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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젠 아이까지 디자인 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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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마이클 샌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책을 [ 자서전 세트]와 함께 올 추석 연휴 때 읽을 책으로 정해놓고 있을 뿐이다. 샌델은 공동체주의자라고 한다. 1970년대부터 서구사회를 풍미하던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에서 공동체의 특수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보편적 가치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자유주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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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마이클 샌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책을 [ 자서전 세트]와 함께 올 추석 연휴 때 읽을 책으로 정해놓고 있을 뿐이다. 샌델은 공동체주의자라고 한다. 1970년대부터 서구사회를 풍미하던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에서 공동체의 특수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보편적 가치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로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이라는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생명의 윤리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묶어놓은 책이다. 사람들은 흔히 유전공학이 가능하게 하는 일부기술들에 대하여 불안하게 여긴다고 한다. 문제는 이렇게 불안하게 여기는 까닭을 분명하게 말하기가 쉽지 않다는점 이라고 저자는 말하고있다. 유전공학이 가능하게하는 기술들은 근육강화, 기억강화, 신장강화 그리고 성감별의 4가지정도로 볼수있으며, 이것들의 애초 목적은 질병을 치료하거나 유전적 이상을 예방하는것 이었으나, 지금은 신체기능이나 외모를 개선하고 소비자를 선택하는 도구로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즉 이것들은 치료와 강화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있으며, 수단으로써 사용되기만 하는것이 아니어서, 이것들이 지향하는 목적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스포츠에서의 약물을 금지하는 이유는 안전성과 공정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전학적 강화기술을 사용하는 스포츠 선수가 나타난다면 즉, 근육강화나 신장강화가 치료가 아니라 강화제로 사용된다면, 그래서 생체공학적 운동선수가 출현한다면 공정성이 훼손된 것일까?

의학의 목적은 건강을 증진시키고 질병을 치료하는 데서 출발하였다고 한다. 또한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받아들이는 사랑과 변화시키는 사랑 두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으며, 받아들이는 사랑은 자녀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며, 변화시키는 사랑이란 자녀의 복지를 추구하는 것 이라고 한다. 이러한 두가지 측면은 서로 다른 측면의 과도함을 교정해주고 있다고 한다. 부모가 유전공학적으로 아이를 디자인 한다면, 즉 부모가 아이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정당할까? 설사 아이를 디자인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어려서부터의 과잉양육은 디자인과 무엇이 다를까 

우생학은 유전자 구성을 통해 인간의 종을 개선하려는 학문이다. 유전공학은 어쩔수없이 우생학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한다. 미국은 1907년 유전적으로 부적격 미국인을 강제로 불임시키는 강제불임법을 채택하여 시행하였었고, 독일은 히틀러가 우생학적 입법을 찬양한 이후 불임법을 공포하고, 우생학을 인종학살로까지 이용하였다고 한다. 즉 나치정권은 우생학에 오명을 씌우고, 그러한 우생학의 그림자가 유전공학과 강화의 논란위에 드리워져 있다고 한다. 과거의 우생학이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부담을 많이 져서 분리, 불임을 당한 것 이라면 현재 또는 미래의 우생학은 특권층 부모가 경쟁사회에서 성공할만한 자식의 종류를 선택하고 유전공학적으로 성공할만한 조건을 갖추게 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다른 이들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괜찮지 않을까 

유전공학으로 디자인해서 만든 아이는 디자인한 부모의 개인적인 계획으로 만들어져서 태어났지만, 우연히 태어난 아이는 우연히 시작 되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계획여하에 복속되지 않는다고 한다. 부모가 아이를 디자인 한다고 하는 것은 아이의 자율성을 빼앗는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부모의 오만 즉, 탄생의 신비를 정복하려는 인간의 충동의 문제라고 한다. 이것은 아이의 자율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계없이 우연성을 없애고 출생의 신비를 정복하려는 충동만으로 아이를 디자인한 부모의 명예는 물론 무조건적 사랑의 규범이 지배하는 사회적 관행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고 한다. 유전학적 강화에 대한 저자의 확고한 생각은 정복과 통제의 가치가 우연과 경외의 가치를 눌러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삶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선물로 인식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유전공학으로 디자인 된다는 것, 그리고 강화된다는 것, 이것은 정복과 지배를 향한 인간의 오만이며, 과거의 우생학적 폭력과 무엇이 다른지 저자는 우리에게 반문하고 있다. 또한 승자독식사회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아이를 디자인 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모습이 우생학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줄기세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개진하고 있다. 그는 아들 부시대통령 시절 대통령생명윤리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 위원회에서 줄기세포 복제에 대한 연구 허용과 관련하여 토론후 투표를 했을 때 샌델은 인간복제를 제한하면서 줄기세포 연구를 허용하는 쪽에 투표하였다고 한다. 배아복제에 대해서는 찬성하지만 인간복제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저자는 배아가 단순한 사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지만, 이와 동시에 배아가 인간과 동일하다고 생각할수도 없다고 말한다.

줄기세포나 배아복제에 대해 뭐라 할말은 없다. 나 자신이 그것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도 못하지만, 특별히 생각해 본적도 없기때문이다. 다만 몇년전 사건때, 기꺼이 난자를 제공하겠다고 줄을섰던 여성들, 그리고 이 난자를 이용하여 복제했던 수많은 배아들, 이것들을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조금은 마음이 착잡해진다.

 

 

 

 

k*****1 2010.09.17. 신고 공감 9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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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위한 윤리와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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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금은 실망이다. “정의는 무엇인가?”로 이름을 떨친 마이클 샌델의 책인데,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에서는 무언가 빠져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무엇보다 인간은 의문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이다. 유전학적 진보의 길을 막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과학에서의 중대한 사건들은 항상 많은 충돌과 탄압(?)이 있어 왔다. 어디까지가 인간의 길인지는 정해진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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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조금은 실망이다. “정의는 무엇인가?”로 이름을 떨친 마이클 샌델의 책인데,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에서는 무언가 빠져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무엇보다 인간은 의문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이다. 유전학적 진보의 길을 막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과학에서의 중대한 사건들은 항상 많은 충돌과 탄압(?)이 있어 왔다. 어디까지가 인간의 길인지는 정해진 바가 없다. 물론 강화의 윤리에서 유전자의 능력의 강화(증강)에 관한 문제를 하나 던져준다. 귀머거리 레즈비언 커플은 듣지 않고 사는 것도 삶의 방식 중 하나라고 말하면서, 자식에게 고의를 장애를 유발한다. 과연 당신의 생각은  분명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길은 인간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어떻게 보면 인간은 유전학적 제비뽑기(변이)로 인한 예측불가능성에 직면해 있다. 현재는 3 2천불이면 고양이를, 개는 10만불 정도면 복제가 가능한 시대이다. 그럼 사람은 얼마면 가능할까? 이런 복제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 실제 클로네이트라는 종교 집단에서 인간복제를 했다고 주장한 적도 있다. 도구는 죄가 없다. 인간이 도구를 어떻게 이용하는가가 문제이다. 유전공학은 우리에게 다양한 질병의 치료의 희망을 주는 동시에 인류의 본성의 조작의 두려움도 준다.

 

자율성에 근거한 반대, 누구도 자신의 유전학적 유산을 고르지 않는다. 유전학적 제비뽑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해지도록 놓아 두는 것은 도덕적 불편함에 근거한다. 유전학적 강화는 미용성형처럼 의학적이지 않는 목적을 위해서 의학적인 수단을 사용한다. 근육과 관련된 유전자는 손상된 근육 회복 및 건강한 근육도 강화시킨다. 그럼 근육 치료에는 이용가능하고, 근육 강화에는 안 되는 것은 좀 난센스..

