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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비판적인 경향의 소설들은 그 소설이 지닌 경향성으로 인해 디스토피아를 드러내든지(조지 오웰의 1984), 유토피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페미니즘 소설가들에게서는 유토피아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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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은 몇프로나 될까. 여자로 태어나 희생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어머니 아니 내 자신을 말하고 싶다. 많은 독자들이 미래의 등장으로 유토피아를 생각할 것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세계를 말이다. 주인공 코니는 다른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상을 말해주고 있다. 처음 접하는 순간 소설이 지만 이여자가 미쳤나. 아니면 타락한 삶에서 다른곳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하는것일까. 정말 여러가지 생각이 공존하게 만든다. 자신이 스스로 만든 공간속에 살아가지만 정작 자신조차 자신을 알수 없는 세상에 살아가는 모습을 통새 비현실적인 미래를 보게된다. 타소설과는 달리 모던클래식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만큼 사회속에서 약자로 살아가고 있는 여성을 마주보게 함으로써 철학적인 의미를 벗어나 자아에 대한 고민을 만들게 하지 않 나 생각한다.
뉴욕의 아파트 코니의 문을 누군가 급하게 두드린다. 자신의 조카 돌리가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과거에는 그 래도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애인이었지만 지금은 포주로 변해 조카에게 매춘을 시키는 그와 살아가는 조카 를 살아갈수 없다. 코니도 한때 따뜻한 가정이 있었다. 하지만 남편이 감옥에서 임상실험에 참여했다가 죽자 나 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딸을 폭해하고 결국에는 양육권을 박탈당하는 수모도 당하면서 말이다. 그런 가운데 코니의 눈에 루히엔테라는 인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을 미래에서 왔다고 소개한다. 한편 돌리를 찾아온 헤랄도에게서 조카를 구하기 위해 반항하던 코니는 결국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버 린다. 강제적인 입원과 약물치료를 통해서 코니에게 개인적인 삶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병원에서도 코니는 루시엔테와 접속하는 가운데 미래를 보게된다. 그 미래의 도시는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아닌 과학의 발 달로 인공적인 분위기로 다가온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출산하는 것이 아닌 기계에 의해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모 습이 사실 현실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현실과 미래를 통해서 코니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적 어도 자신을 찾고자 하는것일까. 왜 사람들이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일까 하는 부분을 심도있게 코니 라는 주인공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싱뚱맞지만 톰크루즈가 등장했던 마이너리타 리포트가 생각났다. 미래를 보고 범죄를 예방한다는 자체가 너무 앞서간다는 생각이 든 영화였다. 우리의 삶도 미래를 미리알고 그 순간이 오면 다른 선택을 한다면 정말로 행복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의외로 평범한 일상이 그리운 시간이 될것 같다는 점이다. 힘없는 약자 가로서 살아가는 코니를 보니 우리들의 어머니는 더없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사회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면 심도있 으면서 좀 무거운 주제로 여겨진다. 단순하게 생각하기에는 오늘 내자신을 생각해보는 시간이 될것 같다. 결코 사 회의 한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가운데 왜 약자와 강자가 존재하고 수많은 경험속에서 속단할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모습이 통쾌하게 그려진것 같아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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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펑크와 페미니즘 문학의 만남. 상상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SF란 장르를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풀어내는 것은 글을 쓰는 작가에게 어찌 보면 하나의 커다란 축복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축복을 제대로 활용하는 작가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본인은 SF 작가라는 타이틀을 거부하고 있으나 이미 마가렛 애트우드 라는 한국에도 많이 소개된 작가를 통해 위와 같은 조합의 효과는 입증되었고, 이제 또 하나의 걸출한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저자 약력을 통해 소개된 마지 피어시의 생은 매우 화려하다. 