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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윤리, 어머니의 윤리 - 방현석 『랍스터 먹는 시간』 방현석의 「존재의 형식」에서 오롯이 부각되는 단어는 “명예”라는 말이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과 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라 보상금을 신청하려는 민주동문회장에서 이 소설의 중심인물 재우는 “우리가 언제 명예를 잃은 적이 있었나요?”라고 사람들에게 반문한다. “민주동문회의 회원들이 선고받은 총 형량이 217년이고, 실 집행기간이 173년이며 제적 281명, 해고 43명”이라는 사실을 들어 진행되는 명예 회복의 절차 자체에 재우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옥살이가 민주화 운동의 결과라면, 보상금은 옥살이에 대한 사회적 보상이라 할 수 있다. 개인의 삶을 포기하고 한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므로 그들이 그에 대한 보상을 국가에 신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재우는 “자유주의자들도 싸우고 있는 이 정권에다 보상을 신청”하는 것은 지난날의 민주화 운동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변한 것이 없는 세상(정부)에 명예 회복(보상금)을 신청하는 것은 자신들이 이룩한 80년대의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세상이 변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변하지 않은 세상과 싸우는 것이 옳다. 보상금 신청이 변하지 않은 세상과의 타협이고, 그것은 곧 명예를 잃는 것이라는 재우의 주장은 정확히 이 지점을 겨냥한다.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벌인 일 때문에 명예를 잃는다는 역설, “불명예스런 건 지난날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라는 재우의 생각은 2000년대의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역설을 비판하는 것과 맞물려 있는 셈이다.
베트남에 체류하며, 베트남 정부와 한국 기업을 연결하는 일(통역)을 하고 있는 재우의 내면에는 철망을 감는 롤러에 말려 들어가 한쪽 팔을 잃은 창은의 고통스런 삶이 드리워져 있다. 2000년대에도 “무임금에 가까운 노조단체의 상근자”로 일하는 창은의 삶은 “충분히 외로워서 이 땅을 떠났고, 완벽하게 외톨이가 되어서 잠시 돌아왔다고 생각한 그”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80년대의 상처이다. “공장으로 갔던 셋 중에서 끝까지 공장에 남은” 사람이 창은이었지만, 그는 대중주의노선에 경도되었다는 이유로 자유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고 조직을 떠났다.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문태라는 인물과 주인공 재우가 비합법 조직 속에서 지도선으로 지위를 높일 때 창은은 여전히 공장을 떠나지 않았고, 민주동문회의 회원들이 일상 속으로 스며들 때도 그는 노조단체의 상근자로 여전히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한 창은이 보상신청을 하지 않는데 민주동문회가 나서서 보상신청을 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로 드러나는 창은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바뀐 것이 없다. 원칙을 중시하는 그의 삶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 이곳의 세상이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우의 외로움이 창은 앞에서는 설 자리를 상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재우는 외로워서 이 땅을 떠났지만 창은은 여전히 이 땅에 남아 세상과 싸우고 있다. 세상과 싸우는 사람이 분명히 남아 있는데도 민주동문회원들은 세상과의 타협을 시도한다. 본질은 그대로 남아 있는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과연 80년대를 뜨겁게 살아왔던 그들의 삶을 보상해주는 것인가? 80년대 주체들의 삶에 내재된 존재의 윤리를 탐색하는 방현석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질문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타자의 고통스런 얼굴을 외면할 수 없는 재우의 삶은 베트남의 시인 레지투이(반레가 필명)의 삶과 어울려 「존재의 형식」의 소설구조를 형성한다. 베트남과 한국이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역사적 상황을 공유하고 있는 두 인물의 삶의 방식은 인간의 윤리가 고통받는 타자를 외면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것임을 새삼 증명한다. 미국과의 민족해방투쟁(베트남 전쟁)에서 “죽어간 친구들을 대신해서 자신이 산다”는 레지투이의 말처럼, 그의 삶은 무엇보다 민족해방투쟁의 과정에서 죽어간 존재들의 삶과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시인이 되지 못한 채 죽은” 친구의 이름 ‘반레’를 필명으로 하여 시를 쓰는 레지투이의 삶이 윤리적인 삶을 비껴갈 수 있겠는가. 그에게 삶의 기준은 죽은 자들이 지향하던 삶의 기준과 다를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재우가 문태를 비롯한 민주동문회의 ‘친구들’과 불화의 상태에 빠진 이유를 물어야 한다. 그는 일상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친구들’의 삶에서 절망의 이유를 찾는다. 창은의 삶에 그는 강박당하고 있지만, 친구들은 창은의 삶에서 멀찌감치 벗어나 변하지 않은 세상의 일상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비쳐진다.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을 상실한 친구들이 친구들일 수 있겠는가? “친구가 친구를 이해해주지 않으면 누구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겠나”라는 레지투이의 말은 여기서 그 의미를 발산한다. 레지투이는 친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험난했던 80년대의 기억을 공유하는 친구들을 부정하는 것은 돌려 말하면 그 기억으로 구성된 재우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공산주의를 위하여 싸운 것이 아니고 공산주의를 살았어요”라는 레지투이의 말은 의미심장한 바가 있다. 공산주의는 사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이기도 하다. 과거의 아름다운 기억이 현재의 삶을 절망으로 빠뜨릴 때, 과거의 아름다운 삶 역시 그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재우의 절망이 친구들의 전향적 삶에서 잉태된 것이라면, 중요한 것은 그 절망을 분명하게 직시하는 주체의 시선일 것이다. 친구들의 삶을 절망의 근거로 생각하는 재우에게는 이러한 주체로서의 시선이 부재한다. “무언가를 꿈꾸려는 자는 그 꿈대로 가야 하지 않을까”라는 창은의 말을 기억하자. 그도 재우가 보는 것을 보고 있고, 재우가 생각한 것을 생각하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의 전향을 자신이 절망하는 근거로 삼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계속’ 걸어간다. 이것이 공산주의를 살고 있다는 레지투이의 말에 담긴 진의라면, 재우 역시 레지투이가 이야기하는 존재의 윤리와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온 셈이다.
