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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의 범주를 어디까지 둬야 할 지 모르겠지만, 볼륨이 상당히 적다. 전체 150페이지 정도의 신국판 판형. 헤르타 뮐러의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언어 예술의 궁극을 만끽했던 '숨그네'의 감동에 번역 출간된 그녀의 책들을 모두 구입했다. 책장을 넘기며, 이 책의 제목이 어떤 의미인지를 내내 되짚었다. 초반부 야간경비원과 주인공인 빈디시의 대화에 등장하는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살펴보니 루마니아 속담이다.
'날개가 퇴화한 꿩은 위기에서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쉽게 먹이로 전락한다. 몸집만 커다란 꿩은 어설프고 무력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을 상징한다. 인간은 위기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꿩처럼 때로는 무력하고, 때로는 비열하고 비겁하다.'- P156
이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루마니아의 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희대의 독재자였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소수 독일인들에게 강한 탄압을 일삼는다. 빈디시 가족으로 대표되는 이주민들에게 삶의 희망은 출국허가증이다. 그것을 얻기 위해 뇌물과 아첨, 심지어 딸의 몸까지 바쳐야했던 당대의 사회상.
'숨그네'에서 러시아로 끌려간 주인공의 수용소 생활을 시적 언어와 환상적인 리얼리즘으로 구현했던 헤르타 뮐러. 이 소설은 '숨그네'를 1/3로 압축한 한편의 서사시다. 처절한 궁핍과 국가의 폭압 속에서도 뮐러의 시선은 담담하다. 도리어 서정시를 방불케할 정도의 아름다운 시어로 가득하다. 완벽한 단문과 단문 사이에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문장이 뚝뚝 단절되는 듯한 느낌이다. 현실과 상상이 수시로 교차한다. 누구의 생각이고 행동인지 쉽게 분간하기 힘들다. 출퇴근길, 버스 안에서 읽으려 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렇게 읽어선 안될 책이다. 문장 하나에 우주를 담고 있듯, 찰나에 그 의미들을 쉽게 지나칠 수 있다.
150페이지 분량의 소설을 책상에 앉아 2번 반복해서 읽었다. 일회성 읽기로는 그 의미 해석이 쉽지 않다. 압축된 시어의 참맛을 깨닫기 힘들다. 하지만 두 번째로 책장을 넘기며 '구덩이', '눈물방울', '키스자국', '올빼미', '파마' 등 49개의 소제목을 따라 읽으니 신기하게도 하나하나 깊이 있는 울림이 느껴졌다. 섬뜩하리만치 담담한 어투로, 당대의 참혹한 현실을 아름답고, 서정적인 시어들로 채워나간다. 헤르타 뮐러 소설의 주요 소재 자체가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당대의 현실이지만, 아름답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녀만의 독특한 문장의 힘이라 하겠다.
'저지대', '마음짐승'을 차례로 읽어볼 생각이다. 거듭 드는 생각이지만, 뮐러의 소설은 주제 사마라구의 그것과 대별된다. 누가 더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뚜렷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두 작가의 소설들을 교차로 읽는 것도 큰 즐거움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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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와 <저지대>의 인연이 이어진 책읽기였습니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가 상당히 난해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는 읽는 호흡이 조금 수월하다는 느낌입니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는 전작들처럼 차우셰스쿠 정권의 탄압에 시달리는 루마니아의 독일계 소수민족들의 애환을 그려냈습니다. 그 무렵 루마니아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나치에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독일계 주민들을 곱지 않은 시각으로 보고 있었던 것인데, 정부에서도 나서나 탄압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작중 화자인 빈디시가 방앗간의 야간경비원에게 이야기하는 대목입니다. “저들은 닭이고, 달걀이고 닥치는 대로 빼앗아가고 있어. 심지어는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옥수수까지 빼앗아가는 판이야. 언젠가는 자네 집과 마당까지 빼앗아갈걸.(111쪽)” 독재정권의 횡포에 시달리던 독일계 소수민족은 서구세계로 이주를 원했고, 독일 정부도 이주민 한 명당 많게는 팔천 마르크까지 루마니아 정부에 지불하여 이들의 이주를 지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루마니아 정부는 지원금을 받아 챙기고도 여권을 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는 독일계 소수민족들이 여권을 발급받기 위하여 무슨 짓을 하는지 서술해냈습니다. 