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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소명으로 돌아가게 하는 뜨거워지는 책
"다시 소명으로 돌아가게 하는 뜨거워지는 책" 내용보기
신대원 입시에 두 번 떨어져 세 번째 입시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며 작은 교회에서 유초등부와 청년부 두 부서를 2년째 교육전도사로 섬기고 있다. 작은 교회의 여러 필요를 느끼며, 그 필요들을 채우기 위해 나름의 열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사역하고 있다. 사역은 내게 기쁨이고 감격이다. 나의 아버지도 목사님이다. 아버지는 참 좋은 목사님이다. 아버지는 깨끗한 목회자셨고, 성
"다시 소명으로 돌아가게 하는 뜨거워지는 책" 내용보기
신대원 입시에 두 번 떨어져 세 번째 입시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며 작은 교회에서 유초등부와 청년부 두 부서를 2년째 교육전도사로 섬기고 있다. 작은 교회의 여러 필요를 느끼며, 그 필요들을 채우기 위해 나름의 열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사역하고 있다. 사역은 내게 기쁨이고 감격이다. 나의 아버지도 목사님이다. 아버지는 참 좋은 목사님이다. 아버지는 깨끗한 목회자셨고, 성도를 진짜 많이 사랑하는 마음을 주는 목사였다. 아버지는 20년이 넘도록 목회했지만 아직도 50여명 정도 나오는 작은 교회의 목회자이다. 나는 그 교회에서 자랐다. 하지만 나는 그 교회에서 참 행복했다. 아니 내가 아는 한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참 행복했었다. 난 아버지가 좋았고, 아버지의 사역이 좋았다. 그 아버지의 뒷모습에 반해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다. 아버지에게는 ‘님’이라는 호칭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어릴 적 내가 만난 목사님들은 참 좋은 분들이셨다. 지금의 언어로 그분들을 표현한다면 ‘고고함’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릴 것 같다. 가난한 목사님들은 주변에 많았다. 하지만 그 목사님들은 참 멋있었다. 가난하지만 전혀 위축되지 않으셨고, 마을의 어른들도 목사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 귀빈석에 경찰서장님 옆에 목사님석이 마련되었었다. 사람들은 목사님을 사랑했다. 목사님도 사람들을 사랑했다. 내가 어릴 적 만난 목사님들은 참 좋은 분들이셨다. 긴 장의자를 뛰어넘으며 놀았던 그 교회는 무언지 알 수 없는 경건함이 베여 나왔고, 나는 그곳에서 항상 무엇인가 밖에서 경험할 수 없는 무엇을 경험했었다. (지금 생각하며 그 ‘무엇’이 하나님의 임재였을 것 같다) 목사님이란, 또 교회란, 그렇게 좋은거라고 ‘보고 느끼며’ 자랐다. 청년이 되고, 세상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되고, 목회자의 세계에 더 근접했을 때, 내가 만난 것은 내가 이전에 알았던 것들이 정말 일부였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구토’가 일어나는 목회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교회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온통 그런 이야기 속에 파묻혀, 가끔 듣는 어찌보면 당연해야할 목회자와 교회에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의외의 이야기처럼 들려지는 세상을 살게 되었다. 학처럼 고고한 인품의 목사님들의 이야기, 어릴 적 들었던 진리로 인해 목숨을 걸었던 분들이 이야기는 이미 까마득한 이 전세대의 이야기가 되어있는 불쌍한 우리네 목회자와 교회의 현실 앞에 서게 되었다. ‘껍데기 목회자’, ‘껍데기 교회’, 그리스도께서 그 피를 주고 사신 그의 신부 교회가 ‘창녀’처럼 되었다는 비참한 소식들을 매일 들으며 많이 울 수밖에 없었다. 그 신부의 타락에 앞장선 교회의 지도자, 특별히 성직자들의 부정과 부패 때문에, 타락 때문에 또 울었다. 많이 울었는데도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얼마 전, 같은 신학대학원을 준비했던 선배들과 후배들이 다 모일 기회가 있어 모였다. 이미 신학대학원에 들어간 이와 그곳을 졸업한 선배들, 그리고 나처럼 대학원을 준비하는 이들이 모였다. 반가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또 울었다. 다음 세대 한국교회의 대안이라고 여겼던 그 반가운 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네 대화 속에는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교회의 부서의 숫자와 그들의 받는 봉급, 장학금의 수혜, 유학 보내 줄 수 있는 여건, 설교 원고가 모여 있는 사이트, 인기 있는 프로그램 소스 ..... 그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었다. 눈물도 없었다. 진지함도 없었고, 소명도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 순간 한국교회의 미래가 지금과 다를 것이라는 ‘소망’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서러워 울었다. “소명자는 낙심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이미 낙심한 마음이었기에 이 책의 제목에 손이 끌리었다. 나는 낙심했다. 전 세대의 목회자와 교회 때문이었지만, 또 우리 세대의 이제 겨우 목회자의 자리에 서고 있는 이들 모습 때문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그 낙심의 상황 속에서 부르짖는 한 ‘정직한, 그리고 마음이 뜨거운 목사님’을 만났다. 이 책에 있는 수 년동안 있었던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 영성수련회’에서 선포된 목사님의 메시지를 읽으며 함께 맘 아파하고, 함께 울고, 함께 소망하고, 함께 기도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단 한편의 메시지도 그냥 맘 놓고 쉽게 읽혀지지 않았고, 단 한편의 글 앞에서 그냥 그렇게 지나치지 못했다. 