작가는 공산주의를 ‘산’ 사람들의 윤리를 레지투이의 말을 빌어 “마음가짐”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마음가짐은 “누구한테서도 경멸받을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명확한 기준을 동반한다. 전쟁터로 떠나는 레지투이에게, 그의 어머니가 들려준 마음가짐의 기준은 실상 레지투이의 현재적 삶을 규정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말이 레지투이의 삶을 이끄는 중심이라는 점에 주목하자. 레지투이의 어머니로 표상되는 베트남 여성들의 윤리는 모성의 신화에 경도되어 모성성을 자식(남편)에 대한 헌신으로 사회화하는 한국사회의 모성담론과 극명하게 대립된다. 당장, 「랍스터를 먹는 시간」의 등장인물인 건석의 어머니 역시 사회화된 모성의 신화를 답습하고 있지 않은가. 그에 비한다면, “경멸받을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어머니의 윤리는 민족해방투쟁을 통해 공산주의를 ‘산’ 레지투이의 내면에 스며들고, 그것은 또한 베트남 사람들의 현재적 삶을 구성하는 존재의 원리로 작용한다.
어머니의 윤리는 「랍스터를 먹는 시간」에서 ‘모계사회’의 윤리로 확장되어 표현된다. 이 소설은 두 개의 이야기로 구조화되어 있다. 주인공 건석의 가족사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면, 보 반 러이, 팜 반 꾹, 우예 티 리엔 등 베트남 사람들과 건석의 관계를 다룬 내용이 다른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두 개의 이야기는 다른 공간에서 펼쳐지지만, 존재의 윤리를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공통된 의미를 발산한다. 건석의 가족사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은 건석의 형 ‘건찬’이다. ‘우옌 카이 호앙’, ‘최건찬’이라는 두 개의 이름에 명시되어 있는 바, 건찬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건석의 아버지와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째보’, ‘베트콩’이라는 멸시를 받으면서도, 어머니(건석의 생모)의 헌신적인 보호를 받으며 자란 그는 노동운동에 참여했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어머니의 말을 단 한번도 거역한 적 없는 그가 노동운동을 그만 두라는 어머니의 단호한 요구를 거부하면서까지 노동운동에 전념한 이유는 무엇일까? “난 내 이름을 비겁하게 만들며 살아가지 않아”라고 건찬은 말한다. 어머니의 이름(모성의 신화)만으로는 지킬 수 없는 인간의 품위가 있다는 것, 이 소설의 곳곳에 나타나는 “인간의 품위”에 대한 담론은 레지투이의 어머니가 이야기하는 ‘마음가짐’과 더불어 방현석이 제시하는 존재의 윤리를 의미화한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방현석 소설에서 인간의 품위를 형상화하는 바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서 논의 진전시켜 보자. 어머니와 관련된 소설담론은 방현석의 초기소설 「새벽출정」에서 ‘철순’의 어머니를 통해 부분적으로 다루어졌지만, 「존재의 형식」과 「랍스터를 먹는 시간」에 나타나는 ‘어머니 이야기’는 작품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 베트남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어머니의 담론은 방현석 소설이 지향하는 존재의 윤리가 ‘어머니’라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레지투이가 어머니의 이름으로 존재의 윤리를 실현한다면, 건찬은 어머니의 윤리(모성의 신화)를 거부함으로써 존재의 윤리를 실현한다.
