 현재진행형이다. 멀리로는 동족상잔이라는 참혹한 비극을 겪어야 했고 군부독재를 용인해야 했으며 신성한 '개인'을 주장하는 것이 간첩질이 되는 암흑의 시대를 경험해야 했다.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호소가 '불온'이 되는 이 모순의 땅에서는 인간은 이데올로기의 노예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분단의식은 언제나 피상적이며 감성적이다. 학문에 인간이 없고 이념에 사람이 없으면 이는 모두 가짜다. 분단은 바로 그 가짜의 것들이 진짜처럼 행세하도록, 그 가짜를 진짜로 맹신하도록 우리에게 광기를 불어넣는다. 무조건 수용과 무조건의 배척을 강요받으며 살아온 오랜 세월 속에서 우리의 의식은 굳어버렸다. 분단은 그렇게 한 개인의 정신까지를 지배한다. 분단을 뛰어 넘어 경직된 의식의 관절에 유연함을 길러주는 데에는 장편만한 것이 없다. 요즘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과 텍스트에 해당하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이 두껍고 어려운 책을 읽기란 쉽지 않다. 우선 재미가 없다. 내 삶과의 구체적 연관성이 없으니 더욱 어렵다. 선택은 소설이다. 소설은 비록 꾸며낸 이야기긴 하지만 작가는 작품 속에서 현실보다 더욱 사실적인 세계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 속에는 당대가 있고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 있으며 긴장과 갈등을 고조시키는 사건이 있다. 인물과 사건은 곧 역사다. 또한 소설은 한 시대의 사회구성원들의 집단적 경험을 구조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는 당대의 정신과 전형(典型)을 드러낸다. 그것은 그대로 내 경험의 한토막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재미있다. 그저 추리작가로만 알고 읽기 시작했던 김성종 문학(여명의 눈동자)이 주는 충격에 놀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식음을 전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 10권을 사흘 만에 읽었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텅 비어버렸던 기억. 남북으로 갈린 운명의 소용돌이보다 더 강하게 부딪친 생존의지, 식인(食人)을 서슴지 않으며 살아남으려는 최대치를 비롯한 패잔병들의 정글은 충격과 경이의 세계였다. 분단은 해방 후 찾아온 것이 아니다. 세계열강들의 협상테이블에서 정해진 것도 아니다. 분단은 피식민지배를 거치면서 이미 예정된 역사의 불행이다. 민족은 만주로 북간도로 뿔뿔이 흩어졌고 우리의 자원은 수탈되어 제국주의 전쟁의 군자금으로 충당되었다. 강토에는 전쟁을 위한 산업기반만이 기형적으로 산재하였다. 소위 식민지 근대의 암울한 현실에 지식인 계층은 황국신민의 길을 걸었고 굶주림과 착취에 지친 민심은 꿈조차 포기하였다. 조정래의 <아리랑>은 바로 그 식민지시대 인간 군상들을 현미경으로 보듯 생생히 재현해낸다. 김제 군산을 중심으로 한 강토의 곡창지대를 배경으로 식민지 백성의 한과 눈물 그리고 그 참혹한 삶을 이야기 한다. 일제에 부역하거나 일제에 항거하거나 한 시대를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삶이 그 안에 녹아있다. 삶의 터전, 인식의 지평은 강토에 머물지 않고 만주 하와이 블라디보스톡까지 확대된다. 수많은 취재여행과 자료수집으로 복원해낸 나라 잃은 백성의 삶은 그대로 '한'이다. 같은 민족 간의 갈등과 반목은 곧 이념의 맹신을 부추기고 이는 분단시대를 여는 서막이다. <태백산맥>은 그 분단이 잔인하게 충돌하는 역사의 진혼곡이다. 소설 속의 분단과 식민지가 어디 두 장편뿐이겠는가. 분단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작품에 녹아 있는 한 모든 문학은 통일(분단)문학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포켓북 형식 등으로 다시 출간되고 있는 책들 중에는 70,80년대의 주옥같은 단편들도 많다. 이를테면 일송에서 내놓은 '판문점'을 비롯한 이호철의 단편선 등이 그것이다. 또한 분단이 우리에게만 주어진 고통은 아니다. 베트남과 독일 등, 그러나 그들은 그 분단을 극복하였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기왕 우리의 삶을 암중에서 지배하고 있는 분단에 대하여 눈을 돌렸다면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서 식민지 분단을 경험한 베트남의 분단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독서가 될 것이다. 더욱이 그 나라는 우리의 젊은이들이(우리에게는 선배세대가 되겠지만) 달러 몇 푼에 미제의 앞잡이가 되어 전쟁을 수행한 불행한 역사의 현장이 아니던가. 