작가로서, 그리고 운동가로서 왕성하게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으며 그 노력 또한 많은 상으로 인정받았던 듯.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이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는 매우 독특한 내용의 작품으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미국의 한 곳, 한 시대에서 소수 인종의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은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존엄성을 부여받지 못한 채 각종 폭력과 차별 속에서 살아왔고 결국 그러한 경계 지음 속에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외부인, 혹은 비속인으로서 정의되어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하지만 또렷하게 자신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지각 능력과 지능을 가진 그녀는 그러한 처지에 대해서 극복하거나 대처하기가 힘들다. 소설의 한 축은 이러한 현실에서 주인공이 어떻게 조금씩 성장하며 극복하려는 노력을 펼치는가 이다. 여기까지는 여성 문학의 단면.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은 주인공 코니가 미래의 인들과 일종의 텔레파시로 교신하며 미래 세계를 경험하는 것. 사이버 펑크라고 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너무 수수하지만 장르에 상관없이 이러한 SF적 장치를 통하여 작가는 미래 세계를 하나 그려본다. 그녀가 그린 미래는 성적 역할이 불분명해져 개인적인 롤로 대체되고 공동 생산적인 소규모 커뮤니티적 사회로 세분화되며 자급적이고 소비지양적인 농업적, 기술적 생산 사회에 가깝다. 이러한 사회적 단면들을 묘사하는 데에는 명확한 이유가 존재하도록 설정하여 그녀가 생각하는 현대의 문제를 역으로 꼬집는다.
이 두 가지 측면의 이야기들이 맞물리며 이야기는 전개되고 이로써 여성이자 인간으로서 코니는 성장하고 점점 맞서싸우며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은 (나는 굳이 페미니즘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인간사 전체를 놓고 볼 때 지극히 최근에 시작되어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 대의에 동의한다고 할 때에도 바뀔 수 없는 생물학적 차이와 수천년 동안 쌓여온 사회적 편견과 장치들을 넘어서기 위한 좋은 방법은 (내 생각에) 아직 찾지 못한 상태로, 그를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음이다.
이 책은 그러한 노력하는 사람들의 한 명인 저자가 내어 놓은 하나의 안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문제점을 꼬집고 그에 대한 하나의 작은 방안을 그려줌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생각해 보게 한다면 그것도 하나의 수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급진적 성향을 생각한다면 그것보다는 좀더 많은 수확을 원했을 테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성차를 생각해 보는 글을 만났다.
딱딱한 사회 과학 책이 아닌 소설로 이런 생각을 좀더 쉽게 끌어낼 수 있는 것. 그것이 문학의 힘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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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 피어시가 10대와 대학 시절을 보냈던 1950년대는 야성이 고등교육을 받거나 야망과 꿈을 품는 것을 가부장사회에 대한 반발로 여기고 그러한 여성에게는 무조건 혐오의 시선을 보내던 시대였다. 마지 피어시는 한시도 사회문제와 정치현안에 관심을 놓은 적이 없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맥시코 출신의 가난한 이혼녀 코니는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떨칠 수 없는 빈곤에 굴레에서 허덕이다 인권은 언급조차 할 수 없는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그러나 그녀가 명백한 정신분열 증새로 여겼던 환영과 환청, 예리한 감각은 미래와 소통할 수 있는 비범한 능력인 것으로 밝혀지고 2317년 미래에서 코니는 현실에서 느껴보지 못한 가족애와 자존감, 그리고 의지력을 되찾는다.
작품에서 그려지는 미래는 그야말로 패미니즘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여성들이 꿈꾸는 모든 차별이 사라진 이상향이다. 성별 영역은 해체되어 육아는 물론이고 출산마저도 남녀를 불문한 개인의 선택이자 공동체의 책임이며 모든 가부장제도는 사라지고 결혼제도마저 의미를 잃는다. 코니는 완전한 평등을 위해 고유의 성역활을 없애고 출산을 기계에 의존하고, 남성도 공동으로 수유와 육아에 참여하는 미래인들의 선택에 처음에는 혐오감을 느끼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진정한 평등이 어렵다는 사실을 차츰 깨닭게 된다.