자식에 대한 헌신적인 삶을 통해 자식의 삶을 규제하는 모성의 신화는 노동운동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는 건찬에게는 넘어서야 할 벽이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개인적인 관계로 폐쇄될 때 존재의 윤리는 한 개인의 윤리적 문제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한국사회의 ‘모성 신화’가 문제화되는 이유는 이처럼 모성의 윤리가 한 개인의 폐쇄적 윤리로 의미화된다는 점에 있다. 레지투이의 어머니가 이야기하는 ‘마음가짐’을 방현석이 ‘존재의 형식’이라는 이름으로 형상화하는 까닭은 여기서 연유한다. 마음가짐은 개인의 윤리를 넘어서는 마음가짐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이름을 비겁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건찬의 생각과 맞물린다. 어머니의 윤리(모성의 신화)를 거부해야 인간의 품위를 지킬 수 있다는 한국사회의 역설적 상황은 방현석이 베트남의 역사를 소설의 제재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베트남에서 펼쳐지는 건석과 우예 티 리엔의 사랑은 무엇보다 이러한 존재의 마음가짐과 연관된다. 건석의 마음속을 흐르는 어두운 기억과, 리엔의 밝은 품성을 대조하며 전개되는 사랑의 윤리는 “인간의 품위”라는 말과 어울려 방현석 소설의 핵심적인 사랑학으로 표출된다. 리엔이라는 베트남 여성을 통해 작가는 여성성이 인간의 품위를 드러내는 본질적인 장소임을 이야기한다. 상처를 지닌 존재를 품어 안는 리엔의 형상은 “거침없는 남성성과 섬세한 여성성”을 공유한 존재로 나타난다. 역사적 상처에 억눌리지 않고, 그것을 새로운 현실 속에서 갈무리하는 리엔의 형상에서 작가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공유한 존재의 형상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우예 티 리엔은 제법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에야 시장에서 돌아왔다. 그녀는 식탁 위에 도마와 큰 접시를 갖다 놓고 랍스터를 손질할 준비를 했다. 1층으로 내려온 건석은 대바구니에서 랍스터를 꺼내는 리엔의 모습을 지켜보고 앉아 있었다. 무지개 색깔의 등을 가진 레인보우 랍스터였다. 랍스터 중에서 최상품으로 인정받는 육질과 맛을 지닌 것이었다. 두 뼘이 넘는 갑각류를 능숙하게 다루는 리엔의 손끝에서는 거침 없는 남성성과 섬세한 여성성이 동시에 묻어났다. 건석을 매혹시키는 것은 어쩌면 랍스터 요리가 아니라 랍스터를 다루는 레인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랍스터의 신경을 한칼에 끊어놓는 그녀의 솜씨는 숨을 멎게 만들 만큼 대담하고 통렬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건석은 아이처럼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오도카니 앉아 바로 그 순간을 기다렸다. (『랍스터를 먹는 시간』, 175쪽)
“랍스터를 다루는 리엔의 모습”이 건석을 매혹시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두 뼘이 넘는 갑각류를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거침 없는 남성성과 섬세한 여성성을 동시에 요구한다. 랍스터를 거칠게만 다루면 랍스터의 숨통을 끊어놓기 전에, 랍스터의 집게발에 먼저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방현석은 랍스터를 요리하는 리엔의 모습을 통해 역사와 대면하는 주체의 자세를 성찰한다. 역사는 주체의 삶과 더불어 발전하는 역사로 의미화되지만, 동시에 그 역사(적 좌절)로 하여 주체는 끊임없이 상처를 입기도 한다.
거침없는 남성성의 신화로 타락한 세상과 맞서 싸운 80년대 주체들은 여전히 타락의 상태로 지속되는 역사(90년대, 2000년대)적 상황 앞에서 절망하고 있다. 그들이 싸워야 하는 ‘적’은 이제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도사리고 있다. 이기적 개인주의에 빠진 동지(내부)들의 삶을 바라보며 끝이 없는 절망에 빠진 주체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 때 지금 이곳의 우리들은 베트남전에 이어 이라크전에 참전했다. 건석처럼, 미국과의 역학관계를 거부할 수 없는 한국사회의 치명적인 결함을 그 원인으로 지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절망은 당신(건석-인용자) 같은 다음 세대가 지난 세대를 답습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팜 반 꾹의 말은 한국사회가 직면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새삼 강조하고 있다. 지난 세대의 잘못을 다음 세대가 반복하고 있다는 것은, 역사(과거)의 교훈을 다음 세대가 성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에 대한 승리의 역사로 기록되는 베트남의 역사를 작가가 주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베트남 전쟁 시기에 북한으로 유학을 떠난 팜 반 꾹은 “전쟁으로 고통 받으면서 죽어가는 인민들에게 크나큰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여전히 마음에 품고 있다. 베트남 전쟁의 영웅인 보 반 러이는 어떤가? 무모한 모험주의에 경도된 자신 때문에 희생된 ‘이니’를 그는 수십 년이 지난 현재에도 잊지 못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의 와중에서 다른 삶을 산 그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타자에 대한 ‘빚’이다. 소설 속에 묘사되는 베트남 사람들의 현재적 윤리는 실로 이들의 마음에 새겨진 역사적인 ‘빚’과 무관할 수 없다.
