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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상의 기록을 마주한다면_016 (원더풀 라이프)
"내 일상의 기록을 마주한다면_016 (원더풀 라이프)" 내용보기
소설 <원더풀 라이프>는 같은 이름의 영화가 기본이지만, 단지 영상을 문자로 옮겨놓은 것은 아닙니다. 각본에 살을 붙여 부풀린 것도 아닙니다. 이번에 제가 하고 싶었던 것은 영상을 활자로 정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형태로 일단 부풀어 오른 <원더풀 라이프>의 모티프를 활자라는 영역으로 다시 해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p.4   이 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내 일상의 기록을 마주한다면_016 (원더풀 라이프)" 내용보기

   소설 원더풀 라이프는 같은 이름의 영화가 기본이지만, 단지 영상을 문자로 옮겨놓은 것은 아닙니다. 각본에 살을 붙여 부풀린 것도 아닙니다. 이번에 제가 하고 싶었던 것은 영상을 활자로 정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형태로 일단 부풀어 오른 원더풀 라이프의 모티프를 활자라는 영역으로 다시 해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p.4

 

이 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로 만난 원더풀 라이프를 글로 풀어낸 것인데, 많은 경우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곤 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 작품은 반대의 상황이다. 드라마가 종영된 후 대본집이나 소설로 구성된 책이 출판되기도 하니, 처음에는 이와 닮았다 여겼는데 책의 시작 고감독님의 글을 읽으니 어쩌면 영화와 책의 영역에서 조금은 다른 내용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이제 상황은 대충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다타라 기미코 씨, 즉 당신 말인데요. 어제 돌아가셨습니다.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중략)

   “다타라 씨는 여기서 일주일을 보내게 됩니다. 여러분께는 각자 방을 마련해두었기 때문에 편히 지내시기 바랍니다. 다만 이곳에 계실 동안 다타라 씨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중략)

   “그건 말이죠. 다타라 씨의 78년 이생 중에서 소중한 추억을 하나 골라주시는 겁니다. 여러분께서 고르신 추억은 저희 스태프가 최선을 다해 영상으로 재현해드립니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시사실에서 그 영상을 보시게 될 겁니다. 거기서 다타라 씨에게 그 추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난 순간, 다타라 씨는 그 추억만을 가슴에 안고 저세상으로 가시게 됩니다. 이곳은 여러분이 그곳으로 갈 때까지의 중계 지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p.27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여기에는 제한 시간이 있습니다. 그 작업을 사흘 안에 해주셨으면 합니다. 오늘의 월요일이니까 수요일 해지기 전까지는 추억을 골라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스태프가 다타라 씨의 선택을 도와드릴 것입니다.” p.27

 

한 주의 시작 월요일, 생을 마감한 사람들은 저세상에 가기 전 이승과 저승의 어디 즈음에서 일주일의 시간을 보내며 마지막 숙제를 하게 된다. 바로 자신의 생에서 가장 소중한 추억 하나를 고르는 것.

 

영화로 만났을 때, 영화를 보는 내내 나라면 어떤 추억을 고르게 될까?‘ 계속해서 곱씹어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후 문득문득 이 질문이 나를 찾아왔다. 그 추억은 이미 나의 시간 속에 있을 수도 또는 앞으로의 시간 속에 자리할지도 모르지만, 인생에서 단 하나의 추억이라니, 과연 사흘의 시간 안에 선택할 수 있을까? 당장 내 앞에 닥치지 않은 일인데도 나는 계속해서 나의 기억을 더듬어 시간여행을 하곤 했다.

 

책은 영화의 느낌과 같이 감정의 과잉 없이 담백하게 조용히 이어지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면서도 시선을 돌릴 수 없게 만든다. 전개되는 상황이라든지 등장인물들은 영화와 다를 바가 없다(어쩌면 시간이 흘러 가물가물해진 기억력도 한 몫을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 마음에 닿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영화에서는 망자 중의 한 명 이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계속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단 하나의 추억을 고르지 못해 자신의 일생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와타나베 씨. 바로 그의 이야기였다.