그러나 코니는 이렇게 낙관적인 미래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다. 섬뜩한 디스토피아 미래의 가능성도 하나열려있음을 알게 된다.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주의. 무분별한 과학기술주의, 자본주의의 폐해가 극대화된 또 하나의 미래에서 현재 매춘으로 생계를 잇는 사촌 조카 돌리의 환생처럼 여겨지는 길디나와 조우하며, 빼앗긴 딸 엔젤리나와 루시엔테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자신도 치열한 전쟁에 뛰어 들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현실에서 느껴 본적이 없는 가족의 정과 우정을 실감하게 해 준 루시엔테에 존재가능성과 아름다운 미래의 존폐는 이제 코니의 투쟁에 달려 있으므로 그녀는 자신에게 남은 모든 것을 걸고 기꺼이 결연한 결정을 내린다. 미래는 앞으로 나가는 진보 방향성을 띠어야한다. 미래란 당연히 현재보다 나아질 것이라며 무조건적으로 희망적 시각을 갖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 세대 이전에 이미 마지 피어시가 고발했던 시회적 약자들의 인권문제는 장소와 시간을 달리할 뿐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코니가 꿈꾸는 이상적 자아상이기도 한 루시엔테가 염려하는 현대인들의 무분별한 환경 파괴 문제 또한 오히려 악화 되었다. 그런데도 경제와 개발논리를 환경보다 더 앞세우는 세태는 수그러들줄 모른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코니처럼 매 순간 미래를 위한 결연한 선택을 내려야함에도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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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대한민국은 전국민이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한 대대적인 계획에 동참했다.
험을 해야 했던 것은 여자아이들이었다. 남자아이들은 110점을 받고도 턱하니 입학을 한 시험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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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 피어시의 경력을 읽다 보면 그가 세상을 향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이나마 짐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성 운동가로서 그의 글이 주는 무게감을 처음 접하는 이 책에서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힘없고 가진 것이 없어서 그리고 세상을 아니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한 여인의 삶을 그리면서 그는 그가 바라는 이상향을 미래의 인물과의 접속으로 그리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본다. 코니의 삶은 어쩌면 정신병동의 부당한 인권유린의 현장으로 묘사한 여타의 작품과 다르지 않으면서 그리고 그는 또 다른 플롯으로 아마도 코니가 살고 싶었던 미래 아니 미래에 만들어 보고 싶었던 마지피어시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느껴진다. 보잘 것 없는 삶을 살아가던 코니는 조카를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사건을 일으키고 그 사건을 빌미로 정신병동에 가치게 된다. 한 번의 정신 병력과 아동학대는 그의 말을 믿어 주는 사람을 없게 만들었으며 그의 가족마저도 그의 삶에 정당성을 유지하려 하는 것에 동조하여 주지 않는다. 이런 코니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미래를 오고가는 능력 아니 몸은 그대로 있지만 일종의 접속 상태를 통하여 미래의 발신자 루시엔테를 통해서 미래의 모습을 바라 볼 수 있게 된다. 정신병동에서 여러 가지 비인간적인 실험이 강요되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코니는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현재의 가장 강력한 수신자로서 미래를 접하게 된다. 출산의 권리를 포기한 미래의 여성사회 그래서 여러 명의 어머니를 가지는 아이들 그리고 그 들의 죽음은 한 공동체를 유지하기위한 또 다른 생명을 낳을 수 있는 명분으로 작용을 한다. 