작중 화자인 빈디시는 방앗간을 운영하면서 여권발급을 도와준다는 이장에서 밀가루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구한 밀가루보다 훨씬 많이 날라다 주고 더해서 큰돈까지 건넸지만 여권을 감감 무소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피가공사는 여권을 수월하게 받아냈다고 합니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질척거리니 더 안달이 날 수밖에 없었겠습니다. 그러던 빈디시도 드디어 여권을 손에 넣게 됩니다. 딸 아말리에가 나서서 경찰과 신부에게 몸을 허락하는 대가가 있었습니다. 정부와 연관이 있는 직책을 가진 이들은 모두 주민들을 벗겨먹으려 드는 상황이니 주민들은 하나같이 내일이 없는 삶을 버텨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라는 루마니아의 속담을 제목으로 가져왔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이야기의 앞부분에서 야간경비원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빈디시의 목소리로 두 차례 언급됩니다. 우리나라의 꿩은 날렵하게 잘도 날아갑니다만, 루마니아에서는 날개가 퇴화한 꿩은 적이 나타났을 때 날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포식자의 먹이로 전락한다고 인식해왔다고 합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는 쫓기는 꿩이 낙엽더미에 얼굴만 파묻는다고 해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방식으로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여기저기에서 옛날 우리네 삶과 많이 닮은 구석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찌는 듯한 8월의 무더위 속에 사람들은 커다란 수박을 두레박에 담아 우물 아래로 내려뜨려 시원하게 만들어 먹었다는 것은 제가 어렸을 적에 여름이면 즐겼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모피가공사가 아들을 만나러 가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터널을 여러 개 지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루마니아가 평원인 줄 알았더니 카르파티아 산맥이 나라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어 언덕과 저지대가 번갈아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터널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승객들이 책을 읽는 모양입니다. “끊임없이 낮과 밤이 바뀌더라니까. 배겨내기 힘들더라고. 모두 자리에 앉아서 창밖은 내다보지도 않아. 밝아지면 책을 읽는데, 무릎에서 책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여간 조심하는 게 아니야.(32-33쪽)” 저도 기차나 차를 타고 여행을 할 때는 책을 읽는데 터널에 들어가면 책에서 눈을 떼고 언제쯤 터널이 끝나는지 앞을 바라보곤 합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늙은 올빼미는 마을 사람들의 죽음을 암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고단한 삶을 버텨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허망하게 죽음을 맞곤 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낱낱이 까밝히기가 수월치 않은 이야기인데도 감정을 섞지 않은 담담한 필체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을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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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며 기대하게 되는것들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기위해 만들어진 이야기. 소설을 읽기 전 언제나 질문하곤 한다. "무엇을 기대하는가?" 중고등학교때 알고 넘어갔으면 참 좋았을 것을 뒤늦은 지금에서야 답을 내리고 있다.
첫 번째는 만들어진 이야기가 주는 '자극' 그 자체다. 새로움을 즐기며 여행 하는것 같은 자극을 받을 수 있다. 소설이 가진 마약같은 매력이다.
두 번째는 인물의 삶을 간접 체험하는데 있다. 인상 깊이 남기긴 힘들지만 시간 효율면에서 상당히 좋다. 또한 절대 경험 할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이 어디인가? 그 속에서 인물의 경험과 감정을 공감하며 얻는 재미와 경험은 소중하다. 특히 극한의 상황 속에서의 내 모습을 생각해 보면 솔찍한 내 자신과의 대화가 가능하다. 가끔 감추려 노력했던 새로운 모습을 보기도 한다.
세 번재는 작가의 메시지를 공감하고 싶어서 이다. 스토리텔링을 통한 메시지 전달은 언제나 쉽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자기계발서 작가는 기억에 안남지만 소설가의 이름은 머릿속에 남는 이유가 아닐까한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는 위에 3가지를 모두 충족시켰다. 필요 이상으로 말이다. 우중충한 분위기와 무거운 내용, 거지같은 현실... 책을 읽는 내내 우울했다.