 

   “비디오테이프에는 와타나베 씨의 생활이 녹화되어 있습니다. 추억을 고르는 데 참고가 될까 싶어서 준비했습니다. 어제 와타나베 씨가 말씀하셨죠? 앨범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고 말이에요. 그 대신이라고 생각해주세요.” pp.117-118

 

   자세히 보니 테이프 하나하나에 와타나베 이치로라는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옆에는 뭔지 알 수 없는 알파벳 몇 개가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구석에는 큼지막하게 R-00, R-01, R-02라고 일련번호가 붙어 있는데 틀림없이 R-70까지 다 있었습니다. p.118

 

우와...나의 생을 하나, 하나 들여다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 저런 일이 있었지? 하면서 반가워하기도 할테고,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다고 테이프를 빨리 감아버리거나 아예 건너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보며 후회하거나 아쉬워할 수도 있다.

 

   와타나베 씨는 옛날 기록 영화를 보는 감각으로 자신이 비치고 있는 비디오테이프를 차례로 봤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기에는 모든 게 어중간하고 부족한 듯이 느껴졌습니다. 우등생도 아니고 골목대장도 아닌, 열등생이라 불리는 존재조차 못 되었습니다.

   화면에 펼쳐지는 일상의 드라마는 확실히 자신의 모습을 중심으로 전개되기는 했지만 존재감은 철저하게 희박하여 와타나베 씨 본인에게도 조연자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p.121

 

   ‘이건 앨범하고는 상당히 다르군.’

   앨범이라면 입학식이나 운동회, 성장을 축하하는 행사, 가족여행 등 인생의 즐거운 장면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비디오테이프는 그런 식의 취사선택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여 뚜껑을 닫아놓은 한심한 자신의 모습도 그대로 화면에 등장했습니다.

   ‘생각보다 즐겁지 않은 일이야.’ p.122

 

앨범과 다르다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며, 한껏 입꼬리를 끌어올려 김치를 외치는 모습이 찍힌 사진 속의 나는 인 동시에 어쩌면 내가 아닐 수도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의 상황과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억지웃음을 지은 사진들도 더러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울한 모습을 일부러 사진에 남기는 경우는 드물지 않는가(어쩌다 주변사람에게 이런 모습이 포착된 사진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당연하게도 손에 꼽을 정도이다).

 

   영상은 테이프를 갈아 넣을 때마다 점차 기복을 잃고 단조로움만 심해질 뿐이었습니다. 화면에 비치는 것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집과 회사만 왕복하고 어쩌다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집에서 빈둥빈둥 비디오를 보는 샐러리맨의 전형적인 생활 자체였습니다. p.160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의 일상이 담긴 테이프를 본다면 나 역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싶어지니 괜시리 심각해졌다. 솔직히 조금은 겁이 나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단조로워진 일상,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집과 회사만 왕복하는 모습, 왠지모르게 억울하고 심통마저 나려한다.

 

   “그런 시간의 축적을 행복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와타나베 씨한테는 지루하다고밖에 느껴지지 않는 생활도 저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부럽습니다. 이것이 모치즈키의 본심이었을 겁니다. p.180

 

모치즈키가 와타나베 씨를 부러워하는 것도 알겠지만, 그의 말에 와타나베 씨가 울컥하며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누군가는 여름방학을 앞둔 날, 전차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해방감을 느끼던 순간을 고르고 또 누군가는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여자아이의 가방에 달린 방울이 짤랑 거리던 순간, 그 아이의 얼굴을 보기 전의 설레던 순간을 선택한다. 오빠와의 추억을 단 하나의 기억으로 남기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단 하나의 추억을 선택하지 못해 70년의 삶을 하나, 하나 돌아보며 회한에 잠기는 와타나베 씨의 이야기는 내게 많은 질문을 동시에 어렴풋한 답을 남겨주었다.

 

당신은 당신의 일상을 얼마나 충실히 대하고 있는가 

당신의 이상은, 목표는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가 

별다를 것 없다 여긴 그 순간이 어쩌면 당신에게 소중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앞서 말했듯이 영화가 내게 단 하나의 추억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면, 책은 또다른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나는 나의 일상을,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 나는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가.

 

영화를 볼 때마다 내게 생각할 꺼리를 선물처럼 잔뜩 쌓아주시는 고감독님은 이렇게 책을 통해서도 선물(?)을 주셨다. 선물을 받고보니 조금 더 깊은 시선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책 표지의 앞과 뒤, 과연 누구의 이야기일까요?