모두가 나를 향한 메시지였고, 우리-적어도 이 땅에서 성직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를 향한 메시지였다. 내 안에서 뜨거운 화두로 멍울져 있었지만 표현하지 못했던 그 이야기들이 이 책 안에 가득히 들어 있었다. 터부시 되었던 목회자의 치부와 교회의 치부가 목회자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교회를 향한 세상의 냉랭한 시선을 가감 없는 드러내 주었다. 강단 위에서 선포되는 것과 그 강단에서 내려오자마자, 그들이 선포했던 메시지와는 전혀 다른 것을 또다시 온몸으로 선포하는 목회자들의 실상을 드러냈다. 세속 권력과 똑같은 모습으로 교회 내에 있는 요직(?)을 차지하기 위한 교회 지도자들의 암투에 대해서도 드러냈다. 그리고는 그 모든 ‘사실’들 앞에서 우는 목사님을 만났다. 함께 울고 있는 또 다른 많은 목사님들을 봤다. 감추는게 대수가 아니라며 또 감춘다고 치유되는게 아니라며, 드러내고 드러낸 그것을 바라보며 울 때만이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하는 목사님의 말에 공감했다. 그 사실을 머리로 알게 된게 아니라 그 사실을 드러내는 목사님의 슬픔 음성 앞에서 ‘느꼈다’고 해야 옳다. 그리고 함께 울었다. 그러나 단지 울음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다는 것, 그분이 그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사역으로 증명해 보이는 삶을 살았다는 것, 그리고 이 말씀을 함께 나누며 많은 분들이 함께 울었다는 것 때문에 아직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며 미소도 지을 수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내내 이 실망과 희망이 교차되었다. 나는 아직 안수를 받지 않았다. 아니 안수는커녕 아직 신학대학원에 입학도 못했다. 나에게는 ‘정식’ 성직자 자격증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 성도 앞에서 설교하고 있다. 그들의 초등학교 학생이지만 나는 그 아이들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또 그 초등학생들의 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그 영광스런 하나님의 어린 영혼들이 이 부족한 나, 자격증 없는 무허가 목회지망생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자라간다. ‘성직’이 신학교에서 또는 교단의 규정에 의해 나온다며 누군가 내게 와 “넌 무허가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를 향해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세우셨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허락하셨다”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의 눈에서 나는 나를 ‘성직자’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강권하심을 날마다 경험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서서 내 ‘성직’을 확인한다. 어느 날엔가 내 사역에 대해 평가받을 날이 왔을 때, 어릴 적 내가 봤던 그 겸손하고 청렴하고 학처럼 고고했던 목사님과 닮았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항상 나에게 동경이었듯, 내 아이가 내 등에서 목자의 등을 볼 수 있기를 소원한다. 내가 사역하는 교회의 성도들의 내 얼굴을 대하고는 이유 없는 미소가 얼굴에 피어나면 좋겠다. 맛 있는거 먹다 문득 생각나는 목사였음 좋겠다. 슬픈 일 있을 때, 함께 있고 싶은 사람, 1번이었음 좋겠다. 또 훗날 내가 속한 교회가 하나님의 평가를 받는다면 이런 평가를 받는 교회이길 원하게 되었다. 그 교회가 ‘행복한 교회’라는 소문이 들리는 교회였음 좋겠다. 그 안에서 쉼을 얻고, 진리를 배웠다고 말하는 이들의 흥분된 목소리를 들었음 좋겠다. 지금은 작은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도 그 교회에 계속 있고 싶다고 여기는 교회였음 좋겠다. 그들이 그들의 아이들을 보내고 싶은 교회였음 좋겠다. 교회가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음을 경험할 수 있었음 좋겠다. ‘소명자는 낙심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처음에는 낙심했다. 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이후부터 차츰차츰 내 안에서 소망이 되살아났다.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때문에, 또 내게 ‘소명을 주신 이’께서 다시금 나로 힘을 얻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 저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를 갱신하는데 쓰여지는 존재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 ! 아직 제 팔이 짧아 그곳까지 미칠 수 없다면, 오늘 제가 있는 이곳에 그 미래의 갱신의 결과가 될 만한 작은 갱신을 얻을 수 있는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저를 채찍질하심으로, 저를 하나님의 정으로 다듬으심으로 이 무너져가는 세대의 한국의 교회 위에 정말로 바르게 사용될 ‘다듬어진 돌’ 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코람 데오’ (Coram Deo)의 마음으로 저 스스로를 준비시켜 주십시오. 저로 갱신의 첫 대상이 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l******s 2004.07.27. 신고 공감 7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소명자는 죽지 않는다.