 

치료와 강화의 불공정은 자연적 불평등 공정성이 아닌 이유가 필요하다. 기억 억제제와 노화관련 기억 손실을 해결한 약에서 치료 목적을 내 새운다. 노화의 개념에서 원래 있던 능력의 회복, 아니면 자연스러움으로 볼 것인가  또한 미용 내분비학 집단적인 자기모순, 보톡스, 우리 주변에서도 번지는 키 크기 열풍에서 호르몬 무기경쟁 분명 현재도 이를 사용하고 있다. 거기에다 성감별 PGD 배아도 인격체 배아폐기(낙태와 유사) Y염색체(DNA차이)를 이용한 정자선별기술으로 성별의 선택이 가능해졌다. 남아를 선호하는 중국, 인도 등지에서 이미 암암리 성행하고 있다. 수단이 아니라 그 기술들이 지향하는 목적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생학적으로 발전한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어차피 한계는 존재하는 것 아닌가  강화가 인간성을 훼손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 주체성을 침식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동을 완전히 기계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인식하는 자유와 도덕적 책임은? 인간의 과도한 행위주체성이 문제다. 스포츠의 본질인 탁월성은 강화된 사람들에서의 탁월로 일반인들과 더 큰 격차가 벌어지거나, 강화로 인한 차이가 줄어들어서 일반인과 프로의 차이가 줄어, 스포츠가 없어 질지도 모르겠다. 강화 죄악은 훈련과 고된 수고의 회피라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 같다. 강화 속에서 더 훈련이 포함될 것 같다. 단지 그것을 보는 대중들의 생각에 의해 좌우되지 않을까 싶다.

 

의도함의 윤리와 생명공학적 권력의 윤리. 유전학적 이외의 하이테크 훈련 실행, 미식축구에서의 몸무게와 선수의 건강을 염려한다는 주장은 타당한가? 문제는 단번에 해결할 원칙은 없다는 점이다. 일단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버전이 끼어들면 전통적인 방식이 살아남기 힘들다. 무엇이 본질적이라는 것은 일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때 필수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녀를 디자인하는 부모. 자녀의 교육과 종교를 결정하는 것은 어떤가?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존재하지 않았다. 많은 수의 젊은이들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종교에 대한 회의로 고민한다. 하지만 또 다른 시작은 시험관 아기 때부터 일 것이다.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된다. 최근 노화를 질병이라고 보는 시각은 인간의 불멸에 가까운 존재로 만들지도, 기존의 모든 관념들을 부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녀는 선물이다. 하지만 부모는 자식의 모든 부분을 전적으로 책임질 수 없는 노릇이다. 부모의 오만, 탄생의 신비를 정복하려는 부모의 충동이 문제이다. 의료는 목적에 따라 방향과 경계가 나뉘는 실천이다. 의학의 목적은 건강을 증진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데서 출발한다. 또한 건강에는 도구적 가치만 있다.”건강은 극대화할 수 있는 종류의 선은 아니다.” 로 본다. 치료와 강화의 구분선의 경계가 흐릿한 것이 문제인 것 같다.

 

우생학. 좋게 말하면,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유전자풀을 개선하려는 목적이다. 분명 자연적인 자산을 크게 하는 것은 사회구성원 각자에게 이득이 된다. 하지만, 나치독일의 경우를 봐서도, 국가나 집단이 이상한 방향(광기)으로 나아가면, 인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것이다. 생식관련 선택 영역을 국가 관여하지 않고, 중립적 이어야 한다. 부모는 아이들의 인생계획을 바꾸지 않고 능력을 개선할 수 있는 소질을 발전시키고자 하면 교육과 유전적인 조작의 차이는 무엇인가?

 

인간성.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신의 역할은 무엇인가?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간의 차이가 많은 것이다. 하지만 분명, 인간이라는 삶은 비슷할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겸손, 책임, 연대 등 도덕적인 개념의 변경을 불러 올 수도 있다. 유전자 검사를 통한 선별(프로메테우스의 충동은 전염력이 있다.)하는 것은 분명 결정의 부담이 있다. 또한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은 출생의 책임은(할 일을 안하고 넘어가는) 부모가 질것인가? 재능과 능력이 노력의 결과와 상관없다면, 인간에게 어떤 희망이 남을까? 잘 사는 것이 다 내 노력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라면. 이런 것들이 다 선택의 자유여야 하는가? 그럼 당신은?

 

배아. 줄기세포 논쟁과 우리의 사회를 스쳐 지나간 사건들로 우리나라에서도 매체를 장식한 배아가 인격체인가? 아닌가? 수정하는 순간 영혼이 깃든다는 입장, 수정부터 출생까지 과정에서 인격이 정확히 언제 생기기 시작하는지 짚을 수 없다면 우리는 배아를 발달한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 봐야 한다.는 입장은 타당한가? 우리는 배아였지만, 복제포배였던 적은 없다. 그러기에 복제포배를 이용한 줄기세포를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비난으로 부담을 느낀 과학자들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배아를 사용하지 않음) 줄기세포의 연구를 진행한다. 하지만, 결국은 배아를 사용 쪽으로 선회할 것이다. 이 길이 근본적인 길이니. 하지만, 분명 인간은 생명체를 만들지 못한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배워온 것들보다 더 새로운 세상에서 살지도 모른다. 유전공학, 생명공학, 우주에 관한 지식 등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과거의 법, 도덕, 가치관 등을 무용지물로 만들지 모른다. 하지만 과학이 인간을 위한 과학이 되어야지, 과학을 위한 과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기술과 과학이란 것은 어쩌면 퇴보를 모르는 오직 전진만 하는 기차일 것 이다. 하지만 누군가 정차 역을 만들어 점검하고, 수리해야 할 것이다. 한쪽의 방향으로 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인류에게 있는 폭력성(전쟁)은 유전학을 어떠한 방향으로 내몰 수 있기에. 어떤 학자는 미래에 인간은 2가지 부류, 유전자 부유계층과 유전자 빈곤계층으로 나누어 질것이다라고 추측했다. 이 추측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부와 비슷한 유전자의 양극화로 다가온다. 이런 세상이 온다면 소수의 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자는 같은 종이란 것 조차 망각해 버릴 것이 두렵다.

p*******t 2010.11.23. 신고 공감 7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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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놈 혁명이 야기한 도덕적 어지럼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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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은 부시 행정부 시절인 2001년 대통령생명윤리위원회 위원에 합류하면서부터 윤리와 생명공학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위원회는 오랜 논의 끝에 10:7로 줄기세포 복제 연구를 금지하는 권고에 합의했다. 샌델은 7명 중 한 명에 속했다. 그는 인간 복제를 제한하면서 연구를 허용하자는 입장이었다. 불치병 치료를 위해서만 쓰인다는 전제 하에 줄기세포 복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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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은 부시 행정부 시절인 2001년 대통령생명윤리위원회 위원에 합류하면서부터 윤리와 생명공학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위원회는 오랜 논의 끝에 10:7로 줄기세포 복제 연구를 금지하는 권고에 합의했다. 샌델은 7명 중 한 명에 속했다. 그는 인간 복제를 제한하면서 연구를 허용하자는 입장이었다. 불치병 치료를 위해서만 쓰인다는 전제 하에 줄기세포 복제 연구가 절실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찰스 다윈의 조카 프랜시스 콜턴 경은 우생학(eugenics)이라는 단어를 창조한 사람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이 맹목적으로 천천히 그리고 경솔하게 하는 일을 우리 인간이 계획적으로 신속하게 그리고 사려 깊게 할 수 있다.” 히틀러 시대를 거치면서 절정에 달한 우생학은 그후 위세가 조금 약해지기는 했지만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다가 게놈 시대가 도래하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현대 우생학의 주장에 그럴듯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해마다 사회복지 비용으로 어머어마한 비용을 지출하고 있는 미국에서 사회복지 수혜자들의 유전자를 조사하고 변경해서 그 자식들이 사회적으로 경쟁력 있는 개체로 자라나도록 추진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와 비슷한 주장은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물론 아직 현실화된 적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에는 어떤 쟁점들이 가로놓여 있을까?