그 들의 삶은 원천적인 평등을 유지하기 위한 순환 보직을 가지게 되고 어쩌면 아주 합리적이고 공평해 보이는 삶이지만 코니의 눈에는 모성을 버린 매 마른 사회로 보이게 된다. 이렇게 몇 번의 인체 실험 속과 미래를 오가는 환경 속에서 코니는 정신병동을 탈출 시켜줄 조카 돌리를 기다리지만 그는 면회 시간이 끝나도록 결국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1권의 마지막이다. 미래의 모습에 여성은 자신만의 권리 즉 생산 출산의 모성에 관한 부분을 포기하고 자신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가지는 평등성만을 가지려 한다. 코니의 눈에 비친 이들의 모습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전해야 할 모성의 권리를 포기한 미래 사회에 대한 의구심 혹은 약간의 애석함을 표현한다. 미래의 시점을 2137년으로 표시한 것은 어떤 큰 의미가 있을까? 이 소설이 쓰여진 시기는 1970년대 중반이다. 여성인 작가는 미래 사회를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려가고 있으며 사회적 질서와 가정 그리고 아이들의 생산과 육아 그리고 죽음이 공동체 사회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전반적인 사회상을 상상력으로 그리고 있다. 어디선가 읽어 본 듯한 글도 있고 어쩌면 이 글에서 모티브를 엇어서 미래사회를 그렸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할 만큼 미래를 그린 사회의 모습에 익숙해지는 모습을 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정신 병동의 인체 실험은 어쩌면 같은 시기에 사회적 비판과 동시대의 글이라 할 수 있는 한 정신병원을 그린 작품의 모습과 흡사 할 수도 있다. 아직 2권의 분량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책의 결말과 미래의 모습은 또 어떻게 표현이 될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 그리고 여성운동가로써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였던 여성들의 모습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지 좀더 심도 있는 이야기와 질문이 이어질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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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작가인 '마지 피어시'는 순수 문학뿐 아니라 장르 문학, 사회 참여 소설도 쓰는 작가이다. 그녀는 가난한 노동자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대학졸업 후 비서, 계산원, 강사 등 여러 직종의 임시직을 거치면서 계급과 여성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되고 이후 패미니즘 운동가이자 열렬한 사회 운동가로 활약하게 된다.
이 소설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의 주인공 코니 역시 서른 일곱살의 전형적인 약자이며 하류층에 속해 있는 사람이다.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용된 최악의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기로에 놓인 여인을 주인공으로 책에는 두가지의 미래가 등장한다. 하나의 미래는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설정이며 이는 최대한 문명의 발달을 억제하는 친환경적인 시스템으로 남녀 역할 구분없이 공동체생활을 하는 '유토피아'적인 세계이다. 멕시코계 여성이라는 이유로 눈앞에서도 서슴지 않는 차별을 겪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생활보호 대상자로 최저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그 어떠한 권리도 정신병자라는 명목에 힘을 잃고 그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한 명씩 수술을 받고 영혼을 잃은 사람이 되어간다. 이곳은 모든 것이 기계에 의해 관리되는 디스토피아다. 작가는 힘없는 자들이 억압받는 현실 세계의 은유로서 정신병동의 모습을 보여 줌과 동시에 끔찍한 디스토피아와 정신병동을 겹쳐 보여 줌으로써, 현대 사회의 병폐를 여실히 드러낸다.
