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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 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충격 속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그녀의 책을 읽고 이렇게 평했었다. “ 한 인간을 마음 깊숙한 곳까지 파괴시키고 영혼마저 통째로 오염시킬 수 있는 비극의 삶. 그런 최악의 삶이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로, 글로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라고. 진짜 그랬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루마니아에서 소련 강제 수용소로 이송된 열 일곱 소년의 삶은 청춘의 꽃을 피우는 젊음이 아니었다. 삶이 아닌 죽음이 지배하는 공포스런 하루하루 속에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극명하게 보여주었던 작품. 그런데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이 작품을 다시 들춰보게 한 책을 오늘 완독하였다. 프리모 레비라는 저자의 ‘지금이 아니면 언제?’라는 책을. 그렇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와 나치, 유태인에 관한 무시무시한 역사의 현장이 그려진 책인데 먼저 프리모 레비라는 저자가 나의 시선을 끈다. 살아있는 건 기적이고 예외일 수 있었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생존한 몇 안되는 행운의 사나이. 그런 그가 집으로 돌아간 후 수용소에서의 처참한 기록들을 자신의 깊은 성찰로 풀어낸 책들을 저술한다. 물론 그 책들은 독자는 물론 당대의 평론가들에서 찬사를 받지만 결국 그는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책을 통해 역사를 회고하는 동안 그가 다시 감내해야했을 과거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조차 쉽지 않다. 우리가 유태인, 나치, 수용소 이렇게 세 단어만 떠올려도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있다. 히틀러의 미치광이짓에 참혹하게 희생되어야 했던 수많은 유태인들과 민간인들의 아픔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문헌과 자료들을 통해 전해져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에 대한 시각이 조금은 바뀌었다. 아니 좀 균형이 잡혔다고 해야하나? 언제까지고 유태인만이 고결한 희생양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책에서는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 살기 위한 몸부림 속에서 악전고투하는 개개인을 묘사하고 있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저자 자신이 유태인이면서 같은 유태인을 바라보는 삐딱한 시선과 풍자였다. 항상 희생자라고만 곱게 포장된 그들을 한 겹 벗겨보면 또 다른 위선적인 ‘인간’이 목격되었고 지금 그들이 ‘선택받은 우월한 민족=유태인’이라는 공식이 나치의 그것과 무엇이 다를까 싶다. 자자는 책에서 이렇게 유태인들을 비판한다. “ 그래서 나 역시 유태인에 대해선 마음이 그다지 내키지 않네. 자기네들끼리 알력과 내분으로 무자비한 만행도 서슴지 않고 말이야.” “ 3년쯤 전이었네. 키예프 강경파 시오니스트 지도자들이 나치와 모종의 거래조건으로 서민층 유태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가 하면, 자기네들의 신성한 시오니즘 운동에 반대한다고 유태인 이민자 252명을 태운 배를 하이파항에서 폭파시켜버렸다네. 또 작년초에는 루마니아에서 팔레스타인으로 가던 슈트루마호도 가라앉혔네. 그 배에 타고 있던 760명의 유태인들은 오늘도 같은 날 제사를 치루지.” “이렇게 자민족 약자들을 무시하고 학살하는 시오니스트들에게 타민족의 고통에 대한 배려가 있을 리가 없겠지. 그들에겐 오직, 어쩌면 나치보다도 더 잔인한 인종주의와 백인우월주의가 깊이 뿌리박고 있을지도 모르네. 나치의 유토피아가 전 유럽의 패권에 이어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게르만민족의 광대한 식민지제국을 건설하는 데 있다면, 유태인들은 나일강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장악해 하나의 이스라엘제국을 건설하는 게 아닌가. 난 서로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보네.” 물론 이 책은 나치로부터 도망 다니는 빨치산 부대원들의 저항활동 치열한 생존기를 서술하고 있지만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다보면 이렇게 나치와 다를 바 없는 유태인의 면모도 고발하고 더 나아가 살기 위해 자신의 동료들에게 총구를 겨눌 수 있는 인간의 추악함을 고뇌하듯 이야기한다. 저자는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는 인간에게 한 없는 연민을 느끼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이렇게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고백하기도 한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생존자라면 누구든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같은 걸 느끼게 되요.”라고. 결국 이러한 자기 성찰이 저자를 자살로까지 몰고 간 게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운 추측도 해본다. 