   

*기억에 남는 문장

설명을 다 들은 망자들이 보이는 반응은 제각각입니다. 죽었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 분해하는 사람, 화내는 사람, 웃는 사람, 말없는 사람, 당황하는 사람, 남기고 온 일이나 가족을 몹시 걱정하는 사람 등. 다만 시간이 좀 지나면 사람들은 대부분 표면적으로는 순순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선택 작업에 몰두합니다. p.27

 

지금 생각해보면 56년을 산 인생에 그리 극적인 일은 없었으니까요. ‘세 라 비 Cest la vie’라는 프랑스 말이 있잖아요. ‘그게 인생이야라는 뜻의. 제 인생을 돌아봤을 때는 역시 제일 먼저 그 말이 떠오릅니다.” 이렇게 말한 가네코 씨는 쓸쓸한 듯 그리운 듯한 묘한 표정으로 웃었습니다. p.56

 

처음에 사람들은 긴 인생 중에서 단 하나의 추억을 고르는 일을 사흘에 끝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특히 70,80년이라는 긴 인생을 보내고 온 노인에게는 더욱 힘든 작업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일을 시작하고 나서 곧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늘 현재나 미래를 생각하면서 사는 건 아니다..(중략)..“그때가 좋았다”, “그때는 힘들었다하며 인생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살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현재를 사는 건 아니다. 살아가면서 추억이라는 과거를 살기 시작한 것이다. 즉 그런 살마들은 사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이미 선택 작업을 대부분 끝낸 것이다.’ p.62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조금 알게 된 것은, 조금 전에 취미라든가 여행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물론 그런 추억을 고르는 것도 좋습니다만, 저는 역시 뭐랄까요, 적어도 자신이 살았던 증거일 수 있는 그런 사건을 고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p.77

 

사람은 얼굴이 제각각 다르듯 추억을 대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그중에는 추억이라는 이름의 과거가 지닌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거기에서 눈을 돌려버리는 사람도 있다.’ p.144

 

이미 죽었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과거의 어떤 같은 순간만을 살아간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일 텐데요, 저한테는.” p.166

 

시오리는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된 후에도 사람들의 생활은 전과 다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습니다. 죽은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이미 자신이 살았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 당연한 것이 마음의 거스러미를 건드렸습니다. pp.188-189

 

달은 참 재미있어요. 원래 모양은 항상 같은데도 빛이 닿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여러 가지로 바뀌어 보이니까요.”

시오리는 역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알고 있었어요? 달은 태어나고 나서 계속, 지금도 조금씩 지구에서 멀어지고 있는 모양이에요. 매년 3센티미터쯤인 듯하지만요. 그래서 앞으로 수천 년이나 수만 년 지나면 지구에서 보이는 달은 주위에 있는 작은 별들하고 구별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네요. 아니, 이 이야기 진짜예요.” p.202

 

아아, 그럼 할아버지가 와타나베 씨인가요? 전 이세야라고 하는데요, 이번에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저하고 할아버지뿐인 것 같아요. 왜 고르지 않았어요?”

(중략)

그런 자네는 왜 고를 수 없었나?” 여유 있는 척하면서 와타나베 씨가 되물었습니다.

아니, 전 고를 수 없었던 게 아니라 고르지 않은 거죠. 고르지 않았어요. 제 인생에 대해 그런 식으로 책임을 지자고 결심했죠.” p.212

 

모치즈키 씨, 50년 전에 시설로 왔을 때 잊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 ‘자신이 했던 일을 잊고 싶지 않다고 말이지. 그거 본심으로 말한 건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여기서 일하려고 생각한 거야?”

(중략)

난 말이야, 모치즈키 씨가 말한 것은 전부 잊고 싶다고 말하는 야마모토 씨하고 같다고 생각하거든. 난 그건 그것대로 좋다고 생각해. 그걸 자각하기만 한다면 말이지. 어차피 우리는 고를 수 없었던 사람들이니까.” p.231

 

나는 그때 고르지 않았을까, 아니면 고를 수 없었을까?’ p.232

 

지금까지 내 추억은 자기 안에만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

모치즈키는 자기 안에서 추억이라는 개념이 크게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중략)

추억은 화석처럼 모양을 바꾸지 않은 채 잠들어 있는 과거가 아니야. 추억은 풍화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해가는 일도 있는 거야.’ p.249

 