인종 차별, 성 차별, 계급주의, 무분별한 과학기술주의, 자본주의의 폐해가 극대화된 미래의 모습은 사이버 펑키 소설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사이버펑크는 "사이버"라는 단어와 "펑크"라는 단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 용어는 1980년에 Bruce Bethke의 단편소설 "사이버펑크"에서 유래하였다. 사이버펑크 문학은 일반적으로 과학기술이 놀랍도록 발달하였으나 여전히 전통적인 국가 및 사회적 권력관계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사이버펑크의 배경과 분위기가 자주 어둡고 비관적이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부랑자, 범죄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 절망에 빠진 젊은 세대를 담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의 미국사회의 단면이 시대적 배경속에 스며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소설이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작가의 성향이 잘 나타나 있는 소설로 몇 십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에서도 무조건적으로 희망만을 가지고 살기에는 아직도 투쟁이 필요한것이 아닌가하는 문제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된 소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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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간의 경계'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아슬아슬한 벼랑의 끝에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정없이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과 헐렁한 스커트 자락을 날리면서 망연히 아득한 저 건너를 바라보는 그녀는 쓸쓸해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 소설의 원제는 <Woman on the Edge of time> 로 경계 보다는 가장자리라는 느낌이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코니가 선택해야하는 미래의 두 모습의 경계를 칭하는 말이 아닐까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코니는 그녀가 사는 세상에서는 낙오자라 불릴 만 했다. 그녀는 백인도 아닌 멕시코계의 가난한 여자다. 가족들에게도 보살핌을 받지 못한 그녀는 제대로된 결혼 생활도 얼마하지 못했고 나중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으로 정신이 나가서 아이를 학대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정부는 그녀에게 아이를 빼앗아 갔고, 생활보호 대상자로 근근히 사는 코니는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처지에 이른다. 그러던 그녀에게 어느 날인가부터 나타나는 이상한 사람은 자기를 루시엔테라고 하면서 미래에서 왔다고 한다. 코니가 가지고 있는 뛰어난 수용력이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면서, 코니를 미래의 세계로 데려간다. 코니가 찾아 간 미래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지금 우리가 망쳐놓은 자연을 복원하려고 애쓰면서 생태적인 삶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공동으로 아이를 기르고, 공동으로 취사하고 함께 일한다. 코니는 미래의 세계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위로를 받는다. 서로를 아끼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담배와 소라진에 찌들은 자신의 삶, 그리고 자신에게 인체 실험을 하려고 드는 의료진들에게 적개심을 키운다. 어느 날 예상과 달리 루시엔테가 사는 곳이 아닌 전혀 다른 미래에 도착한 코니는 여성이 상품화되어 있는 기계적이고 끔찍한 미래를 발견한다. 모두가 코드화되어 있는 그 곳의 모습은 마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만나는 세계와 비슷했다. 미래의 자신의 아이들에게 그런 끔찍한 미래를 남겨줄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코니는 이 세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낸다. 공동 육아, 공동 생산 그리고 모두의 회의로 이루어지는 각종 정책들과 결혼과 성별로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성생활, 이런 것들은 어쩌면 작가가 바라는 이상은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작가가 이 소설을 창작한 시기와 지금은 시간적 격차가 있으나, 아직도 여성들은 남성들보다는 많은 책임을 떠안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마지 피어시가 말하는 그런 세상이 언제쯤 올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모두가 원하는 일을 하고, 함께 먹고 마시며 요리와 육아가 의무가 아닌 기쁨이 되는 선택의 대상이 되는 그런 날을 나의 딸에게 줄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내가 