안간힘을 쓰고 버텨 삶을 유지했음에도 그 생존을 부끄러워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추악한 역사는 제발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 "홀로코스트를 제대로 표현하기에는 인간의 언어가 너무 빈약하다"고 고백했던 프리모 레비의 말이 마지막까지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어느 유태인이 나치에게 총살되기 직전 허락받은 30분 동안 지은 가사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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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 경험과 동유럽 유태인 빨치산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 쓴, 숭엄하기 그지없는 이야기. 나치에 항거하는 레지스탕스 이야기로도 유태인들의 디아스포라 연대기로도 상실감을 지닌 한 인간의 쟁투로도 읽힐 수 있는 이 이야기의 대담함은 그 인간미에 있다. 엄혹한 전쟁 중에도 그들만의 세계 속에서 유머와 동질감, 정신을 잃지 않는 유태인 빨치산 투사들의 인간적인 매력이 프리모 레비의 담담하고 간결한 문체에 잘 담겨있다. 따뜻하고 슬픈, 끊임없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만드는 역작. 마치 그들과 함께 행군하듯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읽어나간 책. 레하임! (삶을 위하여!) 오랫동안 연락두절 상태였다가 갑자기 나치와 우크라이나, 헝가리 용병들의 이동 소식이 들려오면 그때부턴 불안감과 절망감 때문에 초죽음이지. 그 절망감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라 생각하네. 무엇이든 자기 일에 죽도록 몰입하거나 나가서 죽도록 싸우는 것. 그리고 세 번째 방법은 서로에게 허풍 같은 거짓말을 하는 거라네. 절망의 문에 계속 못을 박는 선의의 거짓말. 정의로운 싸움에는 항상 그렇게 이간질시키고 역이용하는 간계가 있기 마련이네. 그러니까 그런 치졸한 간계의 결과까지도 우리가 짊어져야할 운명이라는 뜻이네. 이처럼 어수선한 세상일수록 더욱 원칙에 철저해야 조직도 단단해지고 명분도 살아남는 법이네. 비록 우리가 질 때 지더라도 그 명분만큼은 아름다운 씨앗으로 남아있지 않겠는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늘 슬픈 것들만 떠올리면 독이 되고, 강한 빨치산이 되기 어렵네. 그리고 난 세 가지만 믿네. 총알, 보드카, 여자... 예전엔 이론을 믿어 한때 경도되었지만, 이젠 아니네." "왜요?" "그건 삶이 아니니까." "그럼 삶은 뭐죠?" "앞으로는 살아야 하고 뒤로는 수긍해야 하는, 뭐 그런 것쯤 되지 않을까? 그리고 자네가 나한테 이렇게 꼬치꼬치 묻지 않는 것, 하하." "......" "난 가끔 이런 생각들을 해. 총알이 날아가다가 방향을 바꿔버렸으면 좋겠다고." "어디로요?" "나에게로." "아니, 왜요?" "그래야 진실한 세상으로 바뀔 테니까." 그런데 이 시점에서 시슬이 왜 이런 얘기를 꺼내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렇잖아도 얼마 전부터 시슬과의 관계가 뚜렷한 이유 없이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긴 했다. 사랑은 야전밥솥처럼 언젠가는 식지만 그러나 꼭 밥은 남기는 법이다. 그게 설익은 밥이든 된 밥이든 누룽지까지 남기는 법이다. 멘델은 그걸 믿었다. 비록 사랑이 식어가고 변해가며 스스로 증거인멸을 하더라도 말이다. 다 불타버리고 마지막 한줌의 재 속에 간신히 남은 온기라도 뜨거운 사랑의 증표로 고이 간직하고 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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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여러권의 나치 하의 유태인 이야기를 다룬 소설들을 읽어보았다. 대부분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때의 이야기이거나, 아니면 게토에 거주하면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이번 프리모 레비의 작품은 또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작가라는 타이틀이 따라붙는 작가 프리모 레비의 자전적 장편소설이라고 불리우는 이 작품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저항해 빨치산에 가담했던 러시아의 유태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나치의 인종몰살 정책에 희생당한 유태인들에 관한 이야기는 늘 비극적이고 극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역시 희망적으로 듣기에는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 작품에서 독자들에게 그런 비극적인 면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빨치산으로서 그들이 감내해야했던 고통과 슬픔이 저변에 흐르고는 있지만 바빌론 유수 이후 늘 흩어져 디아스포라로서 살아가야만 했던 자신들의 운명에 항거해 이 전쟁에서 살아남아 꼭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려는 희망을 가진 빨치산 유태인들의 용기와 강인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한 이야기들은 독자들의 마음 속을 울리는 감동으로 자연스레 이어지고 있다. 험난한 생활 속에서도 유머와 인정이 담긴 에피소드들을 대할 때면 작가의 삶에 대한 태도를 간접적으로나마 엿보는 것 같았다.