유전자 약물이나 유전자 조작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다른 방향이나 용도로 오남용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치료의 목적이 아니라 능력의 강화’(enhancement)를 위해서 쓰이다 보면 오남용으로 나아갈 것이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다.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서는 알츠하이머 치료제를 큐어’(Cure)라고 부른다. 유전자 약물이 치료의 목적으로 쓰인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명명일 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큐어는 실험대상 유인원의 기억력을 강화함으로써 유인원과 인류의 대결을 촉발한다. 물론 이 영화는 유전자 약물이 치료와 강화의 경계에서 흔들릴 수 밖에 없음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서 유전자 조작과 관련된 논쟁들을 도덕성, 자율성, 공정성(불평등), 안전성 등 여러 각도에서 접근하면서 무엇이 진정한 판단의 근거가 되어야 하는지 살핀다. 과학이 도덕적 이해보다 빠르게 발전하다 보니 사람들은 불안함에 빠진다. 샌델 자신이 그런 용어를 쓰지는 않지만, 이는 현대 사회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문화지체’(culture lag) 현상이라든가 에밀 뒤르켐의 아노미(anomie) 같은 용어와 상통한다. 유전공학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노미 이론을 대입해서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무분별한 유전공학 활용은 아직 그 어떤 도덕적 잣대나 규제 장치가 형성되기도 전에 사람들 간에 경쟁적이고, 때론 폭력적인 유전적 강화를 초래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유전적으로 가장 강한 형질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될 테고 나아가 가장 강한 유전자를 지닌 자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지금 세상이 자본주의라면, 그 세상은 뭐랄까, 유전자주의라고 부르게 될까? 물론 그 세상에서도 더 많은 돈이 더 우월한 유전자를 의미할 테니 유전자주의도 결국 자본주의와 불가분의 관계가 것이다.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유전자 조작이 무제한적으로 허용된다면 돈이 많을수록 더 키도 크고, 더 잘 생기고, 더 힘도 세고, 더 오래 살 것이다. 한국의 부모들이라면 자녀들을 위해 고액과외나 사설학원에 올인하는 것처럼 유전자 조작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진풍경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샌델이 평등주의적 입장에서 유전자 조작을 반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평등주의 같은 것도 그에게는 너무 협소한 시각인 듯하다. 샌델은 이 책에서 유전자 조작과 관련된 여러 가지 입장과 딜레마들을 가능한 한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여러 가지 사례들과 생명공학 기술들을 소개하면서 거기에 수반된 윤리적 쟁점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책을 읽다 보면 현 수준의 유전공학 기술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될 것이다.

정의론으로 유명해진 마이클 샌델답게 현대 우생학의 자유주의적 원칙들을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여러 가지 사례, 쟁점, 논거, 이론들을 천착한 후에 그가 얻은 결론은 생명은 선물로 주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윤리학은 ‘the ethics of giftedness’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맹목적이고 경솔해 보이는 자연의 우연성에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 생명이 선물이라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을 때에야 인간성과 연대성을 유지할 수 있다. 물론 그 선물은 절대자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그가 신실한 유대인인종적으로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이라는 걸 염두에 둔다면 충분히 나올 만한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공허해 보일 수도 있다. 어떤 독자들은 본문에 제시된 사례들과 저자의 주장들에 동의하면서도 그와 유사하지만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결론에 공감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도덕이 과학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노미적인 현 상황에서 근본적이고 종합적인 논쟁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샌델의 주장은 그 자체로 매우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겠다.



YES마니아 : 로얄 c*****g 2011.08.28. 신고 공감 4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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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 세포 연구를 둘러싼 윤리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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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마이클 샌델/강명신/동녘 마이클 샌델 교수는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빼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 정도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그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샌델은 “정의”이라는 창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문제를 바라보고 답을 찾고자 한다. 샌델의 “정의론”은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동체와 전통의 가치를 중요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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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마이클 샌델/강명신/동녘


마이클 샌델 교수는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빼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 정도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그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샌델은 “정의”이라는 창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문제를 바라보고 답을 찾고자 한다.


샌델의 “정의론”은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동체와 전통의 가치를 중요시 한다.

그가 ‘공동체주의’와 차별성을 띠는 것은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데 있다.

우리에게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던 그가 갑작스런 인기를 얻은 것은 우리 사회에 화두로 떠올랐던 <공정성>이 그의 “정의론”과 겹치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저자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생명윤리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여 줄기세포 복제 연구를 허용할지에 대하여 전문가들과 6개월에 걸친 격렬한 토론을 벌인다.

전문가들은 줄기세포 복제를 금지하는 결과를 돌출해서 관련 법안에 대통령의 거부권을 행사하게 만들었지만 샌델은 인간복제를 제한하면서 연구를 허용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배아 복제는 찬성하지만 인간복제에는 반대한다.

치명적인 질병 치료에 배아 줄기세포 연구가 획기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주목한 현실적인 이유에서이다.

그것을 위해 인간의 생명 윤리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인 요구에 응할 수 있게 하는 근거로 생명은 ‘선물로 얻음’이라는 윤리관을 제시한다.


책에서는, 

운동선수들이 유전공학 기술을 이용하여 능력을 키우는 것과 유전공학 분야의 강화제를 이용하여 자녀의 탁월성을 증진시키는 문제에 대한 부당성을 논하고 있다.

또한, 현대의 자유주의 우생학이 가지고 올 문제점에 대해서도 짚어본다.


마지막으로 줄기세포 연구와 관련한 여러 논쟁을 살펴보고 있다.

배아를 인간으로 규정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줄기세포 연구의 찬반 논쟁으로 이어진다.

여기서도 샌델은 ‘선물로 얻은 삶의 가치’라는 윤리에 준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배아 줄기세포 연구와 연구용 복제를 허용하되, 규제를 통해 인간 생명 초기의 신비에 적절한 도덕적 제한을 규제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줄기세포 연구가 치명적인 질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면서 인류 모두에게 건강한 미래를 줄 것이라는 희망찬 청사진으로 이어진다.


이 책은 한때 온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로 빠뜨렸던 황우석 사태를 떠올리게 만든다.

연일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무언가 엄청난 발견이 가까웠다는 기대로 온 국민을 들뜨게 만들었던 당시는 집단적인 광기에 가까웠다.

거기에 이성적인 비판의 자리는 존재할 수 없었고 대중들을 혹시라도 그러한 것들이 사실로 들어나 모든 기대가 한꺼번에 무너져 버릴 것을 오히려 두려워하였다.

결국 부풀려졌던 풍선은 하루아침에 터져 버리고 전 국민은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저자와 같은 윤리 논쟁이 과학 발전을 저해하는 소모적인 논쟁으로 비쳐질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꼭 언급해야 할 중요한 문제라는 역설적인 증거를 황우석 사태에서 찾을 수 있다.

과학이 급속도로 발달할수록 윤리와 도덕 같이 퇴색한 듯한 가치를 다시 끄집어내서 성찰해야 하는 까닭은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지탱해줄 대들보 역할을 해 줄 가치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w******5 2012.06.28.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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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과 통제, 지배욕구가 만들어내는 유전학의 오용에 대한 도덕적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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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학의 획기적인 발전이 질병의 치료, 건강의 유지를 통한 수명의 연장과 같은 긍정적 결과를 갖는 것은 물론이지만 한편으론 인류의 본성까지 조작이 가능해진 유전학에 도덕적인 불편함을 떨쳐내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대체 유전학 테크놀로지의 무엇이 우리들을 이렇게 불편하게 하는 것일까? 샌델 교수는‘유전학적 강화’와 배아에서의‘줄기세포의 추출’이 지니는 또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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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학의 획기적인 발전이 질병의 치료, 건강의 유지를 통한 수명의 연장과 같은 긍정적 결과를 갖는 것은 물론이지만 한편으론 인류의 본성까지 조작이 가능해진 유전학에 도덕적인 불편함을 떨쳐내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대체 유전학 테크놀로지의 무엇이 우리들을 이렇게 불편하게 하는 것일까?