공산주의를 ‘산’ 사람들의 역사는 이렇게 한 세대의 상처를 넘어 다음 세대의 윤리로 이어진다. 지난 세대의 역사적 상처에 짓눌리지 않고, 베트남인의 가슴 속에 뿌리 깊은 상처를 남긴 나라의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는 리엔의 형상은 이러한 베트남의 역사와 더불어 탄생한다. 섬세한 여성성은 거침없는 남성성을 거부한다고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거침없는 남성성을 성찰하고, 그것을 다음 세대의 윤리 속에서 새롭게 정립해야만 섬세한 여성성은 생성될 수 있다. 어머니의 윤리를 다음 세대의 변함없는 윤리로 제시하는 레지투이의 삶이, 또한 베트남 민중들의 고통스런 삶을 베트남의 현재를 구성하는 윤리적 원리로 생각하는 팜 반 꾹의 삶이, “거침없는 남성성과 섬세한 여성성이 동시에 묻어”나는 리엔의 형상을 가능하게 한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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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었을 때는 내용이 지닌 무게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둡다…어렵다…라는 느낌으로 읽어나갔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작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존재의 형식」- 대학시절 운동권 학생 재우는 현실을 도피 베트남에서 통역을 하며 살아간다. 영화 제작 작업에 참여한 재우는 현지인 레지투이와 영화 제작 스탭인 희은과 작품을 수정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친구 문태(변호사)가 회의 차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과거 자신이 이곳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과 맞닿게 된다. 학생운동, 노동운동…그러나 변하지 않는 현실… 그리고 그 앞에서 느끼는 회의(懷疑)… 변하지 않는 현실을 떠나온 재우와는 다르게, 그 현실에 남아있는 친구 창은과 한때는 같은 이념이라 생각되었던 문태의 변호사로 전향… 문태의 방문이 그저 달갑지만은 않은 재우는 불편한 심기를 들어내고 그러한 재우의 모습을 보며 평범한 줄만 알았던 레지투이는 베트남 전 당시 남부 게릴라전인 ‘반협정 인민’이였으며 그 게릴라전의 전우의 희생이 자신의 현재를 존재하게 했음으로 이야기 해주며, 친구 문태와의 화해를 이어준다. 즉, 재우는 레지투이를 통해 친구들이 재우가 존재하는 현실임을 일깨워 주고 재우는 자신이 두고 온 한국의 현실과의 화해를 배우게 된다. 이 작품 외에도「랍스터를 먹는 시간」, 「겨우살이」, 「겨울 미포만」등이 실려 있는데, 「랍스터를 먹는 시간」은 베트남전을 통해 발생한 따이한(베트남 참전 군인과 현지인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의 아픔과 화해를, 「겨우살이」는 전교조 교사가 복직 후 교단의 현실과 누나의 사고 앞에서 느끼는 현실의 부조리를, 「겨울 미포만」은 전국 최대 규모의 울산 자동차 제조업체 노동조합원들의 고단한 일상을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아픔…그 아픔의 덜어내기 위해서는 화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약자 앞에서 강하고, 강자 앞에서 약해지는 우리의 현실이 애석하게 다가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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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스터를 먹는 시간> 후반쯤에 오토바이를 탄 여학생과 자전거를 탄 여학생이 나란히 가는 장면이 나온다. “누가 누구를 밀고 간다고 도무지 느껴지지 않”게 슬쩍 걸친 팔이 그들을 이어주고 있다. 상대를 밀거나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슬쩍 걸친 채 함께 나아가는 것. 건석이 건찬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어깨를 슬쩍 걸친 채 함께 나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상처를 대하는 가장 너그러운 방식일 것이다. 노동문학을 하는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이 인식되지 않을 만큼, 유연하고 아름다운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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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계속해서 가라. 그러면 어딘가에 닿게 되리라”
연재를 시작하며
낯설다. 20여일만에 글을 쓰기 위해 마주한 모니터의 커서는 계속 깜박이며 나를 불안하게 한다. 거창하게 문학이, 소설이 한 시대의 ‘문제적 개인’을 통해 그 시대의 삶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문학 사회학적인 해석을 곁들여가며 글을 쓸 용기가 내게는 없다. 다만 내가 사는 삶과 그 삶의 행위들이 행해지는 사회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가깝게 들여다보기 위해 택한 한 수단으로서의 소설 읽기를 즐겨했던 한 개인으로서, 지금은 그 행복한 기회마저 세상살이라는 것에 거의 빼앗기다시피 살아가는 불행한 현실에서, 나는 진정한 ‘나’이기 위해 무엇인가 하여야 한다.
소설을 읽는 독자인 나는, 그 때만큼은 객체가 된다. 또한 주체인 내가 객체가 되어 있는 또 다른 ‘나’를 볼 수 있음으로, 내가 본 세상과 세상 속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나를 보는 경험은 경이롭다. 내 의식의 성장기를 함께 했던 그 소설공간의 세계가 나는 지독하게 그립다. 적어도 그 때에는 내 사유의 틀은 단단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가? 사유랄 것도 없는 내 생각의 창고에는 먼지만 수북하고 나는 고형화된 살이의 방식에 따라 기계적인 일상을 산다. 그런 내가 감히 비평의 언저리에도 걸어둘 수 없는 잡글을 쓰며 ‘가짜와의 한판 승부를 벼른다’는 낯뜨거운 확신을 가진 적이 있었음을 이제는 고백해야겠다.