난 일반인
화려한 문체와 광범위한 어휘 사용, 카메라 앵글 속 상황을 설명 하는듯한 산문체. 여러가지로 읽기가 어려웠다. 다 읽었다는 포만감 뿐 남는것이 없었다. 이런 글이 교과서에 실려 수능에 나오면 전국에 있는 국어 선생님들이 짜증을 내지 않을까?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냥 찍고 넘어 갈 것이다.) 조금 더 머리가 커서 읽으면 새로운것이 보일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문화충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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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에 이어 두번째 인연이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일단 제목이
너무 길고 생소한 문장이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추천 받아 읽기 시작했지만 아
니다 싶으면 바로 접으려했다. 난 유난히 제목에 민감한 편이다. 영화도 제목이 맘
에 안들면 안보려든다. 딱 50페이지만 읽어보자 하고 책을 들었는데 책이 너무 가
벼워서 금새 기분이 좋아졌다. <숨그네>에서 헤르타 뮐러의 언어 마술법에 약간 길
들여진 탓에 이번 책은 훨씬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점점 더 갈수록 집중하게되고
집중하다보니 어느새 다 읽어버렸다. 숨그네에서도 치열하게 생존하는 모습을 그려
냈고 이 책에서 역시 가족의 모든것을 내어주면서 생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
서 생존은 곧 <이주>이다.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달라는 것은 모든지 내어 주어야
하는..
여권이 곧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희망권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끔찍한 현실 불
쌍한 인생들. 헤르타 뮐러는 이 어둡고 음침한 이야기들을 너무나 고요하고 담담하
게 풀어나간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냥 보고 들은 그대로의 이야기를 떡하니 풀
어 놓듯이 말이다. 그래서 읽을때는 눈물 한방울 조차 나오지 않지만 읽고 난 후에
는 가슴이 답답하고 조여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거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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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타 뮐러의 책들은 펼치기 전에 한번 크게 숨을 들이마시게 된다. 앞으로 왠지 산소가 부족하게 될 것만 같은 예감... 그리고, 늘 그랬다. 이 중압감은 그녀가 하는 말들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온다.
알듯 모를듯한 은유를 담은 이 긴 제목의 이야기 또한 당시 독재 치하의 루마니아에서 소수민족으로 암울한 삶을 이어가던 독일인들의 삶을 담고 있다. 독재 치하에서 탐욕과 뇌물, 술수와 불법이 판치는 그들의 현실은 우리나라 일제 시대를 떠올리게도 한다. 아니, 멀리까지 갈 것도 없이 결국은 '돈'의 독재 아래 있는 이 대한민국의 어두운 일면들과 겹쳐진다. 외동딸만은 지키겠다던 빈디시는 소원하는 여권을 손에 넣기 위해 그 딸의 몸까지 내어준다. 무수히 바친 밀가루 두 푸대로 안 되자, 결국은 소중한 것까지 내어주는 어리석음. 이 나약함이 권력의 횡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조류에 속하지만 날개가 퇴화한 꿩은 위기에서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쉽게 사냥감이 된다. 몸집만 커다랄 뿐, 먹잇감의 가치 밖에 지니지 못하는 꿩은 무력하고 때로는 비열하며 비겁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을 상징한다. 그렇게라도 살아가는 것, 그들에겐 그것이 최선이다. 아, 어쩌면 우리에게도...
카타리나는 빵 열 조각에 겨울 외투를 팔았다. 위는 한 마리 고슴도치였다. 카타리나는 날마다 풀 한 줌을 꺾었다. 풀수프는 따뜻하고 맛있었다. 몇 시간은 고슴도치가 가시를 옴츠렸다.