방현석의 <존재의 형식>은 우리의 눈으로 본 베트남의 분단에 관한 단편이다. 단편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창비)의 일독을 권한다. 어린 나이에 정글의 전사로 참여했던 시인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반레의 소설 <그대 아직 살아있다면>(하재홍 역/실천문학사)은 한 때는 우리에게 악마의 빨갱이라 가르쳐졌던 베트콩 친구에 관한 회고담이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그러나 외세로 인한 분단에 철저히 저항하다 밀림의 고혼이 된 아름다운 영혼의 친구를 추억하는 소설이다. 독자 여러분들이 꼭 한 번 읽기를 권한다. 드라마 <서울 1945>의 주인공들 중에서도 누군가는 남겨져 시대를 증언하고 사랑했던 친구를 추억할 것이다. 베트남 시인 또한 친구를 추억하고 시대를 증언한다. <아리랑> 역시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노래다. 소설 속의 '대한민국 1945'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눈 덮인 골짜기에서 하림이 하던 말이 다시 들려오는 듯하다. "남겨진 자에게는 남겨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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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방영 당시 그 충격적 비쥬얼에 넋이 나간 사람이 많을거다. 역사 시간보다 드라마를 통해 역사를 보게되는 우리에게 그 진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일제강점기 어느 마을에선가 끌려온 정신대 여성들이 차에서 내려 막사에 들어갔다. 그후 군인들이 몰려 들기 시작했다. 막사 여기저기서 소리를 지르고 고통과 신음에 아파하는 여인들을 군인들은 신나게 밟았다. 그렇게 그녀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어떤 사내가 자신을 가지는 지도 모른채 그렇게 자신의 몸을 더렵혀 갔다. 조선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된 학도병들은 가지않는 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상부의 명령을 어겼다는 미명 아래 괴롭힘을 당했다. 억지로 막사 앞에 들어선 그들은 머뭇거리며 막사안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사랑이 피어나리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대치는 축 늘어져 있는 여인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자신이 배식받은 빵을 나누어 주며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채옥이라했다. 이름처럼 아름다운 그녀는 넝마를 입고 있었도 빛이났다.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들의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 보통 많은 남자를 상대한 여인은 자궁이 망가져서 아이를 가질 수 없는데 여옥은 대치의 아이를 가졌고, 그들의 사랑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전쟁은 그들을 갈라 놓았고, 그 유명한 철망사이의 키스를 만들었다. 그 장면에서 절절한 그들의 사랑은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음을 보였 주었다. 그렇게 여옥과 대치는 헤어지게 되고, 여옥은 전쟁 속에서 아이를 가진 채 모진 고통을 이겨내고 아이를 출산한다. 그때 자신의 아이를 받아준 장하림이란 장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채옥이 평화롭게 출산하는 것을 도와주면서 생명의 경이로움과 그녀의 강인함에 매료된다.
드라마에서는 최대치와 여옥의 가슴아픈 사랑을 드라마틱하게 잘 그려냈다. 그런데 책은 너무나 잔혹하다. 그 놈의 이념이 뭔지 여옥은 대치의 야망으로 인해 평화로운 삶을 이어나갈 수가 없다. 그 사이에 끼어버린 장하림 또한 같은 운명이다. 그때 당시의 퍽퍽한 삶과 그 속에서 몸부림 치며 살아가는 그들은 먼 이야기나 허구가 아니라 우리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이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자식들을 위해 희생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부모들의 모습도 그 내 들과 틀리지 않을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