해(年) 끝과 해 시작 며칠간을 반도의 끄트머리를 여행하면서 다시 책속으로 돌아가야 함을 깨달았다. 쓰기 전에 읽어야함이 정직한 것임을 뒤늦게 알았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연재를 기획한 것은 이런 나의 깨달음을 다잡기 위한 방편이다. <소설 사회학>이란 지면을 채우게 될 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아직은 모른다. 때로는 얼치기 문학비평이 될 수도 있겠고 독자의 눈으로 본 작품론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에 대한 나의 졸렬한 인상일 수도 있겠다. 나는, 그러나, 나의 열의와 시간의 여유가 허락하는 한, 내가 사는 세상의 일들과 관련하여 소설 속에서 그와 같은 사건과 현상들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글이 걸리는 매체의 성격에 맞게 오늘을 위하여 소설 속을 뒤질 것이다. 물론 내 독서의 기억이 80년대를 끝으로 거의 정지하였음으로 이미 나는 새로운 실패를 예감하고 있음을 아울러 고백한다.
촛불시위에 나선 사람들
아이디 ‘앙마’로 촉발된 촛불시위가 그 앙마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는 저간의 사정을 신문과 인터넷 뉴스를 통해 보고 있는 요즘에 나는 촛불시위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본다. 주검이 되었기에 이름을 남긴 효순과 미선에 대하여는, 그 죽임의 범인이 미군 장갑차의 통신장애라는 경악할 판결도 그만 언급하기로 하자. 앙마의 비도덕적인 기사작성의 행태를 구실삼아 우리들의 순수한 의지마저 왜곡보도하는 족벌언론의 망종도 무시하기로 하자. 오늘 나는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인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 시린 겨울밤에 거리로 나서야 했을까’만 생각하려 한다.
미국, 미군, 북한, 핵 등등... 이런 단어들이 언론에 활자화되고 우리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면 나는 습관처럼 베트남, 흔히 월남이라 부르는 그 나라를 떠올린다. 위에 나열된 단어들은 곧 우리의 분단과 그 분단으로 인한 질곡과 수난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또한 앞으로 견뎌내야하고 마침내는 극복해야할 역사의 험난한 파고를 떠올리며 지레 겁을 먹는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인 내게, 이제 겨우 초등학교에 다니는 나의 아이들에게까지 분단은 엄연한 현실로, 무엇보다 무거운 시대의 짐으로 그들의 삶위에 얹어져 있다. 그 분단을 생각하면 나는 베트남과 조우한다. 훨씬 가까운 시기에 분단을 극복한 동.서독이 아니라 베트남이다. 왜일까?
같은 아시아권의 국가라서, 아니면 군국주의 일본의 군화발에 짓밟힌 경험을 공유하기 때문에, 아니다. 내가 우리의 분단현실에 베트남을 주목하는 것은 우리의 분단이 바로 외세의 개입과 그들의 세계지배전략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우리보다 훨씬 길고 고통스런 외세의 지배를 당했던 베트남의 인민들은 그래도 그 분단을 극복하였다. 그 점에서 그들은 행복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부럽다. 물질적 삶에서 우리와는 비교되지 않는 처참한 살이를 살망정 그들은 다른 나라 군대의 궤도차량에 자신들의 꽃다운 소녀가 깔려 죽지 않는다.
나는 주사파일까? 베트남의 인민들은 호치민을 위해서 호치민 정권을 위해서 동족과 전쟁하지 않았다. 또한 권력을 부자세습하는 괴리정권의 적화야욕을 위하여 동족을 살육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 제 멋대로 들어와 자신들의 고유한 ‘인민의 삶’과 ‘인민의 가치와 정신’을 유린하는 외세와 싸웠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지와 정신을 외세에 지배 당하지 않기 위해 프랑스와 싸웠고 일본에 맞섰으며 미국에 대항하며 정글에 피를 뿌리고 자신의 육신을 묻었다. ‘통킹만 사건’으로 말해지는 북폭(北爆)은 친미정권의 수립과 대리지배를 획책한 미국의 만행이었다. 베트남 인민들은 제국주의 미국에 저항하며 식민지 백성으로 살기보다는 차라리 정글의 외로움과 굶주림을 택하였다.