"소명자는 죽지 않는다." 내용보기
강자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 인간이 근본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지배하는 세상, 하나님의 존재를 결코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자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 일등, 일류, 최고만 대접받는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낮은 자와 약한 자, 배우지 못한 자, 소외된 자, 없는 자가가 살아가기 힘든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을 이럴지라도,
"소명자는 죽지 않는다." 내용보기
강자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 인간이 근본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지배하는 세상, 하나님의 존재를 결코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자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 일등, 일류, 최고만 대접받는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낮은 자와 약한 자, 배우지 못한 자, 소외된 자, 없는 자가가 살아가기 힘든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을 이럴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자녀라 말하는 이들이 만들어 가는 하나님 안에 있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함께 하는 곳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지극히 낮은 자와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명령을 하지만 그 말씀을 순종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모인 교회까지 이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살아가는 오늘의 세상에 ‘소명자는 낙심하지 않는다’는 이 시대의 교회와 구성원과 지도자들에게 자신을 반추하게 합니다. 세속과 한국교회에서 보면 ‘강자’의 세계에서 사는 저자의 글이 어쩌면 배부른 자, 강자의 변명 정도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이는 저자가 속한 교회가 한국교회에서 가장 큰 교회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속의 눈과 한국교회가 보기에 약자가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지극히 약한 자라 말할 수 있지만 다른 이는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소명자는 낙심하지 않는다’는 약간 의심의 눈초리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배부른 자의 배부른 이야기로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속한 교회가 족쇄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약한 데서 심히 큰 능력’이라는 글을 읽으면서 소박한 느낌을 가졌습니다. 소박하다는 것은 그의 글이 기름진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글이 기름지면 가식의 냄새가 나며, 그 글은 생명성을 잃은 죽은 글입니다. 죽은 글은 많이 팔일 수는 있지만 이미 공해가 되어 글을 읽는 사람들을 황폐화시킵니다. 사실 강자가 말하는 약자를 향한 긍휼의 마음은 가식이 첨가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식의 기름을 첨가하지 않은 소박함으로 약자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이유는 그의 인격 이전에 하나님이 약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약한 자의 충성을 통하여 자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실상 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일은 부족한 것이 우리들 자신의 현실이며 특히 저자와 같은 환경에 일하는 분들은 어려운 일입니다. 저자는 어떤 경험을 한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얻어진 지식을 넘어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 분명 하나님은 결코 자신이 강자라 말하는 이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와 약한 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하심을 말입니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교회는 이미 죽음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죽음의 교회’로 변질시킨 이들이 우리임을 지적하는 것은 결코 듣고 싶지 않는 경고입니다. 하지만 사실임을 저자뿐만 아니라 글을 읽고 있는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글입니다. 심장병이 든 사람에게 물파스로 치료하겠다는 생각이 지금 우리들 바로 목사들의 생각입니다. 이 얼마나 오만과 교만과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이 부족한지 알 것입니다. 더 문제는 우리 자신이 이런 심각한 질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거나, 안다고 해도 부인하고,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처럼 현장을 직시하고 현장의 처절함을 자기의 것으로 안고, 진리를 중심에 두고 진리를 지키는 방벽을 쌓고, 진리를 실천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이 시대의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저 병 고침과 돈 버는 능력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하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능력이 되십니다.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이것을 외면하고 성령 하나님을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도구로 생각하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성령 하나님을 나를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함께 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시대에 성령을 구하는 이는 많지만 진정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은 적습니다. 즉,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한다는 그릇된 신앙이 팽배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자기만이 할 수 있다는 오만과 교만의 극치입니다. 말씀은 저버린 이스라엘 망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는 강한 군대와 경제적인 부흥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이스라엘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제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려야 할 나라를 군대와 돈으로 다스린 결과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예수님 이 시대 종교 지도자들은 껍데기만 남은 장로의 유전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조상과 자신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하는지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지식과 지혜가 없었기에 그들은 메시아로 오신 주님을 죽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 시대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매주 오만개가 넘는 교회에서 선포되고 있지만 하나님의 교회와 죽음이 두룬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정직하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근본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1장은 하나님의 은혜의 크심과 영원하심과 충만하심을 가장 사실적이고 놀라움을 금할 수밖에 없도록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은 하나님 은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는 자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는 자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 받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목사가 바라는 삶의 목표와 가치는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가는 것입니다. 