두번째 눈이 내렸다. 카타리나에게는 털담요가 있었다. 낮에는 담요가 외투였다. 고슴도치가 콕콕 찔러댔다. (p.125)
빵 때문에 몸을 판 빈디시의 아내 카타리나의 과거가 회상되는 순간, 남부끄러운 것은 문제가 안 된다고 말하는 그 뻔뻔한 당당함이 이해가 된다. 뱃속에서 쿡쿡 찔러대는 '살겠다는 의지'가 가련할 뿐이다. 원하던 여권을 손에 넣고 빈디시 가족은 떠나지만, 그들이 꿈꾸던 '새로운 세계'는 과연 있을까? 그 곳엔 또다른 이름의 권력과 횡포가 있을 뿐. 꿩이 바라보는 세계는 자신이 사냥감인 세계, 살아남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보지만 어차피 자신은 '없는' 세계이다. 생존을 위해 당신이 치루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라는 이름이 아닌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직시하게 만드는 작가... 헤르타 뮐러의 이 가볍고 자그마한 책을 오늘도 무겁게 덮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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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타 뮐러의 책은 저지대로 시작했다. 분량은 얼마되지 않지만 내용이 무거워서인지 아니면 시적인 표현이 많아 이게 과연 무얼 뜻하는지 곰곰히 생각하느라 그랬는지 평소 책을 읽는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루마니아의 독일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씌어진 그 책은 아름다운 문장과 시적인 흐름속에 참담한 현실을 풀어 놓았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역시 느릿느릿 읽었다. 한 번을 읽고, 또 한 번을 읽고. 헤르타 뮐러만의 시적인 표현에 마음을 맡기고 빈디시 가족과 그외 소수 독일인들의 삶의 흔적을 따라갔다. 빈디시는 루마니아에 살고 있는 독일 사람이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빈디시는 마찬가지로 포로 수용소에서 살아 남아 돌아온 카타리나와 결혼을 했고, 둘 사이에는 딸 아말리아가 있다. 카타리나는 빈디시처럼 죽음을 보았다. 카타리나는 빈디시처럼 살아 돌아왔다. 빈디시는 자신의 삶을 얼른 카타리나에게 붙들어 매었다. (67p) 빈디시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마을에서, 장롱 안에서 그 바지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것을. 고향마을이 있고, 앞으로도 오래오래 있으리라는 것을 전쟁터와 포로 수용소에서는 미처 몰랐었다. (68p) 그들은 루마니아의 현실을 견디지 못해 독일로 망명하려고 하나 그 자격을 갖추기가 힘들다. 이장에게 밀가루 포대와 돈을 가져다 바친지 벌써 2년. 그러나 여전히 이장은 기다리란 말 뿐이다. 도대체 언제쯤이 되어서야 루마니아를 떠나 독일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빈디시의 주변 사람들인 목수가족과 모피가공사의 가족도 여권을 얻었는데, 왜 빈디시의 가족은 여권을 받지 못한 것일까. 목수의 아내는 세례증때문에 신부에게 한 번, 여권때문에 경찰에게 한 번 불려갈 것이다. 신부가 제의실에 철제침대를 갖다놓았다고 야간경비원은 이야기했다. 신부는 그 침대에서 여자들과 함께 세례증서를 찾는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면, 다섯 번 만에 찾아낸다네." 야간 경비원은 말했다. "하지만 신부가 일을 아주 철저하게 하려 들면, 열 번이 될 수도 있어. 경찰이 신청서나 인지를 무려 일곱 번 잃어버리거나, 어디 뒀는지 기억 못 하는 경우도 많아. 그러면 경찰은 이주를 신청한 여자들과 우체국 창고의 매트리스 위에서 그걸 찾는대." (79p)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빈디시의 가족은 딸을 신부와 경찰에게 보내야만 여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 독재자가 권력을 잡아 소수의 독일인들이 더욱 탄압을 받게 된 상황하에서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갈망, 이것들이 합쳐져 결국 딸을 목사와 경찰에게 보내게 된다. 자신의 딸이 그지경이 되다 보니 빈디시는 아내에게 자꾸만 트집을 잡는다. 러시아에서 몸을 팔았다느니 하면서... 전쟁터에서 포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왔던 것에만 감사해하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지금은 그렇게 살아 남은 것이 비난이 되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들이 생존을 위해 자유를 찾아 독일로 가면 처음에는 아말리아의 희생에 감사하겠지만, 나중에는 또다시 자신의 아내의 정절을 탓한 것처럼 빈디시는 자신의 딸 아말리아의 정절을 탓하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그가 그토록 소원하던 생존과 자유가 주는 행복은 더이상 의미없는 것이 되지 않을까. 그들에게 있어 생존은 인간의 존엄성을 앞서는 것이었다. 수많은 뇌물을 갖다 바치고, 자신의 아내나 딸을 바치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살아 남고 싶었다. 감히 독재정권에는 저항할 수도,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 뿐. 인간은 가장 두려웠던 순간이 지나면, 다시 본성이 드러난다. 살아 남은 것만에도 감사했던 것을 잊는다. 사냥꾼의 총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꿩처럼, 인간도 결국은 그런 존재일런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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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억난다. 