찾은 오타 1권 279쪽 18째줄 랙래빗 -> 잭래빗 1권 295쪽 24 째줄 다시 크기 ->다시 끄기 2권 197쪽 16째줄 공회당은 홀리는 볼 때의 -> 공회당은 홀리를 볼 때의 2권 199쪽 18째줄 멋진 홀리는 참 많이 - > 멋진 홀리를 참 많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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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클래식, 순전히 아무 내용도 모르고 장르가 매력적으로 느껴져 선택했는데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주인공 코니가 겪은 일들과 결말은 1970년대의 가난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단순히 많은 편리와 이기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현대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인공 코니는 겉으로 봤을때 엉망진창의 삶을 사는 여자다. 남자를 세 번이나 갈아치웠고 자신의 딸을 때려 손목을 부러뜨려 아동학대자로 딸을 빼앗겼다. 현실은 핍박당하는 조카의 애인에게 반항했다가 정신병원에 끌려 들어와 갇혀 있는 상태. 그리고 그녀는 얼마전부터 자신의 주위에 이상한 기운을 내뿜으며 맴돌던 루시엔테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미래에서 온 사람으로 코니와 영적으로 교감해 서로의 세계를 이동할 수 있게 된다. 코니는 루시엔테가 사는 모든 것이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공동생활 위주인 평화로운 미래를 경험하게 되고 루시엔테와의 접속을 통해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인 정신병원 생활에 위안을 받게 된다. 한편, 병원에서는 몇몇의 환자에게 조절장치를 뇌에 이식하는 수술을 진행중이었고 그 수술과정과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기계적으로 조정당하고 통제받는 동료환자들을 보며 코니는 탈출을 감행하지만 실패하게 된다. 결국 코니 역시 강제적으로 수술을 받게 되고 루시엔테와의 접속을 시도하던 중 또다른 미래 세계에 우연히 접속하게 된다. 그곳은 루시엔테의 세계와는 달리 너무나 강압적이고 완전한 권력에 의해 통제된 사회였다. 인간적인 즐거움과 가치가 기계적인 쾌락과 신분에 의한 재편성으로 인해 오싹하고 기괴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또다른 미래세계와의 접속은 루시엔테가 사는 미래세계를 지키기 위해선 코니에게 현실에서 투쟁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주게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코니는 가난하고 힘없어 구차한 삶을 살고, 자의든 타의든 불행한 운명으로 비록 정신병원에서 실험을 당하는 처지지만 그녀는 마지막까지 빼앗겼던 딸에게 물려주고 싶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녀가 열망한 작지만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 그리고 딸과 자신을 사랑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정신병원이라는 공간을 통해 더 크게 와닿았고 어느새 힘없고 열악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코니와 같은 삶에 빠져드는 것에 대해 나도 몰이해와 방관에 속한 것이 아닌가 돌아보게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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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에서 맛깔나는 시리즈물을 하나 펴냈다. 이름 하여 모던 클래식. 1980년대 이후의 작품들, 즉 미래의 고전들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시리즈이다. 언제나 나는 도서관 가득 꽂혀 있는 세계문학전집을 바라보며 갈망 아닌 열망을 품곤 했었다. 언젠가 금전과 시간이 여유가 되면 저 녀석들을 다 사서 서재 한가득 꽂아 놔야지. 그리곤 꾸역꾸역 고전의 텍스트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 하고 말이다. 고전이란 대체로 검증된 작품들이기 마련이다. 시간의 질곡 속에서 다양한 독자에게 읽혀오며 그 가치를 인정받은 책. 그렇기에 고전은 그 안에 깊은 속내를 감추고 있다. 때론 그 묘사가 가볍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고전은 언제나 그 가벼움 속에 강렬한 전율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고전을,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을 사랑했다. 도서관에 갈 때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책 한 권 한 권을 짚었고. 그 사이 사이에 꽂혀 있는 오만과 편견,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이방인 따위의 작품들을 볼 때마다 그 작품들을 읽을 당시에 느꼈던 소름을 조그맣게 느끼곤 했었다. 그리고 이젠, 그 녀석들보다 약간은 앳된, 새로운 형태의 고전이 나를 즐겁게 한다. 내 이름은 빨강의 오르한 파묵, 키친의 요시모토 바나나 그리고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의 마지 피어시가 있는 모던 클래식. 현대의 시점에서 재해석한 고전은, 그 어느 별미보다 맛깔났다.