샌델 교수는‘유전학적 강화’와 배아에서의‘줄기세포의 추출’이 지니는 또 하나의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고 도덕적 공방을 통해 인간과 인간사회의 윤리에 대해 조심스러운 성찰의 시간을 마련 한다.

 

그의 저술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이미 도덕성을 판단하기 위해서 인간의 행복과 자유와 미덕이라는 세 가지 이상을 기준으로‘정의’의 다양한 판단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았듯이 유전학의 발전과 이용이 만들어내는 윤리의식 또한 이에 못지않은 기준과 사유를 요구한다. 먼저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디자인하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한가? 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다소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청각장애인 부부가 자신들의 아이도 청각장애자이기를 원하여 청각장애의 유전적 형질을 지닌 배아를 통해 아이를 출생시키는 행위에 대해 어떤 도덕적 문제점이 있는가하는 것이다. 분명 우리는 도덕적으로 편치 않은 느낌을 갖지만 그것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이와는 반대로 키 작은 아이를 위해 부모가 유전적 기술을 통해 신장을 늘리는 것은 어떨까? 이 행위에는 도덕적 문제가 없는 것일까?

 

청각장애 부부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자유롭게 행사한 이 행위에 딱히 부도덕하다고 지적할 만한 도덕적 판단요소를 내밀기가 쉽지 않다. 만일 이것이 부도덕한 행위라 하면 발육이 부진한 키 작은 아이에게 유전적 도움을 받아 신장을 늘리는 행위도 사실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판단을 벗어날 수 없다. “성별, 키, 다른 유전형질을 선택하고, 신체적, 인지적 능력을”변화시키는, 즉 인간의 본성을 공학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왜 잘못인지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이의 의지와는 달리 인생을 미리 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율성이 침해되고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인생 계획을 수립할 권리의 박탈이라는 개념이 개입되어 있다. 우리들은 이처럼 자율성, 개인의 권리와 같은 도덕적 언어로 이들 행위의 그름을 설명하지만 왠지 석연찮은 구석이 남는다.

 

이와 유사한 경우로 신체능력이나 기억력, 집중력의 강화를 위해 유전학적 강화 기술을 통해 능력을 개선시키는 것처럼 보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로 확장해보면 운동선수에게 근육 강화제를 주사한다던가, 산만하여 행동장애가 있는 아이를 치료하는 리탈린이나 암페타민제제를 사용하여 집중력을 강화시키기도 한다. 유전학적 기술을 통해 생체공학적으로 탁월한 운동선수를 만들었다고 가정해보면 우린 여기에 도사린 도덕적 문제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유전적 선택이나 강화는 인간의 행위 주체성을 침식해서 바로 인간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체공학적 운동선수는 그 자신이 아니라“실제 행위자는 그를 생체공학적으로 만들어낸 발명가”이기에 때문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인간의 행동을 완전히 기계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우리가 인식하는 자유와 도덕적 책임에 어떠한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유전공학자의 능력이니 여기에 도덕성과 책임의 의무가 개입할 어떠한 여지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의 주체에 대한 문제를 떠나 이러한 선수가 뛰는 스포츠가 더 이상 관중의 시선을 끌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던져보자. 아마도 성취에 대한 우리의 존경이 퇴색할 것은 뻔하고, 더구나 탁월성이라는 스포츠의 본질을 상실하고 말 것이며, 재능을 높이 사고 칭찬할 만 한 것이 사라진 스포츠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유전학적 강화가 인간에게 중요한 부분인 자연적인 재능과 소질을 침식하는 것은 분명하다. 나로서는 여기에 존 롤스의‘차등이론’, 즉 “출생이라는 우연을 기준으로 소득, 재산, 기회, 권력과 같은 도덕적 임의성은 불공평을 조장하고, 더구나 혜택 받은 가정환경의 산물로서 우연의 영향을 받는다면 노력의 미덕도 인정치 않는다.”는 견해를 확장하여 유전학적 기술이 야기하는 이러한 도덕적 임의성이 사회의 기본 구조를 파괴한다는 점을 추가하고 싶다. 우연의 차이로 인해 불평등이 만들어지는 자연출생조차 행운의 이익이 배분되는 것이 공동체의 이익과 사회 안정이라는 정의로 추구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유전학적 강화는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일뿐 아니라 오늘의 과잉 경쟁사회의 요구에 순응하여 정복과 지배를 향한 지나친 불안을 조장하는 도덕적 곤란함을 내재하게 된다는 비판을 비켜나갈 수 없는 것이지 않을까?

 

더구나 이는 20세기 우생학의 악령과 다름이 없기도 하다. 극빈자에게 강제 불임을 시키는 것처럼 바람직하지 않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에게 생식을 못 하게 하는 법률을 추진했던 과거의 우생학처럼 국가주도의 강제성이 없으니 오늘의 유전학적 강화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유전적 선호를 이유로 태아를 낙태하고, 프리미엄 난자시장이 성황하며, 특권층 부모가 경쟁사회에서 성공할 만한 자식의 종류를 선택하고 유전공학적으로 성공할 만한 조건을 갖추게 하는 방식의‘자유주의 우생학’은 도덕적 불편함을 떨쳐내지 못한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하버마스의“유전학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인격은 자신을‘자기인생 역정의 단독자’로 볼 수 없다.”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 측면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인류가 만들어지지 않고 태어난다는 사실 자체가 행위를 시작할 수 있는 인류 능력의 조건이라는 말이다. 인간이 유전학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우연에 좌우되어 자신의 운명을 연대와 공유할 이유가 없어져 급격하게 사회연대는 파괴될 것이며, 겸손과 같은 미덕은 사라질 것이다. 궁극에는 아마 영화 『터미네이터』가 상상하는 무한의 전쟁만 존재하는 공멸의 세상을 초래할 밖에 없지 않을까?

 

끝으로‘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것, 생명의 복제까지 나아가려 하는 유전학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짚어본다. 줄기세포 추출 행위는 인간 생명을 상품화하는 비인간적 활동이며, 인간 배아(포배)의 파괴를 동반하는 비도덕적 행위라는 반대론에 대해 저자는 생물학적 사실에서 포배가 인간 존재이고 인격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고 피부세포를 예로 들어 주장하며 줄기세포 추출행위를 찬성하고 있다. 또한 인간 중 누구도‘복제 포배’였던 적이 없는 만큼 복제 포배는 엄격히 말해 배아가 아니라 생물학적 인공물(clonote)이며, 자연생식에 있어서도 초기배아는 다반사로 죽기 때문에 포배를 연구물로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배아의 도덕적 지위에 대한 문제가 있다. 과연 포배는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이 사물인가? 인간은 사물이 아니다! 우리의 의지에 반해 우리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은 정당화 할 수 없다. 인간은 목적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닌가? 인간 생명의 불가침성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불가침성을 어느 시점에 획득하는가? 하면 다시금 그 경계를 확정짓는 다는 것이 어렵다는 점에 봉착하게 되지만, 저자의 주장과 달리 나는“수정부터 출생까지 과정에서 인격이 정확히 언제부터 생기는지 짚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배아를 발달한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싶다. 알 수 없기에 불의의 상황까지를 포함하는 것이 도덕적인 것이 아닌가! 단지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만이지 않은가? 물론 이 문제의 결론에서 “사물로만 취급되어선 안 된다고 해서 배아가 인격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배아는 불가침의 권리가 없다, 그러나 맘대로 처분할 대상도 아니다.”라고 하면서,“오직 쓰고 버릴 목적 때문에 발달초기의 생명을 만드는”엽기적인 일을 지지하고 있다. 질병 치료라는 인류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목적이기에 정당하다는 논리이다.