목표가 크다는 것은 대형교회를 꿈꾸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10만원 짜리 십일조 인생에서 100만원 짜리 십일조 인생으로 성장하는 것이 목표가 큰 자의 이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며 그 분이 가진 길을 가며 그 분이 이루신 일을 믿으면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큰 목표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잃어버린 교회와 성도들이 이제 한국교회를 살려보겠다고 나서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고난이지만 십자가 자체는 영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고난과 영광이 함께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영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3정 31절 이하,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버림을 통하여 이루어진 영광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십자가를 지는 길을 가야 합니다. 주님은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말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교회, 십자가 없는 성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우리는 십자가 없는 교회와 십자가 없는 성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독교 근본을 무너뜨리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바벨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만을 위하여 살다가 죽었습니다. 이 시대에 예수님만을 위하여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굉장히 불쌍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스데반은 성령 충만한 가운데 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지배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면서 죽었습니다. 스데반을 본 받자고 말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가 그가 간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실 그가 이룬 일은 세속의 가치로 볼 때에는 정말 허망합니다. 일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에 맞아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먼저 주님을 위하여 죽은 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바로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k****e 2004.07.03.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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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소명자가 되고 싶다
"진정한 소명자가 되고 싶다" 내용보기
를 읽고 이 책을 읽으면서 대부분의 교회가 같은 고민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믿는 사람은 많지만 아무런 영적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상황이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정말 하나님 앞에 정말 깨어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은혜가 없으면서도 은혜가 있는 척 할 수 있고,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서도 성령 충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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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자는 낙심하지="" 않는다="">를 읽고 이 책을 읽으면서 대부분의 교회가 같은 고민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믿는 사람은 많지만 아무런 영적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상황이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정말 하나님 앞에 정말 깨어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은혜가 없으면서도 은혜가 있는 척 할 수 있고,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서도 성령 충만한 척 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다. 또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우리는 그를 아주 신실한 형제요 자매라고 생각한다. 껍데기 영성 만을 지닌 사람들이 모였으니 모임이 변화될 리가 없다. 특히 이런 사람들이 목회자나 리더로 세워진다면 더더욱 그 모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모임이 될 수 없다. 목회자나 리더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는 자리인 만큼 정말 하나님 앞에 깨어 있는 진정한 소명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하나님 앞에 깨어 있는 진정한 소명자가 되고 싶다. 하지만 내게는 너무나 많은 문제와 연약함이 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내 교만이다. 이 책 안에서도 참으로 여러 번 소명자의 교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람이란 자리에 세워질수록 더 교만해지기 쉽다. 특히 이 책에서 큰 교회 목회자들이 얼마나 교만해지기 쉬운지 꼬집어 주고 있다. 사람의 속성이 원래 그렇기 때문일까. 내게는 하나님을 더욱 많이 알게 되면 될수록 가장 많이 괴롭히는 문제가 바로 교만함이다. 자꾸만 나는 내게 영광을 돌리고 싶어한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나는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반면에 사람들의 비난과 비판에는 맥없이 무너져 버린다. 사람 앞에서 일을 하게 되면 결국 교만해지거나 낙담하게 될 뿐이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선다면 내게 무슨 성실함과 뛰어난 책임감이라는 게 있을까. 교만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성령에 충만해야 하며 은혜 가운데 살아야 한다. 결국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밖에 없다. 나를 구원한 주님의 십자가. 십자가로 상징되는 나 혼자서는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과 구원은 오직 주님밖에 없다는 사실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나는 오늘도 뜨겁지 못한 무기력해진 내 영성을 고백하면서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고백했다. 내가 무기력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괴롭고 힘든 일이지만, 내 힘으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없다는 고백이 나를 얼마나 자유롭게 하는지 모른다. 이 순간 내게서 교만이 떠나 버리고 다시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다. 나를 버리고 주님을 인정할 때면 놀라운 평강과 기쁨이 찾아온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외치고 싶다.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오직 십자가, 오직 주님! 나는 내 것들을 주장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내 것, 내 가족의 안락함, 내 미래의 안락함'을 위해 살고 싶지 않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내가 22살 때 하나님 앞에 고백했던 것처럼 내 생명과 내 전부를 드리는 삶을 살고 싶다. 나는 소명자가 되고 싶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으로 내 가슴이 뜨거워지고 내 삶의 초점이 맞추어졌으면 좋겠다. 내 생명과 내 전부를 내어드리고 싶다. 진정한 소명자의 길은 그리 쉽지 않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소망한다.
a*****0 2005.02.2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