난 그때 자기 안에서 행복한 순간을 필사적으로 찾았어. 그리고 50년이 지나 어제야 비로소 나도 다른 사람의 행복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안 거야. 그건 무척 멋진 발견이었어.” p.252

 
YES마니아 : 로얄 w*****y 2022.03.05. 신고 공감 14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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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컷을 찾아드립니다 - [원더풀 라이프]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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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컷을 찾아드립니다 [원더풀 라이프]를 읽고       일 년 전, 지금은 지난해가 되어버린 새해에 영화 <원더풀 라이프>를 보았다. 일 년이 지나고 다시 새해를 맞아 동명의 소설을 읽었다. 죽은 사람(망자)들이 어느 시설(중계 지점)에서 7일 동안 머물며 인생에서 소중했던 단 하나의 추억을 고르면 영영 저세상으로 가게 된다는 이야기가 퍽 흥미롭다. 영화와 소설의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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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컷을 찾아드립니다

[원더풀 라이프]를 읽고

 

 

  일 년 전, 지금은 지난해가 되어버린 새해에 영화 <원더풀 라이프>를 보았다. 일 년이 지나고 다시 새해를 맞아 동명의 소설을 읽었다. 죽은 사람(망자)들이 어느 시설(중계 지점)에서 7일 동안 머물며 인생에서 소중했던 단 하나의 추억을 고르면 영영 저세상으로 가게 된다는 이야기가 퍽 흥미롭다. 영화와 소설의 원작자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하 고감독)은 "영상을 활자로 정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상의 모티프를 활자라는 영역으로 다시 해방시키고 싶었다(4쪽)"고 말한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나오면, 활자와 영상이 이야기를 표현하는 방식이 정확히 포개질 수는 없기에 둘 중 무엇을 먼저 볼 것인가를 놓고 행복한 고민에 빠지곤 한다.

 

 

"당신의 인생 중에서 소중한 추억을 하나 골라주시는 겁니다. 여러분께서 고르신 추억은 저희 스태프가 최선을 다해 영상으로 재현해드립니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시사실에서 그 영상을 보시게 될 겁니다. 거기서 당신에게 그 추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난 순간, 당신은 그 추억만을 가슴에 안고 저세상으로 가시게 됩니다. 이곳은 여러분이 그곳으로 갈 때까지의 중계 지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27쪽)

 

  <원더풀 라이프>는 같은 이야기를 다루지만 고감독의 말처럼 영화와 소설이 서로 다른 매력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제작자 출신인 그는 영화를 찍을 때에도 가능한 한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를 피하고 2인칭 혹은 3인칭으로 그리려는 태도를 고수한다. 반면 소설에서는 등장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심리묘사를 통해 영화보다 더 입체적인 인물들로 다가온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여러 망자들에게 초점을 맞추며 영화를 봐서인지 그들이 추억을 고르는 데 물심양면으로 애쓰는 시설의 직원들은 주인공들임에도 다소 밋밋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망자들을 맞이하는 시설의 소장인 나카무라를 비롯한 가와시마, 스기에, 모치즈키, 시오리 등 직원들의 심리 상태를 매순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인물들의 개성이 한층 도드라진다. 이 가운데 한 인물을 정해 그의 시점을 좇아간다면 책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듯하다.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곳은 사람을 심판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용서해주는 곳입니다. 보내드리는 측인 우리가 그걸 확실히 인식하고 대하지 않으면 망자들도 당황할 겁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하며 보내드리는 것, 이것이 기본이니까요."(147쪽)

 

  여기서 시설 근무자에 관한 공공연한 비밀 하나를 털어놓는다. 그들 역시 망자임에도 불구하고 삶의 마지막 기억 하나를 고르지 못해서 (혹은 일부러 고르지 않아서) 시설에 남게 되었다는 설정이다. 인생컷, 즉 생의 마지막 한 장면을 선택하기 전까지는 저세상으로 가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시설로 온 망자들과 시설 근무자 모두 죽었지만 완전히 죽은 게 아닌, 죽음에 있어서는 불완전한 존재라 부를 수 있겠다. 한편으로는 망자들을 돕고 지켜보는 과정에서 언젠가는 자신의 인생컷을 찾을 수 있도록 한 누군가의 배려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영화 속 시설 근무자들이 대체로 너그럽고 서로 협업하는 관계로 비춰졌다면, 소설 속에서는 인물들간의 감정선과 더불어 미묘한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 또한 확인하게 된다. 이를테면 이세상 사람들처럼(혹은 각자가 살아있을 때처럼) 누군가를 좋아하고, 비평하고, 질투하는 인간적 성격(성향)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들이 온전한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짙어진다.