 

사용하는 목적과 본성에 적절한 일이어야 한다는 유전학기술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만, 사실 이 기준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사용하는 목적에 대한 정의와 도덕성의 판단기준에 이르면 다시금 불확실성과 상대주의와의 충돌을 마주한다. 이런 순환논리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인간의 지적 능력을 고귀하게 사용하자는 추상적 호소에 동의하지만 우리 인간들이 직감하는 도덕적 불편함 그 자체가 이미 부도덕을 말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유전학적 강화, 인간의 초기생명체인 포배의 실험 사용문제의 도덕성을 검증하는 이 저술은 분명 유익하지만 과학이 초래하는 기계적 합리주의와 자유주의가 지향하는 불공정성의 고착화를 내재하는 이 문제는 인간의 미래를 불투명한 어둠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 역시 분명하다 할 수 있다. 이기적 경쟁의 논리가 만들어내는 불평등이라는‘프로메테우스적 욕구’는 우리 인간사회에서 지양하여야 할 본성이다. 유전학 그 자체가 무슨 악이겠는가. 정복과 통제의 가치로 유전학 기술을 사용하려는 계층의 야욕이 문제가 되는 것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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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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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쩍 삶의 의미와 가치, 타자(사람, 환경 등)와 공생하기 위한 방법들을 다룬 책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도덕윤리, 인문학에 대한 이렇게 다양한 책이 나오고 있는 것이 몇 출판사의 마케팅 능력 때문만은 아닐 것같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어떤 필요가 생겼기에 사람들은 갑자기 그런 책을 찾게된 것일까. 뇌과학과 신경과학, 유전학이 발달해가는 현대에 우리가 우리에 대해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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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쩍 삶의 의미와 가치, 타자(사람, 환경 등)와 공생하기 위한 방법들을 다룬 책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도덕윤리, 인문학에 대한 이렇게 다양한 책이 나오고 있는 것이 몇 출판사의 마케팅 능력 때문만은 아닐 것같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어떤 필요가 생겼기에 사람들은 갑자기 그런 책을 찾게된 것일까. 뇌과학과 신경과학, 유전학이 발달해가는 현대에 우리가 우리에 대해 알 수 없는 영역이 더욱 늘어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공동체주의자로서의 샌델의 입장을 알 수 있었다. 생명윤리처럼 민감한 문제에 대해 공동체주의자는 어떻게 이야기할지, 게다가 '반론'을 펼친다고 하니 이 책도 찾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책 전체에 흐르는 논지에 깊이 공감을 했지만, '줄기세포'를 다룬 에필로그를 읽으면서 갑자기 이야기가 왜 산으로 가나 싶었다. 공동체주의라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좋은 게 좋은 것이 되도록 '해석'해서 행복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본문에서는 유전자에 기대어 빠르게 진화(?)하고 싶어하는 현대인은 근본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헤친다. 경쟁에 유리한 몸을 가지고 싶어하는 스포츠선수, '좋은 유전자'를 가진 자녀를 낳고 싶어하는 부모의 모습을 통해 이러한 세태가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종류의 우생학임을 이야기한다. 샌델은 도덕적으로 유전자를 활용해도 되느냐 안되느냐의 여부는 그 목적이 치료냐, 강화냐에 달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개인주의와 능력주의에 찌든 미국(을 비롯한 현대 세계)이야말로 주체가 왜곡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보인다. 이 세계에서는 진정한 '나'도 없고 그 '나'와 만나야할 타자도 없다. 유전자를 선택하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사실 무한경쟁으로 내모는 사회구조에 가장 먼저 순응하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윤리에 대한 논의에서 종교적 입장과 도덕적 입장은 꽤 비슷해보이기 쉬운 것 같다. 샌델도 유전학의 발전으로 우리 앞에 놓여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명과 삶을 (인격신의 존재 여부는 제쳐놓고) 주어진 선물로 여길 것을 주장한다. 나와 내 자녀의 삶을 내가 디자인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욕심에 가득찬 오만이며 선물로 주어진 삶을 도구로 여기는 자세이다.

 

그런데 종교적이어보이는 그의 논의가 결론에 가서 다른 길을 간다. 줄기세포 논쟁의 핵심에는 줄기세포배아를 인격으로 볼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다. 언제부터 인격으로 볼 것인지를 사실로 규정할 수 없는 이 문제야말로 어떤 가치와 입장을 가졌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샌델은 충분히 세포분열해서 장기가 생겨나지 않은 포배아를 인격까지는 아니고 살갗에서 떨어져나온 세포 정도로 여기는듯 하다. 포배아가 인격을 갖지 않았다고 '본다면' 불임치료를 위한 배아 중 쓰고 남은 것이 버려질 때 그 배아들에 대해 장례를 치뤄주지 않을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차피 버려질 배아를 줄기세포 연구에 활용하는 것이 그 연구를 통해 치료 받을 사람들을 위해서도 좋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공동체주의의 탈을 쓴 공리주의 같아 보여서 갑자기 불편해진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어쨌든 보건학과 윤리학을 전공한 역자의 명쾌한 번역 덕분에 전문적인 이야기에도 막히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샌델의 책 두 권을 읽으면서 흥미롭고 극단적이고 다양한 예시에 놀랐는데 문득 샌델이 책을 쓸 때에는 자료를 조사해주는 도우미들을 따로 둔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우리의 가치관 정립보다 빠르게 변해가는(발전하는?) 현대에 우리 앞에 당면한 문제에 대해 좀 더 효과적으로 고민해보기 위해 한 번 읽어두어도 좋을 책이다. 샌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입장은 스스로 정해야 할 것이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o****2 2010.11.22. 신고 공감 2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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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 주어진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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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혹은 100년쯤 후의 올림픽은 어떨까. 투포환과 투창과 같은 경기에서는 거리의 한계 때문에 경기장은 의미가 없어져서 끝없는 벌판에서 경기가 이루어지고 선수에게 메달을 주는 시스템보다는 각 선수의 유전자를 강화시킨 기술개발자인 유전공학자가 메달 수여대에 오르게 될지도 모르겠다. 올림픽의 명패가 문제시되어 ‘유전자강화대회’쯤으로 이름도 바꾸고 도핑테스트는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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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혹은 100년쯤 후의 올림픽은 어떨까. 투포환과 투창과 같은 경기에서는 거리의 한계 때문에 경기장은 의미가 없어져서 끝없는 벌판에서 경기가 이루어지고 선수에게 메달을 주는 시스템보다는 각 선수의 유전자를 강화시킨 기술개발자인 유전공학자가 메달 수여대에 오르게 될지도 모르겠다. 올림픽의 명패가 문제시되어 ‘유전자강화대회’쯤으로 이름도 바꾸고 도핑테스트는 강화를 위한 변형유전자를 감별하는 신생테스트로 변화될지도 모른다. , 인지력 강화에 의해 강화된 인지력을 가진 사람들과 경제적 이유로 강화하지 못한 인류는 도퇴로 인식되고 그 차이는 극단으로 치닫고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여겨질 미래의 도덕적 기준에 의해 과거의 우생학을 연상하게 하는 인류정리정책이 등장할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보면 유전자 강화는 윤리적으로 미래에 디스토피아적 인류의 모습을 탄생시킬 우려가 있다. 그러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로 유전자 강화가 절실한 이들에게 무조건적 반대를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생명윤리에 대한 체계적인 정책이 거의 부재에 가까운 현재에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해 반대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그러한 생명공학 기술의 발전이 미래에 가져올 폐해(폐해를 낳기 위해 연구하는 과학자가 과연 있겠나)보다 현재 실용적인 면에 부각되는 것이 현재의 인식이다.

마이클 샌델은 네가지(근육강화, 기억강화, 신장강화, 성감별)의 생명공학 기술을 가지고 생명윤리를 논하고 있다. 이를 우리의 일상에 대입해 논해볼만한 스포츠에서의 ‘생체공학적 운동선수’와 부모가 만드는 ‘아이’에 대해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다. 마이클 샌델이 제시하는 이 담론은 ‘오늘날 과학이 도덕적 이해보다 빠르게 발전’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고 결론적으로 우리가 과학의 발전보다 더욱 관심을 갖게 되는 데에 의의가 있다.