작년 가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발표했을 때의 그 생소함. 부랴부랴 헤르타 뮐러란 작가를 검색해봤지만 정보가 너무 빈약했다. <책그림책>이라는 책에서 헤르타 뮐러의 이름을 건져 올릴 수 있었으나, 이미 읽은 책임에도 기억이 안나 더 당황스러웠다. 다시 한 번 책을 읽어보아도 그림을 보고 다양한 작가들이 짤막한 글을 쓴 책이라 헤르타 뮐러라는 작가를 알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문학동네에서 <숨그네>와 <저지대>가 출간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싶었다. 그러다 지인으로부터 헤르타 뮐러의 작품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읽어볼까 하고 구입한 것인 지난 6월이다. 그때라도 바로 읽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 저자의 방한 소식과 함께 세 권의 책이 잇달아 출간되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를 먼저 선택한 것은 저자의 책이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소문에 지레 겁먹지 않으려 비교적 얇은 책을 고르다 먼저 읽게 되었다. 국내에 출간된 다섯 작품 가운데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책이라 약간 떨리긴 했으나, 방한소식과 함께 책 정보와 저자에 대한 소식을 어느 정도 알고 나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약 150쪽의 얇은 책이었으나 짐작대로 가볍지 않은 책이었고, 그녀가 왜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감히 내가 노벨문학상을 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문학과 결합시키는 과정을 철저히 보아온 느낌 때문이었다.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실감나는 묘사보다 무심한 듯 툭툭 던져내는 그녀의 문체가 어떤 묘사와 설명보다 더 진솔하게 다가왔고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종종 전쟁에 관한 문학을 읽다보면 과연 나라면 어떻게 살아갔을 까란 막막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상상은 일분도 이어지지 못하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생각을 흩뜨려 버리는 걸로 끝이 나곤 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도 내가 주인공 빈디시의 가족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저런 상황이었다면 과연 나를 온전히 지킨 채 살아갈 수 있었을 까란 질문으로 스스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독재 치하의 루마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독일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곳에 빈디시의 가족이 중심에 있었고, 빈디시의 가족처럼 서구세계로 가기위해 여권을 손에 쥐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여권만 손에 쥐면 핍박받는 땅을 떠나 고향에서 맘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들이 생각하는 여권은 쉽게 쥐어지지 않는다. 여권을 받기 위해 많은 뇌물을 주었음에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여권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여권을 받으려는 것인지, 여권을 받으려고 그 치욕을 참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삶의 괴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빈디시는 여권을 받기 위해 뇌물을 바치고 치욕을 견디면서도 나름대로의 중심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중심은 루마니아를 떠나 고향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 속에 그것이 희망으로 비춰지지 않더라도 그들이 여권이 나오길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희망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이웃의 죽음, 전쟁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희망을 키운다는 것은 너무나 먼 미래의 일 같았다. "처음에 루마니아 사람들은 히틀러가 죽었는데도 여전히 독일 사람이 있다는 걸 의아해했어.(중략)'아니, 아직도 독일 사람이 있네, 더구나 루마니아에.' " 이런 의아한 시선을 견뎌낸 독일 사람들처럼 빈디시는 나름대로 밑바닥까지 내려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외동딸인 아말리에를 바치는 일까지 하고 말았다. 빈디시의 아내는 "다들 어떻든 여권을 손에 넣으려고 애쓰는데, 당신은 아니야. 그렇게 정직하고 잘났으니 어떡하겠어." 라고 말하며 여권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당당하다고 못 박는다. 그런 그녀를 보며 비난할 힘조차 없는 내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그들이 당면해 있는 현실이 어떠한 것인지 철저히 알게 되었다.