아! 베트남, 나는 촛불시위에 나선 사람들을 생각하다가 그곳 베트남의 시인과 만난다. 방현석의 ‘존재의 형식’은 그 지난한 해방전쟁의 와중에서 겨우 살아남은 해방전사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지금은 시인이며 소설가이고 아시아에서 주목받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레지투이’ 그의 이름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시인 ‘반레’로 불려지길 원하고 기억되기를 원한다. 본문을 인용하면
<레지투이는 북부의 난빈이 고향이었다. 육지의 하롱베이로 불리는 아름다운 난빈의 지탄이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1966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자원입대해서 베트남전쟁에 뛰어들었다. 그의 나이 겨우 열일곱살 때였다. 호치민루트를 타고 오로지 걸어서, 3개월만에 사이공에 도착했을 때 그의 부대원들은 이미 3분의 1로 줄어들어 있었다. 전투목적지로 이동해오는 동안에 그의 동료 3분의 2는 전투 한번 해보기 전에 죽었다. 굶어서 죽고, 말라리아에 걸려 죽고, 미군의 폭격에 맞아 죽고, 부비트랩에 걸려 죽고....>
한 때 우리가 북괴뢰 집단과 함께 가장 증오하도록 교육 받았던 소의 베트콩(남부 월남의 해방전사)과 출신이 비슷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자원입대하여 전쟁에 참여하였을까? 그는 왜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우리의 분단현실에서 만나는 공산주의와 그의 공산주의는 마찬가지인 것인가?
<문태가 레지투이에게 아직도 공산주의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렇다고 했다. 문태의 물음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 싸운 건 아니잖아요?” (.....)
<“... 제가 보기에는 참 위태로워 보이는 이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이 바친 희생은 너무 큰 것 아닌가요....”
이 베트남 시인의 말속에서 나는 한국전쟁과는 다른 그들만의 전쟁과 해방의 의미를 발견한다. 기꺼이 인민이 되고자 했던 베트남 시인의 동료들은 ‘거창한 이념’을 위해서도, 공산주의를 위해서도 아니고 본래의 ‘공산주의의 삶’을 살었을 뿐이고 ‘외국의 군대가 자신들의 대지를 유린하지 않는 세상’을 위해 가공할 폭력집단 미국에 맞서 땅굴을 팠다.
<구치는 사이공 시내에서 한시간 반 거리 떨어져 있는 마을이었다. 해방전선은 그곳을 중심으로 총연장 250㎞의 땅굴을 파고, 사이공 시내를 드나들며 미국과 싸웠다. (....) 단돈 1원도 받지 않고 오로지 호미와 망태기만으로 24년에 걸쳐 파놓은 250㎞의 땅굴을 보면 전혀 다른 베트남이 있다는 사실을 소스라치게 깨닫게 된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인 우리들도 바로 베트남 시인과 그의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대한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에 의하여 결정되어져야 한다는, 우리의 대한민국은 우리 민중의 대지라는 소박한 믿음으로 삼삼오오 촛불을 들고 모여들었을 것이리라.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정글에서 죽어가던 베트남 시인의 동료들의 전쟁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듯이(우리의 전쟁과 같이) 이념의 광기가 학살과 살육을 부르던 전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지에 자신들의 정신을 묻기 위해 먼저 자신들의 살과 뼈를 묻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여전히 이념의 맹신과 광기를 부추기는 언론과 정상배가 존재하는 오늘 우리의 땅에 영원히 묻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꿈을 가위 눌리게 하는 이념의 공포이다. 자유한 의지로 “무엇인가 꿈꾸려는 자는 그 꿈대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촛불을 켜 밝히려는 세상을 위하여
효순과 미선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이름일까? 김춘수식으로 말하여 우리가 그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 이름을 부를 때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이 되어 만날까? 먼저 간 죽음이 주는 의미를 레이투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죽어간 친구들을 대신해서 자신이 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나중에 친해졌을 때 이런 말을 하더군요. 내 앞에 걸어가던 친구가 지뢰를 밟고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살았지, 함께 싸웠던 그들이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살아 있을 수가 있겠어, 라고”>
이 베트남 시인은 그래서 자신의 남은 삶을 자신의 것으로 살기 보다는 죽어간 친구들이 살아가려 했던 삶을 사는 것으로 그들의 죽음을 부활시킨다. 그의 시는 따라서 ‘전쟁이 안겨준 비애로 전쟁을 넘어서려는 정신의 바다를 이루’고 시인의 이름은 이제 레지투이가 아니고 ‘반레’가 된다.
<레지투이가 전선에서 만난 친구 중에서 시인을 꿈꾸던 이가 있었다. 전쟁터에서도 그 친구는 틈만 나면 시집을 읽고, 시를 썼다. 그러나 그 친구는 수많은 동료들이 그랬듯이 전선에서 열아홉살의 나이로 죽었다.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시인이 되지 못한 채 죽은 그 친구의 이름이 반레였다.>
효순과 미선은 반레보다 더 어린 열다섯의 나이에 죽었다. 그녀들이 무엇이 되고 싶었는지는 모른다. 어찌 되었든 그녀들은 어느새 우리에게는 베트남 시인의 친구처럼 다시 살려내야 하고 잊어서는 안되는 이름이 되었다. 광장에 촛불을 들고 모인 우리는 비록 시인처럼 아름답고 성결한 언어로 나를 대신해 앞서 죽어간 친구들을 위해 시를 쓰고 영화를 만들 수는 없어도 그녀들이 살고자했던 세상을 위해 오늘의 결의를 기억하여야 한다.