샌델은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가능하게 된, 각 강화의 찬반론에 있어서 누가 옳다고 할 수 없는 양쪽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 후 대안을 제시하는 논리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찬반 양쪽의 의견을 들으면 어느 한쪽의 편에 설수도 없다. 뭔가 석연치 않은 유전공학적 강화에 대해 현재의 도덕적 기준으로는 공정성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례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마이클 샌델이 무조건적인 유전공학적 강화를 허용하는 데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포츠와 임신과 육아의 경우를 보면, 자본과 지배를 향한 이상 때문에 지나친 경쟁의식이 생기고 도태와 ‘차이’에 대한 불안으로 복지제공을 넘어서는 지나친 강화를 추구하게 된다. 이는 결론적으로는 샌델의 말대로 우생학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생명공학의 발전이 가져올 암치료와 같은 좋음이 유전학적 강화로 사회제도와 도덕감정에 미칠 나쁨보다 항상 선행될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샌델은 개별적인 악덕보다 벌써 보여지는 이러한 강화들이 인류의 정신의 습관과 존재방식이 될 것을 우려한다.

이에 대한 인식론적 대안으로 마이클 샌델은 생명과 우연적인 재능과 유전적 특성이 선물로 주어진것으로 여긴다. 이에 대해 종교적이라 비판하는 데 대해서는 삶이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는 생각은 세속에서도 자신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서 주어진 선물로 받아들 수 있다고 반론한다. 선물보다, 그리고 치유도 아닌, 부모의 것이든 아이 자신의 것이든 자유의지로 강화를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세상에 맞추기 위해 본성을 바꾸는 자율권을 포기한 극단적 형태라고 샌델은 말한다. (이러한 그의 선택은 어떻게 보면 너무도 안전한 선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유전학적 강화로 인한 스포츠와 아기에 대한 부모들에 태도를 보면서 느껴지는 도덕적 불편함에 대한 대안으로 꽤 중도적이며 합리적이기도 해서 반론의 여지가 가장 적은 입장이기도 하다)

 

사실 이 책을 대하기 전에는 마이클 샌델이 제시한 화두에 대해 나 또한 갈팡질팡 하면서 이런 태도, 저런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위로삼은 것은 이 모든 것이 자본중심적 경쟁의 산실이므로 결론은 세계인식의 문제이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자본중심적 사회인식체계를 전환시킬 운동이 필요한데 그 뿌리가 깊고 넓어, 대대적인 혁명이 아니고서야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비관론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류가 가진 제3의 면모에서 그 대안을 찾아가는 마이클 샌델의 이야기는 매혹적이다.

(나는 여기에서 최근 내가 읽었던 책들이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가진것이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여러분야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사회적 담론에 대한 독서와(자본주의와 현대사회이론), 현재 당면 문제에 대한 독서(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그리고 그 대안을 세우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희망을 준 독서(두려움 없는 미래), 이러한 사회에 대한 글과 말들은 모두 얽혀있다.)

생명공학과 이러한 사례가 유전공학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경우에 경쟁과 불안이 인간의 완벽을 추구하게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세계적인 생명윤리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와 대안제시가 절실해진다. 극단적 반대와 극단적 찬성의 편이 있다면 이제는 극단적 중도주의자들의 활발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극단적 중도주의자들이니만큼 주장의 오류도 많을 테지만 마이클 샌델과 같이 찬성측의 주장을 정확히 알고 반대주장의 오류 또한 부정하지 않으면서 다른 곳에서 대안을 찾는다면 매우 희망적이다.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마이클 샌델의 배아윤리학에 대한 논의를 볼 수 있는 것은 매우 가치있는 덤을 받은 것과 같다. 생명윤리 중 가장 오래된 논의중 하나인 낙태에서의 어디에서부터 인간으로 볼 것인가에 관한 문제는 이 부분에서 샌델이 다루고 있는 줄기세포 연구의 배아의 인격성에 대한 논의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 샌델이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는 줄기세포연구에 대한 법 제정 권유 내용은 독자로 하여금 찬성과 반대편의 논리들을 배려한 최선의 중도적 정책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인류는 역사 속에서 이런저런 우생학 정책으로 인한 인권윤리의 문제를 이미 겪었다. 우생이라는 것의 기준은 과연 어떤 것일까. 어떤 인류의 모습이 이상적인 것일까. 이 기준의 문제는 결과적으로 개인의 이익 혹은 생존을 위한 경쟁을 부추기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인류의 건강하고 편안한 미래를 위해 현재의 세대들이 강제로 불임을 강요당하거나 희생된다면 미래 인류를 위해 우성으로 판명되는 이들은 무조건적으로 영광스럽게 출산해야 하거나 강제수용되어 출산을 위해 존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결코 강화는 개인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결과적으로 우생학적 인식론을 형성하게 될 것이라는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배아를 지나치게 생명으로, 혹은 지나친 상품화 하는 것 또한 인간 스스로 존엄성을 포기할 수 있는 일인 것과 같이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인한 지나친 강화는 인간에게 각자 선물로 주어진 삶을 비관하고 완벽만을 추구하게 되면서 비인간화를 조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 또한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이클 샌델이 유전학적 강화에 대해서는 다소 정치적인 대안보다는 인식게몽적 대안을 제시한 데 공감하지만 이들의 대안이 가치있어지려면 신자유주의 자본의 논리가 인간과 인격을 형성하는 현재에는 생명윤리에 대한 학자들의 담론형성과 정책적 대안 수립에 대한 관심이 적극적으로 지원되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염려와 희망을 품어본다.

마이클 샌델의 논리를 압축하고 있는 몇몇의 발췌:

“신장의 박탈로 힘들어하는 무고한 방관자들에게는 공적으로 재정 보상이 가능한데, 방법은 키를 키울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거두는 것이다. 본질적인 물음을 ‘과연 우리가 그런 사회에 살기를 원하는가’하는 점이다.

“노력이 최고의 이상이라면, 강화가 범하는 죄악은 훈련과 고된 수고를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력이 전부가 아니다. (중략) 운동선수가 유전공학으로 도움을 받는 일의 진짜 문제는 무엇인가? 자연적인 재능을 애써 가꾸고 보여주는 일을 영광스러운 일로 예우하는 스포츠의 경쟁을 변질시킨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강화는 무엇인가? 그것은 일종의 하이테크를 이용한 분투로, 노력과 의도의 윤리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관점에서 두가지 윤리, 즉 의도함의 윤리와 생명공학적 권력의 윤리가 도출된다. 문제는 두가지 모두 ‘선물로 주어짐’에 마땅히 주어져야 할 관심과 상치된다는 것이다.

“건강에 대한 이런 개념(공리주의적 개념)은 치유와 강화의 구분을 거부한다.

“유전공학을 통해 아이를 강화하려는 부모의 시도가 교육이나 훈련쪽에 가까운가, 우생학에 가까운가 

“이 시대의 과잉양육은 정복과 지배를 향한 지나친 불안을 나타내며, 이는 선물로서 삶의 의미를 놓치는 일이다”

유전공학으로 유전적 제비뽑기의 결과를 뛰어넘을 수 있고, 운이 정해주던 것을 직접 선택할 수 있다면 우연히 주어지는인간의 능력과 성취의 성격이 무색해질 것이다.”