나치가 유태인들을 몰살하려는 정책을 주도하기는 했지만 이 책에서 유태인들의 적은 비단 나치 뿐만이 아니다. 나치의 몰락에는 수많은 빨치산들과 레지스탕스의 도움이 큰 역할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책에서 다루고 있는 유태인들로만 이루어진 빨치산들의 활약은 연합군들에게는 큰 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태인 빨치산들은 연합군에게도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책 속 게달레 빨치산의 공식 노래로 알려진 유태인 사형수가 작사한 노래에 대한 사연 속에 그 깊고 깊은 한스러움이 담겨있다.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나치에 붙잡힌 한 유태인을 나치는 빨치산은 교수형이고 유태인은 총살형이라고 말하면서 당신은 빨치산이면서 유태인이니 두번 죽어야 한다는 선고를 내린다. 그래서 이미 교수형을 당해 죽음을 당한 사람을 다시 한번 총살형 시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유태인이라는 민족의 위치가 어떠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결국 전쟁이 끝나고 다들 고향을 향해 뿔뿔이 흩어져 갔지만 유태인 빨치산들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다. 디아스포라의 운명이었던 그들은 자신들을 반겨줄 나라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싸웠던가. 해방시킬 조국도, 민족도 없으면서 누구를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던가. 언젠가 디아스포라의 운명에서 벗어나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단 하나의 희망을 위해 서로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그들. 아우슈비츠에서조차 살아남았던 그들이 전쟁 종식 이후 허무주의와 죄의식에 빠져 자살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은 돌아갈 곳이 없다는 이유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생존이 누가 내 대신 죽은 댓가라는 죄의식이 강박관념으로 자리잡고 있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죄가 아님에도 부끄러움이고 죄라고 생각했던 그들. 늘 "지금이 아니면 언제?"라는 사고방식으로 살아왔던 그들에게 큰 시련 이후 그 다음 단계란 쉽게 결정내리기 힘든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던 작가 역시 1987년에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것이 아닐까.
책의 제목으로도 사용되고 작품 속에서 두번 죽임을 당했던 유태인 사형수가 작사한 것으로 나오는 "지금 아니면 언제?"라는 말은 힐렐이라는 랍비가 남긴 말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읽으면 읽을수록 목숨걸고 나치에 저항한 유태인 빨치산들의 슬픈 운명이 생각나 마음 한켠이 젖어오는 그런 내용이다.
...(중략)...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 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레비가 "홀로코스트를 제대로 표현하기에는 인간의 언어가 너무 빈약하다"라고 한 것처럼 이 책을 이야기하기에 나의 언어가 너무 미약한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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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라는 작가를 처음 만난 것이 <이것이 인간인가>이다. 이 소설을 통해 아우슈비츠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전에 읽고 쓴 서평에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학살이나 잔혹 행위에 대한 묘사가 없다’고 쓴 글이 보인다. 감정이입이 절제되면서 그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소설은 재미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전작보다 가독성이 더 좋다. 화려한 수식어나 문장 등이 없는 것은 전작과 똑같지만 유태인 빨치산이란 조금 특이한 소재가 관심을 불러온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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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말해야하까 프리모 레비라는 작가의 삶이 담긴 지금이 아니면 언제를 읽었다. 그의 삶을 통째고 갈아먹는 사건으로 인해 그는 여러편의 책을 출간했지만 그 벽을 깨트리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삶을 마감한다. 프리모 레비는 유대인으로 이탈리아에서 출생한다. 그의 유년은 풍요로웠다. 2차대전이 벌어지고 레지스탕스 빨치산 부대에서 투쟁하다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강금되고 살아남았다. 이탈리아가 유럽의 나라중 반파시즘이 강했던 나라로 기억하는데 프리모 레비도 그중 한명이었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쓴 지금이 아니면 언제?는 팜피엘로상과 비아레조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를 두번이나 방문했다고 한다. 용감한 행동이었을까 아니면 악몽을 떨쳐내고 싶어였을까
멘델은 시계수리공으로 지금은 나치를피해 산속에 살고있다. 그의 앞에 탈영병 레오니드가 나타나고 두사람은 산속에서 생활한다. 그리고 레지스탕스 빨치산이 되기위해 길을 떠나고 폭격맞은 여러나라의 비행기 잔해속에 살고있던 페이아미를 만난다. 이제 일행은 셋으로 늘었다. 이들은 빨치산이 활약하는 곳으로 향하고 자신들이 원하던 빨치산이 되어 나치와 대항한다.