반레로 살아가는 시인 레지투이는 그 세상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서울에서 온 자네 친구 말이야. 내일 새벽 비행기로 떠난다면서? 잘 해주게. 친구가 친구를 이해해주지 않으면 누구와 더불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나”>
친구와 친구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그 세상을 위해 우리들은 광장으로 모여 들었다. 우리가 미국에게 주장하는 이 소박한 요구를 반드시 들어야할 부시의 미국과 사대망상증 환자들만이 못 듣는다. 아니 일부러 듣지 않으려고 한다. 촛불을 켜고 우리는 기도한다. 한국과 미국이 서로를 이해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미군만 앉기 편한 소파를 바꾸자고, 친구를 죽이고 시침떼는 그 고약한 버릇을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기도한다. 친구를 추모하며 친구를 죽인 가해자까지 친구를 삼겠다는 촛불의 헌신을 반미, 불순이라니... 아름다운 시인의 충고에 재우와 문태는 불편함을 털고 친구로 화해한다. 또한 창은과도 화해할 용기와 힘을 얻는다. 재우는 창은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에 베트남 택시안에서 운전사가 행선지를 묻자 대답한다.
“명동성당”
시인 반레가 말해주는 아름다운 세상은 곧 친구가 친구를 이해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다. 레지투이가 입대할 때 들려주던 어머니의 말씀이 이어진다. 문태의 질문에 시인은 어머니에 대하여, 어머니가 가르켜준 ‘마음가짐’에 대하여 들려준다.
<“어머니.... 큰 배움은 없었지만 우리 형제들에게 늘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씀하셨죠.”
촛불을 들고 모인 우리들이 꿈꾸는 세상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당장에 우리의 집회와 행동에 대하여, 그 기사를 보도한 매체를 향하여 던지는 수구언론과 수구당의 정신나간 정상배들이 시인의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 마음가짐을 지금이라도 이해하고 스스로 노력한다면 구태여 우리의 입으로 개혁을 논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의 그 기대는 요원하다. 그렇지만 촛불을 들고 의심없이 나선 우리는 내일을 위해 정글과 땅굴에서 죽어간 시인의 친구이자 베트남 인민인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꿈을 향해 반역도 서슴치 않을 것이다.
“그대 계속해서 가라. 그러면 어딘가에 닿게 되리라.”
덧붙임>> 방현석의 ‘존재의 형식’ 주요인물로 등장하는 실제의 레지투이, 즉 반레의 근작 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실천문학사, 하재홍 옮김)과 함께 다루려 하였으나 기존에 발표된 한국인 작가의 베트남 소설과의 대비도 의미가 있을 것같아 다음 기회로 미루었습니다. 아마도 다음 소설사회학은 월남에서의 한국과 미국 그리고 그 땅의 주인인 베트남 인민이 될 것입니다.
-인터넷한겨레 등 1월.2003 / 방현석의 '랍스터를 먹는 시간' 중에서 |
그는 개인의 이야기를 개인적인 것 자체로 놓아두지 않고 끊임없이 개인을 규정하는 더 큰 구조로 옮겨놓는다. 실은 이것이 그의 소설을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탈개인'의 이야기로 나아가도록 하는 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든 내가 즐겁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감당하면서 살아졌으면 좋겠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마침 내가 그런 고민을 하던 찰나에 이 소설을 만나게 되다니. 노동자의 인권이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산재가 일어나고 법의 사각지대에서 사람들이 죽어간다. 결국 거대악에 맞서려면 집단 투쟁이 필요한데 자본주의가 심화되고 유통체계가 복잡해질수록 개인은 무감각해진다. 나 혼자 잘 살아보겠다고 하는 일이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줄도 모르고... 이렇게 단합력이 안 좋아서야! 누가 대의를 위해 먼저 나서겠나... 앞장서지는 못하더라도 서로를 미워하지는 말아야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멍청해진다. 사람들이. 결국 우리는 지구촌 아래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자아비판적 사고를 가져야 한다. 개인이 휘두르는 폭력을 멈추고 우리 모두 잘 살아보자고 나 하나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가 결코 나 하나의 것만이 아님을 되새기며 나아가야지. 나는 희생이 몸에 배여있는 사람이라, 약속은 지켜야하고, 도리는 다해야하며, 책임은 끝까지 져야한다. 나 자신을 앞서는 가치. 이기적으로 살아야한다, 나 자신이 다치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라는 말을 모두가 따른다면 세상은 이렇게 살만 하지 못하지. 우리 모두 자신의 일부를 떼어주고 사는 거다. 그렇게. 어느 날은 또 돌려받을거다. 그러니까 감당할 만큼만 그렇게만 나 자신 소신껏 살아볼게. |