빈디시와 개(犬)뿐인데도 '혹시 그림자가 다가와 엿보지 않는지, 엿듣지 않는지 어둠 속을 응시'하는 야간경비원처럼 그들에게 개인적인 삶은 없었다. 가택수색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 와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오히려 죽음이 평안해 보일 정도로 느껴졌다면 너무 잔인한 것일까. 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확신만 있다면 버티고 버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들 그런 과거가 어떻게 기억될지 뻔해 어떠한 말도 뱉어낼 수 없었다. 그들이 고향이나 고향이 아닌 곳에 돌아가서 현재와 다른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그들에게 남겨진 과거는 추억이 아니라 고통이 될 터였다. 정도를 지킬 수 없는 삶을 살아온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조차도 알 수 없는데, 또 다른 삶에서의 내면이라 할지라도 지켜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이 모든 과정이 저자의 경험과 버무려져 독특한 문체를 빚어내고 있었다. 저자의 문체는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자꾸 헛손질을 하는 것처럼 무모하게 느껴질 정도로 의미 함축적이다. 늘어지지 않는 간단한 문장 가운데서도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다음을 연결하는 발판이 무엇인지를 잊게 만들 때가 허다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의 문체가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은 의미를 상실해버리는 함축성 뒤에 숨은 실재의 바탕이다. 소설로만 치부해 버릴 수 없는 현재성, 인간의 밑바닥을 보여주면서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절망과 희망의 부조화가 그녀의 작품에 자꾸 다가가게 만든다. 그녀의 작품을 읽고 나서야 지인이 내게 말했던 "쉽게 읽히는 작가는 아니지만 그녀만의 특별한 매력이 있어 좋다."란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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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타 뮐러의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친위대였다.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의 수용소에서 5년간 노역했다. 전후 루마니아의 소수 독일인들은 히틀러의 몰락과 독재정권의 탄압 속에서 강도 높은 감시를 당하며 두려움에 떨어야했다. 독재와 감시에 시달리는 이들의 강박을 제하면 그의 문학이 성립할 수 없듯이, 헤르타 뮐러의 가족력과 루마니아의 독일계 주민의 역사는 그가 평생을 천형처럼 매달리게 되는 테마가 된다. 삶과 문학이 서로를 비추어 공포의 시대를 무력하게 살아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모습을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에서 다시금 해후한다.
히틀러의 몰락과 더불어 영락해버린 이방인들, 슈바벤 주민들은 이중의 감시, 이중의 탄압, 이중의 수치, 이중의 절망을 안고 산다. 쉽게 버릴 수도 없고, 버려지지 않는 삶에 대한 유일한 희망은 독일로의 이주뿐이다. 추방과도 다름없지만 자발적인 망명으로 포장되어진 채, 이주를 염원하는 이들을 둘러싼 거래에서는 거의 모든 부정한 것들이 판을 친다. 거대한 독재 못지않은 구석구석에 깃든 악취, 생존의 대가로 치러야할 인간다움의 상실, 신뢰와 애정 대신 자리 잡은 협잡과 추문의 향연으로 들썩이는 이 작은 마을은 『저지대』에서 이미 만난 적이 있었다.
빈디시는 이장의 집에, 경찰에게 쉴 새 없이 밀가루 포대를 나른다. 5번만 옮기면 나올 것 같았던 여권은 해가 바뀌어도 발급되지 않고, 밀가루 포대 이상의 무언가를 이장, 경찰, 주임신부에게 바치지 않으면 영영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권과 서류를 허가해주는 일이 이루어지는 은밀한 장소인 권력자의 침대에 외동딸을 밀어 넣어야하는 빈디시의 용납할 수 없는 심정과는 달리 아내는 딸 아말리에가 잡은 기회를 적극적으로 반긴다. 육신을 욕보이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낙오와 기회를 잃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임을 아내는 수용소 시절에 이미 겪은 바가 있음으로 해서.
「저지대」에 등장했던 어느 촌로는 슈바벤 마을이 샤르데냐 같은 섬이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푸념한다. 슈바벤 공동체의 지정학적인 특수성은 그네들을 더욱 고루하고 편협하게 만들고, 챠우세스쿠 시절은 이를 더욱 강화하고 무력감을 대물림하게 한다. 밀가루 포대, 모피 외투, 유리 세공품, 가축이며 농작물을 모조리 바치고, 그들의 아내와 딸들을 은밀한 침대에 밀어 넣은 후 가까스로 얻게 된 이주의 기회는 자유와 희망을 보장해주는 듯 했지만, 새 땅에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것을 또 다른 슈바벤 공동체의 축소판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오욕의 더불어.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라고 말하던 야간경비원은 재혼을 하고 마을에 남기를 자처한다. "인간은 강해. 짐승보다 더 강하지(p. 15)" 인간은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도 전쟁과 수용소를 뒤로 할 수 있다. 살아가기 위해 무감해지고, 살아내기 위해 용서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은 살아남게 된다. 그렇지만 생존이 곧 극복은 아니며, 흉물스러운 과거는 흉터를 남긴다. 날개가 둔화된 꿩은 위협을 받으면 자기 몸에 머리를 묻는다. 옥죄이는 공포가 야기한 절망은 근시안적인 자기보신과의 타협을 강요한다. 루마니아의 독재자와 슈바벤의 음험한 유지들을 뒤로하고 자유에의 이주를 성공했을지라도, 결코 맞바꾸거나 내주어서는 인간다움을 상실했다면 그들이 자유의 땅에 건설하는 것은 또 다른 슈바벤 촌락일 수밖에 없다.