우리는 꿈을꾼다 아마도 자신만의 이상향이 없다면 행복도 꿈꾸지 못할것이다. 빨치산이란 이름으로 만났을때는 모두가 행복했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행복속에서 꿈틀대기 마련이다. 하나의 사상에도 우선순위는 존재한다. 소비에트 소련의 빨치산이라 우리도 6.25때 소련파 중공파 이렇게 나뉘었던 시절이 있었다 남로당이던가 이데올로기가 같은데 서로를 헐뜯는다 결국 나치라는 하나의 목표를 두고도 서로 우위를 따지는 인간의 욕망 지금 꼭 이싯점에서 그게무에 중요한 것일까?
전쟁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생활을 피폐하게 만드는건 눈에보이는 것이라 노력하면 되지만 정신이 피폐해지는건 쉽게 원상복귀가 어렵다. 이글은 그런 사람들의 아픔을 다시한번 되짚어볼수 있었던 그런책이었다. 지구상에 전쟁이 언제쯤이면 사라질까 사람들은 전쟁이 나쁜지를 알면서도 되풀이한다. 그런면에서는 상에서 가장 멍청한 동물이 인간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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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누구도 원하는 형태의 것이 아님에도 우리의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전쟁의 참혹한 과거로 점철되어 왔다. 그러나 이점에 있어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이러한 전쟁의 원인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탐욕스런 시기와 질투 그리고 증오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잔혹한 죽음과 파괴만을 부르며 결코 쉽게 치유되지 않는 정신적 고통의 시간만을 우리에게 안겨다 줄 뿐이다. 그래서 어떤 이유라 하더라도 우리는 과거 쓰라린 전쟁의 역사를 교훈삼아, 다시는 그와 같은 폭력의 도구가 재현되지 않도록 하는데 우리의 온힘과 노력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들 중 대부분은 아마도 빨치산이란 말을 흔히들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 단어를 두고 마치 빨갱이라는 동일한 의미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사실 이 말은 원래 정규군과는 별도로 적군의 배후에서 기습과 같은 방법으로 타격을 입히며 게릴라식의 전투를 벌이는 파르티잔이라는 러시아어에서 따온 말이다. 익히 아는바와 같이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빨치산들의 많은 활약이 있었는데, 강압적인 일본의 국내 침략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일제 강점기 시대와 그리고 6.25 전쟁을 계기로 단지 이념적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지리산을 근거지로 하여 활동했던 세력이 바로 그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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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특히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은 많다. 지워지지 않는 끔찍한 기억은 역사속 새김의 강도만큼이나 두고두고 깊은 성찰을 요구하며 세상에 여러 할 말들을 쏟아내 왔다. 하지만 그 많아진 말들은 간혹 의도나 열정과 상관없이 문학적인 측면에서는 반복이라는 식상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디선가 읽은 듯한, 혹은 어느 영화에서 본듯한 장면들이 자꾸 연상되고 소설 각각의 이야기가 갖는 메세지와 소통 방식의 독특함은 그 비장한 역사적 사실에 자꾸 묻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다. 프리모 레비. 스스로 아우슈비츠를 경험하고 그 안에서 살아남아 언어로 풀지 못할 이야기들을 그래도 언어로 풀어내려고 시도하는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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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아니면 언제?] 프리모 레비 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그와 관련한 기록들을 남긴 프리모 레비의 소설이다. 프리모 레비의 에세이'이것이 인간인가'를 보면 알 수 있듯 그의 문체는 비참함을 담고 있지 않다. 다만 담담히 기록을 할 뿐. 나는 개인적으로 레비의 이러한 문체가 더욱 슬프게 다가온다. 가슴속에 내재된 울분을 거르고 걸러 표현한 기록들. 절제되고 객관화된 정제된 언어란 바로 이런거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아니면 언제?]도 마찬가지이다. 유태인 빨치산의 행적을 기록한 이 소설은 그 행적을 영웅시 하기 보다는 나약한 인간, 그리고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유태인이라는 특수성에 입각해서 그들이 살아 꿈틀대고 있는 그 상황만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더 감동이 있고 인간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심리적 고통과 갈등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해소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지고 있다. 