| 재미도 있지만 생각할 거리도 던져주는 책이라며 국어선생님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책이다. 아무리 창비에서 나온 책이지만 제목도, 작가 이름도 낯설어 처음엔 좀 망설여졌다. "존재의 형식"이나 "겨울미포만"은 노동운동에 관한 이야기였다. 대학생 때도 그랬지만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왠지 모를 거부감이 있어서 이 작품들을 읽을 때도 조금 힘들었다. 이해하기 힘들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이제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던 베트남전에 대해 다룬 "랍스터를 먹는 시간"은 가장 분량이 많았지만 제일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베트남전을 우리만의 시각으로 바라봤지 정작 전쟁을 겪은 베트남 사람들의 입장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 "랍스터-"의 내용이 신선했다. 그리고 내가 학교에 근무하고 있어서 그런지 "겨우살이"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
| 실로 오랜만에 '창비'다운 소설집이 나왔다. 생소한 작가의 낯설은 소설이었으나 나는 스스럼 없이 책을 집어들었다. 처음엔 으레 이념대립에 관한 내용을 그린 소설이구나, 싶은 생각에 뜨악한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겼으나, 그건 섣부른 오산이었다. 방현석이 토해낸 산물들은 대개 일방적이거나 혹은 이기적으로 밖에 해석될 수 없었던 우리의 역사의식을 한번에 뒤엎을 수 있을만한 이슈였다. "자식아, 죽었다고 다 없는 것이고, 살아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인줄 아나." 미국에 의해 베트남으로 파병된 한국군의 과거 모습과 또다시 미국에 의해 이라크로 파병되는 한국군의 모습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쯤에 서있는 것일까. 피해자이거나 가해자, 그것은 별반 틀리지 않은 개념임에 분명하다. |
| 랍스터라는 고급음식(이라고 내게 생각되어지는)이 제목에 떡하니 들어가 있어캐비어 타임, 이라던가 샥스핀 라이프 같은 느낌을 주었던 <랍스터를 먹는 시간>은의외로 베트남에서 10년 이상 거주한 저자가 '거기'와 '여기'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였다.흔히 386으로 통칭되는 세대의 범주에 들 저자.그가 왜 베트남에 갔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거기에서 보는 여기는 어떤지 여기에서 거기의 얘기는 어떤 식으로 유효한지...공지영류의 글은 질색이지만 담담한 이 소설집은 마음에 들었다. 베트남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생생하여 영상으로 표현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읽고 있으면 호치민시, 아오자이를 입고 스쿠터를 타는 여자들, 매운 고추의 얼얼함 같은 것들이 보이고 느껴지는 기분.블로그에 비유하자면 앤디의 인도네시아 이야기같은 곳이랄까.단순히 후일담이나 여행기에 머무르지 않고 삶에 대한 원숙한 시선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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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4 편으로 구성된 소설집이다. 그중 2편은 최근작(2003년 기점)으로 베트남과의 우리와의 이야기이다.
<존재의 형식>은 대표적인 후일담 소설이다. 80년대의 동지였던 세 친구가 세월이 지나면서 살아가는 방법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 그래서 서로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이 커져간다. 마지막으로 화해의 길이 모색되면서 소설은 끝난다. 그래도 그들은 동지였나 보다. 소설 대부분에 베트남의 현역 영화감독이자 시인인 반레, 레지투이가 실명으로 등장한다. "그래 계속해서 가라. 그러면 어딘가에 닿게 되리라." 호치민 루트의 전사들의 슬로건도 등장한다. 갈등의 한 부분으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과 보상에 관한 법률>이 등장한다. 명예 회복이 어던 의미이며, 보상금의 사용처에 대해 예전의 동지들은 입장들이 많아 달랐던 것 같다.
<랍스터를 먹는 시간>은 베트남전의 한국군 참여와 현재 베트남에서의 과거의 기억을 가진 베트남 전사와의 이야기이다.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크게는 첫째, 베트남에서의 한국 기업의 형태에 대한 고발, 둘째,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에 의해서 벌어진 학살에 대한 용서와 화해, 셋째, 이라크전에 미국의 요구로 참전하는 한국에 대한 비애 등이 아닐까 한다. 이 소설에서 주요 주제인 형과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 하나의 주제인 <전쟁일기> 우리나라 신문에도 소개된 베스트셀러 '베트남 여전사의 전쟁일기' <호찌민루트의 사랑과 혁명>이 부문부문 소개된다.
이 두편은 베트남과 베트남을 통해 본 과거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되겠다.
<겨우살이> '전교조' 해직 교사의 세상보기이다. 90년대 초반 해직되어, 전향서를 쓴 후 교직에 돌아온 후 세상을 보는 이야기인데, 2008년 후반 다시 <전교조>에 가해지는 압력을 볼 때, 이것이 잃어진 소설이 되지 않고, 생명을 더 가져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겨울 미포만>의 경우에는 노동 운동가의 암울한 실패담으로 보인다. 1996년말부터 1997년초중반까지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후 IMF란 엄청난 경제위기로 아마 노동운동은 더 심한 겨울을 맞이하였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존재의 형식>이 마음에 드는 소설이었다. 제목을 이것으로 하지 하는 생각까지 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황순원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나리오 번역은 <슬로우 불릿><Slow bullet> 의 영화였다. 개봉되었다는 내용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