내가 처음 고전을 손에 잡게 된 계기는 도스토예프스키에 있다. 어릴 때 나는 터무니없는 망상을 하곤 했는데 - 지금도 이 망상이 유효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이다. - 그건 바로 내가 현대의 백야 버전 몽상가라는 것이다. 백야에는 나스첸카와 몽상가가 나온다. 나스첸카는 너무나 변하기 쉽고, 열정적이며,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흔히 우리가 꿈꾸는 병 속의 요정, 언젠가 떠나갈 그녀는, 소실점이 있기에 더욱 아름답고 그렇기에 잔혹하다. 몽상가는 그러한 그녀를 사랑한다. 자신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앎에도 그는 자신을 다하여 그녀를 사랑한다. 중학생의 내게 그런 그의 사랑은 혁명이었다. 그 어떤 사회적 이념과 타자의 시선조차 신경 쓰지 않는 온전한 사랑. 그와 같은 사랑을 하고 싶어 밤잠을 설치곤 했다. 사실 그 당시의 나는 사랑이라곤 쥐뿔도 몰랐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쭉 연애 한 번 못해봤으니, 결국은 나도 사랑이 아닌 몽상 차원에서는 그를 반은 닮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입문한 고전의 세상은 아름다웠다. 확고한 세계관이 존재했고, 살아 움직이는 인격체가 등장했다. 아 이거다, 어린 나는 그렇게 고전에 빠져들었다.
마지 피어시의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를 처음 짚었던 순간. 다른 세계의 가능성 속에서 소설의 주인공 코니가 혼란을 느꼈을 순간, 나 또한 혼란을 느꼈다. 어디선가 맡았던 익숙한 내움새. 부드러운 듯 달콤한, 나의 이상향과 닮아 있는 어떤 느낌이 전전두엽을 치고 대뇌피질에 파고들었다. 이 느낌일까, 생동하는 삶이 내 앞에 확고히 존재하는 느낌, 이 느낌인 걸까. 기실 마지 피어시는 내게 초면이다. 네이버에 검색어를 넣어도 프로필조차 등장하지 않는 완벽한 타인. 그런 그녀가 난데없이 삶이라는 변화구를 던진 것이다. 어떤 알랑 말랑한 느낌의 감흥과 함께. 코니는 정신병원에 한차례 입원한 전적이 있다. 그녀는 푸에르토리코인 특유의 까무잡잡한 피부색을 지녔고, 둔중하며, 두 남편과 - 혹은 세 남편과 - 사별했다. 그녀의 삶은 마약과 진정제 혹은 소라진이라는 신경안정제에 찌들어 있고, 딸을 때렸으며 딸을 부양할 의지가 없다는 이유로 딸을 떠나보냈다. 그녀의 삶은 피폐하다. 아니 척박하다.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사막에 홀로 떨어진 삶. 좌절은 그녀 삶의 모토요 절망은 조금 나은 위안이다.
그런 그녀에게 루시엔테가 나타난다. 계급과 성별에 대한 차별, 그리고 현대의 모든 비합리적 관습이 존재하지 않는 미래에서 나타난 존재, 루시엔테. 정신병원의 코니는 그렇게 소라진과 각성제에 의존한 삶을 살아가며 그녀와 접속한다. 루시엔테가 보여주는 미래의 환상은 너무 아름답다. 누구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세상, 배우자와 남자, 여자친구가 아닌 손 친구, 베게 친구, 정인(情人)을 둘 수 있는 세상, 차별이란 존재하지 않고, 일과 놀이가 결합하였으며, 학교는 자연이고, 정치인이란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의 이상향. 그곳에서 코니는 자신이 정신박약자가 아닌 온전한 인간임을, 그 누구보다도 인간다운 존재임을 확연히 느낀다. 마지 피어시는 시간의 경계에 선 코니를 통해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우리들의 삶이 결코 타자의 독단에 의해 정의될 수 없음을, 편협한 주관에 의해 재단될 수 없음을 역설한다. 코니는 비록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이지만, 그녀가 그곳에서 만난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인간답고, 그녀가 접속한 미래의 어느 풍경과 함께해도 어울린다. 우리는 삶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일반 대중의 상식은 결국 대중 그 자체가 만들어낸 거대한 편견에 불과할 뿐이다. 만약 우리가 코니와 같은 어떤 결단을 내릴 수 있다면, 우린 루시엔테의 미래를 살 자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아름다운, 꿈의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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