물론 빨치산이라는 특징이 걸맞게 사상과 실천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모습도 잘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의 엄정함은 시오니스트에 대한 평가를 통해 잘 보여진다. 시오니스트들에게 어떤 나치보다 더 잔인한 인종주의와 백인우월주의가 깊이 뿌리내려 있음을 지적 하면서 유태인 일부가 갖고 있는 극단적 사상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이는 유태인핍박과 시오니스트의 활동을 연계지으며 설득력을 얻고자 하는 오늘날 이스라엘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고 있어서 레비의 엄정함이 더욱 부각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같은 썩은 소비에트 현실이 과연 그게 누구의 책임인가, -중략- 나, 바로 나라는 존재일세. 나를 비롯한 그런 수많은 존재들이 책을 덮지 않고 책속에서 바로 길을 찾았기 때문에 이같은 결과(폴란드 양민학살)가 빚어졌다고 생각하네. -중략- 독서의 완성은 책을 덮는 거네. 책을 다 읽는다는 게 아니라 덮어야 할 때를 알고 덮을 줄 아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이네. 거기서부터 길이 시작되지.
편집에 있어서는 오탈자가 약간씩 눈이 띄었다. 새판을 인쇄할 때는 이러한 부분이 수정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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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영화 '디파이언스'를 흥미롭게 본적이 있었다. 2차 대전 당시의 유태인이라고 하면 게토에 수용되어 있다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것이 그들의 전형적인 삶의 패턴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의 전설' '쉰들러 리스트'등 내가 본 수많은 2차대전의 유태인 관련 영화들은 한결같이 그런 패턴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나의 일기' 도 숨어서 언제 잡혀갈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유대인의 삶을 그려주는 책이다.
내 인식에서 유대인의 운명을 더욱 강하게 결정지은 것은 정신분석학자 '빅토르 프랑크'의 저서 때문이다. 역시 유대인 수용소의 생존자였던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둔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절망상황에서 인간은 어떻게 의지를 말살당하하게 되는지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또 그는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결단하고 어떻게 자신의 자유의지를 유지할 수 있는지도 보여주었다. 실존적인 결단의 상황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고결한 결단이라는 것이 큰 감동을 주었지만, 그 역시 수용소 안의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책이었었다.
그런데 이 책은 영화 디파이언스처럼 수용소 밖에서 저항하는 유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숨어서 웅크리고 있는 유대인의 모습도 아니고, 2차대전 후에 이스라엘을 건국하려고 몸부림치는 유대인의 모습과도 다르다. 배고프고 추위에 떨면서 상존하는 위협에 몸을 도사리고 있는 존재일 수 밖에 없지만, 깊은 숲을 배경으로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모여서 총을 들고 적극적으로 저항을 하는 모습은 전에는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감동이었다.
'디파이언스'와 상당히 유사한 내용이지만 영화가 담을수 없는 세밀한 세부묘사와 감정의 세밀한 흐름을 정밀하게 담아놓은 점이 훨씬 더 감동이 크다. 이 책에 실린 인물들은 가공이지만, 책이 묘사한 내용들의 대부분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한다. 엄청난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이 집단을 형성하며 그 내부의 갈등을 조정하면서 공동으로 두려움이라는 내부의 적과, 폭력이라는 외부의 적과 맞서 싸우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졌다.
이 책은 거대한 전쟁을 묘사한 것이라기 보다는 전쟁에 대입된 일련의 사람들이 그들이 결코 원하지 않았던 전쟁이라는 상황에 편입된 후에 어떤 선택들을 했는지, 그리고 현실이라는 이름의 상황은 그들이 한 선택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거칠면서도 예리히고 섬세하면서도 드라마틱한 대하소설같은 감동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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