참고추천:

생명에 관한 아홉가지 에세이, 박재현 이도흠/교수신문 엮음(학술에세이상 수상집, 인간복제 등 현대 생명윤리에 관한 한국의 논문들을 볼 수 있음)

http://www.sangeun.co.kr/Index.asp(현재 한국의 생명윤리에 관한 연구를 볼 수 있음)

사회윤리의 제문제(쥬디스의 임신중절에 관한 논의를 볼 수 있음)

이외에도 본문에서 언급된 문헌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하버마스의 유전공학시대의 윤리에 대한 글을 볼 수 있다고 함),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마이클 샌델의 인터뷰 수록되어 있다고 함)가 본문의 심층적 이해에 도움을 주고 매우 흥미로울 듯도 하다.

ps :

이 책의 앞부분에서 김선욱 교수의 해설과 옮긴이의 말 등은 이 책을 덮은 후 마이클 샌델의 이 연구 이외를 포함하는 전반적인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특히 옮긴이가 지적해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번역관련부분과 롤스와의 의견대조부분이 이후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책 서두의 해설 중 '정의란 무엇인가‘의 옮긴이의 말을 인용하는 부분은 공감하기 힘들었다. 나는 아직 그 책을 읽기 못해서 옮긴이의 문맥까지 짐작할 수는 없다. 그러나 김교수의 해설을 보면 그 책의 번역자가 독자들에게 지적유희를 즐겨보라고 권하는 글귀가 충격적이었다고 언급한다. 샌델교수의 강의의 가치가 말이나 논리의 유희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강의를 지적 유희로 소개하는 것이 지적진지함에 대한 일종의 모목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단지 언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배제한 해석일 수 있었다. 독자에게 지적유희를 즐기라 함은 저자의 강의가 지적유희라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평소에는 사고하지 않았던 분야에 대한 브레인스토밍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아니, 저자의 연구가 지적유희가 아니라는 말 또한 조금은 거부감이 생긴다. 학자에게 지적인 사유에 대한 유희가 없다면 단지 학자된 자로서의 의무감으로만 사유하고 연구하고 강의를 할 수 있을까. 학생들에게 지적 진지함의 즐거움을 일깨우는 것 또한 학자와 선생의 의무는 아닌가.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를 읽으면서 나는 마이클 샌델이 매우 좋은 선생님일 것임을 확신했다. 그가 우리의 일상에서 출발하여 논리정연한 말하기의 유희의 힘을 가짐으로써 듣는 이에게 인류로서 꼭 생각해봐야 하는 주제에 대한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쉬운 사례를 적절한 곳에 배치함으로써 이해를 돕고 전체적인 그림과 세부화 또한 논리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듣는 이를 매혹시키는 강의력을 가진 이라는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분명 독자와 청중을 지적유희라는 힘을 통해 탐구하게끔 하는 선생다운 면모를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책의 역자가 의미하는 ’지적유희‘란 강의를 통한 독자들의 마음과 머리에서 일어나는 파장인 사유의 즐거움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었다. 우리는 분명 인류의 하나로서 그가 제시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하는 입장인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윤리라는 사유자체(나는 이것을 ’철학한다‘라고 표현하고 싶다)의 즐거움을 안다면 더욱 적극적인 비판적 수용자로서의 독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해설자의 이러한 언급은 유희라는 언어의 쾌락적요소라는 단어에 굉장한 거부감을 가진 나머지 이러한 해설을 쓰게 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f*****5 2010.09.23. 신고 공감 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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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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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적잖이 신성한 충격에 휩싸이게 하였다. 삶을 조망하는 시선, 가치에 대한 일대 변화를 일으키며, 진정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가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다각도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책이 던진 화두는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이 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그가 말하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 윤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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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적잖이 신성한 충격에 휩싸이게 하였다. 삶을 조망하는 시선, 가치에 대한 일대 변화를 일으키며, 진정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가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다각도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책이 던진 화두는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이 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그가 말하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 윤리란 화두에 대한 담론에 한 번 끼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에 주목하였다.

 

대학 전공과도 연관되는 이야기지만 지금껏 생명과 유전학적 접근을 그다지 심사숙고하지 않았다.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속에서 다소 나와 맞지 않아 큰 좌절을 맛보았고, 몽상처럼 흩어져 나를 휘두르는 생각의 실체를 확인-‘저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어떻게든 제대로 파악해 보려고 한다’(36)라고 말한 그 심리 그대로다- 하고, 깊숙이 자리한 불편하고 거북한 느낌, 생각들을 좀 더 견고히 다듬고 싶은 마음이었다.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는 제목 그대로 ‘생명 윤리’를 여러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던져졌던 몇 가지 이야기를 되새기며 읽기도 하였다. 여러 이야기 중에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 하에서 소비자의 선택적 선호와 기호가 유전학적 강화로 개별적, 자발적 선택의 문제로 다루어진다면, 과연 인간의 존엄성이란 가치가 훼손되지 않을까?’하는 문제가 의미 있었다.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완전함, 완벽함을 쫓지만 그럼에도 ‘불완전’한 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 20세기 우생학의 그림자가 오늘의 생명공학(유전공학과 강화)의 논란 위에 드리워져 있다는 말에 공감하며 자유 시장 경제, 무한경쟁 하에서 우생학의 변주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생명의 윤리’란 화두를 두고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하였다. 인간의 욕망의 끝을 헤아릴 수 없거니와, 삶, 생명의 소중한 가치, 인간 존엄성이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럼에도 물질만능주의, 외모 지상주의 그로 인한 상대적 박탈 그리고 과잉 양육 등의 다양한 문제가 함께 화두로 떠오른다. 진정 어떤 사회가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일지를 고민하다보면, 각자의 개성, 고유성을 지키면서 사회적 틀(시선)에서 진정한 자유를 만끽할 수는 없는지 자문해본다.

 

자식은 결코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선택권이 부모에게 정당하게 주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이에 대한 선호와 기호가 자발적 선택의 자유에 해당한다면, 아이에게 주어진 삶의 본질이 온전하게 유지될까? 단지 부모의 능력(부와 권력)이란 잣대에 의해 자식의 유무가 다름 아닌 소유의 선택 문제로 전락하는 것을 아닐까? 이런 저런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간다. 자녀의 유전학적 우연이 모종의 사회적 약속에 의해 단일화, 획일화되는 듯 아찔한데, 인간의 존엄성이 사회적 틀에 의해 끼어 맞춰진다는 경고의 메시지에 숙고하게 된다. 세상에 맞추기 위해 본성을 바꾸는 것은 자유권을 포기한 극단적 형태란 충고와 우리의 유전적인 능력을 가지고 ‘인간성이 왜곡된 부분’을 곧게 펴는 게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의 재능과 제한에 좀더 친절하고 사회·정치적인 제도를 만들기 위해 가능한 노력을 해야 한다(144)는 ‘마이클 샌델’의 목소리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해본다. 나는 교정하지 않은 채, 뻐드렁니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요즘 치아 교정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때론 우리 부모님은 내게 치아 교정을 ‘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망을 들었던 경우가 종종 있을 정도였다. 왠지 부모로서 마땅한 책무를 하지 않은, 경제적 무능으로 취급하는 뉘앙스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물론 뻐드렁니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다곤 할 수 없다. 아니 있다. 그럼에도 그것은 단연코 내 선택의 문제였다.