공포와 불안이, 감시와 위협이, 부패와 부정이 어떻게 인간을 잠식해나가는지, 인간을 '세상의 거대한 꿩'으로 전락시키는지에 대한 헤르타 뮐러의 보고서는, 날카롭게 단련된 언어로 이루어진 고발장이다. 이 정제된 자성적 문학은 전쟁과 독재의 파괴력이 이름과 모습을 달리해서 등장하는 그리 낯설지 않은 현실과의 싱크로를 불러일으킨다. 빈디시, 그의 아내 카탈리나, 외동딸 아말리에와 그 주변인들이 이름과 모습을 달리해 곳곳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을 느낀다. 불온한 시대, 인간은 머리를 묻는 대신 누추한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 꿩이길 꿈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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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타 뮐러는 <숨그네>에서 고통과 슬픔을 담담하고 아름답게 그렸다. 때문에, 슬픔이 더 크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무척 어렵게 읽은 탓도 있겠지만, 묘한 여운을 남겼다. 해서, 두려움을 안고 다시 그녀의 글을 만났다. <숨그네>에 비하면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는 얇은 책이었지만, 역시나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책을 펼치자 마자 마주한 문장은 이렇다. ‘전몰자 기념비 주변에 장미가 피어 있다. 장미는 우거진 덤불. 아주 무성하게 자라나 풀들의 숨통을 틀어막는다. 종이처럼 돌돌 말린 작고 흰 꽃을 피운다. 꽃들이 바스락거린다. 동이 튼다. 곧 날이 환해질 것이다.’ p 11 아, 어쩌란 말인가. 나는 숨을 죽인다. 이건 시작일 뿐이다. 헤르타 뮐러의 글은 이처럼 강렬하고 황홀하다. 그리하여, 그 황홀함 속에 숨겨진 슬픔과 절망을 때로 잊게 한다.
소설은 루마니아 작은 시골 마을에 살고 있는 소수 민족 독일 사람들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빈디시 가족을 중심으로 모피가공사, 목수, 재단사, 야간 경비원, 통장이, 늙고 힘 없는 노인들의 삶을 보여준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빈디시, 그의 아내 카타리나는 전쟁의 참혹함을 견내냈지만 서로의 상처를 할퀴며 지낸다. 그랬기에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의 떠남은 간절했는지 모른다.
빈디시는 루마니아를 떠나기로 결정한 날부터 방앗간으로 출근 할 때 날짜를 헤아린다. 헤아린 날짜가 많아질수록 절망감은 커져간다. 밀가루를 시작으로 온갖 뇌물을 받치지만, 권력을 가진 경찰과 신부가 원하는 것은 끔찍했다. 도시에서 유치원 교사를 하는 딸, 아멜리에를 원했다. 가장인 빈디시는 자신의 무력함에 고뇌하지만, 러시아에서 몸을 팔며 살아남은 아내 카타리나는 다르다. 루마니아를 떠나야만 살 수 있기에, 생존은 죽음보다 위대하기에 어떻게든 여권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아멜리에의 희생으로 여권을 얻는 비참한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비겁한 삶은 얼마나 가혹한가.
시대적인 배경으로 보면 수용소의 생활를 다룬 <숨그네>의 뒷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고통을 견디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선택할 자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독재 치하에 살고 있는 그들의 삶은 인간 본연의 가치를 누리는 생활이 아니었다. 일상을 함께 나누던 이웃과 친구를 믿을 수 없는 공포가 가득한 시절이었다.
헤르타 뮐러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죽음, 이별, 기다림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인간답게 살고자 자유를 위해 떠난 사람들, 떠나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 죽음으로 남겨진 사람들의 치열한 하루 하루를 너무도 고즈넉하게 담아냈다. 짧고 강렬한 문장으로 이뤄진 소설은 하나의 거대한 산문시라 할 수 있다. 루마니아에서 독일로 이주한 헤르타 뮐러의 경험이 더해졌기에 생생한 풍경의 묘사와 인물의 복잡한 감정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헤르타 뮐러만이 쓸 수 있는 고요한 글은 그 어떤 화려한 글보다 큰 울림을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