  매주 시설에는 청소년부터 청년, 중년, 노년까지 다양한 연령과 사연을 가진 망자들이 도착한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가슴깊이 간직한 사람, 무난하게 괜찮은 인생이었다고 자평하는 사람, 좋았던 것보다 나쁜 기억들 중에 그나마 가장 덜 나빴던 기억을 선택한 사람, 애초에 선택 자체를 포기해버린 사람. 비슷한 듯하지만 조금씩 결이 다른 삶을 살았던 망자들과의 인터뷰는 시설 근무자들의 살아생전의 모습을 짐작해보게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죽으면 모든 게 끝인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에게 삶 너머 죽음의 경계에 마련된 시설에서의 체류는 미처 삶을 정리하지 못한 채 눈감은 이들이 마지막으로 그 시간을 갖도록 마련해놓은 누군가의 또 다른 배려가 아닐까. 그래서인지 시설에서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백년 동안 근무하는 그들과 망자들에게 주어진 7일의 시간들은 이세상의 그것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것으로 묘사된다.

 

 

사람은 늘 현재나 미래를 생각하면서 사는 건 아니다. 특히 아이나 손자를 다 키운 여성이나 은퇴하여 연금 생활을 시작한 남성은 이제 여생을 보내면서 "그때가 좋았다", "그때는 힘들었다"하며 인생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살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현재를 사는 건 아니다. 살아가면서 "추억"이라는 과거를 살기 시작한 것이다. 즉 그런 사람들은 사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이미 선택 작업을 대부분 끝낸 것이다.(62쪽)

 

  '모두가 이야기하는 추억은 어딘지 모르게 그 사람답구나.'(99쪽)라는 소설 속 시오리의 생각과 "기억과 기록은 다릅니다. 기억 선택에 참고만 하세요."라는 영화 속 모치즈키의 대사를 나란히 두고 곱씹어본다. 너무 어린 시절의 경험 혹은 살면서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일에 대한 기억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기 마련이다. 심리학에서 '기억'은 수차례 떠올리는 과정 속에서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들로 채워지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모치즈키와 시오리는 기억 선택을 어려워하는 와타나베에게 그의 인생이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를 제공하는데, 거기에는 그가 자의적으로 바꿀 수 없는 기억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과 기록된 그대로의 것 중 마지막으로 어느 것이 더 좋은 선택이 될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음악을 연주하는 직원들이 앞장을 서고 망자들의 열이 중정을 가로질러 갑니다. 그것은 결코 장례 행렬 같은 어두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원하고 산뜻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내리는 눈 속을 걷고 있던 망자들은 새하얀 종이 위에 먹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듯 중정을 한 바퀴 돌고는 건너편 건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없어진 뒤에도 중정에는 모두가 걸었던 발자국이 동그란 원 모양이 되어 한동안 남았습니다.(240쪽)

 

  무릇 소설과 영화에서 빛과 그림자는 때때로 삶과 죽음을 상징한다. 찬란한 빛이 서서히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빨려드는 장면은 흡사 삶의 마지막인 죽음에 이르렀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원더풀 라이프>에서는 이와 조금 다른 시선을 발견하게 된다. 죽음을 어두운 이미지로만 그리지 않고,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한 순간을 기억하며 떠나는 망자의 뒷모습, 그 뒤로 드리워진 그림자에서 그가 가슴에 품은 한 줄기 빛이 희붐하게 비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망자들의 일정표 같은 소설의 차례를 다시 본다. 환영(Reception), 상기(Remembering), 후회(Regret), 관계(Relationship), 책임(Responsibility), 장송(Requiem), 결단(Resolution), 반복(Refrain). 저세상으로 가는 사람뿐만 아니라 지금 이세상에서 사는 사람의 삶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가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한 해를 열거나 마무리하는 시간에 망자가 모인 공간에서 일어난 이야기에 눈길을 보내고 귀를 기울여 본다면, 우리가 지금 이순간을 충실히 살아내는 데에 작은 빛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이달의 사락 k*****o 2022.01.01. 신고 공감 13 댓글 12