그리고 ‘아빠의 뻐드렁니가 아닌 엄마의 고른 치아를 물려받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의 굵은 목을 닮지 않고 아빠의 가늘고 긴 목을 닮아 얼마나 다행인가?’하는 식으로 부모님과 나의 외형적 유사성을 두고 유전학적 분석을 하며 불평 아닌 불평으로 우스갯소리에 웃고, 그렇게 이야기꽃을 피우곤 한다. 그런데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를 마무리하면서, 나는 내가 나여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이런 나의 고유성이 부모의 무작위적 결합에 의해 우연히 주어진 ‘소중한 선물’이란 사실이 가슴으로 다가와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자의 다른 이야기는 잊어도 상관없을 것 같다. 나란 고유성의 가치가 내 안에서 드높아지면서 생명에 대한 겸손과 경외감에 고취되었고, 생명을 선물로 받아들여 감사하는 마음이 한 가득 내 안에 자리하게 되었다.

d******3 2010.09.17.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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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공학과 줄기세포논쟁의 도덕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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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서가사이를 걷다 보면 의외의 책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라는 제목이 구태의연하지만 저자가 마이클 샌델이라 그가 무수한 철학적 문제를 낳고 있는 생명윤리에 대해 무엇이 정의인지 가르쳐줄 것 같은 기대감이 든다. 『The Case Against Perfection』이라는 원서의 제목이 훨씬 더 매력적인데, 125쪽 남짓의 본문에서 유전공학으로 더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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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 서가사이를 걷다 보면 의외의 책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라는 제목이 구태의연하지만 저자가 마이클 샌델이라 그가 무수한 철학적 문제를 낳고 있는 생명윤리에 대해 무엇이 정의인지 가르쳐줄 것 같은 기대감이 든다. 『The Case Against Perfection』이라는 원서의 제목이 훨씬 더 매력적인데, 125쪽 남짓의 본문에서 유전공학으로 더 강화된 인간이 되는 것이 윤리적인가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30여쪽에 줄기세포연구에 수반되는 복제배아에 대한 윤리논쟁을 별도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토록 얇은 책에 15쪽에 달하는 해설을 맨앞에 붙여놓은 것은 부담스럽다. 역시 같은 분량의 옮긴이의 글처럼 원하는 독자만 선택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뒤에 있으면 좋겠다.


   샌델은 미국 부시 정부 대통령생명윤리위원회에서 활동 당시 의제였던 유전공학 기술의 네 가지, 즉 근육, 기억, 키, 성감별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근육이 위축되는 병을 치료하는 유전공학기술을 운동선수들의 근육을 강화하는데 써도 되는지, 알츠하이머병 치료를 위한 기억을 강화시키는 유전공학기술을 공부를 더 잘하기 위해 써도 되는지, 왜소증 치료를 위한 성장호르몬 치료를 정상인이 더 번듯한 체격을 갖기위해 사용해도 되는지, 성차별이 없는 사회라면 성감별로 원하는 성의 자녀를 선택해도 되는지 등에 대한 논의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논의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과 불유쾌함이 느껴지지만 그런 감정은 또 정당한 것인지 묻고 있다. 인간이 탁월성을 이루려면 노력외에도 재능이 필요한데 그럼 재능이 없이 태어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복제배아를 이용한 줄기세포연구에 대한 논쟁에서는 연구용 복제배아와 불임시술 과정에서 남은 복제배아가 다른 지위를 갖는지, 배아가 어느 시점부터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사실 명확한 해답이 있을 수 없고, 저마다의 종교적, 철학적, 정치적 입장은 좁혀지기 어려울 것 같다.  이에 대한 샌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경외를 보여주고, 우리가 사용하는 목적을 제한하도록 인간의 생명을 주어진 선물로 보는 인식을 더 확산해야 한다. 아기를 인위적으로 디자인하는 유전공학은 자연적으로 유전자가 배합되어 태어난 아기를 자연의 작품으로 받아들이는 경외감을 상실한 것을 드러내는 표지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오만함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착상되지 않은 포배를 가지고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일은 치유를 증진시키기 위해, 주어진 세계에서 복구를 맡은 우리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인간의 지적 능력을 고귀하게 사용하는 일이다."(177-178쪽) 정의보다 인류의 좋은 삶을 우선하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이제는 모호한 중립적 위치에 머무를 수 없는 시점이 되었으며, 유전공학과 줄기세포연구로 이윤을 추구하려는 민간의 움직임이 통제불능에 빠지기 전에 확실한 제도적 장치를 완비해 나가야할 것으로 보인다. 

 

 

 

(에필로그 : 원래의 책이 절판되고 어찌된 상황인지 다른 번역자로 다른 출판사에서 책이 새로 나왔습니다. 제목이 원제에 충실합니다.)


 

 

 

y***d 2016.10.01.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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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 마이클 샌델 : 2072년 4월 10일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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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뒤의 비좁은 골목을 걸어 들어가면 곧 쓰러질 것 같은 한옥이 나오는데 거기는 종이책이 정말 많다. 서울 시내에서 종이책을 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나는 오래된 책 냄새가 좋아서 종종 찾아간다. 가끔 운이 좋으면 정말 옛날에 출판된 책을 만날 수도 있다. 바로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누군가가 수집했던 종이책을 전부 팔아넘긴 모양이다. 한 무더기의 책이 문 옆에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 마이클 샌델 : 2072년 4월 10일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를 읽고" 내용보기
  학교 뒤의 비좁은 골목을 걸어 들어가면 곧 쓰러질 것 같은 한옥이 나오는데 거기는 종이책이 정말 많다. 서울 시내에서 종이책을 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나는 오래된 책 냄새가 좋아서 종종 찾아간다. 가끔 운이 좋으면 정말 옛날에 출판된 책을 만날 수도 있다. 바로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누군가가 수집했던 종이책을 전부 팔아넘긴 모양이다. 한 무더기의 책이 문 옆에 쌓여있었다. 나는 항상 이런 무더기 속의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책에 눈이 간다. 하드커버이지만 너덜너덜해져서 금방이라도 책장이 떨어질 것 같은 책이 있기에 언제 나온 책인지 확인해 보았다. 2010년. 무려 62년 전에 나온 책이다. 코를 갖다 대니 먼지 섞인 종이 냄새가 훅 끼쳤다. 기분이 좋아져 선 자리에서 바로 그 책을 다 읽고 나왔다.

  이 책은 유전자 강화를 시작하기 전 있었던 찬반 토론에 관한 것이었다. 책의 저자는 의학적으로 환자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대파를 무시한 것인지 설득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62년 후인 지금은 유전자 강화를 받은 사람을 흔치 않게 볼 수 있다. 우리 반에도 22명 중에 15명은 유전자 강화를 받았다.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다.


  나는 운동신경을 좋게 해주는 유전자 강화를 받았다.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이런 저런 운동을 시켰고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아오면 아주 자랑스러워 하셨다. 그땐 부모님이 예뻐해 주니까 그저 좋았다. 하지만 나이가 먹으면서 체력 훈련을 하고 운동 하는 생활이 지겨워졌다. 부모님과 대판 싸우고 한동안 집에선 냉기가 흘렀다. 지금은 부모님이 포기하셨는지 어떤진 모르겠지만 운동을 그만 두었다. 이때껏 했던 운동이 아깝지 않냐고 묻는다면 운동하던 시간 동안 글 쓰고 책 읽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앞선다고 말하고 싶다. 그 편이 훨씬 재미있으니까. 하지만 내 글이 백일장에서 상을 받는다던지, 내가 커서 유명한 작가가 된다던지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논리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을 해낼 수 있도록 유전자 강화를 받은 사람들이 나보다 더 글을 잘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실 분했다. ‘이왕 유전자 강화를 해 줄 거면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만들어주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반 1등처럼 집이 아주 잘 살면 여러 개의 유전자 강화를 시켜서 못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 집처럼 금전적 제약 때문에 전부 강화시켜 주지는 못하고 한두 가지에 대해서만 강화를 시키는 집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자식의 적성과 강화 분야가 맞지 않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는 유전자 강화가 없었겠지만 그만큼 교육열이 높았다고 한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헌책방에서 읽은 책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 지금의 부모들이 유전자 강화에 돈을 들이는 만큼 교육에 엄청난 돈을 쏟았다고 하는데 그 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부모가 자식에게 시키려는 교육이 자식의 적성과 맞지 않아 곤란을 겪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했을 때 지금을 살아가는 학생들이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유전자 강화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유전자 강화가 우리에게 축복이 되고 더 윤택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줄 거라고 말했다.

  50년이 넘게 지나면서 기술도 환경도 많이 변했지만 결국 제자리걸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런닝 머신을 타고 달리는 느낌. 인류는 계속 나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앞으로 우리 세대가 커서 어른이 되었을 때 다음 세대의 행복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과거와 많이 달라진 것 같아도 사실상 이전과 똑같은 세상을 물려줄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두렵다.



s*******2 2011.01.19.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